‘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의 성장캐 신인 고윤정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

“죄송합니다.” tvN 토일드라마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이하 언슬전)’에서 고윤정이 맡은 주인공 오이영은 이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그도 그럴 것이 오이영은 산부인과 전공의 1년차. 병원에서 병아리 중의 병아리다. 책으로 배우긴 배웠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경험해본 게 없어 실수 투성이다. 그래서 선배들과 의사선생님들에게 하는 일마다 꾸중을 듣기 일쑤고, 그 때마다 “죄송합니다”가 입에 붙었다. 

 

게다가 오이영은 이 전공의 과정 재수생이다. 본래 개원해 독립시켜준다던 아빠 말에 의대, 인턴 기간을 버텼지만 사업이 망해 병원을 떠났다가 4천여만원의 빚을 갚기 위해 병원으로 컴백했다. 산부인과 의사의 길에 그만한 의지나 꿈을 가진 게 아니어서 언제든 빚만 갚으면 떠날 것처럼 보이던 인물이다. 그런데 위급한 환자를 외면하지 못하고 무엇보다 제 손으로 받은 아기를 보면서 서서히 그 길에 보람을 느끼게 된다.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고 그 길에 별 뜻도 없어 그만한 기대도 별로 없던 인물인지라, 작은 성취가 만들어내는 보람은 더 크게 느껴진다. 그런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 오이영이라는 새내기는 조금씩 성장해간다. 

 

tvN ‘유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고윤정은 바로 이 ‘언슬전’의 오이영이란 인물에 대해 지금의 자신 같다고 말했다. 그녀 역시 촬영할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만 할게요.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라는 것이다. 이제 배우를 시작한 지 6년차. 어찌 보면 조금은 알 것도 같지만 여전히 잘은 모르는 그 정도의 위치에 서 있을 법한 연차다. 바로 전공의 1년차 오이영이 서 있는 위치처럼. 그래서 아직은 여전히 낯선 역할이 쉽지만은 않지만, 조금씩 재미를 느끼고 있다고 그녀는 인터뷰를 통해 말했다.

 

고윤정은 2019년 ‘사이코메트리 그녀석’으로 배우 데뷔를 해 넷플릭스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 ‘스위트홈’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로스쿨’에서는 의상학과 출신 로스쿨생 역할을 소화했고, ‘환혼’에서는 낙수와 진부연이라는 두 인물을 오가는 1인2역으로 액션부터 멜로까지 도드라지는 연기를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고윤정이 마치 제 옷 같은 역할을 맡아 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디즈니+ 드라마 ‘무빙’을 통해서였다. 무한재생 능력을 가진 체대 입시생 초능력자 장희수 역할로 그녀는 웹툰 원작에서 튀어나온듯한 싱크로율의 외모에 풋풋한 청춘 멜로 그리고 절절한 액션까지 보여줌으로써 떠오르는 신예로 주목받았다. 이후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의 멜로 연기를 거쳐 ‘언슬전’의 주인공 역할로 돌아오게 됐다. 

 

배우는 같은 역할을 해도 자신이 가진 고유의 색깔을 더해 넣을 때 빛난다고 하던가. 고윤정의 특별한 색깔은 특유의 털털함이다. ‘환혼’에서 아예 ‘절세미녀’라는 캐릭터를 무리 없이 소화할 정도로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미모의 소유자지만, 고윤정은 예상외로 시원시원하고 털털한 성격을 가진 배우다. 특히 의외의 중저음 허스키 보이스는 배우로서의 신뢰감을 주는 매력을 지녔다. 그 반전의 목소리는 자신의 연기를 외모가 아닌 진짜 연기 그 자체로 보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고윤정의 털털함은 <유퀴즈 온 더 블럭>에서 그녀가 연기에 데뷔하게 됐던 일화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별 생각없이 대학 잡지 표지 화보를 찍게 됐었는데, 그걸 보고 여기 저기서 캐스팅 제의와 왔었다고 한다. 하지만 본래 미술전공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어 모두 거절했던 고윤정에게 지금의 회사 대표가 “안해보고 왜 못한다고 하냐”며 “일단 해보고 정 아니면 하지 마라”고 했단다. 그 말에 고윤정은 곧바로 “그러네?”하고 납득한 후 휴학을 하고 연기 공부를 했다는 거였다. 그녀의 시원시원한 성격이 잘 묻어나는 이야기다.  

 

고윤정의 이런 털털한 면모와 긍정적인 에너지는 그녀가 맡은 작품들 속에서도 은연 중에 캐릭터에 묻어난다. ‘무빙’에서 아버지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친구 봉석이를 응원하는 장희수라는 캐릭터가 더욱 빛날 수 있었던 건 고윤정 특유의 밝은 에너지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평소 무심한 듯 보이지만 그 무표정 뒤에 숨겨져 있던 따뜻한 마음이 드러날 때 그 밝은 에너지는 더 밝게 보인다. 

 

이런 그녀가 가진 매력이 인물 그대로 나타난 듯 보이는 작품이 바로 ‘언슬전’이다. ‘언슬전’의 오이영은 “죄송합니다”를 연발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주눅드는 새내기가 아니다. 산과 펠로우 2년차인 명은원(김혜인)이 자신이 좋아하는 구도원(정준원)에게 논문 쓰는 일로 갑질을 하고도 사과를 하지 않자 대놓고 그걸 콕 집어 사과하라 말하는 똑부러지는 새내기다. 게다가 좋아하는 마음을 먼저 드러내고 거리에서 안고 있는 연인을 보면서 자신도 “안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MZ세대’의 면모가 묻어난다. 또 동기인 김사비(한예지)가 질투를 해 선생님이 남긴 메모를 슬쩍 바닥에 버리는 걸 보고도 그걸 털털하게 이해해주는 그런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선생님들이 모두 응급 수술에 들어가 자리가 비자, 당장 수술이 필요한 환자의 배를 메스로 가르는 과감함도 보여준다. 새내기인지라 모든 게 어설프고 그래서 실수 연발이지만 결코 주눅들지 않고 털털하게 웃으며 나가는 오이영처럼, 고윤정 역시 배우라는 새로운 도전에서 낯설어도 꿎꿎히 나가는 모습이 엿보인다.

 

‘유퀴즈 온 더 블럭’에서 유재석이 뭘 할 때 가장 행복하냐는 질문에 고윤정은 “퇴근할 때”라고 해맑게 말했다. 그 말에 유재석은 빵 터졌지만, 거기에 고윤정은 전제를 붙였다. “열심히 일을 하고” 퇴근할 때라는 것. 그 누구도 새내기 아닌 적이 있으랴. 그 시간들을 거쳐 능숙한 베테랑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힘든 하루지만 그것을 ‘퇴근의 행복’으로 바꾸는 긍정적인 마음이야말로 새내기들이 포기하지 않고 성장할 수 있는 힘이 아닐까. 고윤정이 걸어온 길처럼. (글:국방일보, 사진:tvN)

‘천국보다 아름다운’으로 손석구와 부부가 된 김혜자의 새 얼굴

천국보다 아름다운

“이러고 돈 버는 걸로 너네 부모 내복 사드렸니?” 험상궂은 조폭들이 빚독촉을 하러 온 집에서 해숙(김혜자)은 빚진 아들은 한강에 갔고 자신은 가진 게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강짜를 놓는다. 결국 “똥 밟았다”며 조폭들이 포기하고 돌아가자 해숙은 본색을 드러낸다. 조폭들은 해숙이 그 집에 사는 남자의 엄마라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해숙 또한 그 남자가 빌려쓴 돈을 받으러 온 일수꾼이다. 그 남자에게 자기가 “사람도 죽인다”며 칼을 뽑아 들자 남자는 가진 돈을 털어 놓는다. 

 

JTBC 토일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의 이 첫 장면은 김혜자라는 배우가 얼마나 변화무쌍한 얼굴을 갖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처음에는 저 조폭들이 그러했듯이 ‘엄마의 얼굴’로 모습을 드러내지만 금세 돈 받으러온 일수꾼의 냉혹한 모습으로 얼굴을 갈아 끼운다. 물론 목소리는 김혜자 특유의 나긋나긋한 톤 그대로지만, 측은했다가 화를 냈다가 자포자기 한 표정에서 험한 표정을 짓는 그 변화 속에서 이 인물이 주는 감정은 계속 바뀐다. 이것이 바로 김혜자라는 배우가 부리는 연기의 마법이다. 

 

‘천국보다 아름다운’에서 해숙은 실로 여러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이다. 험하게 일수일을 하며 평생을 살아왔지만, 그것이 사랑하는 남편 고낙준의 병수발 때문이라는 건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빚을 받으러 갔다가 아빠에게 학대받던 영애를 빚대신 데려다 딸처럼 키워낸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코미디와 판타지도 뒤섞여있다. 해숙의 삶은 힘겹기 그지없고, 그래서 결국 남편도 죽고 자신도 죽게 되는 비극이지만 드라마는 이들이 천국에서 다시 만나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다. 그래서 처절한 삶의 비극은 가볍고 발랄한 희극과 겹쳐지고, 무겁디 무거운 삶의 현실은 더할 나위 없이 가벼운 죽음의 판타지를 오간다. “하루 같이 살면은 하루 더 정이 쌓여서 예쁜 건가? 지금이 우리 마누라 제일 예뻐요.” 죽기 전 남편이 했던 그 말 때문에 80의 나이를 선택한 해숙은, 천국에서 만난 젊은 나이를 선택한 고낙준(손석구) 앞에서 아연실색한다. 80의 몸으로 천국에서 젊은 남편과 함께 살아가게 된 해숙 앞에 갑자기 나타나 남편의 품에 안기는 젊고 예쁜 솜이(한지민)가 등장하면서 나이를 뛰어넘는 삼각관계(?)가 예고된다.

 

이처럼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희비극이 얽혀있고, 그래서 비극이 희극처럼 그려지는 드라마지만 그 웃음의 끝에는 묵직한 비극의 예감을 주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 작품이 다름 아닌 김혜자가 연기하고 2019년작 ‘눈이 부시게’의 제작진인 이남규 작가와 김석윤 감독이 뭉친 작품이기 때문이다. ‘눈이 부시게’ 역시 20대의 나이에 시간여행을 하는 혜자(한지민)가 시간을 잘못 돌려 70대 노인이 되며 벌어지는 코믹한 해프닝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70대 노인 혜자(김혜자)의 치매 증상이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시청자들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죽어서 천국에 간 혜자가 그 곳에서 만나게 되는 생전의 인연들의 이야기가 펼쳐질 참이다. 결국 죽음 이후의 천국의 삶을 그리지만, 죽음 이전의 삶에 담긴 애환 가득한 이야기가 채워질 것으로 보인다. 즉 천국의 삶은 웃음이 터지는 희극이지만, 거기서 환기되는 현실의 삶은 비극일 가능성이 높다. 

 

삶과 죽음, 희극과 비극,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이 작품은 그래서 김혜자에게도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벌써 팔순을 넘긴 나이지만 여전히 현역 최고의 배우로 살아가는 그녀는 마치 ‘변검’을 하듯이 여러 얼굴들을 순간순간 갈아끼우며 이 다양한 경계를 넘나드는 드라마를 종횡무진한다. 팔순의 나이에도 여전한 소녀 같은 얼굴을 드러내기도 하고, 그 나이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자애로운 엄마의 얼굴과 더불어, 때론 정반대로 냉혹하고 살벌한 얼굴로 변하기도 한다. 실로 김혜자가 지금껏 연기해온 여러 작품 속 인물들의 다양한 얼굴들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김혜자는 ‘국민엄마’라는 칭호를 얻은 배우였다. 그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은 바로 1980년부터 2002년까지 무려 22년 간 방영됐던 ‘전원일기’다. 그 작품에서 엄마 역할을 하며 매주 얼굴을 내밀었으니 시청자들에게 김혜자가 국민엄마로 각인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배우에게 고정된 이미지만큼 큰 리스크는 없다. 김혜자는 그걸 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배우이기도 하다. 91년에 방영됐던 ‘사랑이 뭐길래’에서는 가부장적인 남편 때문에 기죽어 살면서도 소심한 복수를 하는 당대의 엄마 역할로 변신했고, ‘엄마가 뿔났다’에서는 가사노동 파업선언(?)을 하는 엄마의 파격을 보여줬다.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에서는 광기어린 모습으로 모성애의 끔찍함을 드러내는 연기를 통해 ‘국민엄마’라는 칭호에 갇히지 않는 배우의 공력을 드러냈다. 이 작품으로 김혜자는 아시아 배우 최초로 LA비평가협회상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디어 마이 프렌즈’의 기억을 잃어가는 노년의 희자 역할이나,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라는 엔딩 내레이션으로 유명한 ‘눈이 부시게’의 혜자 역할, 그리고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제주에서 기구한 삶을 살아온 동석 엄마를 소화하며 같은 엄마 역할도 다양한 결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김혜자는 손수 증명해 보였다. 그러니 ‘천국보다 아름다운’ 같은 다채로운 얼굴을 요하는 작품 속에서도 별다른 이물감 없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연기는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그간 연기로 쌓아온 이 많은 엄마의 얼굴들이 자유자재로 꺼내지고 있다고나 할까. 

 

사실 연기라고는 하지만 손석구와 부부 연기를 한다는 것이 쉬울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석구 앞에서 토라지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는 소녀 같은 김혜자의 모습은 나이가 주는 편견 또한 깨주기에 충분하다. 나이 들면 여자가 아닌 아내나 엄마로 불리고, 또 남자가 아닌 남편이나 아빠로 불리는 그 역할이 당연하다 여기는 건 얼마나 큰 편견인가. ‘국민엄마’라 불려도 그것이 하나의 고정된 얼굴이 아닌 다채로운 얼굴로 떠올리게 만드는 김혜자를 보다보면, 누군가를 그저 하나의 역할로 고정시켜 바라보는 우리 자신을 반성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글:국방일보, 사진:JTBC)  

‘협상의 기술’로 전설의 협상가가 되어 돌아온 이제훈

협상의 기술

배우의 자질 중 목소리가 가진 지분은 얼마나 될까. 대부분 보여지는 게 직업인 배우인지라 비주얼이 가장 중요할 거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배우는 보여지는 것만으로는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보는 이들을 그 역할에 몰입하게 만들어야 하고 그가 하는 말과 행동에 설득되게 해야 한다. 여기서 진짜 중요해지는 건 목소리다. 중저음의 차분하고 진중한 목소리가 주는 신뢰감은 똑같은 대사도 달리 들리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이제훈은 바로 그 차분하고 진중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배우가 아닐 수 없다. 그의 목소리를 듣다보면 뭐든 설득될 것 같은 신뢰감이 느껴진다. 

 

최근 드라마 ‘협상의 기술’은 그래서 이제훈이라는 배우가 가진 이 신뢰감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M&A 전문가로서 전설의 협상가로 불리는 윤주노라는 인물이 그가 맡은 역할이다. 그는 위기에 처한 산인그룹을 회생시키기 위해 돌아온 M&A 팀장으로 ‘백사’라 불린다. 하얀 머리 때문에 붙은 이름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행동하기 전에 ‘백 번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과거 함께 일했던 오순영(김대명) 변호사와 탁월한 암산 능력을 가진 곽민정(안현호) 그리고 신입 인턴이지만 학창시절 주식 투자 동아리 회장까지 했을 정도로 나름의 능력을 갖춘 최진수(차강윤)로 팀을 꾸려 본격적인 M&A에 들어간다.

 

협상가의 첫 번째 덕목은 어떤 상황에서도 속내를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윤주노는 거의 표정이 없고 말하는 톤도 거의 변화가 없다. 협상이 마무리되어 계약을 하는 당일에 갑자기 틀어진 계약 취소 상황에서도 그는 감정을 좀체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다. 문제가 생기면 일단 그 문제의 원인을 들여다보고 곰곰이 그 해결책부터 차근차근 찾아나가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일견 망한 것 같은 협상에서도 그는 막판에 상황을 뒤집는 놀라운 결과들을 만들어낸다. 협상가의 두 번째 덕목은 냉철하면서도 담대한 대응이다. 제 아무리 아픈 제 살이라고 해도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도려내는 차분하고도 대담한 선택이 요구된다. 그는 산인그룹의 중심이 건설업이라는 걸 알면서도, 바로 그 건설을 먼저 M&A 하겠다고 선언한다. 파는 물건은 사는 이들도 그 가치를 인정해야 제값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냉정하게 판단한 결과다. 그리고 이 윤주노가 보여주는 협상가의 세 번째 덕목은 비즈니스 그 이면에 사람을 본다는 점이다. 윤주노는 이커머스에 진출하기 위해 택배왕을 만든 차차게임즈라는 게임회사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이 자질을 발휘한다. 모두가 비즈니스에 집중할 때 그는 그 게임 개발자가 왜 그런 게임을 만들게 되었는가 하는 그 마음을 들여다봄으로써 끝끝내 그 회사를 인수하는 결과를 도출해낸다. 

 

이제훈은 이 윤주노라는 협상가의 캐릭터를 구축해내기 위해 이 세 가지 덕목을 드러내는 연기요소들을 보여준다. 어떤 상황에서도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모습과, 모두가 반대하는 상황 속에서도 과감하게 나서서 그들을 하나하나 설득해가는 모습 그리고 차가운 모습 이면에 슬쩍 슬쩍 드러나는 따뜻한 인간미가 그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이제훈이 지금껏 해왔던 연기 필모를 들여다 보면 그 다양한 얼굴들 속에 이미 들어 있었던 것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를 테면 영화 ‘건축학 개론’의 그 순하고 순수한 청년의 미소나, 드라마 ‘시그널’에서의 절박한 모습, 영화 ‘박열’의 무정부주의자가 보여주는 자유로움, ‘아이캔스피크’의 공무원 역할로 보여준 반듯함, 그리고 드라마 ‘모범택시’의 장르화된 액션 히어로의 모습과 ‘무브 투 헤븐’의 따뜻한 인간애, 게다가 ‘수사반장 1958’에서의 활극 히어로 같은 다채로운 역할들 속의 얼굴들이 그것이다. 앳된 얼굴이지만 벌써 마흔의 나이에 연기경력만 20년에 육박하는 이 배우는 그간 참 다양한 역할들을 통해 성장해오면서 이제는 여러 면들을 자유자재로 꺼내 쓸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면모들을 하나로 꿰어주는 데는 앞서 말했던 이제훈의 차분하고도 진중한 목소리가 중요한 몫을 했다. 물론 거기에는 매 역할을 분석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연습과 노력이 전제된 것이지만, 이제훈의 목소리는 그 노력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만드는 힘을 발휘했다. 예를 들어 ‘시그널’처럼 무전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는 판타지 설정이 들어있는데, 이제훈의 진실된 느낌의 목소리는 어찌 보면 믿기 힘들어지는 이 판타지조차 믿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했다. 또 ‘모범택시’처럼 판타지적 인물을 장르적으로 해석한 캐릭터에 특유의 현실감이 부여된 것 역시 그의 진중한 목소리가 주는 신뢰감이 큰 역할을 했다. 

 

‘협상의 기술’은 냉정함과 따뜻함의 양면을 담은 드라마다. 즉 냉정함이란 협상으로 대변되는 비즈니스의 세계를 말한다. 실로 ‘협상의 기술’에서는 같은 회사의 동료들마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배신을 저지르는 정치싸움 같은 것들이 펼쳐지는 냉정 그 이상의 비정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진짜 협상에 이르는 힘은 그 속내를 먼저 들키면 안되는 냉정한 세계 속에서도 상대의 마음을 애써 읽어내려는 따뜻함에서 나온다는 걸 이 작품은 보여준다. 무표정한 얼굴 사이사이로 조금씩 드러나는 마음들은 그의 협상력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말해준다. 

 

연기도 일종의 협상이지 않을까 싶다. 믿고 싶어하지 않는 관객과 시청자들을 앞에 두고 믿고 싶게 만드는 협상의 과정이 그것이다. 무표정할 때는 일견 차갑게 보이는 이제훈의 얼굴은 그 무표정을 거두고 살짝 미소 지을 때 보는 이들을 설레게 만들고, 숨겼던 감정을 드러낼 때 더 강력한 폭발력을 갖는다. 특히 차분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그 역할이 무엇이든 우리는 이 배우에게 설득된다. 이것이 이제 20년에 다다른 연기 경력을 통해 이제훈이 갖게 된 연기 협상력이다. (글:국방일보, 사진:JTBC)

‘보물섬’의 박형식, 매운맛 드라마에 더한 설득력

보물섬

청춘은 밝고 경쾌하다. 그래서 보는 이들을 풋풋한 그 시절로 소환하는 힘이 있다. 박형식은 그런 이미지를 타고난 배우다. 보는 이들을 설레게 만들고, 한없이 밝고 맑으며 가벼웠던 청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배우. 그런데 이런 이미지는 나이 들어가면서 무게감을 요구하는 역할들로 영역을 넓혀야 하는 배우에게는 정반대로 장애요소가 되기도 한다. 발랄함의 가벼움을 넘어 인생의 무게감을 짊어지고 그 그늘을 매력으로 끄집어내야 하는 느와르 장르나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돌아와 분노를 뿜어내는 처절한 복수극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박형식이 최근 출연한 드라마 ‘보물섬’은 그에게는 보물 같은 경험을 하게 해주고 있다고 보인다. 이 작품을 통해 그간 밝고 경쾌하게만 보였던 청춘의 아이콘은 사뭇 무겁고 깊이감까지 갖춘 ‘남자’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으니 말이다. 

 

‘보물섬’에서 박형식이 맡은 서동주라는 인물은 등장부터 선한 청춘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다크한 어른의 면모를 드러낸다. 대산그룹 차강천 회장(우현)이 총애하는 비서로 회사에 불리한 증언들이 청문회에서 나오기 시작하자 대뜸 돈다발을 들고 의원을 찾아가 회유하고 협박하는 인물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금품을 제공하기도 하고 때론 주먹질도 하며 몰래카메라로 찍은 영상으로 협박하기도 하는 그런 인물. 그간 박형식이 해온 풋풋한 청춘과는 등장부터가 다르다. 

 

우리에게 박형식의 이미지는 그의 전작이었던 <닥터 슬럼프>에서의 여정우 역할에 가깝다. 그는 늘 밝았고, 심지어 모든 걸 잃고 밑바닥으로 추락한 후에도 여전히 밝았다. 잘 나가던 성형외과의사이자 인플루언서였던 여정우는 한 순간의 누명으로 모든 걸 잃는다. 그런데 이 청춘은 자신의 만만찮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선배의사들에게 이용만 당하다 결국 우울증을 갖고 쫓겨나게 된 남하늘(박신혜)을 위로해준다. 생존경쟁과 각자도생의 삶을 살아오다 그 지경에 이른 남하늘이 “잘못 산 것 같다”고 말할 때 “네 잘못 아니야”라고 얘기해준다. 박형식 특유의 건강한 에너지는 그래서 남하늘은 물론이고 자신까지도 다시금 회복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는 여정우라는 캐릭터에 제대로 맞아 떨어졌다. 

 

박형식이라는 청춘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이러한 ‘회복력’은 그가 사극에 도전했던 ‘청춘월담’에서도 힘을 발휘한 바 있다. ‘청춘월담’은 저마다 저주와 누명을 뒤집어쓴 청춘들이 그들을 가둬놓았던 담을 뛰어넘는 이야기다. 이환(박형식)은 형을 죽이고 왕세자 자리에 올랐다는 누명을 쓴 채 혹독한 저주를 받은 인물이고, 민재이(전소니)는 사랑하는 부모와 오라버니를 독살한 살인자라는 누명을 쓴 채 도망자가 된 인물이다. 왕세자와 도망자의 처지이지만 그들은 둘다 누명을 쓴 청춘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어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함께 그 어둠의 터널을 통과해 진실을 향해 나간다. 어두운 곳에 놓여져도 오히려 빛나는 밝은 이미지를 드러내는 박형식인지라, 그는 속박된 틀을 벗어나 훨훨 담을 넘어가는 ‘청춘월담’의 서사와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박형식의 밝은 이미지는 심지어 좀비 장르에서도 설렘을 주는 면모를 발휘한다. 좀비들이 창궐하는 아포칼립스 상황 속에서도 한효주와 달달한 멜로 구도를 그려냈던 ‘해피니스’에서의 박형식이 그렇다. 어찌 보면 좀비가 창궐하는 아포칼립스의 암울한 상황과 이러한 발랄함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오히려 ‘해피니스’는 이런 팬데믹 분위기와는 상반된 발랄한 극의 분위기가 특징인 작품이다. 팬데믹 이후의 달라진 인식 기반 위에 세워진 이 드라마는 좀비 장르를 통해 팬데믹 상황을 은유하긴 했지만 너무 어둡지 않은 전망을 담으려 했다. 그래서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어둡지만은 않은 작품을 그리려 했고, 그래서 멜로 같은 달달한 분위기를 살리려 했다. 밝은 미소가 더 어울리는 박형식과 한효주가 작품의 중심에 서게 된 이유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 배우에게 있어서 고정된 밝은 이미지는 성장에는 족쇄가 되기 마련이다. 박형식은 제국의 아이들의 아이돌로 시작했지만 2012년부터 배우로 데뷔해 지금껏 10여년이 넘게 연기의 길을 걸어왔다. 이제 나이도 30대에 접어든 그가 계속해서 청춘의 아이콘으로만 머물러서는 여러모로 한계를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이다. 그가 ‘보물섬’ 같은 욕망과 좌절 그리고 분노와 복수가 이어지는 느와르에 가까운 작품으로 돌아온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인다. 그에게 필요한 것이 이러한 이미지 변신이니 말이다.

 

실제로 예고편이 등장한 후 대중들은 박형식의 다른 면모에 적이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훨씬 굵어진 선이 강조되는 이미지에, 강렬한 눈빛과 다크해진 모습들이 그렇다. 물론 등장은 사랑에 진심인 순정남으로서의 면모로 시작한다. 사랑을 위해 야망까지 접고 여은남(홍화연)이라는 여인을 사랑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러한 순정남의 면모는 첫 회만에 깨져버린다. 여은남이 차강천 회장의 외손녀였고, 비선실세로서 최강빌런인 염장선(허준호)의 조카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면서다. 서동주는 이로써 사랑을 배신당하고, 나아가 대산그룹에서 성공하려던 그 야망 또한 저지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2조원의 비자금을 만든 후 팽 당할 위기에 서게 되는 서동주의 선택은 우리 모두가 기대하듯이 처절한 복수다. 

 

사실 어찌보면 ‘보물섬’은 돈과 권력의 세상 속에서 저마다의 ‘보물’을 찾아가는 이야기지만, 그 구성이나 소재는 막장드라마에 가깝다. 그런데 이러한 막장의 요소들이 박형식이라는 배우가 가진 진중함과 만나 중화되는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지금껏 신뢰를 주던 박형식이기에 믿고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밝은 이미지로만 채워져 있던 박형식에게도 변화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간 청춘의 아이콘으로만 그려져오며 상대적으로 적게 느껴졌던 깊이감의 부여랄까. 이것은 아마도 박형식이 이 작품을 통해 얻게 된 진짜 보물이 아닐까 싶다. (글:국방일보,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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