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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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전’은 어떻게 전쟁영화를 넘어섰나

D.H.Jung 2011. 8. 10.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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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전', 원근법이 백미인 전쟁영화

'고지전'

어떻게 보는가 하는 점은 무엇을 보는가 하는 점만큼 중요하다. 멀리서 볼 것인가, 아니면 가까이서 볼 것인가. 또 어느 쪽의 시점으로 볼 것인가. 그것이 전쟁영화라면 더더욱 그렇다. 전쟁영화를 먼 거리에서 보다보면 스펙터클의 덫에 걸릴 수 있고, 너무 가까이서 바라보면 지나치게 인물들의 감정 속으로만 매몰될 수 있다. 전쟁영화는 스펙터클이 될 때 비판받을 수밖에 없고, 감정에만 매몰될 때 소소해질 위험성이 있다. 또 실제 겪었던 전쟁을 다루는 경우 어느 한쪽의 시각에 맞추다보면 다른 편의 시각이 소외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고지전'만큼 적절한 원근법을 고수하고 있는 전쟁영화는 보기 드물다. 일단 그 '애록고지'라는 영화의 공간이 그렇다. 한국전쟁의 끝 무렵 남북분계선을 가름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애록고지. 그 고지를 중심으로 영화는 시선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한다. 영화는 이 애록고지를 지도 위에 놓여진 하나의 점으로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 지도 위의 몇 미리에 불과한 땅을 더 갖기 위해 남과 북의 대표자들은 격렬한 언쟁을 벌인다. 그러나 이 다소 심심해 보이는 협상의 결과는 실제 애록고지로 날아가면 살벌한 결과로 이어진다. 지도에서 현장으로 다가가는 이 시선의 전환은 그래서 이 영화의 반전 메시지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애록고지의 전황을 포착하는 시선 역시 이 지도에서 전장으로 가는 시선과 동일하게 이동한다. 방첩대 소속으로 후방에 있던 강은표(신하균)의 시선을 쫓아가기 때문이다. 강은표는 뭔가 적과 내통하는 편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수사하기 위해 애록고지에 주둔한 악어부대로 들어간다. 즉 철저히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각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 그가 애록고지에서 과거 친구였던 김수혁(고수)을 만나고, 그 하루에도 주인이 몇 번씩 바뀌는 애록고지의 상황을 경험하면서 차츰 그들과 동화되어가는 과정은, 멀리서 봤던 풍경과 가까이서 보는 현실 사이에 괴리감을 만들어내며 한국전쟁으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만큼의 거리를 갖고 있는 현재의 관객들을 좀 더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만든다.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악어부대의 병사들이 빗발처럼 쏟아지는 총알 사이를 달려가는 장면은 원경에서 바라보면 하나의 그림처럼 보인다. 마치 거대한 흙더미 위에 개미들이 뒤엉켜있는 것처럼 누가 누구편인지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그 원경의 그림은 그러나 이미 관객들에게 익숙한 이 영화의 몇몇 주인공들의 사투를 따라가는 근경에 이르면 하나의 지옥도로 다가온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인물들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가는 현실을 그 원근법의 카메라가 보여주는 셈이다.

흥미로운 건 뺏고 빼앗기는 끝없는 전투장면의 반복 속에서 변해가는 이 전쟁에 대한 생각이다. 그들은 이제 차츰 이 전쟁이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 전쟁 자체와 자신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애록고지를 중심으로 남과 북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몇몇 시퀀스들은 그래서 이 전쟁영화를 휴먼드라마로 만드는 이유다. 고지는 그저 거기 우뚝 솟은 땅일 뿐이고 이쪽에서 노래하면 저쪽에서 들릴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대치하고 있는 병사들은 점점 자신들이 왜 싸우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한다. 그래서 군인으로서는 서로에게 총칼을 들이밀고 있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서로를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이 멀고 가까움과 이쪽과 저쪽의 사이에 놓여진 대결구도의 간격을 공감의 시각으로 채워놓는다.

고지 하나를 놓고 이처럼 다채로운 이야기를 포착해내는 원근법이 있을까. 그 원근법은 공간적으로도, 인물과 인물 사이에도, 남과 북이라는 대치 상황 속에서도, 또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도 다양한 시각들을 포섭해낸다. 그리고 이 원근법은 전쟁영화가 가진 위험성과 한계를 ‘고지전’이 넘어설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