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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네모난 세상

'SBS스페셜', 무엇이 철거왕 같은 괴물을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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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왕, 영화 같은 이야기? 끔찍한 현실이다

 

‘철거왕’. 마치 조폭영화 제목 같다. 실제로 무수한 조폭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재개발 현장에서 이른바 ‘용역’으로 활동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다지 낯선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 현실로 실감하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각목과 쇠파이프와 화염방사기, 물대포차, 포크 레인 앞에서 뼈가 부서지고 살이 타면서도 터전을 지키려 안간힘을 썼던 주민들의 고통을 어찌 전부 알 수 있단 말인가.

 

'SBS스페셜(사진출처:SBS)'

<SBS스페셜>이 다룬 철거왕 이금열에 대한 이야기는 그래서 마치 조폭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드라마 타이즈된 연출로 시작된다. 성공에 대한 욕망과 가진 것은 몸뚱어리 하나밖에 없는 청년의 비뚤어진 야망 같은 것이 우리가 그들에게 갖고 있는 막연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다큐가 다루려는 것은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대신 그 이미지 밑에 숨겨져 있는 추악한 폭력의 실체를 끄집어내 보여주고 그 밑바탕에 깔린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말하기 위함이다.

 

1998년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펴낸 ‘다원건설 철거범죄 보고서’에는 당시 적준이라 불렸던 철거업체의 끔찍한 폭력의 내용들이 들어가 있다. “임신 5개월 된 임산모를 때리고... 아주머니들에게 강제로 똥물을 먹이는 폭행”을 저지르기도 했으며, 심지어 “부녀자의 국부를 발로 밟는 성추행”도 빈번하게 했다고 한다. 방송에 나간 내용을 보면 한 여성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서 반 실신시킨 사례까지 들어 있었다.

 

당시 전농동 주민이었던 피해자 송경란씨는 당시 적준이 아이가 혼자 있는 집에 불을 지르고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자 “아이는 어떻게 하냐”며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기도 했다. 그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적준은 사람 죽이는 거 우습게 생각해요. 이렇게 하면 이 사람 다칠 거라는 생각 안하고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철거를 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 때 참 많이 죽었어요.”

 

당시 초등학교 1학년생이었던 김현욱 군은 누가 제일 보고 싶냐는 질문에 “엄마 아빠”라고 답했다. 하지만 당시 엄마 아빠는 적준아저씨들하고 싸우고 있다는 것을 김현욱 군을 알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적준아저씨들에 대한 이야기는 어린 아이가 담고 있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적준아저씨들이 포클레인 갖다요. 막 뭐라고 하면서 집 부수려고 막 그러는데 한 사람은 막 쇠파이프로 갖다 막 때리고 그랬는데, 어떤 사람은 불 갖다 지르고..”

 

도대체 국가가 있고 시가 있고 경찰이 있는데 왜 이런 살인 방화가 자행되는 것을 먼 산 불구경하듯 바라보고만 있었을까. 여기에도 역시 우리가 그간 조폭 영화에서 많이 봐왔던 정치권이나 공권력과의 커넥션이 제기된다. 15년 전에 보고서가 나오고 다원의 불법행위에 대한 고발장이 제출되었을 때 실무를 주도한 박래군 소장에 따르면 “수사가 될 것 같더니 다원이 여당 실세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말이 나오면서 흐지부지 됐다”고 한다.

 

다원이나 철거왕 같은 도무지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범법자들이 버젓이 벼락부자가 되어 살아가게 된 데는 그만한 우리사회의 아픈 현대사가 작용하고 있다. 중동경기가 끝나고 들어온 중장비들이 88서울올림픽을 명분으로 재개발쪽으로 이동했다는 것. 재개발을 국가가 민간으로 넘김으로써 폭력적인 철거를 사실상 방임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최근 철거왕 이금열이 구속 기소됨으로써 그 이면에 놓여진 커넥션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억대 로비를 했다는 이야기는 물론이고 윗선에서 수사에 개입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영화 같은 이야기로 치부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부끄러운 우리네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서민들이 가진 아파트에 대한 소박한 꿈들은 어쩌면 그 밑에 이처럼 피와 눈물을 흘리며 쫓겨난 사람들의 이야기에 묻혀졌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끔찍한 건 사실상 철거왕이라는 괴물의 탄생을 국가가 만들어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실로 너무나 살벌한 별명이 아닌가. ‘철거왕’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