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보소>, 복합장르가 만들어내는 기묘한 재미
“뭐야 뭐야? 나 촉 디게 좋아-” KBS <개그콘서트>의 ‘은밀하게 연애하게’에서 임종혁은 김기열과 박보미의 비밀연애를 슬쩍 슬쩍 훔쳐보며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이들은 형사들이다. 범죄를 수사해야할 촉이 연애로 향하고, 선임과 신입 여형사는 수사가 아닌 연애를 한다. 형사물과 연애물을 결합하니 기묘한 지대가 생겨난다. 늘상 보던 연애물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그 복합장르 속에 뒤섞인다.
'냄새를 보는 소녀(사진출처:SBS)'
아마도 SBS <냄새를 보는 소녀>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느낌이 이와 같지 않을까. 복합장르가 드라마에서 하나의 트렌드를 만든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별에서 온 그대>가 SF 판타지에 멜로와 코믹, 액션, 스릴러 같은 장르들을 엮어내 대륙까지 흔들었고, <너의 목소리가 들려>나 <피노키오>의 박혜련 작가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들을 등장시켜 다양한 장르를 뒤섞으면서도 그 안에 독특한 사회적 메시지까지 담아내는 자신만의 영역을 과시한 바 있다.
<냄새를 보는 소녀>는 복합장르의 또 다른 버전이다. <별에서 온 그대>가 초능력을 가진 별에서 온 도민준(김수현)을 내세우고 있다면 <냄새를 보는 소녀>는 제목처럼 냄새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소녀 오초림(신세경)이 그 주인공이다. 드라마는 미스테리하게 벌어지는 이른바 바코드 연쇄살인을 담은 스릴러로 시작한다.
연쇄살인마에 의해 부모가 살해당하고 쫓기던 오초림은 차에 치어 기억을 잃어버리는 대신 냄새를 보는 초감각을 갖게 된다. 하지만 연쇄살인마를 목격한 그녀 때문에 최무각(박유천)은 같은 이름을 가진 여동생이 살해당하는 걸 보고는 감각을 잃어버린다. 연쇄살인마에 의해 두 사람은 각각 소중한 사람들을 잃게 되지만 한 사람은 초감각을 갖게 되고 다른 한 사람은 이름처럼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만 보면 전형적인 액션 스릴러나 추리 장르처럼 보이지만 이 두 사람이 운명처럼 만나 미묘한 감정을 나누는 멜로 역시 빠질 수 없는 재미요소로 등장한다. 두 사람이 서로 가까워지는 멜로의 이야기는 또한 두 사람의 공통의 목표 즉 연쇄살인마를 잡고 과거의 아픔을 극복해내는 것에도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이 다양한 장르들은 기묘한 이음새로 이어진다.
초감각의 오초림이 무각의 최무각을 도와 수사를 하는 과정은 그래서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면을 보완해 하나의 완전체를 이루는 모습 그대로다. 오초림이 초감각으로 사건의 단서들을 찾아낸다면 무각은 온몸을 던져 범죄자들을 잡아낸다. 또 오초림의 꿈인 개그우먼이 되는 것을 돕기 위해 의외의 콩트 연기력을 보여주는 무각은 그녀와 콤비를 이룬다.
일상에서 오초림은 땅 위로 1센티 정도 들어 올려진 듯 과장된 인물이고 최무각은 반대로 동생의 죽음을 파헤치는 무겁게 가라앉은 인물이지만 콩트 코미디 속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초림이 콩트 특유의 과장을 잘 못하는 반면, 최무각은 거꾸로 과장된 연기로 개그의 자질을 드러낸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건 이들의 외면과 내면 사이의 부조화를 말해주기도 한다. 그것이 어떻게 합치를 이루는가도 이 드라마가 앞으로 보여줄 또 하나의 이야기다.
흥미로운 일이지만 이 여러 장르들이 뒤섞인 <냄새를 보는 소녀>는 의외로 보는 내내 두근두근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그것이 스릴러가 주는 긴박감 때문인지 아니면 오초림과 최무각 사이에 벌어지는 알콩달콩한 로맨스 때문인지는 애매모호하다. 물론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복합장르의 기묘함은 분명한 정체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그 모호함에서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 깊숙이 들어와 있는 우리에게 가상과 현실은 이미 혼재되어 있다. 우리는 그다지 그 경계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니 가상이 주는 판타지와 현실이 주는 실감 사이의 경계도 점점 얇아지고 있다. 복합장르가 주는 기묘한 느낌은 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장르들이나 판타지와 현실이 의외로 자연스럽게 엮여 어떤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데서 나온다.
흔히들 가상현실의 혼재가 가져온 그 으스스한 느낌을 ‘언캐니 현상’이라 부르고 그것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특징이라고들 말한다. 복합장르에서 느껴지는 그 기묘하고 정체가 모호한 재미 역시 그 특징을 어느 정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냄새를 보는 소녀>가 주는 정체모를 두근두근에는 그래서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새로운 세상의 새로운 감각의 일단이 느껴진다.
“뭐야 뭐야 나 촉 디게 좋아”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그 재미의 정체가 여전히 모호하게 다가오는 건 우리에게 아직 남아있는 전통적 문법들의 저항 때문일 게다. 물론 <냄새를 보는 소녀> 같은 복합장르의 애매모호함 역시 우리가 디지털 깊숙이 들어와 이제 디지털을 그다지 새롭게 느끼지 않는 것처럼 향후 우리네 드라마의 익숙함이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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