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타임리프 판타지, 설레거나 식상하거나

728x90

타임리프 판타지가 오히려 현실을 더 껴안아야 하는 까닭

이제 타임리프가 없으면 어딘지 심심하다? 아니 너무 타임리프가 많이 등장해 식상할 지경이다. 드라마를 보는 취향에 따라 최근 쏟아져 나오는 타임리프 설정에 대한 호불호는 나눠질 것이다. 종영한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은 조선시대에서 이어진 인연이 현재로까지 이어졌고,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는 고려시대의 무장 김신(공유)이 도깨비로 부활해 무려 7백여 년을 산 이야기를 다뤘다. 그리고 현재 방영되고 있는 <사임당, 빛의 일기> 역시 조선시대와 현재를 넘나드는 타임리프 판타지 설정이다.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사진출처:tvN)'

또 이러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타임리프 설정의 드라마들은 올해도 계속 나올 전망이다. 3일 첫 방송되는 <내일 그대와>는 지하철을 매개로 하는 타임리프 판타지 설정이 되어 있다. 오는 3월 방송 예정인 <터널>은 ‘3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에서 현재로 온 아재 형사의 新문물 표류 수사기’를 다룰 것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이미 훨씬 이전부터 타임리프라는 판타지는 <나인 : 아홉 번의 시간여행>에서 다뤄진 바 있고, <시그널> 같은 작품에서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무전기라는 설정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별에서 온 그대> 같은 경우에는 죽지 않는 외계인이라는 설정으로 자연스럽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가 가능해졌다. 타임리프,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오래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폭넓은 시간대를 다루는 설정으로 인해 사극과 현대극은 이제 완전히 구별되는 장르가 아닌 게 되었다. 

이러한 타임리프 설정의 드라마가 많아지는 것은 시간의 혼재가 주는 흥미로움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이 설정이 모두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신의> 같은 고려시대의 최영 장군이 현재를 넘나들며 여의사와 시공을 초월한 사랑을 하는 드라마는 생각만큼 성공적이지 못했다. 또 조선시대와 현재의 전생과 이생을 뛰어넘는 <푸른 바다의 전설> 역시 스토리적으로 성공적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이른바 순환우주의 세계관을 끌어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사임당> 역시 아직까지 그 성공을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무전기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 <시그널>이나 고려시대의 전생과 현재의 이생을 도깨비와 도깨비신부, 저승사자의 이야기로 풀어낸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는 대중적인 성공은 물론이고 작품성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똑같은 타임리프라고 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이런 성패를 가르게 된 것일까. 

흔히들 타임리프라는 시간을 넘나드는 판타지 설정은 그 자체의 흥미로움에 시청자들이 빠져들 것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타임리프라는 판타지 설정은 그 허구를 이어주는 강력한 현실적인 동인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저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전락할 위험을 지닌다. 현재에서 갑자기 과거로 소환됐다면 그런 판타지가 왜 필요한가를 그 작품은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시그널>의 판타지가 성공했던 건 무전기 설정 그 자체 때문이 아니고 그런 판타지를 통해서라도 과거로 돌아가 미제사건을 해결하고픈 강렬한 현실적 열망이 그 동인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그널>의 김원석 감독은 무전기라는 판타지 설정에 대한 현실적 근거를 자세히 넣으려고 굳이 애쓰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중요한 건 판타지 설정 자체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가 하려는 현실적인 정서나 갈망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라는 것. 

<도깨비>가 성공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는 심지어 도깨비나 저승사자 같은 초월적 존재를 등장시키고 있지만 이들을 통해 실제 하려는 이야기는 삶과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 것이었다. 사랑과 기억이 있다면 죽음은 그저 불행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 마찬가지로 영생한다는 것이 행복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이 드라마는 판타지 설정을 통해 이야기해줬다. 물론 이 이야기는 지금의 힘겨운 현실상황에 처한 대중들에게 위로를 주기에 충분했다. 

타임리프라는 설정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설정이 건드리는 현실적인 정서가 더 중요하다. 타임리프는 그저 그림을 멋지게 만들기 위함이거나 과거와 현재를 뛰어넘는 상상력의 자유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그래서 항상 그것이 왜 필요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면 그 드라마의 타임리프가 성공적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