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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기 몸도 없는 게 사람이에요?” ‘파친코’의 소름 돋는 한 마디
    동그란 세상 2022. 4. 28.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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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친코’의 진가는 단역조차 이런 묵직한 대사를 던진다는 것

    파친코

    오사카에서 전도사로 일하는 이삭(노상현)은 아들이 위험한 일에 빠져 있다며 이를 막아달라는 한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그 아들을 찾아가 만난다. 얼굴에 잔뜩 흙이 묻은 채 이삭과 함께 거리를 걷는 사내는 설득하러온 이삭에게 오히려 “눈을 뜨라”고 일갈한다. 

     

    “눈을 뜨실 때가 됐어요. 전도사님. 여기 인부들이나 나나 땅굴 들어가서 철로를 깔아요. 인부들 더 빨리 더 많이 먼 곳으로 실어 나르려고. 그래서 우리처럼 뼈 빠지게 부려 먹으려고요. 그렇다고 우리가 대단한 대우를 해달래요? 최소한 길바닥에 똥 싸지르는 짐승이랑은 다른 꼴로 살게 해줘야 할 거 아니에요.”

     

    애플+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에 등장하는 이 사내는 단역이다. 이삭이 우연찮게 만나고 지나치는 인물 중 하나일 뿐. 하지만 이 사내가 던지는 대사는 <파친코> 6회 전체를 관통하는 묵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건 살기 위해 조선 고향 땅을 떠나 낯선 오사카로 와 갖가지 차별 속에서 살아나가던 조선인들이 가진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다. 저들처럼 살라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총칼을 앞세워 요구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거나 부인하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고민이다. 

     

    그런 이야기만으로도 위험해질 수 있고, 그 위험이 그 자신과 가족만이 아닌 모든 조선인들에게 화살로 돌아올 수 있다는 걸 이삭은 말하지만, 그런 이삭에게 던지는 사내의 일갈은 얼얼하기만 하다. “제가 그걸 모를 거 같으세요? 저라고 꿈속에서 어머니 얼굴 보고 울다 깨는 일 없겠냐고요. 형제들, 누이들 만나 본 적 없는 생판 남들까지 다 걱정되고 신경 쓰인다고요. 하지만 두려움이 내 몸을 멋대로 주무르게 놔두면요, 나중엔 내 몸의 윤곽조차 낯설어질 거예요. 그걸 내 몸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자기 몸도 없는 게 사람이에요?”

     

    1920년대 일본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조선인들의 삶은 1980년대 일본에서의 그 삶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파친코>는 이런 현실을, 이삭과 사내의 에피소드에 이어 솔로몬(진하)과 하나의 에피소드로 교차 편집함으로써 드러낸다. 에이즈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하나는 솔로몬이 미국으로 떠난 후 ‘예쁜 집’에 사는 애들은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걸린 이 병이 바로 그런 집에서 자란 남자한테서 옮은 거라며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한다. “솔로몬 날 봐. 넌 절대 그들이 될 수 없어. 그렇게 비싼 옷을 입고 좋은 학위를 따도 그들은 네가 기회가 있다고 착각할 딱 그만큼만 문을 열어 놓을 거야. 넘어가지 마.”

     

    끝까지 조선말을 쓰고 조선의 이름을 버리지 않고 김치를 담가 먹으며 살아온 재일 한인들의 삶을 그래서 수십 년이 지났지만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솔로몬은 회사로부터 땅을 팔지 않는 한 재일한인 할머니를 설득해야 자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처지에 몰렸지만, 그래서 저들을 위해 나섰지만 끝내 할머니가 그간 겪어온 아픈 차별의 이야기들을 마주하고는 땅을 팔라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걸 실패한 솔로몬을 가차 없이 버린다. 하나의 말대로 저들은 솔로몬에게 ‘기회가 있다고 착각할 만큼만’ 문을 열어 놓은 것. 

     

    “사람이 아니에요. 우린 저놈들 눈에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 굴욕감에 술 처먹고 싸움질 하고 집구석에 들어가서 마누라나 패고... 적어도 나 바닥은 아니다. 내 밑에 누가 더 있다. 저 놈들의 법을 따라 줬어요. 그런데 아직도 춥고 아직도 배고프잖아요. 이젠 그 법을 때려 부숴야 합니다.” 이삭이 만난 사내가 쏟아내는 그 말은 1980년대의 솔로몬이라는 후대에까지 그 울림이 이어진다.  

     

    사내의 그 말에 무언가 깨달은 이삭은 사사건건 그의 아내 선자(김민하)를 깎아내리는 형에게 꾹꾹 눌렀던 감정을 폭발한다. 형의 모습은 저 사내가 말한 “굴욕감에 술 처먹고 싸움질 하고 집구석에 들어가서 마누라나 패는” 그런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삭은 그 사내가 했던 말을 빌려 형에게 말한다. “우리 아이는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게 하고 싶지 않아. 난 내 자식이 자기 몸의 윤곽을 똑바로 알고 당당하게 재량껏 살았으면 좋겠어. 우리 자식들도 그럴 자격 있는 거 아냐 형? 형도 나도.” 

     

    그리고 이삭의 이 이야기는 나이든 선자(윤여정)가 과거 대놓고 두 집 살림을 하려던 한수(이민호)가 집도 사주고 뭐든 해주겠다고 한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솔로몬에게 털어놓는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내를 반으로 쪼개놓고 살수는 없다 아이가. 뭐는 당당히 내놓고 뭐는 숨키가 살고. 니 그 아나? 잘 사는 거보다 어떻게 잘 살게 됐는가, 그게 더 중한 기다.” 그 이야기는 선자가 아이 아버지인 한수가 아닌 이삭을 선택해 결혼해 살아가게 된 이유를 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일본 땅에 이주해 살아가는 재일 한인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놀라운 건 이처럼 묵직한 메시지를 담은 대사를 단역이라고 할 수 있는 한 사내의 목소리를 통해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분히 의도적인 이런 선택은 <파친코>라는 작품이 주인공에서부터 저 단역에 이르기까지 등장인물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면서, 작가가 가진 이름 모를 민초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슬쩍 지나가는 어부나 어시장 한 편에서 쌀을 파는 쌀집 할아버지, 이역 땅에 와서 땅굴에 들어가 철도를 놓는 일을 했던 인부까지 중하게 바라보는 시선. 그것은 어쩌면 이주민이라는 위치에서 살아오며 내재된 관점이 아닐까 싶다. <파친코>라는 작품이 특히 감동적인 이유이기도 하고.(사진:애플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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