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과 밀실.
남북이 분단된 우리에게 이 두 단어는 특별한 은유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1960)>은 일찍이 이렇게 표현했다.
남한은 밀실은 넘치나 광장이 없고, 북한은 광장은 있으나 밀실이 없다고
김보솔 감독의 애니메이션 <광장>은 이 소설에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눈보라에 칼바람이 부는 북한이 배경이다.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의 이방인인 평양 주재 스웨덴 서기관 보리에게 북한은 낯선 곳이다.
하지만 보리는 그 살풍경한 곳에 조금더 머물고 싶어한다.
그 곳에서 만나 사랑하게된 교통보안원 서복주 때문이다.

그 곳은 이방인과의 접촉 자체가 감시되고 금지된다.
시장에서 귀여운 어린 아이와 대화를 해도
그 아이와 엄마에게 누군가 다가와 그걸 문제삼는 곳이다.
보리와 복주는 길거리를 함께 걷거나 손을 잡는 일조차 쉽지 않다.
내밀한 접촉은 자칫 스파이짓으로 오인될 수도 있는 일이다.
보리의 북한 통역관인 리명준도 그래서 늘 거리를 둔다.
집에 들어가 삶은 계란에 맥주 한 잔을 하자고 해도
그 사소한 일조차 리명준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실 알고보면 리명준은 보리를 감시하고 감청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보리가 복주를 만나는 일을 탐탁찮아 한다.
그것이 복주에게 일으킬 파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들은 그들에게는 '평양추방' 같은 조치가 취해질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 내뿜는 입김이 더 뜨거워지듯
금지는 욕망을 더 간절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조금 더 평양에 머물겠다는 간청이 거절되고
복주마저 사라져 버리자 보리의 억눌렀던 감정은 폭발하고만다.
복주를 찾아 평양을 헤매고 찾을 수 없게되자 리명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리명준은 그런 보리를 "이기적인 새끼"라 욕하며 비난한다.

꽁꽁 얼어붙은 동토인지라 더더욱 간절한 온기가 느껴지는 보리와 복주의 사랑이야기를 다뤘지만
<광장>에서 주목되는 인물은 바로 리명준이다.
그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굳은 얼굴로 등장하지만
저들의 사랑을 감시하고 바라보면서 조금씩 변화해간다.
김보솔 감독은 아마도 리명준의 변화를 통해
이 견고해 결코 깨지지 않을 것 같은 체제에도 생겨나는
작은 균열을 그리고 싶었던 듯하다.

작품 속에 여러 차례 메타포로 등장하는 계란은 리명준의 변화를 말해준다.
보리가 호의로 건넸지만 그가 뿌리쳐 깨버린 계란,
감시되는 걸 알아차린 보리가 술에 취해 던져 리명준이 감시하던 건물 창문을 깨버린 계란,
그리고 그것이 삶은 계란인 줄 알고 이마로 깼다가 터져버린 날계란이 그것들이다.
마치 바위를 치듯 날아가던 그 계란들은 조금씩 리명준을 변화시킨다.
끝내 리명준은 보리가 복지를 찾는 일을 돕는다.
그러면서 왜 이렇게까지 하냐는 외교관의 물음에 이렇게 말한다.
"글쎄요... 외로웠나 봅니다."
왜 외로움일까. 외로움이란 감정이 생겨났다는 건 무얼 뜻하는 걸까.
사실 이 살벌한 감시체계 안에서는 외로움조차 느낄 수 없다.
늘 불안이 공기처럼 흐르고 있어서다.
하지만 외로움을 느꼈다는 건 리명준에게 인간적인 감정이 생겼다는 의미다.
그건 작은 균열이자 희망이다.

기억에 선명히 남는 장면은
눈 내린 광장 위로 리명준이 자전거를 타고
그 위에 자유로운 궤적이 그려지는 장면이다.
첫 장면에 등장한 북한의 광장에는
마치 서야할 자리를 지정하는 듯한 숫자가 일정한 간격으로 쓰여 있었다.
그 숫자들이 눈에 덮이고 그 위로 리명준이 자전거로 그려내는 궤적은
그의 외로움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유에 대한 갈망을 담는다.
한국의 애니메이션이지만 이토록 스산하고 쓸쓸하게 마음을 휘어잡은 작품이 있었나.
<광장>의 그 궤적이 오래도록 가슴에 선을 그어 놓았다.
2026.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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