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 이미지? 엄태구의 매력적인 진면목에 묘하게 빠져든다

놀아주는 여자

“조회수 천만이면 천만원 법니까? 아니면 뭐 1억? 얼마를 벌길래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겁니까? 그 돈 내가 다 줄 수도 있는데. 아 전과자 돈은 뭐 더러워서 싫은가? 우리 직원들이요, 거기 난동부리러 간 조폭들 아닙니다.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고 욕 들으러 간 것도 아니고요. 그냥 애들 먹을 제품 열심히 개발하고 만들어서 홍보하러 간 겁니다. 거기 있던 다른 사람들하고 같은 목적으로 간 거라고요. 내가 보기에 목적이 달랐던 건 그쪽인 거 같은데. 여기선 구독자와 좋아요가 돈이라면서요. 돈 버는 방법 알았으니까 이제 부자만 되시면 되시겠네. 아님 뭐 원래부터 방법 알고 있었거나...”

 

JTBC 수목드라마 ‘놀아주는 여자’에서 조폭 출신 사업가 서지환(엄태구)은 키즈 크리에이터 고은하(한선화)에게 아픈 말들을 쏟아낸다. 직원들 대부분이 전과자지만 이제 손을 씻고 육가공업체 목마른 사슴을 세워 합법적인 사업을 하려던 차에 SNS에 올라온 동영상 하나가 발목을 잡았다. 새로 개발한 소시지 홍보차 행사에 나섰다가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마침 고은하가 출연한 행사 영상을 소속사인 마카롱 소프트 마대표(연제욱)가 악마의 편집을 해 올려버렸다. 마치 난동 부리는 조폭과 고은하가 대결하는 것만 같은 영상으로. 

 

영상은 조회수가 폭발했고 그래서 마대표는 입이 귀 끝에 걸렸지만 고은하도 서지환도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였다. 아이들을 위한 방송만을 하겠다는 소신으로 ‘어그로 방송’과는 선을 그어 조회수도 구독자도 별로 없던 고은하는 그 소신을 깬 사람처럼 된데다 심지어 서지환과 그 회사 직원들에게도 큰 폐를 끼치게 됐다. 그 영상을 고은하가 악의적으로 편집해 올린 거라 오해한 서지환은 큰 상처를 입는다. 고은하의 동심 가득한 모습에 마음이 가던 차에 큰 실망을 했고 그래서 너무나 아픈 말을 쏟아낸다. 

 

이 에피소드는 ‘놀아주는 여자’라는 드라마가 가진 기획의도를 분명히 드러낸다. 그건 일종의 선입견과 편견에 대한 이야기다. 조폭 출신이고 전과가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그 사람들이 만든 음식을 뭘 믿고 먹느냐는 사람들이나, 그런 성급한 편견을 활용해 악마의 편집을 한 영상으로 조회수 장사를 하려는 약삭빠른 세상에 대한 일침이다. 조폭 출신이지만 양심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서지환의 회사에서 만든 소시지가 바로 그 전과자라는 낙인 때문에 모두가 거부하게 되지만, 정작 대규모 식중독 사태를 일으킨 건 다름 아닌 고은하가 잘 모르고 홍보했던 유기농 우유였다는 사실이 이런 일침을 잘 보여준다. 

 

편견과 선입견을 지워내고 서지환의 진면목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인물로 고은하라는 ‘동심’ 가득한 인물을 세워 놓은 건 그래서 우연한 선택이 아니다. 고은하는 여전히 동심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인물이고, 그래서 서지환의 진짜 모습을 조금씩 보며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실제 원본 영상을 올려 기존 영상이 악마의 편집을 한 거라는 걸 만천하에 공개한 고은하의 진심을 알아챈 서지환은 그래서 그녀를 찾아와 사과한다. “정말 미안합니다. 제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쪽한테 말을 너무 심하게 했습니다. 저는 오해받는거 싫어하면서도 제가 그쪽을 오해했습니다.”

 

‘놀아주는 여자’는 제목부터가 수상하다. 어딘가 편견과 선입견을 불러 일으키는 제목이다. 하지만 이건 그 앞에 ‘아이들과’라는 문장이 생략된 제목이다. 드라마를 보고 단박에 이 제목의 진짜 의미를 알아챈 시청자들은 깨닫게 된다. 문장 하나에도 감춰진 진짜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선입견과 편견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러고 보면 이 작품에서 서지환 역할에 그간 조폭 이미지로 주로 소비되던 엄태구가 캐스팅된 것 역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어딘가 섬뜩한 이미지로 굳어진 것처럼 느껴졌던 엄태구지만 이 작품은 그것 역시 하나의 선입견이자 편견이었다는 걸 앞으로 보여줄 작정이다. 한없이 망가지며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무심한 듯 스윗한 그런 엄태구의 매력이 드러날 것 같은 기대감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사진:JTBC)

‘졸업’은 학원강사를 미화하지도 교사를 비하하지도 않았다

졸업

“난 서혜진 선생 그런 부분이 참 좋아요. 자기 밥그릇이 걸린 문제에선 망나니처럼, 미안합니다, 투사처럼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고 싸움에서 이기고 난 다음엔 갑자기 도덕책을 읊어대는 그런 뻔뻔함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죠. 참 욕심나는 사람이에요.” 표상섭(김송일) 선생님이 학교까지 그만두고 최선국어 부원장이 된 이유를 묻는 서혜진(정려원)에게 최형선 원장(서정연)은 한껏 비아냥을 쏟아댄다. 

 

표상섭은 오답 문제 때문에 서혜진이 학교까지 찾아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망신을 줬던 인물이었다. 고집스럽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서혜진을 포함해 학원강사들을 “기생충”이라고까지 이야기했던 인물이다. 또 결국 서혜진 뜻대로 오답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표상섭은 도저히 “선생님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학원강사들을 혐오하는 입장을 드러냈다. 그래서 그 후에는 오히려 서혜진을 필두로 한 학원강사들과 저 혼자만의 싸움을 시작한다. 교과서 안에서만 시험문제를 출제한다고 고집을 피우고, 그건 결국 동료 선생님들에게 민폐로 돌아간다. 시험문제가 변별력이 없어, 학생들 등급을 세우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랬던 표상섭이 갑자기 학교를 그만두고 서혜진이 최고의 제안을 받고도 고사했던 최선국어 부원장으로 왔던 것이다. 알고보니 표상섭은 서혜진으로 인해 학교선생님으로서 완전히 망가졌고, 소신도 무너져버렸다. 학교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어졌고, 마침 최형선의 스카웃 제의를 받아들이고는 이제 완전히 학원 선생으로서의 길을 선택한 거였다. 서혜진을 찾아온 표상섭은 이제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자신도 동류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 일은 서혜진에게 큰 충격을 준다. 자신이 했던 행동들이 학교에 남아있어야 될 선생님을 학교 바깥으로 내몬 결과로 이어졌다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최형선을 찾아와 그 부원장 자리를 지금이라도 맡겠다며 표상섭 선생님이 있어야 할 자리는 학교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서혜진에게 최형선은 지독할 정도로 정확한 지적을 한다. 최형선의 지적은 서혜진이 스스로도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실체를 낱낱이 까발리는 것이었다. 

 

최선국어 부원장 자리를 고사하는 이유로 제안조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찾아온 학생 시우(차강윤)를 가르치고 싶다고 얘기했던 부분에 대해서도 최형선은 무슨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인 줄 알았다며 코웃음을 친다. 그러면서 서혜진이 가진 양면적인 모습을 아프게도 꼬집는다. “교육자이자 장사치 그 괴리감을 서혜진 선생처럼 깔끔하게 외면할 줄 아는 사람도 드물죠.” 이 충격적인 최형선의 지적을 서혜진도 아프게 인정하며 이준호(위하준)에게 털어놓는다. “최형선 원장이 왜 최고인 줄 알겠더라.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아주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정리해줬어.”

 

이 에피소드는 ‘졸업’이 왜 표상섭 같은 인물을 앞부분에 배치해 서혜진과의 한 판을 벌이게 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담겨있다. 이 에피소드로 인해 전국의 중증교사노조에서는 공교육 현장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그 장면만 놓고 보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우려의 시선이었다. 하지만 10회에 이르러 표상섭이 학교를 그만두고 학원 부원장 자리로 가고, 여기에 충격을 받은 서혜진이 최형선 원장의 날선 비아냥을 통해 자신을 직시하게 된 부분을 보면, 이 작품이 애초 학원강사를 미화하거나 공교육 일선의 교사들을 비하할 의도 자체가 없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최형선의 이야기는 아프게도 서혜진의 진짜 모습 그대로였다. 서혜진은 학원강사로서 성공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진정한 선생님’이 되고픈 욕망 또한 갖고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그의 첫 제자였던 이준호가 나타나면서 더더욱 커졌다. 그래서 다소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갖게 됐고, 부원장 자리 같은 현실적으로 좋은 조건을 마다하고 한 학생의 스승으로 남겠다는 비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하지만 최형선의 일갈은 결국 서혜진은 학원강사일뿐 선생님이 될 수는 없다는 현실이었다. 

 

또한 표상섭의 선택을 통해 드라마가 하려는 건, 공교육이 치열한 입시경쟁의 현실 속에서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교육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교과서 위주로’ 하면 된다는 말은 치열한 사교육에 의해 변별력이 사라지는 결과로 이어지고, 결국 등급을 나누기 위해서는 다시 교과서 바깥에서 시험 문제를 내야 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표상섭의 다소 고집스럽게 그려져 심지어 빌런처럼 보이게 만든 건 어찌 보면 그의 선택이 너무나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입시 현실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고 학원으로 나서는 표상섭의 모습은, 우리네 공교육이 처한 위기상황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졸업’이 서혜진이라는 양면의 욕망을 가진 학원강사의 이야기를 통해 담아내려 한 것은 어느 특정 직업군의 비하도 미화도 아닌 우리가 처한 교육 현실의 문제라는 것. 주인공이지만 그저 미화도 비하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드러내려 한 이 지점은, ‘졸업’이 멜로드라마라는 장치를 갖고 오긴 했지만 그 안에 담아놓은 교육의 문제에도 얼마나 치열한 고민을 담고 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커넥션’의 미로를 계속 따라가게 만드는 지성이라는 실타래

커넥션

테세우스가 미궁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있었다면, SBS 금토드라마 ‘커넥션’이라는 미스테리한 범죄스릴러 속에서 시청자들에게는 지성이 있다. ‘커넥션’의 주인공 장재경(지성) 경감이라는 인물의 상황 속으로 시청자들을 몰입하게 함으로써, 이 미로 같은 사건을 파헤치며 그 사건의 실체를 마주하게 해주는 압도적인 연기를 펼쳐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커넥션’은 20년 전 학창시절에 있었던 한 친구의 죽음과 그것이 단순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힘 있는 친구들 편에 서서 증언을 하지 않았던 박준서(윤나무)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공사장에서 죽은 박준서를 친구들인 박태진(권율), 원종수(김경남), 오치현(차엽), 정윤호(이강욱) 등은 자살로 단정짓지만 장재경은 오히려 그들이 미심쩍다. 친구들이지만 위계가 확실한 그들은, 금형약품 대표 원종수를 금형그룹 회장으로 앉히기 위해 박태진 검사, 오치현 비서실장이 모종의 사업을 계획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 장재경이 어느 날 갑자기 괴한들에게 끌려가 ‘레몬뽕’이라는 신종마약에 중독되어 버리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사건은 복잡해진다. 장재경은 자신을 마약에 중독시킨 자들을 추적하면서 동시에 친구의 석연찮은 죽음 역시 파헤치게 되는데 수사 깊숙이 들어가면서 두 사건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흥미로운 건 박준서가 죽기 전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이 사건들을 파헤치게 하기 위한 모든 세팅을 해놨다는 사실이다. 그건 바로 거액의 보험에 들고는 그 수혜자로 장재경과 오윤진(전미도)을 지목한 것이다. 이로써 장재경과 오윤진은 그 거액의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라도 박준서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는 걸 밝혀내야 하는 입장에 놓였다. 

 

‘커넥션’은 등장인물의 직업을 활용하는 것에서부터 치밀한 계획이 엿보인다. 박준서가 굳이 장재경과 오윤진을 보험 수혜자로 선택한 건, 형사와 기자라는 그들의 직업 때문이다. 이 직업은 결국 진실을 파헤치는 공통의 목적을 갖고 있다. 여기에 허주송(정순원)이라는 박준서가 보험을 든 보험설계사이자 학창시절의 친구 또한 연결되어 있다. 보험설계사 역시 벌어진 일이 사건인지 혹은 사고인지를 판별해야 하는 직업이다. 그러니 ‘커넥션’의 인물구성과 그들이 가진 직업설정은 우연이 아니다. 형사와 기자 그리고 보험설계사가 함께 거대한 사건의 흑막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작가가 인물 설정에서부터 계획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이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사건들 속으로 장재경과 오윤진 그리고 허주송이 공조하는 수사가 펼쳐진다. 그들은 각자의 직업에 맞게 사건의 실체 다가가는데, 그 동력에는 사건의 진실을 알고픈 직업적 욕망 그 이상의 우정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드라마가 에필로그로 다소 뜬금없게 보이는 학창시절 이들의 사랑과 우정을 담는 건 그래서 합당한 이유가 있다. 이러한 끈끈함이 갖가지 위협 속에서도 수사를 포기하지 않고 이들이 계속 앞으로 나가게 만드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세 사람 중 결국 중심축은 역시 장재경이다. 그는 딜레마에 빠졌다. 마약반 베테랑 형사지만 의도치 않게 마약 중독이 됐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밝히고 치료를 받게 되면 이 사건은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은 채 묻혀지게 될 거라는 걸 안다. 그래서 수사를 계속 하기 위해 중독 사실을 숨기지만, 그러기 위해서 점점 마약에 깊게 빠져드는 상황에 놓였다. 

 

마약반 베테랑 형사로서의 단단함과 치밀함이 이 인물이 주는 신뢰감이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중독 반응이 나오게 되면 마약 앞에 무너져내리는 무기력함을 보인다. 이 딜레마에 빠져 있으면서도 이 인물이 끝까지 수사를 포기하지 않는 건 친구 박준서와 얽힌 과거사와 우정 때문이다. 힘겨워도 계속 앞으로 나가며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미로를 통과해가는 장재경의 과정에 동참하는 것. 그것이 ‘커넥션’이라는 범죄스릴러가 가진 힘이 아닐 수 없다. 

 

절대로 쉽지 않은 이 복합적인 감정과 상황을 오가는 역할을 과연 그 누가 이토록 몰입감 높게 연기해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성의 연기는 압도적이다. 다소 모호한 사건 전개가 계속 이어지지만 시청자들이 이탈하기보다는 계속 그 미로를 따라가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지성이라는 실타래에 대한 굳건한 믿음 때문이다. 지성의 연기는 그래서 장재경이라는 인물과 시청자들 사이에 단단한 ‘커넥션’을 만들어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진:SBS)

“엄마는 죽었어.” 김태용 ‘원더랜드’

원더랜드

2003년 방영된 드라마 ‘다모’는 이른바 ‘다모 폐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마치 폐인처럼 드라마에 빠져들었던 시청자들이 만든 말이다. 2019년에 방영된 대만드라마 ‘상견니’는 ‘상친자(상견니에 미친 자)’라는 말을 만들었고, 최근 종영한 ‘선재 업고 튀어’는 ‘선친자’라는 말을 남겼다. 폐인이니 미친 자니 하는 말들은 본래 부정적인 표현이지만, 이들 과몰입을 말하는 데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무언가에 깊이 빠져드는 ‘과몰입’의 시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김태용 감독의 ‘원더랜드’는 죽은 사람의 의식을 인공지능으로 복원하는 ‘원더랜드’ 서비스가 일상이 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SF 영화다. 이 기술로 죽음의 의미는 달라진다. 죽은 후에도 인공지능을 통해 망자와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일상이 펼쳐진다. 곧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어린 딸에게 알려주지 않으려는 엄마나, 혼수상태에 놓인 남자친구를 너무나 그리워하는 여자친구, 손주를 먼저 떠나보낸 할머니 같은 이들이 서비스를 신청한다. 그리고 살아간다. 마치 죽음이 없던 것처럼. 하지만 계속 학습해 진화해가는 인공지능과 죽음으로 끊겨버린 실제 망자는 비슷하긴 해도 같을 수가 없다. 다만 그걸 받아들이는 이들의 애틋한 마음이 그걸 실제처럼 느낄 뿐. 

 

“엄마는 죽었어.” 영화에서 인공지능을 진짜처럼 여기는 딸에게 아이러니하게도 인공지능이 그렇게 고백하자 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래도 자기 전에 책 세 권 읽어 줄 수 있어?” 하고 묻는다. 딸의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더불어 과몰입의 섬뜩함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이제 가상과 현실의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 그건 가상을 현실처럼 재현하는 기술의 발전만이 아니라, 가상을 현실처럼 받아들이는 과몰입의 일상화가 불러온 것이기도 하다.  (글:동아일보, 사진:영화'원더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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