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죽었어.” 김태용 ‘원더랜드’

원더랜드

2003년 방영된 드라마 ‘다모’는 이른바 ‘다모 폐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마치 폐인처럼 드라마에 빠져들었던 시청자들이 만든 말이다. 2019년에 방영된 대만드라마 ‘상견니’는 ‘상친자(상견니에 미친 자)’라는 말을 만들었고, 최근 종영한 ‘선재 업고 튀어’는 ‘선친자’라는 말을 남겼다. 폐인이니 미친 자니 하는 말들은 본래 부정적인 표현이지만, 이들 과몰입을 말하는 데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무언가에 깊이 빠져드는 ‘과몰입’의 시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김태용 감독의 ‘원더랜드’는 죽은 사람의 의식을 인공지능으로 복원하는 ‘원더랜드’ 서비스가 일상이 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SF 영화다. 이 기술로 죽음의 의미는 달라진다. 죽은 후에도 인공지능을 통해 망자와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일상이 펼쳐진다. 곧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어린 딸에게 알려주지 않으려는 엄마나, 혼수상태에 놓인 남자친구를 너무나 그리워하는 여자친구, 손주를 먼저 떠나보낸 할머니 같은 이들이 서비스를 신청한다. 그리고 살아간다. 마치 죽음이 없던 것처럼. 하지만 계속 학습해 진화해가는 인공지능과 죽음으로 끊겨버린 실제 망자는 비슷하긴 해도 같을 수가 없다. 다만 그걸 받아들이는 이들의 애틋한 마음이 그걸 실제처럼 느낄 뿐. 

 

“엄마는 죽었어.” 영화에서 인공지능을 진짜처럼 여기는 딸에게 아이러니하게도 인공지능이 그렇게 고백하자 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래도 자기 전에 책 세 권 읽어 줄 수 있어?” 하고 묻는다. 딸의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더불어 과몰입의 섬뜩함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이제 가상과 현실의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 그건 가상을 현실처럼 재현하는 기술의 발전만이 아니라, 가상을 현실처럼 받아들이는 과몰입의 일상화가 불러온 것이기도 하다.  (글:동아일보, 사진:영화'원더랜드')

'옛글들 > 이주의 영화 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맛있는 희망  (0) 2024.07.07
있는 그대로의 나  (0) 2024.06.24
사건과 사고  (0) 2024.06.10
무지와 착각  (0) 2024.06.03
협력과 숙론  (0) 2024.05.26

“이거 사고 맞죠?” 이요섭 ‘설계자’

설계자

김은희 작가가 쓴 드라마 ‘지리산’은 산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사고들이 알고 보니 누군가 저지른 살인사건이었다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사고인 줄 알았더니 사건이었더라는 서사를 굳이 김은희 작가가 쓴 건, 그것이 주는 울림이 있어서다. 멀리는 삼풍백화점 붕괴부터 가깝게는 이태원 참사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대형참사들이 그저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방만함이 불러온 사건이었다는 대중적 공감이 그 울림의 정체다. 이요섭 감독의 ‘설계자’ 역시 바로 이 사고와 사건이라는 다른 관점이 만들어내는 갖가지 음모와 음모론을 영화적 소재로 끌어온다.

 

영일(강동원)은 사고로 위장해 살인청부를 대행하는 일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주영선(정은채)이 아버지인 검찰총장 후보자 주성직(김홍파)을 죽여달라는 의뢰를 하고, 그걸 수행하는 과정에서 동료들이 죽게 되면서 영일의 의심은 점점 커져간다. 자신들 뒤에 이 모든 걸 설계한 또 다른 인물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급기야 동료들까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하나하나 의심가는 인물들을 추적해나가고, 그들이 설계자라는 걸 확신하면서 보복을 가하려한다. 결국 ‘설계자’는 설계하던 인물이 설계를 당하게 되면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는 혼돈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갑작스레 달려든 버스에 치여 영일의 눈앞에서 죽어가던 팀 막내가 끝까지 믿을 수 없다며 “이거 사고 맞죠?”라고 묻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사고로 위장해 사건을 벌여온 이들이 결국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걸 의심하게 되는 처지에 놓인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들 스스로 만든 세상에 갇힌 꼴이랄까. 최근 들어 음모론들이 많아진 이유 역시 크게 다르진 않을 게다. 이젠 진짜 사고도 사건이라 여겨질 정도로 신뢰를 주지 못하는 사회가 온갖 음모론들의 원인일 테니.(글:동아일보, 사진:영화'설계자')

'옛글들 > 이주의 영화 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있는 그대로의 나  (0) 2024.06.24
과몰입의 시대  (0) 2024.06.16
무지와 착각  (0) 2024.06.03
협력과 숙론  (0) 2024.05.26
승패보다 명승부  (0) 2024.05.13

“당신, 피해자 아니에요.” 김세휘 ‘그녀가 죽었다’

그녀가 죽었다

“나쁜 짓은 절대 안 해요, 그냥 보기만 하는 거예요.” 영화 ‘그녀가 죽었다’에서 공인중개사 구정태(변요한)은 고객이 맡긴 열쇠로 그 집에 들어가 그 내밀한 삶을 훔쳐보는 취미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열쇠를 위임받고 집을 소개해 주는 일을 하고 있어 집주인이 없을 때 남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하지만, 그 일의 목적을 벗어난 사적인 취미(?)는 ‘나쁜 짓’이다. 그건 가택침입에 해당하는 범법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정태는 이것이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집주인을 해코지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눈에 띠지 않는 작은 물건 하나를 가져와 수집하는 ‘취미’를 가졌을 뿐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한 짓이 범법행위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이 인물은, 어느 날 문을 따고 들어간 자리에 SNS 인플루언서 한소라(신혜선)가 피를 철철 흘린 채 죽어 있는 모습을 발견한 후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에 억울함을 호소한다. 마치 자신이 피해자나 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이것은 거짓된 관종의 삶을 살아가는 인플루언서 한소라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은 “내가 제일 불쌍해”다. 그는 자신이 하는 행위가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자신을 피해자라 착각하며 변명들을 늘어놓는다.

 

자신이 저지른 나쁜 짓에 무지하고 그래서 스스로를 피해자라 착각하는 이들의 삶은 현재 우리사회의 부조리한 단면을 보여준다. 잘못을 자각해야 변화가 생길텐데, 그 자체에 무지하니 자신 또한 피해자라는 착각 속에 사회는 변화의 기회를 잃는다. 형을 살고 나와서도 자신의 나쁜 짓을 자각하지 못하는 구정태에게, “당신, 피해자 아니에요”라 일갈하는 형사의 말은 그래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면이 있다.(글:동아일보, 사진:영화'그녀가 죽었다')

'옛글들 > 이주의 영화 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몰입의 시대  (0) 2024.06.16
사건과 사고  (0) 2024.06.10
협력과 숙론  (0) 2024.05.26
승패보다 명승부  (0) 2024.05.13
그럴 만한 이유  (0) 2024.05.06

“유인원과 인간이 함께 살 수 있을까?” 웨스 볼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혹성탈출:새로운 시대

“동물도 그렇지만 소통은 원래부터 안 되는 게 정상이다. 그렇기에 더욱 더 소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최근 ‘숙론’이라는 책을 낸 동물학자이자 생태과학자인 최재천 교수가 한 말이다. 대화를 통해 정치적 타협점을 찾아가기보다는 당파로 나뉘어 정쟁을 일삼는 현 정치행태를 비판한 그는, 그래서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함께 찾아나가려는 ‘숙론(熟論)’을 그 대안으로 내놨다. 

 

아마도 최재천 교수가 7년만에 새로운 시리즈로 돌아온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를 봤다면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을까. 시저가 사망한 후 수백 년이 흐른 뒤 진화한 유인원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 유인원들의 새로운 구원자로 성장해가는 노아(오웬 티그)의 모험담을 담은 작품이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제국을 건설하려는 프록시무스에 의해 부족이 노예로 끌려가자, 노아는 이들을 해방시키려 나서고 그 과정에서 인간 소녀 노바(프레이아 런)를 만난다. 유인원인 노아와 인간인 노바는 공공의 적 앞에서 협력하지만, 서로 다른 종으로서의 팽팽한 긴장감을 지우지 못한다. “유인원과 인간이 함께 살 수 있을까?” 이런 질문 앞에 이들은 다른 입장에 서게 된다. 공존의 삶을 배워 온 노아가 노바에게 협력의 손을 내미는 반면, 노바는 그 마음을 알면서도 인간의 지위를 회복하고픈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무너진 자유의 여신상을 발견하고 그토록 탈출하려 했던 혹성이 지구였다는 걸 알게 되는 충격적인 엔딩을 우리는 이미 1968년에 나온 ‘혹성탈출’의 첫 작품으로 본 바 있다. 그로부터 50여년이 흘렀지만 현실은 별반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저 노아와 노바처럼 여전히 공존과 소통이 어려운 현실 앞에 최재천 교수가 말하는 숙론은 요원한 일일까. (글:동아일보, 사진:영화'혹성탈출:새로운 시대')

'옛글들 > 이주의 영화 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건과 사고  (0) 2024.06.10
무지와 착각  (0) 2024.06.03
승패보다 명승부  (0) 2024.05.13
그럴 만한 이유  (0) 2024.05.06
독립영화의 가치  (0) 2024.04.2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