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속도에서 걷는 속도로

응답하라 1988

급한 일이 없는 날이면 약속장소에 늘 30분 정도 일찍 나간다. 서촌이나 북촌, 인사동, 종로에서 주로 약속을 잡는데 그곳 골목길들을 걷는 게 재미있어서다. 30분 정도 먼저 도착해 골목길들을 슬슬 걸어 다니며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금은 카페와 음식점들로 가득 채워져 말 그대로 인파가 몰리는 익선동 골목도 7,8년 전만 해도 한옥의 처마를 그늘 삼아 슬슬 걷기 딱 좋은 길이었다. 비 오는 날 우산 하나 들고 그 길에 들어서면 고즈넉한 분위기에 순간 도시 한 복판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아늑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에는 그 골목길에 '거북슈퍼' 하나가 달랑 있었는데, 비 오는 날 그 가맥집에서 병맥주를 마시며 빗소리를 듣는 기분이 그만이었다. 물론 거북슈퍼가 있던 자리에 세련된 음식점들이 잔뜩 들어선 지금은 그곳을 잘 찾지 않는다. 그때의 정취가 잘 느껴지지 않아서다. 대신 요즘은경복궁역 뒤편 서촌 쪽에 약속을 하고 그 골목길들을 쏘다닌다. 그곳 골목길은미로처럼 뻗어있어 일단 들어서면 다른 세계로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을 준다.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발길이 어디에 닿을지 못내 궁금해진다. 어쩌다 길을 따라 수성동계곡까지 올라가 겸재 정선이 그린 그림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걸 보다 보면 이곳이 서울 한복판에 숨겨진 별천지라는 생각이 든다. 구석구석 걸어 다녀야 비로소 보이고 발견되는 별천지.

 

그때는 가치를 미처 몰랐던 것들이 있다. 집에 놓여있던 유선전화기 앞에서 사랑하는 누군가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던 시간과, 마음을 글 몇 줄에 담아 적어보던 편지들 그리고 한쪽 귀로 나누어 듣던 워크맨 노래들 같은 게 그것이다. 골목길도 그랬다.그저 좁기만 했던 골목은 더럽게만 느껴졌고, 그 골목 한편에 놓인 평상에서 골목으로 들어오는 아이들 하나하나에 인사를 하고 참견을 하던 이웃 아주머니들의 오지랖은 불편하게만 생각되었다. 하다못해 왁자하게 떠들며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아이들은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그 골목이 싹 밀어진 자리에 세워진 말끔한 아파트에 살다 보니 이제 알게 되었다. 그것이 꽤 그립고 따뜻한 시간들이었다는 것을.

응답하라 1988

‘응답하라 1988’은 쌍문동 봉황당 골목 풍경으로 시작한다. 택이네 집에서 함께 ‘영웅본색’을 보던 친구들이 6시 괘종시계 소리와 함께 집집마다 “밥 먹어라” 하고 부르는 엄마들의 소리에 집으로 돌아간다. 변진섭의 ‘새들처럼’이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가운데, 카메라가 훑어 보여주는 골목길 정경은 당대를 살았던 이들의 기억을 되살려 놓는다.익숙한 철제문들과 현관 위에 놓인 화분들, 포스터들이 잔뜩 붙였다 떨어진 흔적이 가득한 담벼락, 위로 넣고 앞으로 빼내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옛날 쓰레기통과 그 옆에 놓인 연탄재들, 버려진 의자들, 대야들. 도둑이 넘어올 수 없게 깨진 사이다병과 맥주병을 거꾸로 꽂아 놓은 담장, ‘사글세 있습니다’, ‘잠잘 방 있습니다’ 같은 전단이 붙어 있는 전봇대, ‘양담배 있습니다’라 적힌 담뱃가게, ‘금은보석 고급시계’라 적힌 촌스럽기 이를 데 없이 화려한 봉황당이라는 간판... 그 풍경들 위로 훗날 이때를 회고하는 덕선의 내레이션이 들려온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봉황당 골목. 난 이 골목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인터넷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지금 생각하면 그 많은 시간들을 우린 대체 뭘 하면서 보냈을까?”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가 건드린 정서적 뇌관은 지금은 찾기 힘든 그 골목길 풍경에 있었다. 지금은 사라져 버렸거나 혹은 사라져 가는 것들을 그 1988년의 쌍문동 골목길에 옮겨 놓은 것이다. 이제 보니 그 골목길은 사람과 사람을 얇디얇은 벽으로 막아놓은 아파트와는 달리, 사람과 사람이 길로 연결된 정이 넘치는 공간이었다. 아이들은 그 골목에서 함께 놀며 자랐고 부모들은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이웃인지 가족인지 알 수 없는 정이 있었다. '응답하라 1988'의 그 쌍문동 골목길은 지금의 차가운 디지털 세상의 풍경에 결핍된 어떤 것들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그 풍경을 보고 지금 도시에 하나둘 생겨나고 있는 골목길로 자꾸만 마음이 이끌리는사람들은 아마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게다. 저런 곳에서 살고 싶다.

응답하라 1988

내게도 그런 골목길들이 있었다. 포장도 되지 않은 흙길들이 대부분이었던 70년대 나의 고향 경기도 안성의 골목길들에는 여지없이 아이들이 와하고 소리치며 달려가곤 했다.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금을 그어 놓고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십자 가이상’, ‘팔자 가이상’, ‘오징어 가이상’, ‘접시 가이상’ 같은 놀이들을 하곤 했다. '오징어게임'이라는 드라마가 바로 그때 했던 ‘오징어 가이상’을 소재로 한 것이다. 놀이터도 별로 없던 시절, 우리의 골목길은 땅만 있으면 뭐든 놀 수 있던 놀이 공간이었다. 방과 후 집에 돌아와 가방을 던져 놓고 그 골목길로 나가면 항상 같이 놀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보면 골목길 집집마다 밥 냄새가 피어올랐고, 엄마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밥 먹어라!”

 

새마을 운동의 물결이 그 시골 마을에도 일렁이기 시작하면서 땅에 금 긋고 놀던 놀이들은 학교 운동장으로 밀려났다. 비가 오면 푹푹 들어가던 흙길은 널찍한 신작로로 바뀌었고 그 위로는 시멘트가 덮여 트럭 같은 차들이 달리기 좋은 길로 바뀌었다. 우리들은 금 그을 수 있는 새로운 땅을 찾았고, 방과 후 집으로(사실은 골목길로) 가던 발길은 이제 학교 운동장으로 모여들었다. 가끔 소나기라도 내리면 시멘트로 포장된 신작로 위로 먼지들이 몽글몽글 떠오르곤 했는데 그때 풍기던 텁텁한 냄새는 지금도 갑자기 소나기를 맞아 처마 끝에 비를 피할 때면 속절없이 코끝을 스치는 기억이 됐다. 빼앗긴 자의 아련함이랄까. 마음껏 금을 그으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곤 했던 우리들의 골목길이 시멘트로 덮이고 그 위로 신난다는 듯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빨라진 세상의 변화 속에서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져갔다...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이란 에세이의 ‘길의 원리 행함의 원리’라는 글을 통해 ‘길은 명사라기보다는 동사에 가깝다’고 했다. 길이란 사람의 ‘행함’에 맞게 나는 것이고 그래서 논두렁길의 구부러짐은 농사꾼의 몸의 조건에 따라 ‘이리저리 휘어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길들이 어느 날 차들이 달리는 도로로 바뀌었다. 구불구불 넘어야 했던 산길 대신, 터널을 뚫어 낸 길로 차들이 쌩쌩 달려가면서 그 고갯길들의 ‘존엄’은 사라지게 됐다. 나의 기억 속에 구불구불 미로처럼 펼쳐져 있고 비가 오면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흙들을 오목하게 파이게 했던 그 골목길 대신, 일직선으로 뻗어있어 편리하긴 하지만 각진 길들 과 빗물이 스미지 못해 하수도를 향해 흘러내려가는 시멘트길로의 변화는 그래서 사람의 길에서 자동차의 길로 바뀌며 생겨난 삶과 생각의 변화처럼 다가온다.

 

골목길의 땅은 빈 공간이었다. 거기에는 아무 표식도 기능도 강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빈 도화지나 마찬가지였다. 그 위에 우리들은 매일 오징어도 그리고 접시도 그리고 팔자도 그려가며 놀았다. 동그랗게 원을 그려놓고는 돌을 세 번 튕겨 만들어지는 공간만큼을 내 땅으로 삼을 수도 있었다. 물론 우리들의 놀이가 끝나고 나면 슥슥 다른 친구들의 발길에 지워진 후 그들의 도화지가 되었다. 무한한 가능성과 상상의 공간. 하지만 그 공간 위로 시멘트와 아스팔트가 덮이고 금이 그어졌다. 차도와 인도가 나뉘고 횡단보도가 생겼다. ‘사람은 왼쪽 자동차는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는 규칙도 생겼다.

 

그 규칙을 가진 길은 ‘생산성’이라는 척도로 채워졌다. 느긋이 걷곤 하던 길을 이제 사람들은 경쟁하듯 달리기 시작했다. 차들이 쌩쌩 달렸고, 때론 사람과 사람이, 때론 차와 차가, 때론 사람과 차가 부딪쳐 사고를 냈다. 경쟁사회의 시작이었다. 땅에 금을 몇 개 긋고 하던 놀이의 ‘오징어 게임’은 이제 선을 넘으면 진짜 죽는 살벌한 경쟁의 ‘오징어 게임’이 됐다. 저녁이 되면 풍겨오던 밥 냄새와 “밥 먹어라” 외치던 엄마들의 목소리가 있던 자리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오징어 게임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 서울로 전학을 온 나는 한동안 차만 타면 멀미를 했다. 차의 속도로 쌩쌩 달려가던 그 변화 앞에 몸이 미처 적응하지 못했던 거였다. 하지만 내가 서울의 속도에 적응하며 더 이상 차멀미를 하지 않게 되던80년대를 거치며 도시는 급속도로 변했다. 땅은 포장되었고, 오래되고 낡은 집들은 밀어내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와 빌딩들이 세워졌다. 외국인들의 시선에 특히 민감한 한국인들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이런 변화를 가속화했다. 개발 위에 다시 개발을 얻는 재개발이 서울 전역에서 이뤄졌다. 그렇게 30여 년 간 자잘한 도시의 골목길들이 사라져 갔다.

 

그런데 이건 웬일일까. 신사동 가로수길, 이태원 경리단길, 마포구 연남동길, 망원동 망리단길... 최근 몇 년 간 도심을 중심으로 골목길들이 곳곳에서 생겨나 증식하고 있다. 거기에는 저 '응답하라 1988'이 상기시켰던 잃어버린 골목길에 대한 향수와 추억 그리고 나아가 어떤 보상심리 같은 것들이 어른거린다. 물론 개발과 재개발 속에서도 골목길들은 늘 존재했다. 70년대의 종로와 명동, 무교동거리가 상업화의 물결을 탄 도시의 활기였다면, 80년대 야타족과 오렌지족으로 대변되는 압구정동 로데오거리는 과시경제의 상징이었고, IMF의 그늘 속에서 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커져온 홍대거리는 젊은이들의 문화적 갈등과 고민의 흔적이었다. 그렇다면 최근 생겨난 가로수길부터 망리단길에 이르는 골목길들의 전성시대는 도대체 뭘까. 압축성장과 개발의 뒤안길에서 사라져 버린 길들에 대한 회한이자 그리움 같은 게 아닐까.

응답하라 1988

압축성장과 개발시대의 길이란 속도를 의미하는 차들이 장악한 공간이었다. 본래 마을이란 삶의 공간과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생겨난 상점들로 구성되어야 하지만, 그저 빨리 지나치게 만드는 차들의 길이 생겨나면서 공간은 사람이 머무는 곳이 될 수 없었다. 최근 들어서는 골목길들이 차들을 밀어내고 대신 ‘걷는 사람들’을 애써 채워 넣고 있는 건 그래서 반가우면서도 안쓰럽다.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하자 신사동 가로수길은 그 골목골목까지 도시에 걷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거리가 되었고, 부암동길은 도시적인 풍경 속에 자연을 느끼며 걸을 수 있는 길이 됐으며, 삼청동길은 역사가 보이는 길, 이태원 경리단길은 이국적인 풍경을 걷는 길이 되었다. 하지만 거기 그냥 있는 것이 당연한 길이 아니라 굳이 무슨무슨 길이라고 지칭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우리에게 골목길 같은 사람들이 걷는 길이 낯선 공간이 되었는가를 말해주는 것만 같다.

 

서울 구석구석에 골목길이 생겨나는 건 도시에 인간적인 온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나를 설레게 한다. 하지만 '젠트리피케이션'이 생겨나는 골목길을 보다 보면 그곳 역시 자본화의 고속도로가 깔림으로 해서 밀려나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피할 수 없다. 카페와 음식점들로 가득 채워지기 전, 고즈넉한 한옥의 처마를 내주던 익선동 골목길이 그립다. 그곳 거북슈퍼에서 잠시 다리를 쉬게 하고 병맥주 한 잔을 홀짝이던 그 한적한 온기가 자본의 열기로 채워져 있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래도 나는 약속시간 30분 전에 도착해 골목길을 찾는다. 그렇게 한 명 두 명 걷다 보면 없던 길도 만들어질 거라고 믿으며.

2024.11.4

‘김영철의 동네한바퀴’, 동네의 푸근함은 어디서 오는가

“별 볼일 없는 가게에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복이라 생각하고 가져가세요.” 식당을 찾은 김영철에게 주인아주머니는 누룽지를 챙겨주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김영철은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자꾸만 식당 쪽을 돌아봤다. 그의 눈가는 어느새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 누룽지를 챙겨주시며 주인아주머니가 울고 계셨다는 것이다. 

KBS <김영철의 동네한바퀴>가 찾아간 서울역 뒤편 중림 만리동. 김영철이 동네를 돌다 출출해져 지나던 길에 우연히 발견한 콩나물 비빔밥 집이었다. 한 그릇에 가격은 3천원. 푸짐하게 담아주는 비빔밥에 “3천원 받아서 남는 거 있냐”고 묻는 김영철은 마음 속으로 어머니가 어린 시절 자주 해주셨던 그 콩나물 비빔밥을 떠올렸을 게다. 그 밥하고 맛이 똑같다는 김영철은 어느새 아주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익 남긴다는 마음은 요만큼도 없다”는 아주머니를 보며 김영철은 그 옛날 1970년대 어느 집을 가도 “밥 먹고 가라”시던 그 시절의 어머니들을 떠올린다. 

서울역을 바쁘게 지나기만 했던 분들이라면 <김영철의 동네한바퀴>가 김영철의 발걸음에 담아 보여준 그 뒤편 골목길들의 풍경이 새삼스럽게 다가왔을 게다. 사실 천천히 걸어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게 동네다. 그 동네는 김영철이 말하듯 고향 같다. “엄마 같기도 하고 편하고 따뜻하고.”

기차가 지날 때마다 땡땡 소리가 나서 붙은 땡땡거리 서소문 건널목을 건너 중림동으로 들어가는 김영철은 길을 걷다 우연히 본 골목 앞에 문득 멈춰선다. 옛날에는 서울 골목이 다 그랬다는 것. 두 사람이 걸으면 꽉 찰 듯한 좁은 골목길이지만 그래서 어딘가 정겨운 그 골목길은 그 곳이 서울역 뒤편에 있는 동네라고는 믿기지 않는 풍경으로 다가온다. 

제목처럼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것이 이 프로그램이 하는 전부지만, 궁극적으로 이 프로그램이 보여주려는 건 동네만이 아니다. 그저 지나치듯 바라보면 특별할 것 없는 조금 오래된 동네의 풍경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풍경을 특별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그 곳에 있다. <김영철의 동네한바퀴>는 그 사람들을 찾아간다.

만리시장에서 35년간 방앗간을 했다는 주인아저씨는 일일이 손으로 짜내는 참기름, 들기름을 찾는 손님들에게 담아준다. 세월의 더께가 앉아 있는 그 집을 찾는 손님들은 “이 집은 뭐든 맛있다”며 들기름을 사간다. 김영철은 어렸을 때 그 앞을 많이 뛰어다니며 놀았다고 술회한다. 그 때도 아마 그 방앗간은 거기서 고소한 냄새를 동네 한 가득 뿌려 놓고 있었을 게다. 

시간이 멈춘 듯한 노포 성우이용원은 3대에 걸쳐 총 90년 동안이나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 집에서 60년째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아저씨는 그 옛날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방식 그대로 지금도 손님을 맞는다. 슬쩍 봐도 예사롭지 않은 공을 들이는 이발은 물론이고, 물뿌리개로 머리를 감겨주고 말가죽에 날을 세워 하는 면도가 보기만 해도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16살 때 배웠지만 하기 싫어 방황을 했었다는 그일. 하지만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며 쌓아온 경력은 이제 미국, 에콰도로에서까지 찾아오는 손님들을 만들었다. 

염천교 수제화 거리에서 만난 수제화 장인은 발의 본을 직접 떠서 일일이 손을 두드리고 바늘로 꿰어 그 사람에게 딱 맞는 신발을 지금도 만들고 계셨다. 한 켠에 쌓여있는 손님들 발의 본을 떠놓은 것들을 보니 어째서 사람들이 그 곳을 찾는가가 이해된다. 양 발의 크기가 다른 분이나 장애가 있는 분들이 기성화를 억지로 신으며 불편을 감수했던 걸, 아저씨는 그 발에 딱 맞는 신발을 만들어 편하게 해주신다. 손님들이 좋아해서 이 일을 계속 하고 있다는 아저씨의 말에서는 장사라는 단어로는 채울 수 없는 마음이 느껴진다. 

게스트하우스들이 많이 생기며 외국인 관광객들이 늘어난 동네에는 스타가 된 구멍가게 아주머니도 있었다. 능숙하게 영어를 하며 외국인들을 상대하는 슈퍼 아주머니는 찾은 손님들과 찍은 사진들을 가게 벽면에 가득 붙여 놓았다. 장사가 아닌 그 외국인들과의 추억이 만들어지는 공간. 이미 SNS로 알려진 그 곳은 외국인들이 꼭 찾아가는 ‘성지’가 되어 있다고 한다. 어둑해져가는 동네 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외국인들이 마치 집처럼 편안하게 슈퍼 앞에 둘러앉아 까르르 웃는 모습이 정겹다. 그들이 슈퍼에서 느낀다는 푸근함은 어쩌면 그 아주머니의 정 때문이 아닐까. 

<김영철의 동네한바퀴>는 빈티지의 가치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낡으면 싹 밀어내고 새로운 걸 세우기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면 지금은 그 조금씩 시간의 더께가 얹어진 곳이 우리들의 발길을 잡아끄는 시대가 아닌가. 그래서 김영철은 그 아주머니가 소박한 누룽지 선물 하나를 건네며 흘리는 눈물에 마음이 뭉클해졌을 게다. 이 프로그램은 동네만의 따뜻함이 있는 건 그 곳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동네의 한 모퉁이를 비추는 불빛 같은 사람들이.(사진:KBS)

‘한끼줍쇼’, 사람냄새 물씬 나는 이 프로그램의 정체

나이가 들어도 어쩌면 저렇게 신사일 수 있을까. 신사동에서 한 끼 함께 할 집을 찾아 나선 JTBC 예능 <한끼줍쇼>에 출연한 배우 김용건은 아마도 ‘신사’로 정평이 난 그 면면 때문에 섭외된 인물이 아닐까 싶었다. 아재개그가 입에 철썩 달라붙은 김용건이 여러모로 신사동의 신사로는 딱 어울릴 것 같기 때문이다. 

사실 영하 10도를 오가는 겨울 날씨에 골목길을 떠돌며 한 끼 밥을 청하는 일은 젊은 사람들도 쉬운 일이 아닐 게다. 하지만 김용건은 연거푸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시종일관 유쾌함을 잃지 않았고, 무엇보다 여러 사유로 거절하는 집 주인들에게도 ‘고마움’을 표했다. 이렇게 알아봐주시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것이다. 

<전원일기>에 20년을 출연했고, 최근에는 <품위있는 그녀>에 출연해 남다른 존재감을 뽐냈던 배우지만, 자신을 잘 모르는 분들에게는 기꺼이 “하정우 아버지”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그였다. 어딘지 쓸쓸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는 그러면서도 “그게 기분이 나쁘지가 않다”고 말해 자식에 대한 남다른 마음을 드러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빌라 계단을 오르내리며 마지막까지 시도를 멈추지 않았지만 결국 실패해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워야 하는 처지에서도 김용건은 “이것도 좋다”며 긍정적인 말을 내놓았다. 물론 그게 너무나 슬퍼 보인다는 이경규의 한 마디가 진심일 수 있지만, 김용건은 신사로서의 면모를 끝까지 지키는 ‘품위 있는 어른’의 모습이었다. 

한편 누나와 두 남동생이 지내는 집에서 한 끼를 함께 하게 된 강호동과 황치열은 남다른 이 남매들의 정 앞에서 뭉클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슨 사연인지 부모 없이 남매 셋이 지내고 있는 그들은 냉동 아구찜에 베이컨 버섯볶음으로 조촐하게 저녁을 차려냈지만 누나가 요리를 하고 동생들이 저마다 저녁차림을 돕는 모습은 그 어떤 집보다 따뜻한 가족의 정 같은 것이 느껴졌다. 

평소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이 남매들에게 불쑥 서로에 대한 마음을 물어보자 조금은 쑥스러워하면서도 누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 동생들 앞에서 늘 굳건한 ‘제2의 엄마’ 역할을 해온 누나도 순간 울컥하는 모습을 보였다. 삶의 궤적이 비슷해 남다른 공감대를 보이는 황치열과 늘 유쾌함을 잃지 않던 강호동도 어리지만 어른스러운 아이들 앞에서 조금은 숙연해졌다.

<한끼줍쇼>에 나온 김용건에게 이경규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들 하정우에게 영상편지를 보내라며 자신의 영화에 출연해달라고 요청하자 김용건은 선선히 “해줄 때 확실히 도와주라”고 말했고, <한끼줍쇼>에도 나와 달라는 요청에서는 “사람 냄새 사는 프로그램”이라며 여기 나와 한 끼 하는 것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했다. 나이 들어도 어른임을 굳이 드러내지 않는 진짜 어른 김용건이나, 어느 집의 너무나 어른스러운 아이들이 보이는 남다른 남매의 정에서 느껴지는 ‘사람냄새’. 바로 이것이 <한끼줍쇼>가 주는 훈훈한 재미의 실체가 아닐까.(사진:JTBC)

펄펄 나는 ‘한끼줍쇼’, 이런 따뜻함 얼마나 그리웠던 걸까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정릉동의 교수마을. 강호동이 “피톤치드!”를 외치자 도심 속 숲이 내뿜는 신선한 공기가 시청자들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특별할 건 없는 동네의 풍경이지만, 사실 이런 낮 시간에 동네가 어떤 모습을 숨기고 있는지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텅 빈 골목길이 말해주듯 많은 이들은 아침 일찍 일을 하기 위해 동네를 떠났다. 어딘가에서는 그들이 정신없이 바쁘게 일을 하고 있을 시간, 한적한 동네를 봄볕을 맞으며 오롯이 걸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한적함이 주는 평온함과 따뜻함을.

'한끼줍쇼(사진출처:JTBC)'

그렇게 JTBC <한끼줍쇼>가 낮부터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잡아내는 풍경은 일상이지만 특별한 느낌으로 시청자들을 끌어들인다. 그렇게 천천히 걷는 속도로 동네를 들여다보니 바쁜 출퇴근길에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전봇대에 지친 새들을 위해 마련된 새집이 보이고, 집집마다 개성 있는 문구가 적혀있는 대문들이 보인다. 새삼 담장 너머로 비쭉 보이는 나무들이 반갑고, 무엇보다 골목길이 주는 그 고즈넉한 포근함이 느껴진다. 

그 편안하면서도 새로운 일상의 풍경들이 이 프로그램의 어떤 ‘걷는 속도의 정서’를 깔아놓으면, 그 위로 쉴 새 없이 떠들어대고 상황극을 펼치며 과한 리액션을 보이는 강호동과 그런 그를 끊임없이 못마땅해 하며 투덜대고 맥을 끊으려 하는 이경규의 밀고 당기는 예능판이 얹어진다. 걷는 속도 위에서 강호동이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마치 동네 아주머니들의 정겨운 수다처럼 풀어놓으면, 이경규는 때론 버럭 대고 핀잔을 주면서 그 과함을 적당히 중화시켜 웃음의 균형을 맞춰준다. 그들이 베테랑이라는 건 그 예능의 과함과 일상의 편안함을 오래된 콤비처럼 주고받는 그 합을 통해 여실히 느껴진다. 

여기에 게스트로 합류한 성유리와 정용화는 그 날만의 특별한 하루의 색채를 덧씌운다. 원조 요정 성유리가 <힐링캠프>를 통해 맺은 이경규와의 인연을 바탕으로 적당히 그를 챙겨줘 기분 좋게 만들면서도 때론 그의 약점을 들어내 웃음을 만든다면, 정용화는 부산사나이의 열정을 드러내며 이경규의 표현대로 ‘발광하는’ 강호동의 리액션을 고스란히 받아주다 방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너무 정용화의 리액션이 부각되자 스포트라이트가 그쪽으로 가는 걸 못마땅해 하는 이경규가 그를 핀잔주고, 그러면 정용화가 다시 “왕이 될 상인가”하는 멘트로 권력을 꿈꾸는 이경규의 마음을 풀어준다.

그리고 지금껏 한 번도 첫 집에서 한 끼 식사를 한 적이 없는 <한끼줍쇼>가 원조요정 성유리에 힘입어 그 첫 기록을 달성한다. <한끼줍쇼>의 진짜 이야기는 그렇게 선선히 문을 열어준 4대가 한 집에 사는 집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20가지가 넘는 일들을 해 오셨다는 아버지와 딸들, 그리고 스무 살에 결혼해 아이를 가진 아들 때문에 이제 겨우 50대에 할머니가 된 그 아버지의 딸과 그래서 벌써 삼촌소리를 듣는 초등학생까지. 누가 누구인지 헷갈려 따로 족보를 그려놓고 들여다봐야 할 지경으로 북적대는 집안의 풍경. 

그 풍경은 고스란히 그들의 평소대로 차려진 저녁 밥상에 묻어난다. 당뇨가 있으시다는 아버지의 죽과 어른들이 챙겨먹을 법한 나물들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할 토스트까지 함께 얹어진 저녁 밥상. 밥상의 다양함과 풍성함은 그 4대가 함께 사는 가족의 온기가 느껴지는 기분 좋은 북적임을 그대로 담아낸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이경규와 성유리는 그 가족들 속에 전혀 이질감 없는 인물로 녹아들고, 그걸 바라보는 시청자들도 자연스럽게 그들과 식구가 되어 있는 듯한 몰입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응답하라 1988>에서 다시금 흘러나왔던 동물원의 ‘혜화동’의 한 가사가 문득 떠오를 수밖에 없는 풍경들이다. <한끼줍쇼>는 바로 우리가 잊고 살아온 따뜻함에 대한 그리움을 찾아가는 길을 보여준다. 골목길이 보이고 집들이 보이고 그 집안의 가족들이 만들어내는 온기가 느껴진다. 시청자도 식구로 만드는 대책 없는 따뜻함. 그것이 펄펄 나는 <한끼줍쇼>의 정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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