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럽지’ 연애 매칭에서 연애 관찰로, 진짜 연애 보여준다

 

거침이 없다. 당당하다. 사랑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길거리에서건 어디서든 스킨십도 자연스럽다. 사실 연애를 해본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얼마나 감정이 애틋하고 가슴이 설레는지.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애틋한 감정이나 설레는 마음은 과거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달라진 건 그걸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거에는 그런 사적인 연애가 드러나는 것을 피하고 조심스러워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길거리에서도 종종 뽀뽀를 나누는 젊은 연인들을 볼 수 있고, 과감한 스킨십도 타인의 시선을 그리 의식하지 않는다. 마치 해외를 여행하다 느낀 그 자유로움을 이제는 우리네 길거리에서도 심심찮게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MBC에서 첫 방영된 <부러우면 지는 거다(이하 부럽지)>는 바로 이런 사적인 연애를 드러내는 것에 있어서 거리낌이 없어진 시대의 변화를 밑그림으로 가져왔다고 보인다. 배우로 전향했지만 우리에게는 아나운서의 이미지 또한 남아있는 최송현과 프로다이버 이재한 커플은 그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찍히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뽀뽀를 하고 감정을 드러내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이원일 셰프와 MBC <전지적 참견 시점> 김유진 PD 커플은 웨딩샵에서 드레스를 입어보며 한껏 서로에 대한 애정을 과시한다. 웨딩샵을 빠져나오며 길거리에서 서로에게 뽀뽀를 나누는 것에서도 과감하다. 또 레인보우 지숙과 최근 코로나 앱으로 화제가 됐던 이두희 커플은 PC방 데이트를 즐기며 ‘공개연애’가 오히려 만들어준 자유를 만끽한다. 그 전에는 숨어서 했던 연애를 이 방송을 계기로 대놓고 할 수 있어 즐겁단다.

 

사실 관찰카메라는 처음 그 형식이 시도됐을 때부터 누군가의 사생활을 들여다본다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애써왔다. 해외의 리얼리티쇼가 보여주는 그 과감함(?)을 우리로서는 그대로 적용하기가 정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3년 MBC <아빠 어디가>나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 같은 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관찰카메라가 먼저 시도됐다. 가장 정서적 부담이 적은 관찰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관찰카메라가 조금씩 그 영역을 넓혔다. MBC <나 혼자 산다>는 연예인 관찰카메라로 영역을 넓히면서 1인 가구가 급증하는 시대에 1인 라이프를 들여다본다는 ‘사회적 의미’를 굳이 더하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이런 1인 라이프 이야기는 더 이상 이 프로그램에 중요하지 않게 됐다. 어느 새 관찰카메라는 어느 영역에서든 익숙해진 형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TV조선 <연애의 맛> 같은 본격 관찰카메라 프로그램은 보다 내밀한 사적인 관계로까지 카메라가 들어갔다. 이제 우리에게도 어떤 정서적 장벽처럼 여겨지던 내밀한 사생활을 관찰하는 본격 리얼리티쇼의 시대가 열렸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여전히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의 정서적 차이는 존재한다.

 

스튜디오에 출연하는 장성규, 장도연, 허재, 전소미, 라비는 그래서 그 관찰영상들에 대한 반응들이 조금씩 다르다. 그 중에서도 ‘라떼는’ 하며 과거에는 풍기문란으로 잡혀 들어갈 장면들이 나오는 것에 말문이 막혀하는 허재와, 이 방송을 통해 연애 버킷리스트를 만들겠다는 신세대 전소미의 다른 반응들은 그 정서적 세대적 차이를 잘 보여준다.

 

프로그램은 형식적으로도 이들의 사적인 연애를 들여다보는 재미를 대놓고 추구하고 있다는 걸 드러낸다. 카메라 렌즈 형상으로 스튜디오에 앉아 있는 출연자들을 누군가 훔쳐보듯 들여다보다가 화면이 전환되어 진짜 커플들의 장면을 이어 붙이는 편집이 그렇다. 그것은 시청자들의 시점을 관찰카메라의 시점과 맞춰놓는 형식적 장치다.

 

한 때 남녀 커플을 등장시키는 이른바 연애 매칭 프로그램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 차원을 넘어서 연애 관찰 프로그램으로 카메라의 포커스가 바뀌고 있다. 실제 연애의 풍경이 달라졌고, 그것을 드러내는 일이나 타인의 시선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시대에 <부럽지>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 조심스러움을 걷어내고 당당하게 있는 그대로의 진짜 연애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적 연애를 들여다본다는 그 정서적 장벽을 슬쩍 넘어서 프로그램을 보면 달라진 연애의 풍경과 남녀의 모습 게다가 일과 사랑에 대한 관점 등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에게는 공유하는 취미가 중요하고 사랑만큼 일도 소중하다. 그것을 서로 존중하고 나아가 타인의 취향까지 사랑하는 모습이 이들의 연애 속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난다. 애써 부정하려 해도 우리는 이미 사적인 것들을 드러내고 들여다보는 일에 익숙해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많은 각자의 SNS들은 그걸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부럽지>는 이런 시대의 변화된 지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사진:MBC)

달라진 감수성, 멜로의 구도, 스킨십도 달리 보인다

어째서 한편으로는 설레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슬아슬해지는 걸까. tvN 수목드라마 <김비서가 왜 그럴까>를 보다 보면 느껴지는 두 가지 감정이다. 이영준 부회장(박서준)이라는 키다리아저씨에 가까운 현대판 왕자님이 비서인 김미소(박민영)에게 서툴러도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그 모습이 그렇다. 그 모습에서는 한때 폭력적인 것이 아니냐는 논란까지 일었던 벽에 여성을 밀어붙이고 억지로 키스를 퍼붓는 남자 주인공의 장면이 슬쩍 겹쳐진다.

물론 두 장면에 담긴 함의는 사뭇 다르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는 이미 김미소에 대한 이영준 부회장의 사랑이 아주 어린 시절 그들이 함께 겪었던 유괴 사건 속에서부터 계속 이어져 왔다는 걸 전제하고 있다. 그러니 건강한 사랑하는 남녀가 한밤 중에 문을 두드려 “같이 자자”고 말하는 게 잘못됐다 볼 순 없다. 다만 그간 우리가 멜로드라마에서 아무 비판의식 없이 바라봤던 그런 장면들이 이제는 한번쯤 스스로 생각해보게 되는 그런 상황을 우리가 맞이하게 됐다는 거다. 

사실 <김비서가 왜 그럴까>는 그 드라마의 구도에서부터 아슬아슬한 면이 존재했다. 비서와 부회장의 로맨스. 거기서 위계나 권력 구도를 읽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 권력 구도에서 벌어진 부적절한 관계들이 신문 사회면에 오르는 현실이 아닌가.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 아슬아슬한 위계가 갖는 불안감을 몇 가지 장치들로 넘어섰다. 

그 첫 번째는 공적 관계를 깨면서 본격화하는 멜로다. 김미소가 사표를 던지는 순간 시작되는 멜로는 부회장과 비서 간의 관계가 아니라 사적인 이영준과 김미소의 관계로 그려지게 만들 수 있었다. 두 번째는 과거 유괴사건을 두 사람이 함께 겪음으로써 이 관계가 이미 공적 관계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시작된 이영준의 순애보에서 비롯됐다는 걸 보여준 대목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치는 이영준이라는 캐릭터다. 이 드라마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부회장이나 재벌2세 캐릭터와는 완전히 상반된 ‘배려의 아이콘’으로 이영준을 세웠다. 

이런 장치들이 있어 <김비서가 왜 그럴까>는 그대로 편하게 웃으며 볼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는 아슬아슬함은 여전하다. 두 사람이 연인관계를 선언한 상태지만 두 사람이 사적인 자리에서도 나누는 대화의 모습이 여전히 부회장과 비서의 어투를 사용한다는 점 같은 게 그렇다. 두 사람은 사적 관계임에 틀림없지만, 그 공적인 어투는 두 사람의 관계를 공적 관계로 착각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마치 부회장-비서 캐릭터 코스프레를 통한 관계의 새로움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사적인 관계와 공적인 어투가 중첩된 부분은 여전히 아슬아슬함을 만든다. 

다행스러운 건 과거의 상처를 이겨내고 그 정체들이 다 밝혀진 이후, 꽁냥꽁냥하게만 흘러가던 멜로가 김미소의 ‘자신의 삶 찾기’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저 부회장과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다가 아니라 김비서가 아닌 김미소로서 행복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모색했다는 것. 그래서 자신은 몰랐던 비서라는 직능으로서의 성취감이 분명 있다는 걸 그는 발견해낸다. 이제 김미소로서 김비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미투 운동 이후로 우리의 남녀 관계를 바라보는 감수성은 많이 달라졌다. 저것이 연애인가 아니면 부적절하거나 불평등한 관계인가를 조금씩 들여다보게 됐다는 것. 그래서 멜로드라마 속 남녀의 사랑이야기는 이제 그 변화를 예고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김비서가 왜 그럴까>를 보면서 그저 그 꽁냥꽁냥한 멜로에 빠져들면서도 한편으로 저런 관계는 적절할까를 생각하게 된 건 여러모로 건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슬아슬함을 느낀다는 건 그만큼 우리의 감수성도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고, 그 달라진 감수성은 거기에 맞는 새로운 멜로의 구도를 요구하고 있다는 뜻이니 말이다.(사진:tvN)

‘예쁜 누나’, 캐스팅만으로도 꿀 떨어지는 설렘이라니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걸까. JTBC 금토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예쁜 누나’ 윤진아(손예진)와 ‘밥 사주고픈 동생’ 서준희(정해인)가 함께 웃으며 거리를 걷는다.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브루스 윌리스의 ‘Save the last dance for me’는 이 장면을 하나의 뮤직비디오로 만들어버린다. 

누나 동생의 나이 차가 있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리면서도 쉽게 손을 내밀지 못한다. 함께 걷는 그 장면에서 서준희의 손이 윤진아의 어깨 위로 가려다 멈추며 어색하듯 엉뚱한 포즈를 취한다. 그 장면이 너무나 풋풋하게 다가온다. 이미 연애 경험들이 있을 법한 그들이지만 그 장면에는 마치 이제 막 첫사랑을 경험하는 듯한 이들의 풋풋함이 담겨진다. 

그 장면을 더 설레게 만드는 건 그저 모습만 봐도 마음이 이끌리는 두 사람의 표정들이다. 윤진아 역할을 연기하는 손예진은 나이가 무색한 청순한 얼굴에 특유의 눈웃음을 날린다. 서준희 역할의 정해인은 하얀 치아를 슬쩍 드러내며 미소를 지을 때마다 소년 같은 매력이 터진다. 물론 해맑은 소년의 얼굴에서 ‘예쁜 누나’에게 지분거리는 전 남자친구 앞에서는 남자의 얼굴로 바뀌지만.

올드 팝을 깔아 넣은 그 장면 속에서 느껴지는 건 조금은 구닥다리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더 아련해지는 ‘옛날 식 사랑’의 기억들이다. 어쩌면 너무나 쉬워져 버린 스킨십과 감각적인 삶이지만, 윤진아와 서준희가 영화관에서 팝콘을 나눠먹으며 손길이 닿지 않을까 신경 쓰는 모습은 더더욱 마음을 잡아끈다. 자동차에서 손을 잡을까 말까 고민하는 손길이 주는 이토록 강렬한 설렘이라니.

서로에게 마음이 이끌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나이 차와 누나, 친구 관계로 얽혀있어 좀체 그걸 드러내지 못하는 두 사람. 그래서 서준희는 윤진아에게 마음을 고백하려다 문득 말을 돌려 “매일 밥 사줄 수 있냐”고 묻는다. 그러자 윤진아는 자기가 언제 밥 안 사준 적 있냐고 답한다. 그들은 ‘밥 사주는 걸’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건 사실상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생각하는 마음을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용기를 내지 못하다 직장 동료인 강세영(정유진)이 서준희에게 작업을 걸려고 하자 갑자기 서준희의 손을 꼭 잡는 윤진아의 모습은 그 어떤 멜로의 스킨십보다 더 두근거리는 장면으로 다가온다. 이제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그 꿀 떨어지는 눈웃음과 미소를 나누며 쉽지 않은 사랑을 하게 될 것이다.

서준희의 누나 서경선(장소연)이 윤진아의 절친이라는 사실이나, 서준희와 윤진아의 동생 윤승호(위하준)가 친구라는 사실, 그래서 윤진아의 부모 또한 서준희를 잘 알고 있다는 그런 관계들은 이 두 사람만의 시간이 주는 달달함과 팽팽한 갈등을 만들어낸다. 과연 이들은 이 갈등들을 넘어서 두 사람의 사랑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요즘처럼 본격 멜로가 쉽지 않아진 상황 속에서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도리어 그 정통 멜로의 구도를 가져왔다. 물론 안판석 감독 특유의 현실감각이 넘쳐나는 영상과 상황들이 배경으로 깔리면서 이들의 멜로는 그 자체로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되지만 그래도 이 드라마가 담고 있는 건 설렘 가득한 멜로 그 자체다. 그리고 이 본격 멜로에 한껏 힘을 부여하고 있는 건 손예진과 정해인이라는 배우라는 걸 부정하긴 어려울 것 같다. 손예진의 눈웃음과 정해인의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말이다.(사진:JTBC)

‘키스 먼저’, 김선아는 잊어버린 걸 감우성이 기억한다는 건

‘그는 기억하고 그녀는 잊어버린 것.’ SBS 월화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는 매회 에필로그 형식으로 이런 제목의 짧은 이야기가 덧붙여진다. 그 이야기에는 손무한(감우성)과 안순진(김선아)의 이미 과거에 얽혔던 사연들이 소개된다. 둘 다 이혼을 하고난 후 흔들리는 기내에서 처음 마주하던 때와, 그 날 아무도 없는 한겨울 동물원을 찾은 순진을 무작정 따라갔던 무한과, 거기서 자살 시도를 했던 순진을 구해냈던 무한의 이야기 등이 그 에필로그에 담긴다.

그 에필로그가 보여주는 짧은 이야기 속에는 무한과 순진이 왜 지금처럼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들이 제시된다. 무한은 이혼 후 세상과 거의 연결고리를 갖지 않은 채 이제 병들어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반려견과 함께 살아가고, 순진은 집안 가득 과거의 물건들을 방치한 채 오랜 법정싸움으로 지게 된 사채 빚 독촉을 받으며 자포자기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리고 그 에필로그에는 순진이 본래 아이가 있었고 그 어린 아이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사망하게 된 사연이 더해진다. 공원묘지에서 무한은 아버지의 묘소를 방문했다가 아이의 장례를 치르며 오열하는 순진을 보게 된다. 순진이 집안 가득 과거의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방치해놓고 있는 건 바로 그 아픈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 남편인 은경수(오지호)가 집을 나가자 순진을 찾아왔을 거라 의심한 백지민(박시연)이 그 집안에 들이닥쳐 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지다 문득 발견한 아이를 담은 비디오테이프 앞에 멈춰서게 된 건 그 역시 순진이 미우면서도 부채감 같은 걸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경수는 스스로 말했듯 자신은 그 아픈 기억으로부터 지민을 만나 빠져나왔지만, 아직 순진은 그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경수가 지민과 재혼하고도 순진을 마음에서 놓지 못하고 있는 건 그래서다.

너무 아파서 오히려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순진은 아이의 죽음이 주는 그 거대한 상처만을 기억하지만, 그렇게 아파하는 자신을 바라보던 무한의 눈길은 기억하지 못한다. 눈 내리던 동물원 어느 한 켠에서 눈을 맞으며 오열하고 있을 때 그 뒤에서 우산을 받쳐주던 무한이 있었고, 버리고 간 캐리어를 대신 끌며 따라왔던 무한이 있었다. 그리고 무한은 어느 벤치에서 순진이 손목을 그었을 때 달려와 그를 응급실까지 데려갔다. 무한은 선명히 그것을 기억하지만 순진은 잊어버렸다. 너무 아픈 기억들이 무한 같은 새로운 사람과의 기억을 담을 여지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위층 남자 아래층 여자로 만나게 되고, 점점 가깝게 되어 이제는 “자러 올래요?”라는 말에 야릇한 감정보다는 따뜻함을 느끼게 되었지만 순진은 여전히 무한을 완전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아무런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채 이제 직장에서도 잘리고 집에서도 쫓겨나게 된 처지의 순진을 지금도 무한은 뒤에서 바라본다. 순진은 그 모든 아픔 앞에 혼자 서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를 바라봐주고 다가와주며 손을 내밀어주는 무한이 있었다.

아마도 이 구도는 <키스 먼저 할까요?>가 가진 사랑에 대한 시각이다. 이제 나이 들어 딱히 설렐 일이 있을까 싶은 마음들이지만, 이들은 육체적인 욕망보다는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그 시선에 마음이 움직인다. 그래서 아마도 <키스 먼저 할까요?>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이 붙었을 게다. 이들에게는 스킨십이나 함께 자는 것 따위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그 마음을 들여다봐주는 것이니. 순진은 잊어버렸지만 기억해주는 무한이 보여주는 그 마음.(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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