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전개 ‘피고인’, 답답함 이겨내기 쉽지 않다

지성의 연기는 명불허전이다. 제아무리 명연기자라도 힘겨울 상황들을 온몸으로 빨아들여 연기로 보여주고 있으니. SBS 월화드라마 <피고인>은 하루아침에 아내와 딸을 살해 유기한 죄로 사형수가 되어 감옥에서 깨어난 주인공 박정우(지성)가 당시 기억을 잃어버린 상황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 힘겨울 수밖에 없다. 기억이 나지 않는데 모든 증언들이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와 딸을 살해했다고 말하고 있는 상황. 지성의 연기 몰입은 그래서 이 드라마에 시청자들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되어준다. 

'피고인(사진출처:SBS)'

하지만 지성이 힘겨운 연기를 계속 하는 동안, 그를 통해 박정우라는 캐릭터에 몰입하는 시청자도 똑같은 힘겨움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어느 정도라면 반전의 사이다를 위한 고구마 상황으로 기다리게 되지만 그 끝이 좀체 보이지 않고, 어쩐지 새로운 사건이 나타나지 않은 채 반복되기만 한다면 시청자들도 지칠 수밖에 없다. 이제 3회가 지난 것뿐이지만 왜 이렇게 전개가 느리냐는 볼멘소리가 시청자들에게서 나오는 건 그래서다. 

1,2회만 해도 사건은 거의 폭풍전개 하듯이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박정우가 처한 상황은 물론이고, 그를 그런 상황에 몰아넣었을 것으로 보이는 쌍둥이 형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차민호(엄기준)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또 그 사건의 진실에 접근해가는 박정우가 그가 차민호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증거가 없어 잡지 못하는 안타까움 같은 것들은 시청자들에게조차 간절한 마음을 만들었다. 

하지만 3회의 이야기를 보면 1,2회에 비해 너무 느린 전개를 보이고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3회에 담겨진 이야기는 박정우가 과거 차민호를 잡으려 했으나 그가 심지어 지문까지 지워가며 빠져나갔다는 사실과, 어딘지 수상한 박정우의 친구 검사 강준혁(오창석)이 현장검증에 대역까지 썼다는 사실을 국선변호인 서은혜(권유리)가 알아차렸다는 이야기, 그리고 박정우의 처남이 그가 갇혀 있는 감옥의 교도관이며 징벌방 바닥에 박정우가 무언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적어 뒀다는 이야기 정도다. 

물론 이것도 꽤 많은 드라마의 정보일 수 있지만 시청자들이 답답함을 느끼는 건 주인공 박정우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고 그것이 좀체 변화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졸지에 사형수가 된 박정우의 상황이 조금이라도 변화하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는 달리, 그는 여전히 기억상실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다. 

사실 감옥이라는 상황 하나만 갖고도 폐쇄된 공간이 주는 답답함을 주기 마련이다. 그래서 <피고인> 역시 박정우가 감옥에 들어오기 전 차민호와 있었던 일들을 중간 중간에 집어넣고는 있지만 그래도 답답함은 그리 상쇄되지 않는다. 여기에 아내와 딸이 살해됐다는 그 시점의 기억이 뭉텅 날아가 버린 상황은 그 답답함을 더 깊게 만든다. 

장르적 성격상 이 답답함은 물론 뒤에 전개될 속 시원한 반전을 위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게 눌러주는 것도 어느 정도의 숨통을 틔워줘야 시청자들도 계속 견뎌낼 수 있기 마련이다. 답답함을 깨치기 위해 감옥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좀 더 다채롭게 구성할 필요가 있고 기억의 단초들도 조금씩 풀어내줄 필요가 있다. 

현실의 답답함에 짓눌린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보면서도 계속 그 답답함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다. 답답한 현실을 그려내기 위해 밑그림을 그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참는 일이 힘겨워진 현재의 대중들의 정서를 좀 더 감안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자칫 잔뜩 기대하고 바라보고 있는 시청자들이 떠날 수도 있으니.

기억·자책감·억울함, 지성이 끌고 가는 ‘피고인’의 힘

도대체 저런 연기를 어떻게 소화해낼 수 있을까. MBC 드라마 <킬미힐미>에서 지성이 다중인격을 연기할 때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그 생각은 다시금 SBS 월화드라마 <피고인>을 통해 재연되고 있다. 단 2회만을 두고 봐도 이 드라마 속 주인공 박정우(지성)가 가진 감정들은 너무나 복합적이다. 

'피고인(사진출처:SBS)'

검사로서 잘나가던 모습의 당당했던 모습이 있다면, 형을 죽인 동생 차민호(엄기준)가 형 행세를 하려는 걸 알아차리고 그 진실에 접근해가며 분노하는 모습이 있고, 갑자기 4개월의 기억이 뭉텅 잘려나간 채 감방에서 깨어나 아내와 딸을 살해한 혐의에 황망해하는 모습이 있다. 그 감정은 그럴 리가 없다는 부정은 물론이고, 그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어쨌든 살해됐다는 아내와 딸에 대한 깊은 자책감,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는 억울함, 그럼에도 아무런 기억도 할 수 없다는 답답함 같은 것들이 교차되는 것이다. 

연기라는 것은 그저 흉내가 아니고 그 캐릭터가 처한 상황과 감정들을 자신의 그것으로 끌어들여 표현해내는 것이란 점을 두고 보면 지성이라는 연기자가 이 역할을 하며 겪었을 심적 고통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아내와 딸에 대한 살해 혐의를 모두가 인정하는 분위기에서 자신조차 기억을 하지 못해 그걸 확신할 수 없는 감정은 얼마나 무너질 것인가. 

지성에게는 극심한 심적 고통의 연기지만, <피고인>이라는 드라마는 사실상 바로 이 고통스런 박정우의 상황을 통해 극의 힘이 생겨난다. 드라마는 단란했던 박정우와 가족 간의 상황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4개월을 뛰어넘어 감옥에 수감된 그를 보여준다. 이 중간에 남겨진 기억의 공백은 박정우의 상황이 180도로 변해있다는 점에서 시청자들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그가 가진 극심한 심적 고통들은 고스란히 시청자들의 감정 또한 움직인다. 그가 범인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게 만들지만, 슬쩍 CCTV를 통해 무언가 커다란 트렁크를 차에 싣는 모습은 설마 그가 진범인가를 또 의심하게 만든다. 물론 주인공인 그가 진범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지만 어쨌든 이 뭉텅 잘려진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모여져 완전한 그림을 그려 보여줄 때까지 시청자들의 시선은 고정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지성이 연기해내는 박정우라는 인물의 감정이 얹어지는 일은 중요하다. 그가 가진 답답함과 억울함과 자책감 같은 것들은 어쩌면 우리네 현실이 대중들에게 부여하는 감정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 잘못된 세상, 그리고 그것이 무엇 때문에 잘못됐다는 심증이 점점 드러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확증되지는 않은 상황, 그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에 어쨌든 동조한 점도 있다는 자책감과 그럼에도 자신은 그런 세상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했다는 억울함 등등이 그 감정이다. <피고인>은 박정우라는 특정 개인의 상황과 감정을 담고 있지만 드라마는 그걸 수용하는 시청자에 의해 온갖 현실적 상황과 감정들이 환기되기 마련이다. 

지성의 연기에 탄복할 수밖에 없는 건 그 복합적인 감정 상태를 박정우라는 인물을 통해 그 인물 자체인 것처럼 연기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 연기를 통해 그려지는 박정우라는 인물은 그래서 현재의 대중들이 느끼는 이른바 ‘피고인’ 감정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거 <추격자>라는 드라마가 진범을 추격하는 주인공을 통해 시대의 진범을 추격하는 당대 대중들의 마음을 담아냈었다면, 이번 <피고인>은 어쩌다 피고인이 된 주인공을 통해 시대의 피고인의 감정을 갖게 된 대중들의 억울함, 답답함 등을 풀어내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성이라는 놀라운 연기자의 몰입을 통해 우리는 어쩌면 시대감정을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피고인’, 다소 과한 설정도 지성과 엄기준의 연기라면

깨어보니 기억이 지워진 채 사형수가 되어 있는 검사. 자신의 쌍둥이 형을 죽이고 형 행세하는 살인자. 사실 SBS 새 월화드라마 <피고인>의 설정은 다소 과한 면이 있다. 물론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강력부 검사가 사형수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나 그렇게 벌써 감옥에서 4개월이 지나버렸지만 여전히 자신이 사형수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는 건 충격적인 일이다.

'피고인(사진출처:SBS)'

한 명은 사업가지만 다른 한 명은 살인자인 쌍둥이 형제 설정도 현실적이라기보다는 극화된 면이 더 강하다. 폭행으로 사경을 헤매는 여자의 가해자로 쌍둥이 동생 차민호(엄기준)는 검사 박정우(지성)에 의해 쫓기게 되자 형 차선우를 때려눕히고 베란다에서 밀어 떨어뜨린다. 그리고 형 행세를 하며 유유히 건물을 빠져나가 형의 집으로 찾아간다. 그는 자신을 알아보는 형수에게 그녀의 아이가 형의 자식이 아니라는 약점을 폭로하겠다며 엄포를 놓는다. 

사실 제 아무리 쌍둥이라고 해도 이렇게 사업가와 살인자가 뒤바뀌는 설정이 쉽게 용인되지는 않을 것이다. 외모만 같다고 해서 모든 존재의 증명이 해결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문 조사 하나만 해도 금세 들통 날 일이다. 하지만 <피고인>은 그런 디테일한 문제들은 다음으로 미루고 일단 사건들을 밀어붙이는 쪽을 선택한다. 

첫 회에 시청자의 시선을 잡아끌어야 하는 최근 드라마들의 속성상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분명 스토리의 설정이 과하다는 느낌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에 몰입하게 된 건 다름 아닌 지성과 엄기준이 보여준 연기대결에 가까운 절절한 연기 덕분이다. 사실상 지성이나 엄기준 모두 1인2역을 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성은 잘 나가던 강력부 검사에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었지만 한 순간에 사형수가 되어버린 그 절망감을 연기한다. 게다가 무슨 일이 자신에게 벌어졌는지도 그는 전혀 가늠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이 사형수가 된 이유가 아내와 딸을 살해했다는 것이란다. 지성은 이 천상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박정우라는 인물의 처절함을 특유의 ‘미친 연기력’으로 보여준다. 결국 이 드라마는 어떤 누군가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된 사건으로 집으로부터 멀리까지 오게 된 박정우가 다시금 집으로 돌아가는 그 이야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너무 다른 쌍둥이 역할을 1인2역으로 해내야 하는 엄기준 역시 만만찮은 배역을 맡았다. 특히 형을 죽인 동생 차민호 역할은 보는 이들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첫 회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베란다에서 떨어뜨렸지만 그래도 살아남아 병원까지 실려 온 형이 동생을 알아보고 이름을 부르다 결국 죽는 순간, 웃으며 오열하는 연기는 가히 압권이었다. 

물론 <피고인>이 하려는 이야기는 그저 다소 과장되어 보이는 극적인 상황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다. 결국 진실을 찾아나가는 이야기고 그 과정은 정의를 구현해가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또한 박정우가 처한 상황, 즉 4개월 기억의 공백은 그걸 채워나가며 진실에 접근해가는 과정들을 훨씬 더 긴박하게 만들어줄 것으로 보인다. 

첫 회이기 때문에 다소 과한 설정들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드라마가 어떤 힘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지성과 엄기준이라는 연기자들 덕분이다. 그리고 이런 대결구도는 향후에도 계속 이어질 것이란 점에서 이 두 연기자들의 연기대결을 보는 재미 역시 쏠쏠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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