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진심... ‘사말’이 주는 감동의 실체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주도에서 처음 만났을 때 비가 내렸거든. 갑자기 천둥소리가 나서 그 사람을 쳐다 봤는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딴 생각에 잠겨 있는 거야. 그런 모습이 좀 쓸쓸해 보이더라. 근데 오늘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어. 나는 천둥소리를 듣고 놀랐지만 그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던 것처럼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나만 듣고 나만 알게 되는 일들이 생겨. 그걸 그럴 때마다 수어로 문자로 설명하려고 하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막막해져. 들리지 않아서 쓸쓸한 순간만 생각했는데 들려서 쓸쓸해지는 순간도 뭐 있을 수 있는 거구나. 그런 생각 들더라고.”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에서 정모은(신현빈)은 친구 오지유(박진주)에게 미술관에서 송서경(이은재)과 권도훈(박기덕)이 다투는 소리를 들었지만, 듣지 못하는 차진우(정우성)에게 그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심정을 그렇게 에둘러 털어놓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생겨나는 비밀이 만들어내는 쓸쓸함. 그건 듣지 못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만 생기는 쓸쓸함은 아니다. 그게 말이든 글이든 수어든, 근본적으로 완전한 진심이 소통되기 어려운데서 만들어지는, 결국은 혼자라는 쓸쓸함이다. 

 

정모은도, 차진우도, 송서경도 또 정모은의 절친인 윤조한도 비밀이 있다. 정모은은 자신의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다. 낳아주신 엄마는 따로 있다. 어려서 아빠와 엄마가 다투는 소리를 우연히 듣고는 그 사실을 알았다. 절친인 윤조한(이재균)은 정모은과 함께 시골집에 가서 우연히 보게 된 사진을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정모은은 그 사실을 안 이후로 엄마가 “날 진짜 사랑하는 걸까. 사랑하는 척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고 한다. 어려서 불안하기만 해서 가졌던 그 어리석었던 생각들을 털어놓으며 그런 비밀은 몰랐으면 더 나았을 뻔 했다고 정모은은 털어 놓는다. 

 

차진우는 송서경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이 있다. 학교에 불이 났었고 그로 인해 차진우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무슨 이유에선지 송서경은 아픈 말들을 잔뜩 쏟아붓고는 차진우를 떠났다. 차진우는 큰 상처를 받았지만, 세월이 한참 지나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난 송서경에게 그 때 왜 떠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송서경에게는 비밀이 있지만 그건 지나간 과거일 따름이라고 말한다. 

 

정모은은 차진우와 송서경 사이에 있었던 일이 궁금하고 그래서 차진우의 절친인 홍기현(박재준)을 찾아가 묻지만 그건 그 비밀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입을 통해 듣는 이야기들이 신경쓰여서다. 고맙게도 홍기현은 있는 그대로를 알려주면서 차진우의 마음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거라고 정모은에게 말해준다. 

 

윤조한은 정모은을 좋아하지만 절친이고 정모은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 비밀을 털어 놓지 않는다. 대신 정모은이 출연하게된 드라마의 OST를 맡아서 만든 곡에 자신의 마음을 담는다. 정모은은 모르겠지만 윤조한은 그렇게 멀리서나마 스스로의 마음을 전한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드라마지만, 불타오르는 사랑의 화려함보다는 그 여백으로 남아 있는 쓸쓸함이 더 짙은 여운을 주는 드라마다.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자기 감정을 자꾸만 차진우에게 드러내고 말하려는 송서경과 달리, 차진우도 정모은도 또 윤조한도 쉽게 말로서 자신의 속내를 꺼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말로 전해질 수 없는 진심이 존재하고, 그래서 우리는 모두 쓸쓸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이 드라마는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쓸쓸한 존재로서의 우리들을 인정하기 때문에, 말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진심이 전해지고 그 진심이 닿게 되는 그 순간의 감동은 더 짙다. 침묵한 채 따뜻한 시선으로 정모은을 바라만 보는 차진우의 마음은 그래서 그 침묵 속에서 더 잘 전해지고 그의 세상을 향한 따뜻한 마음 역시 그가 그리는 그림 속에서 더 잘 살아난다. 정모은의 진심은 차진우에게 쉽게 말하지 못하고 세심하게 고민하며 말을 아끼는 그 모습에서 드러난다. 

 

윤조한의 진심은 끝내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대신 음악을 들려주는 데서 드러나고, 낳아준 엄마는 아니지만 딸을 생각하는 정모은의 엄마 나애숙(김미경)의 마음은, 우연히 딸의 남자친구를 만났는데 청각장애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게 걱정되어 “귀가 성치 않든 고아든 간에 지가 좋아서 만난다는데 ‘그래 니가 좋으면 나도 좋다’ 시원하게 그 한 마디를 못해준 것”을 후회하며 눈물 흘릴 때 절절히 드러난다. 

 

때론 말하지 않을 때, 차라리 비밀로 남겨둘 때 그 침묵을 또 비밀을 알아봐주는 이에 의해 오히려 더 진심이 전해지는 순간이 있다. 차진우의 전시회에 온 어느 마지막 손님이 그가 그린 그림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그것이다. 왜 눈물을 흘렸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정모은에게 그녀는 말한다. “글쎄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혼자 이 고즈넉한 연못을 바라보면서 화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살았고 어떤 이유에서 이런 그림을 그리게됐을까 떠올려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주제 넘죠? 그림 한 장으로 그 사람의 삶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건 결코 주제 넘은 일이 아니다. 수천, 수만의 단어를 동원해도 알 수 없던 누군가의 삶의 진실을 우리는 순간을 포착해낸 그림 한 장으로 때론 아름다운 가사를 담은 노래 한 곡으로 알아보게 되는 그런 경험을 하지 않던가. 그 그림 앞에서 눈물 흘렸던 사람처럼, 우리는 어쩌면 <사랑한다고 말해줘>가 주는 감동과 여운을 마주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진심을 느끼며. (사진:지니TV)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이 하면 멜로도 이렇게 다르다

헤어질 결심

죽어가는 자들의 눈에는 그 마지막 순간이 담긴다.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형사가 하는 일은 어쩌면 그 죽어가는 자들의 눈에 담긴 그 마지막 순간을 찾아내는 일이 아닐까. 그 마지막 순간에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했으며 그건 어떤 감정이었을까. 그런 것들을 건조하게 의심하고 추적하는 일이 아닐까. 

 

박찬욱 감독은 영화 <헤어질 결심>의 형사 해준(박해일)의 그런 시선을 따라간다. 산 정상에서 추락해 사망한 남자. 남편이 죽었는데도 별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는 아내 서래(탕웨이). 해준은 의심의 시선으로 서래의 일상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잠복근무를 통해 서래의 주변을 맴돌며 사진을 찍는 그 의심의 시선은 점점 관심으로 바뀌어간다.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여자. 아픈 엄마를 스스로 죽였다는 서래에게 그가 관심을 갖는 건 그 ‘결심’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마음 같은 것 때문이었을 게다. 죽음 앞에서야 사는 의미가 찾아지는 해준. 형사라는 직업 때문에 갖게 된 이런 상태는 주말부부로 만나 건강을 위해서 의무적으로 섹스를 하는 아내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그에게 삶은 죽음 같은 ‘헤어질 결심’까지 하게 만드는 그런 순간에야 비로소 느껴지는 어떤 것이다. 

 

해준의 이런 관심은 고스란히 서래에게도 전해진다. 해준의 집 벽에 붙여져 있는 사건 관련 사진들 속에 자신의 일상이 담겨진 사진들을 보면서 서래는 느낀다. 이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단지 형사가 용의자를 바라보는 시선 그 이상이라는 걸. 서래는 해준의 ‘반듯함’과 ‘젠틀함’을 좋아하지만, 그것이 형사라는 직업에 대한 자긍심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래서 그 자긍심마저 깸으로써 “완전히 붕괴됐다”고 말하는 해준에게 강렬한 사랑을 느낀다. 

 

의심에서 관심으로 넘어가고 그래서 자신이 붕괴되는 것마저 감수하는 해준의 마음과, 자신을 남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거기에서 어떤 보호받고 이해받는 느낌까지 받다 그의 마음이 그의 모든 걸 붕괴시킬 정도로 강렬하다는 걸 알게 된 서래의 마음. 그들은 조금씩 서로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형사와 용의자라는 경계를 무너뜨리고, 중국인이라 부족한 말 표현을 넘어선다. 

 

이처럼 우리가 명확하게 선이 그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경계들은 마치 안개가 낀 듯 흐릿해지고 이 편과 저 편이 구분가지 않을 정도로 뒤섞인다. 법적인 부부와의 관계는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고, 사실상 불륜이자 그것도 형사와 용의자 사이에 벌어지는 관계는 서로 나누는 눈빛이나 숨소리, 핸드크림을 발라주는 손길만으로도 에로틱하고 감정을 툭툭 건드린다. 

 

불면으로 잠 못드는 해준의 눈은 마치 죽은 후에도 부릅뜨고 마지막 순간을 애써 보려하는 시신들의 눈을 닮았고, 안구건조증에 넣는 안약으로 흐르는 눈물에는 물리적 고통과 감정적 고통이 뒤섞여 있다. 그런 눈이 세상의 경계를 어찌 분명히 볼 수 있을까. 안개 가득한 이포의 바닷가에서 애타게 서래를 찾는 해준의 모습이 분명하다 여겼던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져 헤매는 인간의 실존처럼 비춰진다. 배경음악으로 깔린 정훈희와 송창식의 ‘안개’가 이들의 사랑을 더욱 애틋하게 만드는 이유다. 

 

히치콕의 ‘관찰자의 시선’을 가져온 박찬욱 감독은 그 용의자를 바라보는 형사의 의심을 ‘관심’이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틀어 수사극을 멜로로 풀어낸다. 관찰자가 대상에 빠져들고 관찰되던 자 역시 자신을 바라보는 남다른 시선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래서 이건 박찬욱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시선은 그렇게 카메라에 담길 대상에 대해 의심하고 관심을 갖게 되다가 어떤 ‘결심’의 순간을 발견하곤 자신이 생각했던 굳건한 경계들이 붕괴될 정도로 매료되었던 건 아닐까. 

 

결국은 사랑이야기지만, 박찬욱 감독이 그려낸 <헤어질 결심>은 죽음을 결심하는(죽이거나 죽거나) 그 순간의 강렬한 삶을 전제하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일상적으로 쉽게 ‘사랑’이라 부르는 것들이 과연 얼마나 진짜일까를 생각하게 되고, 진짜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은 ‘사랑’을 말하지 않고도 다른 표현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걸 생각하게 한다. 그 방식이 색달라 낯설고 결코 쉽지 않은 안개 같은 영화지만, 다 보고 나면 그 안개 깊숙이 전해지는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 작품이다. (사진: 영화 '헤어질 결심')

‘아르곤’, 짧아도 묵직한 여운으로 남은 까닭

우리가 희망하는 언론이 이런 것이 아닐까. tvN 수목드라마 <아르곤>은 아쉽게도 8부작이라는 짧은 분량으로 끝을 맺었지만 여러모로 묵직한 여운을 남겼다. 마지막 엔딩까지 바른 언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를 보여줬다. 

'아르곤(사진출처:tvN)'

미드타운 비리 보도에 대한 이야기가 이 드라마의 시작점이자 마지막이 됐던 건 그것만큼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없기 때문이다. 미드타운의 건물이 붕괴되고 그래서 사람들이 죽어나갔지만 현장소장을 희생양 삼아 넘기려는 이들. 그들은 정관계와 경제계, 검찰, 언론까지 뒤얽힌 게이트로 결국 부실공사로 인해 미드타운이 붕괴된 원인을 만든 사람들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그토록 많았던 사건사고들을 떠올리게 한다. 멀게는 성수대교 붕괴와 삼품백화점 붕괴부터 가깝게는 세월호 참사까지. 그것은 천재지변이 아니라 비리가 누적되어 만들어진 참담한 결과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건사고들이 계속해서 터져 나온 데는 감시자 역할을 해야 했던 언론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해서다. 언론 또한 게이트에 연루되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미드타운 비리를 보도하려 하자 HBC 사장이 나서서 모든 방송들을 사전 검열하려 한다. 그리고 아르곤은 방송 자체가 중단됐고, 기자들은 아르곤 스튜디오 출입이 금지됐다. 그런데 문제는 그 미드타운 건설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김백진(김주혁) 역시 자기감정에 휘둘려 팩트 체크를 제대로 하지도 않고 그 일에 일조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는 점이다. 결국 이 사실을 보도하면 그가 지탄받을 일은 뻔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는 언론상 시상식장에서 자신은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며 과거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언론이 잘못한 것은 얼마가 지났든 반드시 제대로 고치고 가야 한다는 그 소신을 지킨 것. 결국 그의 자성으로부터 미드타운 비리는 밝혀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처한 적폐청산의 문제가 결국은 그런 철저한 자기반성을 전제로 한다는 걸 <아르곤>은 보여줬다. 물론 그는 방송사를 떠나야 했지만. 

<아르곤>은 진실을 보도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준 드라마였다. 섬양식품의 신제품 분유로 인해 아기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지만 이런 거대기업과 맞서는 일은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그 보도를 주도했던 신철 기자(박원상)는 내부고발을 한 직원의 자살로 인해 오히려 강압적으로 취재를 한 기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하지만 그 절망감을 딛고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그래도 꿋꿋이 진실을 사실에 근거해 보도해야 한다는 김백진의 소신이었다. 그는 섬양식품에 대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피해자들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보도를 해야 한다고 밀어붙였다. 그것이 설혹 자신들의 과오를 끄집어내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지금껏 많은 드라마들이 언론을 소재로 했고 또 기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아르곤>이 달랐던 건 보다 치열한 방송보도의 현장을 깊이 있게 다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은 바로 김백진이었다. 그 같은 인물이야말로 우리네 대중들이 원하는 언론인이었다. 물론 드라마 속에서 그는 언론인상을 거부하지만 그래서 시청자들은 기꺼이 그에게 마음속으로 상을 주었을 것이다. <아르곤>은 짧아서 아쉬웠지만 그래도 긴 여운으로 남았다.

‘삼시세끼’, 한지민의 잔상 오래도록 남은 까닭

있을 때는 잘 몰랐지만 없을 때 더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 tvN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 바다목장편의 첫 게스트로 출연한 한지민이 그렇다. 생각해보면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꽤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생각해보라. 어딘지 예능이 어색한 듯 혀를 날름 빼고 득량도의 세끼 집을 처음 들어왔던 그녀의 모습을.

'삼시세끼(사진출처:tvN)'

한 이틀 간의 시간 속에서 한지민은 세끼 집 사람들의 식구라고 해도 될 만큼 편해졌다. 물론 이서진과 과거 드라마 <이산> 같은 작품을 통해 익숙한 관계였지만, 이 이틀 동안 두 사람은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칠 정도로 더 가까워졌다. 늘 조용조용한 에릭에게는 살뜰하게 주방보조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고 그와 함께 해신탕을 만들어먹으면서 더 돈독해졌다. 

윤균상과는 처음 만나 어색한 관계였지만 잭슨네 목장에 함께 다니면서 누나 동생으로서의 친밀함이 생겼다. 더운 날씨에 홀로 잭슨네 목장에 가서 청소하고 먹이를 주는 윤균상이 못내 안쓰러웠던 한지민은 에리카를 타고 가 윤균상에게 에어콘 시원한 차를 타고 가라고 하기도 했다. 자신은 윤균상이 끌고 온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겠다며.

사실 한지민은 수수함과 털털함 그 자체였다. 우리가 드라마 등을 통해 봐왔던 그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그리고 그녀가 특별한 걸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세끼 집 남자들과 그들이 하는 일들을 같이 하면서 어우러진 것뿐이었다. 같이 요리를 하고 밥을 챙겨먹고 잭슨네 목장에 가서 산양들을 챙기고 너무 무더운 한낮에 바다로 나가 물놀이를 하는 그 일상의 시간들을 공유했던 것뿐.

하지만 다시 득량도를 찾은 이서진과 에릭 그리고 윤균상의 일상은 어딘지 허전함이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무엇이든 해야 할 것 같아 설거지를 하며 웃던 그녀의 모습과, 함께 식사 자리에 앉아 중국풍의 가지된장덮밥을 먹으며 고량주 땡긴다던 그 모습, 그리고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하며 까르르 웃던 그 소리들이 마치 잔상처럼 득량도 곳곳에 묻어난다. 똑같은 일상이지만 이처럼 누군가의 난 자리는 도드라져 보인다. 

에릭은 다시 찾은 득량도의 세끼 집에서 먼저 냉장고를 열고 이전에 한지민과 함께 담가두었던 열무김치를 꺼내 먹어본다. 잘 익었다는 에릭은 그것으로 입맛 돋워줄 열무국수를 만든다. 이서진은 냉장고에서 한지민이 남기고 간 반찬을 꺼내 놓는다. 그녀는 없지만 한 끼 밥상 가득 그녀의 흔적들이 묻어난다. 

사실 이건 <삼시세끼>라는 프로그램이 가진 보이지 않는 힘이 아닐까 싶다. 어딘가로 떠도는 여행이 아니라 한 공간에 머무는 것이고 거기서 생활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 들고 나는 자리가 확실히 잔상을 남긴다. 똑같은 공간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득량도의 그 집에는 찾았던 이들의 손길과 체온이 묻어난다. 한지민이 떠난 자리에는 여전히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그 귀여운 얼굴이 눈에 선하다. 있을 때는 그저 즐거워 잘 몰랐지만 없을 때 더 느껴지는 빈자리. 그래서 그 어떤 여행 예능보다 <삼시세끼>가 주는 여운은 더 오래 지속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