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에서 읽는 드라마업계 위기극복법

지금 드라마업계는 위기라는 말이 실감나는 상황이다. 천정부지로 치솟은 제작비에 비해 장르화되고 공식화된 문법 속에서 차별화된 작품이 나오지 않는 현실 때문이다. 그래서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의 성공은 눈에 띤다. 금기를 깨고 거둔 성취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범죄 스릴러는 성공 가능성 낮다? 천만에!

종영한 MBC 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범죄 스릴러다. 시청률이 과거만큼 중요한 지표는 아니지만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상파에서 스릴러는 그다지 유리한 장르는 아니다. 특히 요즘처럼 이른바 고구마-사이다의 이분법으로 드라마를 선택하는 경향에서는, 뒷부분에 이르러야 겨우 사건의 진상에 도달하고, 진범을 잡는 사이다 전개가 이어지기 마련인 범죄 스릴러는 불리하다. 사건이 터지고 시청자들을 복잡한 미로 속으로 빠뜨리는 그 과정은 자칫 긴긴 고구마 전개처럼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역시 초반 기대감이 그리 높진 않았다. 워낙 주인공인 프로파일러 장태수(한석규)가 처한 상황이 비극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장태수는 과거 어린 아들을 잃었고 그 때 함께 있었던 장하빈(채원빈)을 의심했다. 평범하지 않은 딸이었기 때문이다. 사이코패스는 아니지만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딸이었다. 하지만 이 의심 하나는 그의 가족을 파탄지경으로 몰고 갔다. 이혼한 아내는 자살을 했고, 딸은 장태수와는 말도 섞지 않은 채 엇나가기 시작했다. 딸에게서 무언가 일을 꾸미는 듯한 불안감을 느끼던 와중, 장태수는 수사하는 사건에서 자꾸만 딸의 흔적이 발견되는 일을 겪는다. 프로파일러로서 사건의 진실만을 냉철하게 바라봐야 하지만 그 정황과 증거들이 딸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상황 속에서 장태수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런 비극이 가진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첫 시청률이 5.6%(닐슨 코리아)로 시작한 건 한석규 같은 대배우의 아우라가 작용한 면이 있었다. 실제로 그는 초반 시청자들의 마음을 장태수라는 인물에 몰입하게 만드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 스릴러의 고구마적인 성격 때문에 2회에 4.7%로 떨어졌지만, 한석규의 차분하면서도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이자 프로파일러인 인물의 심리를 제대로 표현해낸 연기는 시청자들의 시선을 붙잡는 힘을 발휘했다. 그렇게 시청자들을 그 미로의 덫에 빠뜨리며 점점 텐션을 높인 드라마는, 갈수록 반전의 반전을 이어가며 열광적인 반응들을 이끌어냈고 마지막회에 이르러서는 최고 시청률 9.6%의 높은 수치로 마무리 됐다. 

 

무엇이 그 저력이었을까. 그건 스릴러라 처음부터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기는 어렵지만 차곡차곡 빌드업해나가다 보면 끝내 폭발력을 발휘할거라는 그 뚝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흐름은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바로 직전에 방영됐던 변영주 감독의 범죄 스릴러 ‘백설공주에게 죽음을-Black Out’에서도 똑같이 발견된 결과였다. 첫 회 2.8%로 시작한 드라마는 마지막회 8.8% 최고시청률로 마무리됐다. 스릴러가 고구마 전개라 안되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빌드업을 제대로 했는가 아닌가가 성패의 관건이라는 걸 이 두 편의 범죄 스릴러는 수치로 확인시켜줬다.

 

신인 감독, 작가는 어렵다? 글쎄...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가 더더욱 놀라운 건 이 대본을 쓴 한아영 작가나 작품을 연출한 송연화 감독 모두 신인 작가, 감독이라는 사실이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한아영 작가가 2021년 MBC 드라마 극본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은 작품이다. 본래는 ‘거북의 목을 노려라’였지만 제목만 바꿨다. 신인이지만 워낙 촘촘한 심리변화와 반전의 묘미가 가득한 정교한 플롯으로 심사위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또 이 작품을 연출한 송연화 감독은 2021년 방영됐던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경험을 쌓고 그 다음해에 4부작 ‘멧돼지 사냥’을 연출했다. 아직까지 신인이라고 해도 무방한 경력의 감독인 셈이다. 

 

신인 작가의 대본에 아직은 경험이 많지 않은 감독에게 10부작의 범죄 스릴러를 맡겼다는 건 이 작품이 얼마나 도전적이었는가를 잘 말해준다. 드라마업계에서는 파격적인 선택인데다, 요즘처럼 업계가 힘든 상황에서는 더더욱 어려운 선택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러한 도전적인 선택은 오히려 식상함을 깨고 참신한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었다. 

 

범죄 스릴러지만 가족이라는 코드를 넣어 치밀한 심리 대결이 펼쳐지는 색다른 서사가 시청자들을 열광케 했다. 그리고 의심이 만들어낸 파국 속에서도 끝까지 진실을 찾아가고 나아가 불신했던 자신의 과오를 뉘우침으로써 가족이 신뢰를 찾아가는 그 과정이 작위적인 느낌없이 펼쳐졌다. 여기에 송연화 감독의 ‘미친 디테일’과 심리 묘사가 담긴 연출이 빛을 발했다. 자칫 시청자들을 답답하게 만들 수도 있는 어두운 연출과, 반복되는 미장센을 통한 심리 묘사는 뚝심 있게 밀고 나감으로써 끝내 빌드업의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냈다. 

 

신인이어서 리스크가 크다는 드라마업계의 오랜 금기는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깨버려야할 어떤 틀에 박힌 공식이라는 걸 드러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중견이어서 갖게 되는 리스크 또한 클 수 있다는 걸 이 작품은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도망치고 추격하는 범죄 스릴러의 그 흔한 공식은 이제 시청자들도 식상해하는 것이 아닌가. 또 어디서 본 듯한 적당한 고구마와 사이다를 반복하는 연출방식도 마찬가지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그래서 이러한 금기로 여겨진 틀들이 어쩌면 우리네 드라마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걸 드러내줬다. 

 

한국 드라마 업계의 위기, 결국 작품으로 돌파해야

최근 한국 드라마 업계는 ‘위기’라는 말이 일상어가 되었다. K드라마의 위상이 높아졌지만, 그만큼 제작비도 급상승함으로써 제작하면 할수록 손실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높아진 제작비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글로벌 시장을 겨냥해야 하지만, 글로벌에서 통하는 배우들도 한정적이다. 출연하기만 해도 해외 판권이 팔리는 배우들이 있는 반면, 연기력으로는 국내에서 누구나 인정받지만 글로벌 시장에서는 팔리지 않는 배우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양극화는 출연료의 양극화도 만들어내면서, 전반적인 제작비 상승을 부추긴다. 이건 물론 액수의 차이는 있지만 스타 작가나 스타 연출자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처럼 해외에서 이른바 ‘팔리는 배우’를 세우고 들어가는 제작은 작품의 부실을 가져올 위험성이 있다. 실제로 과거 2000년대 초반 ‘겨울연가’가 욘사마 열풍을 타고 한류 바람을 일으켰을 때, 몇몇 스타 배우들을 앞세운 기획들이 연달아 실패하는 일들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스타 배우에 집중한다는 건, 제작비의 쏠림 현상도 만들어 상대적으로 작품의 완성도는 부실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최근 글로벌 OTT를 상대로 이른바 잘 나가는 제작사들이 내놓은 일련의 작품들이 들인만큼의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 건 어쩌면 이러한 기형적 흐름이 ‘본질’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가 도드라져 보이는 건 그래서다. 특정 장르가 어렵다거나 혹은 신인은 안된다는 관행들을 깨고 그것이 오히려 성공 가능성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어서다. 결국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본질로 다시 돌아가는데서 나올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재기발랄한 신인들을 찾아내 작품 본질에 집중할 것인가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글:시사저널, 사진:MBC)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의심과 불안이 겹치자 생겨난 기막힌 심리 스릴러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정말로 엄마가 범인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해? 너 때문이겠지. 엄만 너 볼 때마다 힘들었을 거야. 시신 묻은 게 떠올라서 괴로웠을 거고. 피하지 말고 똑바로 봐. 그거 못견디겠어서 누구라도 죽이고 싶은 거잖아. 너. 장하빈. 엄마 그렇게 만든 건... 사람 때문 아니고... 의심이야.”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MBC 금토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를 보는 시청자들이라면 대부분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프로파일러인 아버지 장태수(한석규)는 살인사건을 수사하면서 점점 그 현장에 딸 하빈(채원빈)의 흔적들이 나오자 불안해진다. 혹여나 딸이 범인이 아닐까 의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건이 진행되면 될수록 사건의 실체가 아주 조금씩 드러난다. 하빈은 범인이 아니라 엄마를 죽게 만든 이들을 찾기 위해 의도적으로 가출팸에 접근했다. 하빈의 친구였던 이수현(송지현)이 그 가출팸에 있었고, 무슨 일인지 엄마가 이수현의 사체를 땅에 묻은 사실을 알게 됐다. 하빈은 누군가의 협박으로 엄마가 죽게 됐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 누군가를 찾아 자기 손으로 복수하려 했다. 

 

하지만 장태수는 엄마의 죽음이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이수현의 시신을 묻은 것 때문에 괴로워하다 결국 자살을 한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엄마가 그런 짓을 한 이유는 다름 아닌 하빈 때문이었다. 하빈이 혹여나 이수현을 죽였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불안이 이유였다. 그래서 이를 은폐하기 위해 엄마가 대신 시체를 묻었다며 장태수는 그것이 ‘너 때문’이라고 딸에게 말한다. 

 

그런데 그 말은 너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며 딸을 질책하는 말이 아니다. 엄마가 딸을 그만큼 사랑했다는 의미다. 너무 사랑해서 조금 다른 아이이긴 하지만 보통 아이처럼 키우고 싶어했던 엄마였고, 그럼에도 이수현의 사체를 보고는 딸이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걱정, 불안이 겹쳐지면서 해서는 안될 짓을 한 거였다. 그 결과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파멸이었다. 장태수의 말처럼 하빈의 엄마를 그렇게 만든 건 사람(하빈도 아니고 또 누군가의 협박 때문도 아닌) 때문이 아니고 의심(딸이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때문이었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가 시청자들을 미치게 만드는 미로 속에 빠뜨리는 이유는, 단순한 사건의 흐름과 범인을 잡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밑에 깔려 있는 인물들의 감정과 심리변화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누군가 범인처럼 보이고, 이상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런 행동을 하는 감정과 심리들이 숨겨져 있다. 가족이 범인일 수 있다는 데서 생겨나는 의심과 걱정이 뒤섞인 불안은 하빈의 엄마가 사체를 암매장하는 그런 일까지 벌이게 만든다. 

 

그런데 이건 하빈의 가족에게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이제 점점 수면 위로 올라오는 사건의 진실 속에서 또 한 축을 차지하는 박준태(유의태)와 그의 숨겨져 왔던 아버지 정두철(유오성) 그리고 박준태의 연인 김성희(최유화)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그것이다. 박준태가 술에 취한 채 잠든 후 깨어보니 옆자리에 죽어있던 송민아(한수아)를 보고 자신이 죽였다 착각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김성희에 의해 조작된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그 순간 등장한 김성희가 “차라리 술 때문”이라고 하라며 그의 아버지가 사람을 때려 죽였다는 사실을 꺼냄으로써 박준태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처럼 자신도 그런 사람일 수 있다고 믿게 만든 것이다. 

 

기막힌 건 그의 아버지 정두철이 이 일이 진짜 아들의 짓이라 부정하면서도 의심하며 자신이 송민아의 사체를 토막내 처리했다는 점이다. 저 하빈의 엄마가 이수현의 사체를 처리했던 것과 똑같은 이유다. 즉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가 그리려 하는 건, 가족에 대한 작은 의심, 불신이 얼마나 큰 뼈아픈 사건들로 만들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자식이기 때문에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거라 부인하면서도, 혹여나 그것이 사실일 수 있다는 의심이 만들어내는 작은 틈. 그 틈으로 이 부모들은 범죄를 저지른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그저 벌어지는 사건의 끔찍함이나 그 범죄자를 잡아내는 순간의 카타르시스 같은 것들을 담는 범죄스릴러와는 완전히 다른 독특한 전개과정을 보여준다. 그보다는 하나의 사건 위에서 여러 인물들이 이를 통해 갖게 되는 감정과 심리상태를 들여다보고, 그것이 촉발시키는 사건의 파장들을 따라간다. 

 

아마도 범인은 하빈도 박준태도 아닐 것으로 보인다. 그들보다는 김성희가 더욱 의심가는 인물이다. 하지만 범인이 누구든 그보다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보는 건 하빈과 박준태 같은 가족이 의심과 불안 사이의 틈에서 괴로워하며 겪게되는 고통스런 과정들이고, 그럼에도 그걸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만이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장태수 같은 인물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인물들의 복잡한 감정들을 표정 하나 말 하나로 표현해내는 한석규와 채원빈을 비롯한 연기자들의 호연과, 같은 대사라도 뉘앙스 차이에 의해 달리 들릴 수 있는 걸 정확히 알고 있는 한아영 작가의 섬세한 대본, 그리고 이 복잡해보이는 미로 같은 사건들을 길을 잃지 않게 연출해내면서 그 위에 인물의 심리까지 영상언어로 담아낸 송연화 감독의 삼박자가 합쳐져 실로 기막힌 심리 스릴러가 탄생했다. (사진:MBC)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팀장님은 피곤하시겠어요. 남들보다 많은 게 보이는 사람은 모른 척 할 게 그만큼 많아지는 거잖아요.” 신입 프로파일러 이어진(한예리)의 이 말은 장태수(한석규) 팀장이 처한 난감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설명해준다. 늘 사건을 대하며 범죄행동을 분석하는 게 일인 그는 딸 장하빈(채원빈)이 하는 말이나 어떤 행동 하다못해 그녀가 가방에 매달고 다니는 팬던트 하나도 그냥 지나쳐 지지가 않는다. 그것들이 말해주는 의미들이 프로파일러인 그에게는 남다르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서 자꾸만 범죄의 냄새가 난다. 그것도 자신이 지금 수사하고 있는 살인사건과 연루된 냄새가. 

 

MBC 금토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프로파일러 장태수가 사건을 추적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딜레마를 그려낸다. 그의 이런 직업병(?)은 이미 그를 비극의 수렁 속에 빠뜨린 바 있다. 과거 캠핑을 갔다가 어린 하빈과 그의 동생 하준이 산에서 실종됐고 수색 끝에 발견된 건 죽은 하준과 피투성이가 된 하빈이었다. 장태수는 직업적 감각으로 하빈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추궁했고 그녀를 의심하게 됐다. 그의 아내 윤지수(오연수)는 그런 장태수를 못견뎌하다 이혼했고, 그녀에게 덥친 비극 속에 서서히 무너져 결국 자살했다. 장태수는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하빈과 어떻게든 잘 지내보려 애쓰지만, 어찌된 일인지 자신이 수사하는 범죄와 자꾸만 연루된다.

 

직업적으로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파고 들어야 하는 게 그의 직업이다. 장태수는 딸이 설혹 범인이라고 해도 결코 물러서거나 포기할 그런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하빈 역시 만만치가 않다. 범죄현장에 자꾸만 하빈이 있던 정황과 증거들이 발견되고, 하빈 역시 그것들을 은폐하려는 것 같은 행동을 한다. 프로파일러의 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너무나 숨막히는 일이 아니냐고 친구가 말했을 때 그녀는 “거짓말을 더 잘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진실을 파고드는 프로파일러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며 더 정교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된 딸과의 대결구도가 생겨난다. 

 

그래서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장태수가 진실을 추적하는 범죄스릴러이면서, 동시에 그의 가족에 닥친 비극의 진실을 풀어가는 이야기가 된다. 문제는 그 의심의 대상이 가족이라는 점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그래서 끝없이 가족 간의 갈등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과연 장태수는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감내하며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까. 가족이면 무조건 믿어줘야 한다는 죽은 아내 윤지수의 말이 자꾸만 그의 귓가에 울려퍼지지만, 장태수는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또한 이 드라마는 프로파일러들이 사건을 봐야 하는가 아니면 사람을 봐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도 던져 놓는다. 이를 대변하는 두 인물은 장태수의 팀에 들어온 이어진과 구대홍(노재원)이다. 이어진은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사건만을 봐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구대홍은 피해자든 가해자든 그 마음을 들여다봐야 사건의 진실이 보인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실 프로파일링의 선택지가 아니다. 사건과 동시에 사람도 봐야 하는 게 그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장태수처럼 그 사건이 가족과 관계되어 있다고 여겨질 때 이런 직업적인 균형감각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장태수는 과연 의심하면서도 가족이라 회피했던 딸을 이제 마주하고, 그녀의 굳게 닫힌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바로 이 딜레마에 빠져 있는 장태수의 시선을 따라간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갈수록 미로 속에 갇혀 버린다. 딸을 끝까지 의심해야 하는 장태수의 그 미칠 것 같은 갑갑함과 궁금증이 고스란히 시청자들에게 전이된다. 그래서 시청자들의 추리가 시작된다. 갑자기 자살하기 전 윤지수가 백골사체로 발견된 수연을 땅에 묻는 장면까지 떡밥으로 제시되자 시청자들은 또다시 충격에 빠진다. 하빈만이 아니라 윤지수 또한 과거 사건들과 연루된 숨겨진 진실이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장태수가 어서 딸 하빈의 굳게 닫힌 방을 열고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주기를 바라게 된다. 또 이 가족의 비극과 맞닿아 있을 것 같은 윤지수에게 과거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밝혀주기를 바라게 된다. (글:일간스포츠, 사진:MBC)

‘이토록 친절한 배신자’로 돌아온 한석규, 그 인간적인 얼굴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98)’에서 정원(한석규)은 그렇게 조용히 다림(심은하)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한다. 어려서 하나 둘 아이들이 돌아간 텅 빈 운동장에 앉아 모두 그렇게 떠나갈 것이라는 걸 묵묵히 받아들이던 정원은 시한부 인생이라는 판정도 그렇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담담한 체념을 뚫고 어느 날 갑자기 다림이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오고 평온했던 일상은 흔들린다. 더 그와 함께 웃고, 떠들고, 살고 싶어지는 것. 하지만 그는 결국 죽음을 받아들이고 다림에게 좋은 기억으로만 남게 하기 위해 아무 말 없이 떠난다. 그는 사라졌지만 그의 마음은 사진으로 남았다. 사진관 앞에 전시된 액자 속에서 수줍게 웃는 다림의 사진으로. 눈내린 어느 날 다림은 그 사진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는다. 

 

다림이 정원과의 기억을 그 액자 속의 사진으로 기억하는 것처럼, 20년이 넘게 흘렀지만 한석규라는 배우는 이 영화로 여전히 기억된다. 너무나 평범하고 수수하지만 다정함이 묻어나는 얼굴에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 환하게 웃고 있지만 그 뒤편에는 죽음 같은 무거운 비극이 숨겨져 있어 보다보면 어딘가 마음이 촉촉해지는 그런 배우가 바로 한석규다. 특히 이런 따뜻한 웃음 속에 담긴 어딘가 쓸쓸한 삶의 비의 같은 것들은, 밝고 뜨겁던 여름을 지나 이제 슬슬 스산해져가는 날씨에 하나둘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을 닮았다. 그래서 가을이 오면 더더욱 그가 떠오른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우리네 삶이 조금 스산해도 괜찮아. 서로 따뜻하게 웃어주는 우리가 있잖아. 

 

그가 최근 주연을 맡은 MBC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의 장태수 역시 한석규 특유의 비감이 효과를 발휘하는 캐릭터다. 그는 범죄현장을 분석하는 일로 이력이 난 베테랑 프로파일러다. 그런데 그의 딸 하빈(채원빈)이 자꾸만 수상하다. 사이코패스 성향을 보이는 하빈에 대한 의심은 어려서부터 시작됐다. 캠핑을 갔다가 함께 산에 들어간 어린 동생이 절벽에서 추락사한 채 발견됐을 때 하빈은 피투성이였다. 가족이면 무조건 믿어줘야 한다는 아내 윤지수(오연수)와 달리 그는 프로파일러로서 하빈을 의심한다. 혹 어린 동생을 그가 죽인 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점점 가족 사이에는 균열이 생기고, 결국 이혼한 아내가 자살하게 되면서 장태수와 그의 딸 하빈의 관계는 더 냉담해진다. 또다시 벌어진 살인사건 속에서 자꾸만 하빈의 흔적들이 발견되면서 장태수는 더더욱 괴로워한다. 진실을 향해 나가는 길이 그에게는 가시밭길이다. 어쩌면 딸이 살인자라는 걸 자기 손으로 밝힐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사건만큼 그 안에서 겪는 인물들의 감정과 심리가 중요한 작품이다. 한석규는 바로 이 장태수라는 인물이 가진 감정들을 고스란히 시청자들이 빠져들게 해주는 연기를 선보인다. 주름진 얼굴이 잔뜩 찡그러진 채 화면 가득 음영을 담아 전해질 때, 시청자들은 그의 고통을 공감하게 된다. 어떻게든 사건의 진실이 밝혀져 그를 미치게 만드는 의심(그것도 가족에 대한 의심이다)을 끝내주기를 시청자들은 바라게 된다. 부디 그가 두려워하는 일이 진실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원리에 대해 쓴 ‘시학’에서 비극이란 한치 앞을 모르는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에서 만들어진다고 했다. 한석규는 바로 이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배우다. 그래서 딸을 의심하는 프로파일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네 삶의 비의까지를 담아내는 깊이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과연 우리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가. 미국의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1969년에 쓴 ‘죽음과 죽어감’에서 사람이 죽음을 선고받고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5단계로 구분했다.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이 그것이다. 장태수가 처한 비극을 한석규는 이 5단계 감정들을 끄집어내 표현한다. 때론 부정하고 분노하다가 때론 타협하고 결국 절망 끝에 우울에 빠지고 수용하는 그런 감정들이 그의 얼굴 표정 하나하나에 새겨진다. 

 

한석규를 영화계에서는 ‘90년대 한국영화의 페르소나’라고 부른다. 80년대의 페르소나가 안성기라면 90년대는 바로 그가 우리 영화의 곳곳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보였던 얼굴이라는 뜻이다. 보편적인 평범한 얼굴이지만 그래서 그는 ‘은행나무 침대’ 같은 사극으로, ‘닥터 봉’ 같은 로맨틱 코미디로, ‘초록물고기’나 ‘넘버3’ 같은 사회극적 요소가 강력한 장르물로, 또 ‘쉬리’ 같은 액션에서도 모두 작품에 잘 스며드는 연기를 선보이며 90년대를 구가했다. 그리고 그의 존재감은 최근에는 드라마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뿌리깊은 나무’, ‘비밀의 문’ 같은 사극은 물론이고 ‘낭만닥터 김사부’ 같은 작품의 김사부 역할로 시대의 아이콘이 됐다. 특히 무려 시즌3까지 방영된 ‘낭만닥터 김사부’나 왓챠에서 방영됐던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같은 작품을 통해 특유의 비감을 잘 표현해내는 저력을 선보였다. 어딘지 쓸쓸하지만 그 삶의 비극을 받아들인 자의 밝음이 담긴 비감이 그것이다.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는 암 투병을 해 점점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된 아내를 위해 특별한 레시피를 찾고 준비하는 남편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한석규는 바로 그 남편 역할을 맡았다. 점점 죽어가는 아내를 보며 아파하고 안타까워 하면서도 단 한 숟갈이라도 먹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애쓰는 이 인물에서도 저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이나,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의 장태수가 겹쳐진다. 결국은 겨울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이를 담담히 맞이하는 자의 쓸쓸함 같은 것이랄까. 하지만 그 쓸쓸함이 지나고 나면 다시 삶이 만발하는 봄이 올거라는 걸 그 다정함과 따뜻함으로 전해주는 배우. 스산한 가을이 오면 그가 떠오르는 이유다.(글:국방일보, 사진:MBC)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