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의 폭주, 어째서 막장이 떠오를까

 

SBS 월화사극 <대박>이 폭주하고 있다. 그 폭주는 이인좌(전광렬)의 폭주를 닮았다. 그가 연령군(김우섭)을 찾아가 칼로 찔러 죽이는 장면은 이 사극이 이제 갈 데까지 갔다는 걸 말해준다. 연령군이 누군가.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비록 서자지만 숙종이 그토록 아끼던 자식이 아닌가. 그런데 일개 이인좌 같은 인물의 폭주에 의해 허망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건 너무 과한 허구다.

 

'대박(사진출처:SBS)'

이인좌라는 인물 역시 역사적 기록에 남아있는 실존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이런 설정은 지나치다. <대박>은 이인좌라는 인물의 힘이 중요한 게 사실이지만, 너무 이 인물을 크게 그려놓았다. 연잉군(여진구) 따위는 애송이로 바라보는 존재이며 심지어 한 나라의 임금인 숙종과도 대적하는 엄청난 존재다. 이제는 왕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칼로 찔러 죽이는 희대의 인물로 그려졌다. 아무리 허구라고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서고 있다.

 

문제는 허구조차도 개연성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대박>의 여주인공은 담서(임지연). 그런데 담서의 죽음은 너무나 허망하고 또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사실은 이인좌라는 걸 알고 있는 담서는 복수를 하려던 인물.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숙종의 명을 받고 이인좌를 죽이러 온 김체건(안길강)의 앞을 그녀가 막아선다. 그가 자신을 제자로 삼은 것만은 진심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란다. 그것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기꺼이 김체건의 칼에 맞아 죽으며 이인좌를 살려달라고 말하는 건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인물의 일관성이 깨져버린 것이다.

 

그걸 보고 역시 이인좌를 처단하기를 그토록 원해왔던 백대길(장근석)이 구생패를 던지며 갑자기 그를 살려달라고 김체건에게 말하는 대목도 그렇다. 그는 갑자기 살인검 활인검이야기를 꺼내며 담서가 목숨을 걸고 부탁한 일인데 그를 살려달라고 말한다. 이것 역시 일관성이 없는 캐릭터의 행보다. 모든 비극이 이인좌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잘 알고 있는 대길이 담서의 죽음과 부탁(이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이지만)으로 이렇게 이인좌를 살려 달라 하는 대목이 이해될 수 있을까.

 

앞서 이미 죽은 것으로 알고 있던 대길의 아버지 백만금(이문식)이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며 돌아오는 이야기에서도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지만, 여주인공으로서 훨씬 더 많은 역할이 가능했을 담서가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 대목에서는 작품이 너무 쉽게 인물을 죽이고 살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박>에도 일종의 데스노트같은 것이 있는 것인가.

 

다른 게 막장이 아니다. 충분히 납득될 만큼의 개연성이 없는 것, 인물의 일관성이 사라지는 것 그리고 궁극에는 인물들이 마치 작가의 노리개처럼 별다른 이유 없이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 이런 전개가 바로 막장이다. 이런 막장이 목적하는 건 이야기의 흐름 자체가 아니라 자극이다. 충격적인 장면들을 연달아 보여줘 주목을 끌려는 것이지만 이런 식의 자극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던 시대는 지나갔다.

 

<대박>의 시청률은 결국 8.5%(닐슨 코리아)로 월화극 꼴찌로 전락했다. 시청률에서 유리한 사극이고, 장근석, 여진구, 전광렬, 최민수 같은 쟁쟁한 캐스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된 건 결국 폭주하는 이야기 때문이다. 연기는 모두 더할 나위 없이 좋았으나 이야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개연성을 잃어가고 있다

<대박>의 무리수, 운빨에 맞춰버린 전개라니

 

역사를 상상력으로 재해석하거나 바꾸는 건 이제 그다지 큰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물론 이러한 역사 왜곡의 문제가 어느 선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따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SBS <대박>이 그리는 다소 무리한 전개들, 이를테면 숙빈 최씨(윤진서)가 도박에 빠진 남편이 있었다거나, 그 남편 백만금이 숙종(최민수)과 도박을 벌여 숙빈 최씨를 얻었다거나 하는 것 같은 설정은 차치해두고 이야기하자.

 

'대박(사진출처:SBS)'

하지만 드라마가 내적 개연성을 따라가기보다는 너무 인위적인 흐름이 느껴지는 문제는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문제다. 숙종의 명으로 이인좌(전광렬)가 형장에까지 나오게 되고 형 집행이 막 벌어지려는 그 순간 마침 숙빈 최씨가 사망하면서 집행이 유보되는 이야기는 너무 인위적이다. 대길(장근석)과 연잉군(여진구)이 그토록 노력해 잡은 이인좌가 아닌가. 하지만 그가 거의 죽음 직전에 살아나는 이유는 한 마디로 운이 좋아서다.

 

어쨌든 <대박>이라는 드라마가 도박을 다루고 그래서 운이라는 것이 중요한 동기나 결과에 작용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극적 상황을 애써 만들어놓고 그저 운이 좋아 인물을 살린다면 거기에 몰입해 보고 있는 시청자들은 어떤 생각이 들까. 이인좌라는 인물이 억세게 운이 좋은 인물이니 그렇게 살아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드라마가 운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합당한 근거와 이유들을 대주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운이라는 것이 그저 하늘에서 점지해준 어떤 것이 아니라, 최소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우연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들의 행동과 부딪침, 그로 인해 생겨나는 화학작용 등을 좀 더 세세하게 다뤄주는 게 오히려 시청자들에게는 더 흥미진진함을 안길 수 있지 않을까.

 

이 사극이 그리고 있는 숙종은 그 캐릭터만 보면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신하들과 세자는 명분을 찾지만 숙종은 그저 명령한다. “짐이 말하고 있노라하고 엄포를 놓으면 그 많은 신하들의 반대는 그대로 수그러든다. 그토록 이인좌를 붙잡을 명분을 찾기 위해 대길과 연잉군이 고생을 했지만 숙종은 한 마디로 명분 따윈 필요 없다며 당장 그를 잡아넣으라고 명하고, 며칠 후 능지처참시켜버리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숙종 앞에 그간 유약함을 보이던 경종(현우)이 이인좌의 형 집행을 유보시키고 그를 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에 대노한 숙종은 칼을 뽑아 들고 경종을 향해 다가와 죽고 싶으냐며 으름장을 놓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순간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져버린다. 그간 지병을 앓고 있던 것이 마침 그 순간 터져버린 것이지만, 이런 전개 역시 시청자들에게는 너무 우연적인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이런 우연의 반복과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굴러가기보다는 작가에 의해 개연성 없이 전개되는 걸 계속 보다보니, 이미 죽은 걸로 알고 있던 대길의 아버지 백만금(이문식)을 다시 살려놓은 것 역시 작가의 인위적인 설정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애초에 백만금이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복선을 우리는 과연 봤던가. 갑자기 이인좌가 감옥에 갇혀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자 죽었던 인물을 다시 살려놓은 느낌이다. 대길에게 아버지를 보고 싶으면 자신을 살려내라고 엄포를 놓는 이인좌의 이야기를 그리기 위한 목적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제 아무리 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이야기 전개가 어떤 내적 개연성으로 흐르지 않고 작가의 자의적인 의도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은 <대박>에 시청자들이 쉽게 몰입하지 못하는 이유다. 주인공들은 저마다 굉장한 일에 빠져든 듯 진지하지만 그들은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육룡이 나르샤>에서 육룡은 누구 하나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저마다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대박>의 인물들은 심지어 대길이나 연잉군도 그리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뭘까.

 

그것은 그들 캐릭터가 스스로 가진 내적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무언가에 의해 휘둘리거나 열심히 능동적으로 움직이려 했는데 사실 알고 보면 이인좌의 손바닥 위라는 걸 발견하고는 허탈해한다. 그들이 느끼는 허탈함은 고스란히 시청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열심히 몰입해 들여다봤는데 그게 그들 캐릭터의 내적 힘에 의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작가의 손바닥 위에서 감정놀음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시청자들은 허탈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대박>의 전광렬, <옥중화>의 전광렬

 

전광렬은 아마도 요즘 가장 바쁜 연기자가 아닐까.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두 편의 사극에 출연하고 있다. SBS 월화사극 <대박>MBC 주말사극 <옥중화>가 그 작품들이다. 겹치기 출연이 만들어내는 혼동은 이런 선택이 과연 괜찮은 것인가를 묻게 하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흥미로운 건 두 사극이 전광렬을 활용하는 방식이 너무나 다르다는 점이다.

 

'대박(사진출처:SBS)'

전광렬이 이렇게 무리해서까지 동시에 두 작품을 소화하는 까닭은 이 작품의 작가나 PD와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 전광렬은 <대박>의 권순규 작가가 쓴 <무사 백동수>, <불의 여신 정이>에 모두 출연했다. 물론 <옥중화>를 만들고 있는 이병훈 감독과 최완규 작가와는 꽤 많은 작품들을 해왔다. 최완규 작가의 데뷔작인 <종합병원>에서부터 최근 <빛과 그림자>까지 전광렬은 출연해왔고 <허준>처럼 이병훈-최완규 콤비가 해낸 사극에도 출연했었다.

 

전광렬의 연기자로서의 색깔은 독특하다. 물론 젊은 시절에 그는 연기도 출중했지만 훈남의 외모로도 어필하던 스타였다. 그래서 주연이 당연했지만 차츰 나이가 들어 중견의 자리에 오면서 존재감 강한 조연의 역할을 맡아왔다. 그런데 흥미로운 전광렬은 조연 자리에 있으면서도 주연 못지 않은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빛과 그림자>에서 그는 악역이었지만 장철환을 미친 존재감으로 만들며 주역인 안재욱을 압도하기도 했다. <왕과 나>에서도 주인공인 김처선(오만석)보다 내시부 수장인 조치겸(전광렬)이 주목받는 아이러니를 만들기도 했다.

 

물론 조연이 주연보다 주목받는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시각은 양갈래로 갈라진다. 요즘처럼 주조연의 구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진 시대에 그건 미친 존재감으로 칭찬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드라마가 균형 있게 흘러가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대박>에서 전광렬이 연기하는 이인좌라는 인물은 역사 속에 이인좌의 난으로 유명한 실존인물이다. <대박>은 전면에 대길(장근석)과 연잉군(여진구)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인좌와 숙종(최민수)의 대결구도가 더 팽팽한 사극이 되었다. 대길과 연잉군이 연합하고 그들이 형제인 사실을 알게 되는 등 출생의 비밀에 얽힌 이야기들이 등장하지만 이 모든 걸 조종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이인좌와 숙종이다.

 

문제는 이인좌라는 인물의 존재감이 거의 한 나라의 왕인 숙종과 대결할 정도로 크게 그려진다는 점이다. 물론 <대박>이라는 사극이 허구를 덧대 만들어낸 대결구도라고 하지만 이런 정도의 상상력을 지금의 시청자들이 납득하기는 쉽지 않다. 이인좌의 존재감이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대길과 연잉군이 주변으로 밀려나는 듯한 느낌은 <대박>이 가진 최대 약점이 되었다. 좀더 명쾌한 주인공들의 활약상이 그려지기보다는 이미 이인좌의 손에서 그려진 대로 흘러가는 듯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반면 <옥중화>에서 전광렬이 연기하는 박태수라는 무술고수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전옥서의 비밀감옥에 오랜 세월 갇혀 있으면서 주인공인 옥녀(진세연)에게 무술을 가르쳐주는 인물이다. 역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가상인물이지만 사극의 이야기와 잘 어우러져 있다. 무엇보다 이 인물은 확실한 자기 존재감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온전히 옥녀라는 캐릭터에 힘을 보태주는 역할이기도 하다. <옥중화>가 활용하고 있는 전광렬의 연기는 과하지 않고 적절하다. 이런 점들은 아마도 이 사극이 훨씬 안정된 느낌을 주는 이유일 것이다.

 

전광렬이라는 배우를 활용하는 방식은 <대박><옥중화>가 사뭇 다르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들이 쓰고 있는 이인좌라는 캐릭터와 박태수라는 캐릭터의 무게감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캐릭터 활용이 주인공을 그림자로 덮어버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빛나게도 하는 건 너무나 큰 결과의 차이가 아닐까. 공교롭게도 사극이라는 장르에 겹쳐져 출연하고 있는 전광렬이라는 배우의 활용법은 그래서 주조연이라는 역할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대박>의 전광렬과 최민수에 가린 장근석과 여진구

 

SBS 월화드라마 <대박>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최근 들어 사극의 주인공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인 경우는 낯설지 않다. <육룡이 나르샤>가 조선 개국의 이야기에 여섯 용을 등장시킨 건 한 주인공의 관점이 아니라 여러 관점들을 교차시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대박>은 그 주인공이 명확하다. 숙종(최민수)과 숙빈최씨(윤진서) 사이에 태어나 어린 시절 저자거리에 버려진 대길(장근석)이 그 주인공이다.

 

'대박(사진출처:SBS)'

이 점은 <대박>의 포스터를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대길 역할의 장근석이 정중앙에 서 있고 바로 뒤에 훗날 영조가 될 연잉군(여진구)이 그리고 그 뒤에 숙종과 이인좌(전광렬)가 서 있다. 무엇보다 대길이 연잉군과 공조해가며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얽혀있는 연원들을 풀어가고 그런 운명을 만든 이인좌에게 복수하려는 내용이 줄거리라는 점에서 <대박>의 주인공은 이 여정을 이끌어가는 대길이 분명하다.

 

이렇게 <대박>의 주인공이 대길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굳이 강조하는 까닭은, 이 사극이 그러나 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장면들만 놓고 보면 대길의 분량이 많고 그와 연잉군이 공조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대길이 이인좌와 맞서기 위해 육귀신(조경훈)과 골사(김병춘)를 하나하나 도장 깨기하듯 투전판 깨기를 하고 나면 그것이 결국은 이인좌가 이미 다 예상한 손안의 게임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알고 보면 이인좌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대길이라는 청춘이 지금까지 고난과 성장을 거듭해온 그 이면에는 모두 이인좌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인좌는 범 새끼가 아니라 범이 되라며 대길을 칼로 찔러 벼랑에서 밀어 떨어뜨린다. 이인좌에 대한 복수심으로 대길은 성장하고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나 복수의 행보를 보이는데 그것이 결국은 모두 이인좌가 깔아놓은 판 위에서 그의 예상 시나리오대로의 결과라는 것. 드라마는 세상을 통찰하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인좌라는 특별한 인물이 한 시대를 어떻게 농단했는가를 다루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사극에서 이처럼 어른의 농단에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청춘의 모습은 대길만이 아니다. 연잉군 역시 금난전권 폐지같은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펼치고 싶지만 그 때마다 그는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 직면하고, 아버지인 숙종에게 불려가 세상이 네 뜻대로 그렇게 될 듯싶으냐?”라는 식의 무시를 당한다. 그리고 연잉군이 무엇을 하고 있다는 걸 숙종은 거의 모두 꿰고 있으며, 심지어 그를 도발하면서 자신의 뜻대로 이 판을 움직이려 한다.

 

결국 <대박>의 이야기는 그래서 전면에 대길과 연잉군이 갖가지 시대의 어둠과 싸워나가는 모습을 그리지만, 그 실제적인 대결은 숙종과 이인좌라는 그 배후의 인물들에 의해 계획된 것들처럼 보인다. 대길이 백성들의 고혈을 빠는 육귀신 같은 인물을 무너뜨리는 이야기는 흥미롭고 통쾌한 면이 있지만, 그것이 결국 이인좌의 생각대로의 결과라는 걸 아는 순간 맥이 빠지게 된다.

 

그래서 <대박>의 이야기는 마치 숙종과 이인좌가 두고 있는 체스판에 대길과 연잉군, 나아가 담서(임지연) 같은 청춘들이 하나의 말로서 등장하고 있는 듯한 구도를 만들고 있다. 이런 구도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거기에는 몇 가지 추정이 가능하다.

 

첫 번째는 사실 대길과 연잉군 중심으로 움직여야 하는 이야기가 엉뚱하게도 숙종과 이인좌의 캐릭터가 강해지면서 그쪽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의심할 수 있는 건 초반 장희빈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숙종의 캐릭터가 너무 강렬해 다른 캐릭터들이 주목되지 않을 정도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두 번째는 최민수와 전광렬이라는 배우의 강렬한 연기가 어떤 면에서는 장근석과 여진구의 존재감마저 덮어버린 면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러 연기자들의 연기가 조합이 되어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드라마에 있어서 이런 연기력을 바탕으로 한 독주는 바람직한 건 아니다.

 

세 번째는 이 구도를 작가가 의도했다는 것이다. 숙종과 이인좌라는 어른을 대변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짜놓은 판 위에서 대길과 연잉군 같은 청춘들이 처음에는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다가 후에 이를 뒤집는 이야기를 그리려 했을 수 있다는 것. 이 관점으로 보면 <대박>은 최근 <육룡이 나르샤><사도> 같은 여러 사극들이 다루었던 어른과 청춘의 대결구도를 가져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도대체 무엇이 주인공인 청춘들과 주변 인물들 사이의 힘의 균형을 깨버린 것일까. 필자의 생각은 이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거라는 점이다. 현실에 더 적응되어 있고 판세를 읽는 능력이 뛰어난 노회한 어른들은 청춘들을 때론 도발하고 때론 다독이면서 자신들의 의도대로 움직이려 한다. 그것은 <대박>이라는 드라마 속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이 드라마의 중견연기자와 젊은 연기자 사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렇게 주인공인 청춘들이 숙종이나 이인좌 같은 어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움직이고, 나아가 이들과 좀 더 명쾌하게 대적하는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사극을 보는 시청자들이 느끼는 답답함이다. 이 답답함은 물론 지금의 청춘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지만, 아마도 시청자들은 드라마에서는 조금 다른 판타지를 원했을 수 있다.

 

고구마보다는 사이다를 더 요구하는 요즘, 이런 판타지가 아닌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구도는 시청률에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그 청춘의 답답함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은 이 사극이 가진 미덕일 것이다. 대길과 연잉군이 아니 이들을 연기하는 장근석과 여진구의 안간힘이 느껴질수록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지는 건 그래서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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