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 가는 <객주>, 도 넘은 아이에 대한 집착

 

왜 이토록 아이에 대한 쟁탈전을 반복하는 것일까. KBS <장사의 신 객주(이하 객주)>의 아이 쟁탈전에 대한 집착이 도를 넘었다. 마치 이 사극 속의 육의전 대행수 신석주(이덕화)가 아이에 대해 집착하는 모습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처럼, ‘장사의 신이라고 떡 하니 문패를 박아놓은 드라마가 장사는 안하고 아이를 두고 벌이는 쟁탈전이 상식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장사의 신 객주(사진출처:KBS)'

덕분에 이야기는 산으로 가고 있고, 괜찮았던 캐릭터들은 점점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 국사당 마마로서 전체 장사판을 혀 하나로 좌지우지 하던 매월(김민정)은 천봉삼(장혁)이 조소사(한채아)와 혼인을 맺은 일 때문에 질투에 눈이 멀어버렸다. 한 때는 마음 속 연인인 천봉삼을 음으로 도왔던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이제는 그의 아이를 훔쳐 길소개(유오성)가 신석주를 망신 주는 술수를 쓰는 인물로 전락했다.

 

천봉삼과 팽팽한 대결구도를 이루던 신석주도 마찬가지다. 육의전 대행수로서 적수지만 그래도 대인으로서의 풍모를 보이던 그는 천봉삼과 조소사 사이에 태어난 아이에 집착하기 시작하면서 추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매월이 훔쳐 온 아이를 길소개가 그에게 넘겨주고, 김보현(김규철), 민겸호(임호)와 객주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아이의 친부는 사실 천봉삼이라는 것이 폭로됨으로서 대행수로서의 위신은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내 아들이야 육의전을 이어받을 내 아들이야!”라고 소리치며 악쓰는 신석주에게서 한 때 천봉삼의 호적수였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다.

 

원산객주와 길소개의 모략으로 천가객주의 말뚝이(황태)라고 속여 못 먹을 말뚝이를 섞어 팔던 전주객주를 찾아간 천봉삼은 결국 모든 문제들을 풀어나갈 실마리를 잡지만, 마침 온 원산객주가 신석주와 자신의 아이의 일을 얘기하자 모든 걸 집어치고 천가객주로 달려간다. 그나마 장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던 참에 이야기는 다시 아이 쟁탈전 문제로 돌아가 버린다.

 

물론 아이 쟁탈전 문제가 <객주>에서 전혀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어찌 보면 신석주의 유일한 약점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어찌 보면 무모해 보이는 아이 쟁탈전이 감행되고, 그 하나의 약점이 만천하에 드러남으로써 신석주가 육의전 대행수로부터 불신임을 얻게 됐다는 것. 따라서 이 아이 쟁탈전으로 신석주는 뒤로 물러나고 대신 길소개가 전면에 나서게 되는 이야기가 이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신석주가 물러난 마당에 아이 쟁탈전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게 되지 않을까. 이제 본연의 장사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을까. 하지만 길소개라는 인물이 전면으로 나서는 만큼 그것이 온전히 장사에 대한 이야기가 될 지는 의문이다. 길소개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온갖 술수를 다 동원하는 인물이다. 신석주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 하지 않은 캐릭터라는 것이다. 결국 온전한 장사의 대결을 보기보다는 그의 술수와 맞서는 천봉삼의 이야기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객주>에 대한 시청자들의 볼 멘 소리는 장사에 집중된 성공과 실패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면에 벌어지는 온갖 술수들이 너무 과도하게 등장함으로써 이야기의 본말이 흔들리고 있는 것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물론 이런 술수와의 대결이 <객주>가 그리려는 진정한 상인의 길을 말하는 것일 테지만 그것이 너무 과도한 것이 문제다. 과도한 설정의 반복은 자칫 캐릭터의 매력까지 앗아갈 수 있다. 산으로 가고 있는 <객주>. 빨리 제 갈 길을 찾아야 시청자들을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삼시세끼>, 수수밭에 수수노예들은 없다

 

<삼시세끼>는 드디어 수수지옥을 벗어났다. 이서진과 옥택연에 이승기와 김광규라는 두 노예(?)를 충원한 노예 수수F4’는 끝끝내 수수밭에 남은 수수들을 모두 베었다. 그 과정에서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을 보다 못한 제작진까지 모두 수수밭에 투입되기도 했다. 일을 해본 나영석 PD는 뒤늦게 노동 강도가 외외로 세다는 걸 깨닫고는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삼시세끼(사진출처:tvN)'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이 있다. 왜 그들은 굳이 그 수수밭을 끝까지 베었을까. 수수를 갖고 뭔가 만들어먹는 것도 아니다. 설혹 그 수확한 수수를 내다 판다고 해도 그런 돈벌이가 프로그램에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왜 수수에 그렇게 집착했는가가 궁금해진다.

 

그 의문은 그러나 의외로 쉽게 풀린다. 그 수수밭을 베는 장면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엄청난 수수밭 앞에 마름처럼 나타난 나PD고기 한 근에 수수 한 가마라고 얘기하는 장면은 우습다. 그것은 물론 예능의 코드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또한 제작진과 출연진 사이에 일종에 암묵적으로 허용된 놀이를 하는 듯한 뉘앙스도 들어있다. 고기를 먹으려면 수수를 베어야 하는 놀이.

 

여기에는 <삼시세끼>라는 프로그램이 가진 놀라운 매력의 원천이 숨겨져 있다. 많은 이들이 <삼시세끼>가 시골 라이프를 권장하는 귀농 프로젝트처럼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사실 <삼시세끼>와 귀농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나영석 PD 또한 인터뷰를 통해 밝힌 사실이다. <삼시세끼>는 시골에서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바쁜 도시생활에 지쳤을 때 나도 하루 정도는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 단순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그 소박한 소망을 채워준다.

 

이것은 생활이라고 하기 보다는 23일 정도의 작은 여행이라고 보는 편이 낫다. 그것은 아마도 나영석 PD가 일관되게 해온 여행이라는 소재의 또 다른 버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삼시세끼>는 이처럼 먹고 살아야 하는 실생활과는 조금 거리를 둔 프로그램이다. 거기서 출연자들은 <12>처럼 한 끼를 먹기 위해 돈을 벌거나 미션을 수행할 필요는 없다. 필요하다면 읍내에 나가 음식 재료들을 사와도 된다. 나영석 PD는 의외로 거기에 기꺼이 주머니를 열어준다.

 

만일 <삼시세끼>귀농처럼 먹고 살아야 하는 리얼리티를 갖고 만들어졌다면 이처럼 대중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현실 자체보다는 그것을 잠시 벗어나 소소한 삶이 주는 또다른 풍요로움을 누려보게 한 것이 이 프로그램의 중요한 성공 포인트다. 그래서 그들이 하루 종일 삼시세끼를 챙겨먹으며 하는 일들은 하나의 어른들을 위한 소꿉장난의 성격을 갖는다.

 

소꿉장난이라고 하면 어딘가 너무 한가로운 이야기가 아니냐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이 일이나 생산성에서 벗어나 온전히 놀이로서 접하는 <삼시세끼>의 세상은 우리에게 그동안 잊고 있던 삶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면이 있다. 그토록 외치던 생산성이 사실은 우리를 삶의 주인이 아닌 노예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거기서 깨닫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성과 무관한 수수밭 베는 일에 투입된 네 사람을 노예라 부르고 수수 F4’라고 부르지만 거기 진짜 노예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을 했다기보다는 하나의 게임 같은 놀이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수수밭은 그래서 노동의 공간을 놀이의 공간으로 바꿔놓은 <삼시세끼>의 상징물처럼 보인다. 그들은 물론 허리가 빠지게 수수를 베었지만 그것이 고기 한 점이라는 흥미로운 놀이 때문이라는 점은 이 수수밭의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낸다. 늘 일과 생산성 관점으로만 살아온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이런 놀이인지도 모른다. 어른들을 위한 소꿉장난은 그래서 어쩌면 그 어떤 위로나 위안보다도 더 크게 다가오기도 한다.

 

<비밀>, 집착을 버릴 때 더 커지는 것

 

가지려는 것보다 놓아주는 것이 더 큰 사랑이다. <비밀>의 엔딩은 그 사랑의 진정한 비밀을 알려주면서 마무리 되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강유정(황정음)은 행복을 위해 아들을 놓아주었고, 그토록 조민혁(지성)을 갖기 위해 심지어 자신을 망가뜨리기까지 한 신세연(이다희)은 그를 놓아주었다. 조민혁은 사장직을 버렸고 안도훈(배수빈)도 신세연과 성공에 대한 비뚤어진 욕망을 내려놓고 자신의 과오를 모두 인정했다.

 

'비밀(사진출처:KBS)'

결국 이 모든 사건들은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민혁에 대한 신세연의 집착이 그렇고, 안도훈의 성공에 대한 집착이 그러했으며, 박계옥(양희경)의 아들에 대한 집착 또한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결국 강유정이라는 캐릭터는 이 집착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받은 인물이면서, 동시에 이 집착의 고리들을 끊어내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는 조민혁에게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했고, 안도훈에게 정의를 알게 했으며, 박계옥에게는 진정한 모성애를 보여주었다.

 

“세상에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다만 어떻게 갚으며 살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는 이 드라마가 갖고 있는 주제의식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준다. 누구나 죄를 지으며 살아가지만 거기에 대해 어떻게 용서를 구하고 인간답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것. 강유정이 왜 그토록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는가를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죄 없는, 아니 그 죄를 비밀로 갖고 있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 비밀을 드러내고 용서를 구했을 때만이 구원이 있다는 것.

 

드라마는 강유정이 법정에 선 장면으로 시작해서 안도훈이 법정에 서는 장면으로 끝난다. 억울한 강유정이 차츰 현실을 깨달아가고 그래서 결국에는 정의가 실현되는 과정을 구조적으로도 염두에 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애초에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시작했다는 얘기다. 첫 회에 벌어진 사건에 깔린 숨겨진 이야기들이 마지막 회에 드러날 수 있는 건 이 완결된 이야기 구조 덕분이다.

 

<비밀>은 드라마가 참신해질 수 있는 비밀을 알려준 드라마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통속극에 가까운 평범한 멜로와 복수극이 될 수도 있었던 소재였지만, 그 안에 시청자가 궁금해 할 수 있는 비밀 코드를 담아냄으로써 이야기를 팽팽하게 만들었고, 그 비밀 속에 사회와 정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집어넣음으로써 이야기가 통속 치정극으로 흘러가게 하지 않았다. 결국 참신한 드라마란 전혀 새로운 소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치밀하게 다루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이야기로 변주하느냐가 관건이라는 걸 <비밀>은 보여주었다.

 

또한 <비밀>은 드라마의 성패가 단순히 작가의 시청률로 만들어진 지명도나 원고료 액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시청률에 올인하면서 자기복제나 심지어 막장도 서슴지 않는 중견작가들의 세상 속에서, 신인작가의 과감한 발굴이 얼마나 드라마를 참신하게 만들어주는가를 <비밀>의 작가들을 통쾌하게도 알려주었다. 이로써 입증된 단막극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비밀>은 그래서 주제의식이 그러하듯이 가지려 애쓰지 않았기 때문에 완성도를 가져갈 수 있었다. 이 드라마는 시청률만을 가지려 하지도 않았고, 그 시청률만을 위해 이름 있는 작가들을 가지려 하지도 않았으며, 연기가 아닌 스타성만을 앞세운 연기자를 세우려 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비밀>이 가지려 했던 것은 작품의 완결성이고 그걸 통해 추구하는 대중들과의 공감대였다. 그것은 결국 <비밀>이 시청률에서도, 무명작가의 이름을 알리는 데도, 또 그동안 평가절하 되었던 연기자를 재발견하는데도 성공한 이유가 되었다.

 

이제 <비밀>은 종영했지만 적어도 이 드라마가 우리네 드라마들에게 던진 질문은 끝난 것이 아니다. 언제까지 스타작가와 스타배우에 힘입어 그저 시청률만 나오면 다라는 식의 드라마 제작 패턴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 시청률을 위해서 자극적인 코드를 계속 복제해 사용하는 퇴행적인 드라마를 반복할 것인가. 몇몇 스타작가와 스타배우들에게 과도하게 집착함으로써 생겨나는 드라마 제작의 양극화를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비밀>은 이 많은 질문들에 이미 스스로 답을 보여주었다. 집착이 오히려 비뚤어진 결과만을 가져오듯 놓아야 산다. 이 반복되는 드라마 패턴에 대한 집착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