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키오>, 이 청춘들이 처한 현실 과연 옳은가

 

SBS <피노키오>에서 최인하(박신혜)피노키오 증후군이라는 이유로 MSC 입사 시험 최종 면접에서 떨어진다. 거짓말을 못한다는 건 기자로서 결격사유에 해당한다는 것이 이유. 그녀를 떨어뜨린 MSC 보도국의 에이스이자 그녀의 엄마이기도 한 송차옥(진경)은 이렇게 말했다. “무수한 거짓말들 위에 떠오르는 게 진실이라고.

 

'피노키오(사진출처:SBS)'

이것은 아마도 우리네 언론이 가진 현실일 것이다. 일단 보도 아이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거짓말이 아니라 그 이상도 해야 하는 게 작금의 언론이다. 과거 송차옥이 보도를 좀 더 임팩트있게 만들기 위해 아이들이 사고를 당한 현장에서 아이 신발(사실은 마트에서 산)을 들고 리포트를 하거나, 홍수보도를 하면서 무릎밖에 물이 안차는 데도 무릎을 꿇고 허리까지 차는 것처럼 꾸며 방송에 내보내는 것. 그런 자극과 연출은 물론 풍자적으로 과장된 것이지만, 아마도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기보다 침소봉대하는 건 지금의 언론이 처한 경쟁적인 현실일 수밖에 없다.

 

엄마이면서도 딸에게 그토록 무정한 송차옥이라는 인물은 그래서 일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인물처럼 극화되어 있다. ‘얼음마녀로 불리는 송차옥은 <피노키오>라는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바로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캐릭터. 그녀는 최달포(이종석)네 가족을 과장 추측 보도로 파탄 낸 기자이기도 하다. <피노키오>는 그래서 이 현실을 대변하는 얼음마녀 송차옥과 그 현실과 대결하는 최달포와 최인하라는 청춘들을 다루고 있다.

 

청춘들이 일의 세계 속으로 들어와 부조리한 세상과 대결하는 이야기는 최근 드라마들의 화두가 된 느낌이다. <미생>의 장그래(임시완)는 도무지 바뀌지 않는 이 지독한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미생이라 치부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무언가 거창한 꿈이나 이상을 더 이상 펼칠 수 없는 현실. 그러니 꿈이나 이상이란 하나의 사치처럼 되어버렸다.

 

따라서 이 미생의 청춘은 세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이 부족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노력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삶에서 위안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그런 위안은 없다. 그렇게 버텨낸 삶의 결과가 바로 오과장(이성민)이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장그래와 다를 바 없는 여전한 미생이다.

 

<오만과 편견>의 청춘 한열무(백진희)나쁜 놈들 잡는 것이 검사의 책무라 생각하지만 검찰의 현실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실감한다. 정의 같은 이상만 갖고 덤볐다가는 오히려 깨지기 십상인 곳이 바로 이 조직의 현실이다. 제 아무리 명백한 심증이 있다고 해도 위로부터 덮으라면 덮어야 하는 게 조직생활의 또 다른 룰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는 문희만(최민수) 검사 같은 인물 앞에서 한열무의 치기는 마치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비춰진다.

 

거짓말이 기자의 덕목이 되는 언론의 현실. 꿈을 갖기보다는 하루하루를 버티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직장의 현실. 또 정의보다 조직의 룰이 앞서는 공권력의 현실. 이건 과연 정상적인 것일까. <미생>이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이런 현실 앞에 서 있는 미생의 청춘들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텨낸다고 완생으로 거듭날 수 없다. 또 완생으로 거듭난다고 해도 그것은 현실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한다. 오히려 현실의 시스템의 공고함을 확인하는 것일 뿐.

 

우리가 <피노키오><미생> 그리고 <오만과 편견>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그 속의 판타지에 열광하다가도, 한편으로 막막함을 느끼게 되는 건 바로 이 어찌 할 수 없을 것처럼 공고하게 구축된 부조리한 현실을 거기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청춘들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연 이런 청춘들 앞을 가로막는 현실은 옳은가. 도대체 무엇이 아무런 잘못이 없는 그들을 현실 앞에 마치 죄인처럼 서게 만들었을까.

 

팩트의 시대에서 스토리의 시대로

사실은 명명백백해 보인다. 하지만 사실이 가진 힘이 너무나 약해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타블로의 이야기다. 한 네티즌에 의해 제기된 학력의혹은 타블로 당사자에게 처음엔 우스워보였을 지도 모른다. 왜 그렇지 않을까. 분명 자신은 대학을 나왔다는데 누군가 나오지 않았다고 얘기한다면 그건 좀 심한 농담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연예인으로서 언제든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다고 여겨온 타블로는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는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언론들이 네티즌이 제기한 학력의혹을 기사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넷 언론들은 점점 경쟁적으로 이를 기사화하면서 여기에 대응을 하지 않는 타블로를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 '수상함'은 곧이어 '사실'로 둔갑한다. 뒤늦게 타블로는 결국 사실을 제시하면 모든 일이 종료될 것이라 생각하고는 몇 가지 증거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웬걸? 사실들은 오히려 의혹을 더 증폭시킨다. 이 놀라운 마술 상자는 증거를 넣으면 넣을수록 더욱 커다란 의혹으로 돌아오는 힘을 보여주게 된다.

왜 한 쪽은 사실이라고 증거를 계속 보여주고 있는데, 다른 한 쪽은 그것이 조작된 것이라고 말하는 걸까. 왜 사람들은 타블로를 믿지 못하는 걸까. 결국 사건은 검찰에게까지 가게 되었다. 상황은 아직 종료된 것이 아니다. 결론이 어떻게 날지도 미지수다. 하지만 이 타블로 사건은 그 진위와 상관없이 우리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이 어떻게 변화해가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타블로 본인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연예인들(실제로 현재 몇몇 연예인들은 이 소통의 문제로 심한 곤란을 겪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 같은 일반인에게도 중요하다.

우리는 팩트(fact)의 시대에서 스토리(story)의 시대로 변화해가는 과정에 놓여있다. 팩트의 시대에 사실 그 자체는 권위를 가진 것이었다. 즉 증거 제시는 그 자체로 사건의 일단락을 맺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스토리의 시대에 상황은 달라졌다. 팩트는 그저 스토리의 재료가 될 뿐이었다. 따라서 이런 정보들이 소문에 의해 증폭되고 변질되는 사건 속에서 그것을 막기 위해 던지는 팩트란 오히려 스토리만을 더 크게 만들기 마련이다. 어째서 이런 왜곡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진원지는 정보의 과잉이다. 팩트의 시대에 정보들은 지금처럼 쏟아져 나오지 않았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인터넷처럼 그 정보를 그대로 보여주는 매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TV나 라디오 같은 매체는 자체적으로 정보가 생산되는 매체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인터넷은 다르다. 이 매체 속에서는 과거 수용자로 존재하던 대중들이 스스로 정보를 생산해낸다. 그래서 정보는 과잉일 수밖에 없다. 이 정보의 과잉은 이제껏 우리가 알 필요도 없었던 어떤 이들의 사적인 생활까지를 정보로 끌어들임으로써 정보를 더욱 과잉되게 만들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일반인들의 사생활이 노출되어 정보로 생산되는 시대. 그리고 이미 트위터나 미니홈피 등으로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의 혼재가 일반화되어버린 시대. 우리는 이 무수히 많아진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한 가지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정보의 선별과 맥락 잇기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쏟아지는 정보들은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못한 채 쓰레기(공해)가 되어버린다. 마치 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들이 있다고 해도 그 별과 별 사이에 어떤 선을 그어서 별자리가 되지 않으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것처럼.

이 정보의 선별과 맥락 잇기의 과정이 바로 팩트가 스토리가 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인터넷이라는 무수한 정보의 별들이 쏟아지는 공간에서 중요해진 것은 그 별이라는 팩트 자체가 아니고, 그 별과 별들이 이어지는 스토리의 별자리다. 카더라 통신이 순식간에 기정사실화되는 것은 그 통신이 제공하는 스토리가 그럴 듯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타블로 사건처럼 그 스토리가 사적인 영역을 침투해들어갈 때 그 힘은 더욱 강해진다. 즉 팩트의 시대에 진실처럼 보였던 공적인 영역은 이미 스토리의 시대로 들어오면서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일반화되면서 연예인들의 신비주의화 경향이 무너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신비주의 콘셉트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사적 영역이 보호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 이상 대중들이 공적영역에 대한 신뢰가 깊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공적으로 발표된 자료에 대해 사적인 의심이 제기될 때, 그 스토리는 더욱 진짜처럼 믿어지게 된다. 간단히 말하면 사적인 내밀함을 정보가 드러낼 때(혹은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 때) 그 정보의 신뢰성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이것은 우리가 종이신문의 콘텐츠를 대하는 것보다 블로그나 트위터의 콘텐츠를 더 신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아주 사적인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하다못해 제품의 기능에 대해 어떤 전문가가 연구결과를 토대로 쓴 신문의 정보들보다, 한 주부가 직접 쓴 사용기가 더 신뢰가 높아진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스토리의 시대가 진실을 매도하는 시대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스토리가 가진 힘은 역기능보다는 순기능이 더 많다. 스토리는 혹독한 현실을 이겨내는 힘이다. 우리가 꿈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스토리를 통해 구체화된 것들이다. 이러한 맥락잇기의 과정을 통해 우리 인류가 발전해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보면 우리 시대에 제기되고 있는 스토리화의 문제는 아주 작고 사소한 부작용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나쁜 스토리가 나쁜 미래를 가져오듯이 좋은 스토리는 더 좋은 미래를 가져올 수 있다.

팩트의 시대에서 스토리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기 때문에 지금 인터넷은 진통을 겪고 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중요한 것은 이 스토리의 시대에 대한 이해다. 어떤 정보의 왜곡이 벌어졌을 때 거기에 대처하는 방식을 이제는 스토리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왜곡이 벌어진 그 사실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왜곡이 말해주는 스토리를 읽어야 한다. 즉 타블로 사건에서 팩트(사실)는 학력의혹이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스토리는 병역문제나 국적문제에 닿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걸 안다면 어떻게 자신이 가진 진실을 대중들에게 전해주어야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지도 고민하게 될 것이다. 언론에서 이런 문제가 불거졌을 때, 늘 하는 태도로서 몇몇 네티즌들을 악플러로 몰아가는 자세 역시 문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정보를 의도적으로 왜곡해 사건의 발단을 만든 장본인은 합당한 법적 제재를 받아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싸잡아 모두를 악플러로 모는 것은 소통을 불통으로 만드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사실이 중요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이제 사실 뒤에 놓여진 스토리를 바라봐야 하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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