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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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브레인', 우리는 왜 하균신에 열광할까

D.H.Jung 2011. 12. 14.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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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인', 이강훈이라는 우리 모두의 트라우마

'브레인'(사진출처:KBS)

신하균은 '브레인'에 등장하며 '하균신'이란 별칭을 얻었다. 그가 가진 발군의 연기력이 한 몫을 한 것이지만, 더 큰 것은 그가 연기하는 이강훈이라는 캐릭터의 힘이다. 별로 착해보이지도 않고 성격이 좋아보이지도 않는 이 인물.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간다. 그의 끝없는 추락이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들고 마음 한 구석을 허물어뜨린다. 도대체 무엇일까. 이 캐릭터의 무엇이 이토록 대중들을 들끓게 만들까.

사실 이강훈에서 떠오르는 캐릭터가 있다. 바로 '하얀거탑'의 장준혁(김명민)이다. 불나방처럼 기꺼이 욕망의 불꽃에 몸을 던지는 인물. 그래서 성공을 위한 동아줄이라면 서슴없이 잡고 '충성'을 맹세하는 그런 지극히 속물적인 인간. 하지만 자꾸만 들여다보면 어딘지 연민이 생기고 오히려 그로 하여금 그토록 성공에 집착하게 만드는 '더러운' 사회의 부조리를 통찰하게 만드는 그런 인물. 이강훈에게선 분명 장준혁의 냄새가 난다.

장준혁처럼 이강훈이 태어난 곳은 개천 중에서도 가장 조악한 개천이다. 가난한 집안, 일찍 집을 나가버린 어머니, 뇌질환으로 수술을 받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 아버지, 다시 돌아왔지만 끊임없이 떠올리기 싫은 과거의 가난을 환기시키는 어머니. 게다가 그 어머니는 자신의 라이벌 서준석(조동혁)네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여동생은 자신의 병원 커피샵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상황. 이 태생적으로 결정된 비운의 가난한 삶은 그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그 트라우마가 성공에 대한 강박을 낳는다. 태생적으로 삶이 결정되는 세상에서 그가 오로지 믿을 수 있는 건 자신의 실력뿐. 그래서 누구보다 더 철저히 실력을 갖추고 그것으로 인정받으려 하지만 세상은 녹록지 않다. 어디 세상이 실력만으로 버텨낼 수 있는 곳인가. 제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조직 내에서의 정치력이 없다면 무용지물인 게 현실이다. 그래서 이강훈도 고재학(이성민)의 밑으로 줄을 서고 충성을 다한다. 하지만 정치로 맺어진 관계란 영원할 수 없다. 고재학은 결국 이강훈을 이용해 먹을 대로 이용해먹고는 팽해버린다.

여기까지는 장준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브레인'이 흥미로운 건, 김상철(정진영)이라는 우리가 흔히 의술이 아니라 인술이라고 부르는 것을 행하는, 마치 히포크라테스가 다시 되살아난 듯한 인물에서 나온다. 그는 끊임없이 이강훈에게 '욕망'이 아니라 '환자'를 위한 의술을 펼치라고 말하고, 바로 그렇게 이강훈을 '인간이 되지 못한' 심지어 '파렴치한' 자로 몰아붙인다. 더 이상 비전이 없는 이강훈은 다른 병원을 알아보려 하지만, 그것마저 김상철 교수가 내린 평판에 의해 좌절된다.

마치 김상철 교수는 천사 같고 이강훈은 욕망에 걸신들린 악마처럼 보이지만, 과연 그렇다고 이 드라마가 진짜 그리는 것이 이런 권선징악일까. 과연 이강훈은 개과천선할 것인가. 그런 결론을 향해 갈 수도 있지만 그것은 너무 단순하고 재미없는 도식이다. 그것보다는 김상철 교수와 이강훈으로 대변되는 선과 악이 뒤집어지는 반전이 훨씬 재미있고, 또 그 반전이 주는 의미도 더 깊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복선은 이강훈 아버지의 죽음이 김상철 교수와 연관되어 있다는 암시를 통해 이미 깔려 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는 이강훈이라는 인물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그것은 이강훈 같은 괴물(?)의 탄생이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이강훈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잘못이다. 이강훈이 그렇게 고통스런 괴물이 된 것은 태생에 의해 비롯된 트라우마(이를테면 아버지의 죽음 같은) 때문이란 점이다. 사실 김상철 교수는 이강훈의 그 괴물 같은 심성을 질책하기만 했지, 왜 그런 욕망에 대한 집착을 갖게 됐는지 이해해보려 한 적이 없다. 수많은 환자들 앞에 자애로운 아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김상철 교수는 정작 자신의 제자인 이강훈이 가진 마음의 병을 치유해주지는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브레인'이 가진 진가가 드러난다. '브레인'은 뇌 질환을 수술하는 외과의사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이 이야기의 겉면에 불과하다. 실제는 이 의사들이 겪고 있는 정신질환이다. 이강훈이 갖고 있는 '욕망에 대한 집착'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이 그의 뇌리에 남긴 트라우마이고, 어쩌면 김상철 교수의 끝없는 환자에 대한 희생과 봉사 역시 젊은 시절 한 때 잘못했던 일이 남긴(이를테면 이강훈의 아버지를 죽게 만든) 깊은 트라우마의 결과일 수 있다. 결국 '브레인'에서 환자는 뇌 질환을 겪고 있는 환자들만이 아니다. 의사들 역시 똑같은 '기억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얘기다.

이강훈이라는 캐릭터가 악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우리네 마음 속의 깊은 공감과 연민을 끌어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네 서민들도 이 낮은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아마도 이강훈 같은 트라우마를 누구나 하나씩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바보처럼 선량해지기보다는 어딘지 악착같이 살아보려 하는 것이 아닌가. '브레인'은 바로 이강훈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한 사람에게 트라우마가 만들어지는 이 사회의 부조리를 끄집어내는 드라마다. 신하균이 하균신으로 불리게 된 것은 바로 이토록 우리네 대중정서를 건드리는 이강훈이란 캐릭터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