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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인간 의사, 봉달희’의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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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에게 의사는 어떤 존재일까. 아주 사소한 병에도 쉽사리 생명을 놓칠 수 있는 연약한 인간에게, 의사란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의사의 말 한 마디에 환자의 상태가 호전되기도 하고 악화되기도 하는 ‘플라시보 효과’는 환자와 의사와의 관계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특히 외과 같은 몸에 칼을 대는 분야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외과를 다루는 ‘외과의사 봉달희’에는 이 ‘신적인 존재인 의사’가 없다. 거기에는 ‘인간인 의사들’만이 가득하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신적인 존재로 믿어왔던 의사가, 실은 우리와 똑같이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기뻐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 이것이 ‘인간 의사, 봉달희’가 주는 재미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의사
‘외과의사 봉달희’가 처음 방영되었을 때, 시청자들은 “도대체 봉달희가 의사 맞냐”는 반응을 보였다. 당장 피를 뽑지 않으면 5분 내에 사망할 환자를 두고 어찌해야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의사를 보고(물론 울릉도 보건소의 검진의지만) 시청자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사의 모습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 그녀가 한국병원 레지던트로 오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심근경색 환자를 소화제 처방해 결국 사망하게 한 그녀는 환자들의 생과 사가 자신의 순간적인 선택에 달려 있다는 중대한 사실에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 살리는 의사보다 먼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의사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 드라마의 갈등상황은 바로 이 중대한 선택 앞에 수시로 놓이게 되는 의사들에게, 일반인으로서의 시청자들이 감정이입되는 순간 발생한다. 이 손에 땀을 쥐고 피 말리는 선택 앞에서 기쁨과 슬픔은 오버랩된다.

죽일 것이냐 살릴 것이냐의 잔인한 문제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치병 드라마’를 뒤집어놓은 상태가 된다. 불치병 드라마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를 다루지만, 이 ‘인간 의사’가 주인공인 드라마는 ‘죽일 것이냐 살릴 것이냐’의 문제를 다룬다. 똑같이 삶과 죽음을 다루지만 ‘불치병 드라마’가 수동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이 드라마는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입장을 취한다. 여기서 드라마는 좀더 철학적이 되고 좀더 역동적인 모습을 띄게 된다. 이건욱(김민준 분)의 말을 빌리면 ‘인간에게 칼을 댈 수 있는 유일한 면허를 가진 인간’, 의사라는 직업 특성 상 환자 앞에서의 모습과 인간으로서의 모습은 괴리를 갖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의사 조문경(오윤아 분)은 아들의 병 앞에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어머니가 된다. 그 두 정체성(의사와 어머니) 사이에서 그녀는 갈등을 일으킨다. 재미있는 것은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에 아들을 부정하던 이건욱이 아들의 병을 알고 아버지이기를 자처하는 장면이다. 이것은 죽음 앞의 한 인간(그것도 아주 가까운)에 대한 의사로서의 안타까움일까 아니면 아버지로서의 애절함일까. 혹은 그 둘 다인지도 모른다. 이 복잡 미묘한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의 감정을 살짝 엿보는 맛, ‘외과의사 봉달희’라는 드라마의 묘미가 아닐 수 없다.

‘인간 의사’의 약점이 만들어내는 드라마
‘멜로 라인’이 있는 드라마로서 ‘무늬만 전문직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우려해왔던 것과는 달리, ‘외과의사 봉달희’는 이 ‘멜로 라인’을 ‘인간 의사’의 갈등 라인 속으로 끌어들인다. “도대체 그 아이의 친아버지가 누구냐”며 조문경에게 핏발을 올리는 이건욱. 늘 자신보다 앞서있는 경쟁자이자 기분 나쁜 존재인 안중근(이범수 분)과 조문경이 함께 가는 장면을 보고 증오 섞인 눈빛을 던지는 그의 모습은 강력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만일 누군가를 살려야할 한 의사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의 살의를 가지고 있다면 상황은 어떻게 될까. ‘인간 의사’의 따뜻한 면모는 때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한다.

‘외과의사 봉달희’는 ‘인간으로서의 의사’를 다루었다. 그리고 그 ‘인간 의사’는 위험천만이 아닐 수 없다. 환자와 의사 사이에 인간 대 인간의 감정이 섞일수록 그 의사는 더 위험해진다. 아무리 능력 있는 의사라도 자기 자식 같은 사람에게 함부로 칼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감정이 조절되지 않는 의사가 칼을 쥔다는 것 역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고민하고 더 신중해지는 봉달희를 보면서 우리는 인간의 어떤 위대한 면모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가 그 모진 의사가 되었던 것도 결국은 자신의 아팠던 과거와 심장 때문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 위험천만한 의사에게 비로소 안심하게 된다. 환자의 입장에 섰던 봉달희야말로 진짜 환자의 아픔을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차갑기만 한 안중근에게서 어떤 알 수 없는 인간미를 발견하기도 하는 것 역시 그가 아직까지 밝히지 않고 있는 과거의 어떤 아픔이 언뜻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인간 의사’를 보여주는 ‘외과의사 봉달희’가 ‘본격적인 병원드라마’의 틀 속에서 멜로 역시 살려낼 수 있을까. 이 기대감 또한 이 드라마를 보는 재미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