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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캐릭터, TV의 아이콘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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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화된 이름으로 규정되는 연예인들

버럭범수, 야망준혁, 야동순재, 애교문희, 내숭달희, 사육해미... 요즘은 이름 두 자와 그 성격을 규정하는 글자를 붙인 ‘아이콘화된 이름’이 대세다. 드라마와 시트콤을 기억해내는데 우리는 굳이 그 긴 제목을 생각해낼 필요가 없다. ‘하얀거탑’대신 야망준혁을, ‘외과의사 봉달희’대신 버럭범수를, ‘거침없이 하이킥’대신 야동순재를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제목보다 더 구체적으로 드라마나 시트콤의 특징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야망준혁에서 떠올려지는 야망을 향해 질주하는 준혁의 모습이나 버럭범수에서 봉달희를 향해 버럭대며 사랑을 표현하는 범수의 모습은 이들 드라마가 현재 보여주고 있는 재미요소를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이름들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고 입에 잘 붙는다는 장점이 있어 인터넷을 통해 혹은 입에서 입으로 무한복제된다.

아이콘만 누르면 되는 시대
인터넷 검색이 일반화된 시대, 이런 이름들은 네티즌의 세례를 받아 새롭게 떠오르는 아이콘들이다. 드라마의 캐릭터를 아는 사람은 전날 드라마를 놓쳤다고 해도 다음날 인터넷에 뜬 검색어로 대충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이 시대 TV컨텐츠의 중심에 캐릭터가 서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드라마는 물론이고 예능프로그램, 코미디 할 것 없이 캐릭터 중심적인 현상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네티즌들의 키워드가 되는 프로그램 중 하나인 ‘거침없이 하이킥’의 성공은 바로 그 캐릭터 지향에서 비롯된다. 또한 ‘무한도전’의 멤버들은 각기 고유의 별명(뚱보-정형돈, 뚱뚱보-정준하, 단신-하하, 외국인-노홍철, 악마의 아들-박명수 등)을 가질 정도의 캐릭터를 통해 웃음을 유발한다.

캐릭터가 TV의 아이콘이 된 것은 그만큼 쏟아져 나오는 컨텐츠가 많은 정보화사회에서 좀더 쉬운 방법으로 컨텐츠를 선별하고자 하는 자연스런 욕구에서 비롯된다. 즉 드라마를 이해하기 위해 내용을 전부 파악하기보다는 특정 캐릭터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더 빠르고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개그 프로그램에서 더 특징적으로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예로 죄민수라는 캐릭터를 들 수 있다. 우리는 ‘개그야’의 죄민수를 떠올리는 것이 그를 스타덤에 올린 코너명, ‘최국의 별을 쏘다’를 기억하는 것보다 쉽다. 이러한 캐릭터 중심적인 경향에서 ‘아이콘화된 이름’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캐릭터를 찾는 데 있어서도 좀더 짧게, 좀더 확실하게!

아이콘으로 성공하고 고통받는 연예인
TV 프로그램들은 이제 캐릭터 창조가 성패의 갈림길이 되었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물론 내용과 떨어진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지만), 약간의 허술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사랑 받는다. 반면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구태의연하거나 호감가지 않는 캐릭터는 프로그램을 망쳐놓는다. 연예인들이 점점 TV 프로그램의 중심 축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이런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에는 작가와 PD가 연예인이란 질료를 선택했다면 요즘은 캐릭터화된 연예인이 프로그램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것은 연예인들의 권력화를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스트레스와 중압감을 양성한다. 이미 캐릭터로 아이콘화된 연예인과 그렇지 못한 연예인 사이의 간극은 점점 넓어질 수밖에 없고 여기서 도태되어간다고 느끼는 연예인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잘 나가는 연예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심적인 압박감을 준다. 개인사생활조차 캐릭터로 아이콘화되어버리기 때문에 그들은 진정한 사생활이 없는 완전한 유리상자 속의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다 문득 설정된 캐릭터 바깥으로 튀어나가는 행동을 했을 때 결과로 오는 것은 아이콘의 상처 혹은 죽음이다.

아이콘화된 연예인들은 그래서 변신이 이중의 족쇄가 된다. 문근영 같은 ‘국민여동생’이란 아이콘을 가진 연기자는 연기변신에 있어 연기력 이외의 장벽에 부딪치게 된다. 언제나 두드리면 튀어나오던 아이콘에 대한 혼동을 야기시키는 변신은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불쾌감이 되곤 한다. 그 아이콘을 사랑해왔던 강도만큼 그들은 변신하려는 아이콘을 용납하지 못한다. 하지만 연기자들의 변신은 어찌 보면 생존이다. 나이는 점점 들어가는데 여전히 고등학생 이미지를 요구하는 것은 연기자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캐릭터를 통해 귀환하는 중견연예인들
반면 캐릭터를 통해 이제는 잊혀질 뻔한 중견연예인들이 아이콘으로 귀환하기도 한다. ‘주몽’에서 모팔모 역할을 하며 주목받은 이계인은 30여 년 연기세월에서 주로 범죄자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으나 모팔모라는 캐릭터를 통해 털털하고 가슴이 따뜻하면서 화통한 인물로 아이콘화되었다. 임채무는 모 CF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멜로 드라마의 심벌이었다. 하지만 2:8 가르마를 하고 모레노 주심을 흉내내는 단 한 편의 CF는 그의 이미지를 하루아침에 바꾸어놓았다. 그는 이제 진중한 연기자에서 재미있는 아저씨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는 ‘황금어장’같은 프로그램에서도 활약 중이며, 최근에는 ‘복면달호’에서 역시 코믹한 연기를 선보였다.

젊은 연예인들과 달리, 중견연예인들의 변신은 ‘권위에서의 탈피’라는 점에서 용인되고 존경받는다. 아이콘화의 장이 젊은 세대들의 활동영역인 인터넷이란 점에서 볼 때 중견연예인의 변신은 재미이면서 발견이 되기 때문이다. 국내 연기자들 중 명연기자로 손꼽혀온 ‘거침없이 하이킥’의 이순재나 나문희가 ‘야동순재’와 ‘애교문희’로 젊은이들의 아이콘이 된 것은 바로 이런 인터넷의 속성이 한 몫을 차지한다.

연기자와 캐릭터의 경계가 사라진다
캐릭터의 리얼함은 프로그램의 성패를 좌우하기도 한다. ‘무한도전’의 성공은 유재석이 주창하는 것처럼 ‘리얼 버라이어티 개그’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개그맨들과 설정된 캐릭터 사이의 간극이 모호하다. 가상현실을 매일 접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만들어진 캐릭터는 더 이상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반증이다. ‘무한도전’에 출연하는 개그맨들은 그 스스로 자신의 성격을 드러내면서, 거기서 구축되는 캐릭터를 다른 캐릭터와 대결시키면서 웃음을 유발한다. 호통명수가 치킨집 사장이라는 점이나 유재석이 나경은 아나운서와 사귄다는 사실은 프로그램 상에서 하나의 웃음의 요소로 그대로 활용된다. 현실로서의 연기자와 프로그램 속 캐릭터 사이의 간극은 그만큼 좁혀진다.

이런 현상은 ‘거침없이 하이킥’에서의 극중 이름으로 연기자의 이름이 고스란히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만든다. 야동순재, 애교문희 같은 아이콘들은 어쩌면 연기자들에게는 위험성이 있는 게 아닐까. 연기자의 이름을 캐릭터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은 자칫 연기자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잘못된 이미지로 굳어진 이름은 잘못된 이미지로 굳어진 캐릭터의 이름보다 더 위험하다. 다행히 ‘거침없이 하이킥’의 경우엔 김병욱 PD가 가진 독특한 연출 스타일로 이런 위험성이 오히려 장점으로 발휘된다. 그는 애초부터 연기자들 속에 내재된 성격 혹은 이미지를 시트콤 캐릭터로서 끌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보유한 PD이다. 하지만 연기자와 캐릭터 사이의 경계가 점점 지워져 가는 흐름 속에서 위험성은 여전히 상존한다.

캐릭터가 TV의 아이콘이 된 시대. 연기자들은 가장 중심에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만큼 가장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제 대본에 의해 잘못 설정된 캐릭터나 잘못된 연출로 인해 직격탄을 맞는 것은 작가와 PD보다는 프로그램의 캐릭터로 표상된 연기자들이다. 여기에 리얼함이 강조되면서 야기되는 현실의 생활인과 TV속 캐릭터의 고착은 연기자로서의 정체성 혼란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것은 어쩌면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선택했을 때부터 미리 각오해야 하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처럼 캐릭터 중심으로 변모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 지금 연예인들이 과거보다 더 많은 것들을 각오해야 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