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팔이> 김태희, 산전수전이 일깨운 가능성들
여전히 김태희가 연기를 잘한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캐릭터를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다만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는 걸 염두에 둔다면 이 정도의 연기가 부족하다 여겨진다는 얘기다.
'용팔이(사진출처:SBS)'
하지만 적어도 <용팔이>를 통해서 김태희가 얻어간 것은 분명히 있다. 이 드라마는 지금껏 그녀가 해온 많은 드라마들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새로운 면들을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드라마가 시작한 지 거의 몇 주 동안 그녀는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걸 갖고 ‘누워서 돈 번다’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했지만 누워서 연기하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이고, 눈을 뜬 상태에서도 몸을 쉬 움직이지 못하니 눈빛 하나, 손가락 움직임 하나로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자살하기 위해 스스로 목을 그으려 안간힘을 쓰는 장면도 그렇고, 그녀를 죽이러 들어온 이과장(정웅인)에게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독기어린 눈빛으로 그를 쓰러뜨리는 장면도 그렇다.
병상에서 일어나서도 김태희는 한동안 얼굴을 전면에 드러내놓지 않았다. 캐릭터가 얼굴을 붕대로 가리고 다른 사람인 척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얼굴을 드러냈을 때는 그녀를 구원해준 김태현(주원)과 달달한 멜로 연기를 해야 했다. 물론 이 멜로 연기는 시청자들에게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상황이 너무 급전개된 것도 원인이지만 그것이 어쩌면 김태희가 늘 배우로서 소비되던 이미지 그대로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스러운 건 곧바로 이 한여진이란 캐릭터가 한신그룹의 왕좌에 오르면서 피의 복수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김태희는 표독스러울 정도의 악녀 이미지를 드러냈다. 김태현 앞에서는 연인의 모습이지만 그간 자신을 그렇게 VIP 병동에 가둬뒀던 사람들 앞에서는 말 한 마디로 복수를 행하는 사신의 모습이었다.
결국 그나마 김태희가 이 드라마의 후반부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낼 수 있었던 건 이 ‘악어들의 세상’으로 들어온 그녀의 생존을 위한 악녀 캐릭터가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용팔이>의 전반부를 주원이 연기하는 김태현이라는 휴머니스트가 이끌었다면 후반부는 김태희가 연기하는 한여진이란 악녀 본색이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한 편의 드라마에서 배우가 이처럼 다양한 연기를 선보일 수 있었다는 건 김태희로서는 소중한 기회가 됐을 것이다. 사실 김태희가 그토록 오랜 연기생활을 하면서도 연기가 별로 늘지 않았다고 여기게 된 건 늘 비슷한 방식, 즉 멜로의 대상으로서만 주로 그녀가 소비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녀를 ‘만인의 연인’ 이미지로만 묶어둔 나이 들어도 여전히 여신처럼 예쁜 얼굴은 그래서 연기자 김태희에게는 크나큰 족쇄 역할을 했던 셈이다.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그래도 <용팔이>를 통해 김태희는 좀 더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실험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눕혀지고 가려지고 멜로연기에서부터 악녀까지 다이내믹한 한여진이라는 인물의 변화 속에서 어쩌면 김태희라는 연기자도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김태희에게 남은 숙제는 이렇게 펼쳐놓은 가능성들을 비록 작은 역할이라도 버리지 말고 앞으로도 계속 시도해나가는 일이다. 그래야만 그토록 공고한 연기력 논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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