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들’, 박무순 할머니의 사연에 담긴 이 프로그램의 진심
사실 이제 누구나 글을 쓰고 읽는 세대들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는 그다지 실감나게 다가오지는 않을 게다. 읽고 쓰는 일은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로 다가올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를 거꾸로 보면 그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을 못한다는 건 얼마나 답답한 일일까. MBC <가시나들>이 경남 함양군의 문해학교 할머니들을 통해 느껴지는 건 글을 몰라 힘겨웠던 그분들의 삶과, 지금이라도 글을 배우겠다는 절실함, 노력해도 쉽게 늘지 않는 공부의 어려움, 그럼에도 배워 조금씩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즐거움이다.
“나는 한글을 못배웠습니다.” 박무순 할머니가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 보낸 사연은 첫 문장부터 듣는 이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어린 시절 마을에 한글을 알려주는 분이 있어서 당신도 한글을 배우러 찾아갔는데 “가시나가 글은 배워서 뭐할라꼬”하며 쫓겨났단다. 그래도 자꾸 찾아가니 이름만 알려주더란다. 그래서 할머니가 알고 있는 한글은 ‘박무순’ 석자였다는 것.
하지만 글을 모른다는 건 생활 자체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는 걸 박무순 할머니는 서울 지하철에서 헤맸던 사연을 통해 적었다. “영감님 만나 서울로 시집을 갔습니다. 처음 지하철이 생기고 탔는데 글을 모르니 못 내렸습니다. 몇 번을 타고 내리고 타고 내리고 했는지 모릅니다. 하루 종일 지하철만 타다가 파출소에 갔습니다. 많이 창피했습니다.”
또 글을 모른다는 건 아이들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 속상한 일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해서 책가방 챙길 때도 글을 알면 챙겨줄 텐데 모르니까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어린 애들이 밤늦게까지 가방을 못 싸면 눈치로 어림잡아서 이거 아닌가 하고 골라줄 때 속상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제 그 나이에 배워서 어디에 쓰려고 하느냐고 하지만, 이분들에게 글을 배운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일일 수밖에 없다. 할머니 대신 글을 읽어주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향 마을로 돌아온 박무순 할머니가 한글을 알려준다는 문해학교를 일주일에 한 번씩 공부하러 찾는 이유다.
이제는 지하철도 잘 탄다는 할머니는 자신 같은 처지의 할머니가 주변에 많다는 걸 알고는 그 분들도 글을 배우기에 늦지 않았다고 말한다. “나만 힘들고 불행하게 살았다 생각했는데 나보다 더 고생한 사람이 있습니다. 옆집 사는 웅양댁 이남순이입니다. 한번은 이남순이가 시계를 차고 있어서 시간을 물었는데 못 들은 척 안 알려줬습니다. 진짜 얄미웠습니다. 알고보니 이남순이가 시계를 볼 줄 몰랐다고 합니다. 한글을 나보다 몰라서 같이 학교도 다니자 했습니다.”
안 간다는 걸 3년 내 “꼬셔“ 지금은 자기 이름 ‘이남순’은 잘 쓴다는 할머니. 이름을 쓴다는 건 마치 자기 존재를 드디어 제대로 드러낸다는 의미가 아니겠나. 그것만으로도 이 할머니들이 즐거울 수 있는 이유다. 물론 이렇게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고, 그것이 누군가에게 읽혀지고 들리게 되는 건 더더욱 즐거운 일일 테고.
라디오의 사연을 양희은이 읽어주는 내내 박무순 할머니는 무엇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이고 계셨다. 조금은 속상했던 때의 일들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할머니의 진심이 묻어나는 한 줄 한 줄이 읽혀질 때마다 할머니도 듣는 이들도 숙연해졌다. 부끄러워할 필요도 또 고개를 숙일 이유도 없어보였다. 이토록 담담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내고, 그것이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는 것. 이보다 좋은 글이 있을까. <가시나들>에 담긴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라는 의미가 박무순 할머니의 글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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