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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일의 기쁨과 슬픔', 때론 디테일한 일상 공감이 더 긴 여운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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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단편만이 담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건

 

장편 드라마들은 긴 호흡의 스토리들을 다룬다. 그래서 이야기는 다소 거창해지고, 극적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이 다 그렇게 거창하고 극적인 건 아니다. 그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지나고 난 후에 기억으로 각색된 이야기들은 거창하고 극적인 사건들의 연속처럼 보이지만, 실상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이란 매일 매일 조금씩 부딪치며 하루하루를 살아냈던 것들이 먼지처럼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낸 것들이기 때문이다.

 

KBS 드라마 스페셜 <일의 기쁨과 슬픔>은 바로 그 소소해 보이는 일상을 통해 우리의 삶을 관조하는 드라마다. '한국의 실리콘 밸리'라는 판교에 있는 중고거래 앱을 운영하는 스타트업 우동마켓. 실리콘 밸리 스타일로 영어 이름을 쓰며 수평적 관계를 지향한다 하지만, 회사 분위기는 여지없이 '라떼는'이 오가는 꼰대 스타일의 상사들이 있는 수직적 체계를 갖고 있다.

 

모두가 본명과 다른 영어이름을 쓰고 있지만, 본래 이름이 김안나라 이름 그대로 불리는 안나(고원희)는 이 회사의 앞뒤가 다른 이중성에 답답해한다. 직원들 쫀 적 없다며 일일이 직원 하나하나를 콕 집어내 칼퇴해서, 일처리 느려 터져서, 아이디어 내놓은 거 없어서 뭐라 한적 있냐고 지적하는 대표의 오른팔 앤드류(송진우)의 모습은 그 이중성을 드러낸다. 그는 지적한 적 없다면서 그런 방식으로 지적하고 있어서다.

 

드라마는 이처럼 답답한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 안나가 부딪치게 된 두 가지 사건을 다룬다. 기획팀에서 일하는 안나는 고객들의 불만사항을 접수하고 처리해주는 일을 하는데,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해줘야 할 개발자 케빈(김영)과 자꾸 트러블이 생긴다. 안나는 문제사항들을 처리해달라고 할 때마다 마치 그 문제를 그가 만들어내는 것처럼 받아들이며 한숨을 내쉬는 케빈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

 

게다가 데이빗(오민석)은 우동마켓에 많은 물건들을(그것도 새것을) 최저가에서 조금 낮게 올리는 유저 거북이알을 안나보고 접근해 만나보라고 한다. 우동마켓이 마치 거북이알의 개인매장처럼 되어 버리는 게 아니냐며 그를 만나 그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

 

그런데 그렇게 억지로 등 떠밀려 마치 중고물건을 사러 나온 것처럼 만나게 된 거북이알 이지혜(강말금)가 겪은 황당한 이야기는 안나에게 일상의 깨달음을 안겨준다. 이지혜는 안나가 좋아해 휴대폰 배경화면에 담고 있던 알렉세이 스미르노프(알프)의 공연을 성사시킨 인물이었다. 이지혜가 그 공연 성사 미션을 받게 된 건 조운범 회장(류진)의 SNS가 알프 관련 소식으로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너무나 열심히 일해 공연을 성사시켰지만 그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리고 싶었던 회장의 SNS가 아니라 홈페이지에 먼저 공지한 게 화근이 되었다. 결국 보복성 인사발령을 받고 심지어 포인트로 월급을 지급받는 황당한 일까지 겪게 됐다.

 

특진이 날아가고 다른 팀으로 발령받았을 때까지도 담담했던 이지혜는 그러나 그 많은 포인트가 월급으로 들어오자 막막해져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힘들어해도 세상은 바뀐 게 없었다. 그는 포인트로 식사를 하고 커피도 마시고 쇼핑도 하며 살았다. 그러다 "돈도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시스템의 포인트"라 생각한 그는 포인트를 돈으로 바꾸기로 결심하고 직원할인으로 물건을 구매한 후 우동마켓에서 중고거래로 현금화했다.

 

이지혜의 일화는 일의 세계가 누군에게나 기쁨과 슬픔의 반복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안나는 선배 제니퍼(김보정)의 조언처럼 "일의 기쁨과 슬픔 사이의 밸런스"를 찾는 것이 직장인들의 삶이라는 걸 깨달았다. 포인트를 월급으로 받았을 때의 슬픔을 이겨내고 그 포인트를 다시 현금화하는 것처럼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찾아내려 노력하는 것. 안나는 퇴근길에 홀로 늦은 혼밥을 하는 케빈을 떠올리며 그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그가 좋아하는 레고를 선물하며 화해한다.

 

사실 <일의 기쁨과 슬픔>이 담고 있는 일화는 너무나 일상에 맞닿아 있어 사건처럼 보이지 않는 일들이다. 하지만 그 소소한 일상을 디테일하게 들여다보고 그 사람들이 겪는 감정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의외로 우리가 사는 진짜 모습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거대 서사나 거창한 사건들을 다루는 장편드라마들로서는 담아내기 어려운 이야기. 단편드라마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걸 <일의 기쁨과 슬픔>은 잘 보여주고 있다.(사진: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