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주인', 피해자다움의 프레임과 정면대결하는 건강함

세계의 주인

피해자라는 말은 피해자들에게 얼마나 무거운 옷을 입히는 걸까. 

그 프레임에 갇히면 피해자들은 질식할 듯 그 상처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여기에 세상은 '피해자다움'마저 요구한다. 그것이 피해자라는 걸 증명이라도 한다는 듯이. 

윤가은 감독의 영화 <세계의 주인>은 이주인(서수빈)이라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한 여고생의 이야기로

바로 그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세계의 폭력과, 이에 맞서는 건강한 생존자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첫 장면부터 학교에서 남자친구와 진한 키스를 나누는 주인의 파격적인 모습으로 영화는 문을 연다.

하지만 두 시간 동안 주인에게 벌어진 일들과 그가 현재 해나가는 일들을 목도한 관객들은 극장을 떠나며 알게된다.

그 첫 장면은 에로틱한 장면이 아니라 이 생존자가 온몸으로 자신이 겪은 상처를 뚫고 나가려는 건강한 안간힘이었다는 것을. 

 

친구들 사이에서 인싸로 밝게 살아가며, 어린이집 원장인 엄마와 친구처럼 지내고, 학예회에서 마술쇼 준비에 여념이 없는 귀여운 동생을 챙기는 주인은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여고생처럼 보인다.

하지만 출소한 성폭행범의 이사 반대 서명을 해달라는 반 친구의 요구에 의외의 완강한 모습을 보이면서 주인의 숨겨진 과거가 드러난다.

주인은 서명문에 적힌 성폭행 피해자가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는 문구가 틀렸다며 친구에게 아무 것도 모르면서 적은 그 문구를 고치면 서명을 하겠다고 버틴다.

결국 싸움까지 하게 된 그들은 학교측에 의해 화해의 자리를 갖게 되지만  그 자리에서 주인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과거 상처를 꺼내놓는다. "나도 성폭행 피해자의 한 사람으로서..." 

 

주인은 물론 과거의 그 상처가 쉽게 씻길 수 없는 것이지만 피해자가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갈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또래 아이들과 똑같이 어울리고 연애에도 진심이다. 

하지만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망가뜨린 어린 날의 성폭행 피해는 주인에게도 쉽게 넘기 어려운 상처다. 

주인의 과거를 알게 된 친구들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어떤 친구는 배려한다고 말을 조심하고, 어떤 친구는 너무나 밝게 살아가는 주인의 모습에 그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한다. 

피해자는 피해자다워야 한다는 '피해자다움'의 프레임에 속에서 주인은 저들에게 함부로 재단된다. 

 

숨겨진 과거가 드러나자 주인을 둘러싸고 있던 세계가 달리 보인다.

친구처럼 지내던 엄마(장혜진)는 알코올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안보이던 아빠는 주인을 볼 면목이 없어 도망치듯 산에 칩거해 살아간다. 

그저 봉사활동을 하는 단체처럼 보였던 모임은 알고보니 성폭행 피해자들의 모임이었다.

하다못해 마술쇼에 진심처럼 보였던 동생마저, 마술처럼 누나에게 벌어졌던 일을 사라지게 하고픈 마음을 드러낸다. 

피해자라는 게 밝혀지는 순간, 그저 평범해 보였던 삶이 그 프레임 속에 갇힌다. 

그건 진실이지만 정작 매일 같인 생존하기 위해 싸우는 주인이 원하는 게 아니다. 

 

'피해자다움'이라는 프레임은 성폭행 피해자들이 2차가해를 당하는 이유가 된다.

법정 싸움을 벌이는 피해자들에게 가해자측 변호사가 건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비수처럼 이들의 상처난 마음을 난도질한다. 

그런데 도대체 피해자다움이라는 프레임은 왜 생기는 걸까.  

그것은 이른바 '공정한 세상 가설(Just-world hypothesis)'의 기대심리에서 비롯된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공정하기 때문에 뿌린대로 거둔다는 이 가설은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는 세상의 불안을 줄이기 위한 심리기제다. 

어디선가 갑자기 생긴 어떤 가해나 폭력에 의해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게 실제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면 세상이 너무 불안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 일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피해자들에게만 벌어지는 일이라고 치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맞은 데는 맞을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 심리기제는 피해사실의 원인을 피해자들에게 전가하는 일이다. 

이를 테면 "왜 그 밤길을 혼자 간 거예요?"라고 피해자에게 묻는 질문에는

그 피해사실이 가해자 때문이 아니라 피해자가 '밤길을 혼자 갔기 때문에' 생겼다는 의미가 담기게 된다. 2차가해는 이렇게 발생한다. 

 

<세계의 주인>은 이 땅의 생존자들에게 함부로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세상과 맞선다. 

주인의 건강함과 그래서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그 프레임을 깨려 부딪치는 모습은 그래서 주변에도 변화를 만든다. 

저마다 쉬쉬 하며 피해자다움의 프레임 속에서 살아가던 이들이 주인의 건강함에 힘을 얻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레서 세계의 많은 주인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그래서 자신들을 배제했던 세계에 스스로 주인임을 드러낸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가 그러하듯이, 이 작품은 작은 세계를 통해 세상을 통찰하는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관객 스스로 저도 모르게 2차가해의 입장에 서 있다가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그 상황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게 된다.

그래서 폭력적인 세상과 당당하게 대결해가는 주인의 위치에서 응원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 

 

너무나 좋았던 명장면들이 많은 작품인데 그 중에서도 하나를 꼽으라면 세차장 신이 압권이다.

엄마가 모는 자동차에 타고 자동세차장에 들어간 차 속에서 주인은 숨겼던 감정들을 폭발시킨다. 

롱테이크로 찍힌 그 장면은 세차장 바깥의 거품과 솔질, '브레이크를 밟지 마세요' 같은 문구들까지 의미심장하게 만든다. 

아무리 겉을 닦아도 안은 변하지 않는 자동차처럼, 주인의 마음이 그러할 거라는 걸 그 장면 하나가 포착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무엇보다 좋은 건, 주인이 감정을 쏟아낼 때 그걸 아무말 없이 가만히 들어주는 엄마의 모습이다. 

피해자라고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마치 생각해주는 척 말 한 마디씩 얹는 게 다반사지만

그것은 어쩌면 피해자들이 원하는 일이 아닐 게다. 

그보다 그 쏟아내는 그들의 절규를 들어주는 일. 그것이 진정 그들이 원하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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