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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선덕여왕'의 비담, 왜 매력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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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담, 그 무심함이 담은 세상에 대한 비웃음

어떤 캐릭터는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전혀 우리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어떤 캐릭터는 아무런 말없이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슬쩍 눈 한 번 찌푸리는 것으로도 순식간에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선덕여왕'의 비담(김남길)이 그렇다. 비담이라는 캐릭터는 말 그대로 불쑥 등장했다. 덕만(이요원)과 유신(엄태웅)이 동굴로 숨어들었을 때, 비담은 어둠 속에서 슬쩍 발끝을 보이고는 천연덕스럽게 하품을 하며 우리들 가슴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도대체 무엇이 비담을 이처럼 매력적으로 만든 걸까.

첫인상에서 캐릭터의 성격까지는 알 수 없었을 테니, 일단은 그 인상이 준 효과부터 생각해봐야할 것이다. 먼저 비담이 등장한 그 시점이 중요하다. 비담이 등장하는 시점은 덕만이 비극적인 자신의 운명을 알아채고 상심에 빠져있던 시기이고, 유신 역시 덕만을 호위하며 애틋한 사랑을 드러내던 시기다. 덕만이나 유신 둘 다 운명의 고리에 얽매여 헤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연출하던 그 때, 비담은 마치 운명 자체를 비웃기라도 하듯 하품을 해대며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의 덕만와 유신의 당찬 모습을 보아왔던 시청자라면 이 시점에서 비담의 하품에 공감을 느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드라마가 조금은 울고 짜는 멜로적 틀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으니 말이다.

비담은 그 후에도 늘 그 하품을 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비담이 등장할 때마다 웃음이 터져나왔던 것은 그 우스꽝스런 표정 탓만은 아니다. 비담은 개그맨들이 무대에서 활용하는 긴장의 와해를 통한 웃음을 연출했다. 덕만과 유신을 중심에 두고 천명(박예진)과 알천랑(이승효) 그리고 설원공(전노민)과 김서현(정성모)이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할 때, 비담은 이들과는 무관한 인물로 한가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유신의 갑옷을 비담이 갖고 있는 걸 본 알천랑이 그게 어디서 났냐며 심각하게 물어볼 때, "닭다리랑 바꿨는데?"하고 말하는 식이다. 게다가 엄청난 무공을 갖춘 인물이 이처럼 한가로우니 그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보인다.

이처럼 비담은 이 사극 속의 어떤 캐릭터와도 확실히 차별화되는 얼굴로 등장함으로써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그것이 단순히 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비담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고유의 성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비담은 중간자적인 인물이다. 진지왕(임호)과 미실 사이에서 태어났고, 미실에 의해 버려졌다. 그는 혈연으로는 미실의 편이지만, 버려졌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미실의 적이기도 하다. 그는 선과 악의 중간에 서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천진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순식간에 아귀 같은 얼굴로 돌변한다. 정치적으로도 그는 중간자이다. 정치와는 상관없이 몇 백 명의 생명을 위한 약재를 구하기 위해 한 사람(덕만)의 목숨 정도는 버릴 수도 있는 인물이다. 선이건 악이건 실용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다. 비담은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이제는 정치에 무관심하려 하는 우리네 대부분의 모습을 닮았다. 운명이니 대의니 하면서 누가 누구를 죽이고 살리고 하는 것보다는 솔직한 것이다.

비담이라는 캐릭터의 얼굴을 보면 까칠함과 천진함이 동시에 묻어난다. 눈빛은 살기등등하지만 살짝 비틀어진 입가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칼을 들고 있지만 유신처럼 잔뜩 긴장하여 앞으로 치켜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충 어깨에 걸머쥐는 무심함을 유지한다. 비담의 얼굴에는 웃음이 피어나지만 그 웃음 뒤끝은 좀 허허로울 정도로 쓸쓸함이 있다. 늘 비껴있고 무심한 듯 보이지만 사실상 비극적 운명 속에 서 있는 자의 눈물이 그 모습에는 기묘하게도 배어있다. 이런 연기를 단번에 끌어내 보여주는 김남길이란 배우가 왜 이제야 눈에 띄었는지 이상할 정도다. 비담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적기에 등장함으로써 그만큼 강렬해진 첫인상과, 대중들을 닮은 캐릭터 자체가 가진 공감대, 그리고 무엇보다 김남길이라는 발군의 연기자가 잘 어우러진 결과다. 비담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무심함(무언가 대단한 일인 양 운명 운운하는 자들이 하는 짓에 대한 비웃음을 담은)은 지금의 서민들의 마음 또한 건드는 부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