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률이라는 이름의 파시즘

흔히들 “예술영화는 졸리다”는 자조적인 농담처럼, 잘 만들어진 드라마와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는 항상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최근 <봄의 왈츠>, <굿바이 솔로> 같은 뚜렷한 메시지를 갖고 ‘생각하게 만드는’ 웰 메이드 드라마의 낮은 시청률은, ‘TV는 바보상자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꺼내게 만드는 씁쓸함이 있다.

조기 종영되거나 연장 방영되는 드라마가 나오는, 시청률이 지고선이 된 작금의 현실은 한편으로 ‘한류의 종주국’이라는 호칭을 무색케 한다. ‘시청률이 몇%’라는 애매한 잣대로 작품을 난도질하는 대부분의 연예기사들도 시청률이라는 바벨탑을 쌓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한류라는 힘으로 전 세계 컨텐츠 비즈니스의 중심에 서겠다는 포부에 맞는 일일까.

물론 시청자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문제는 시청률에 올인 하는 방송사와 그런 시류에 밀착하는 제작자들,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수많은 매체들이 문제다. 그저 재밌으면 됐지. 뭐가 그리 거창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지금 우리네 드라마가 문화계 전체에서 갖는 비중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얘기일 것이다. 드라마는 이제 그냥 드라마가 아닌, 우리네 문화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지적인 시청률과 범아시아적 시청률
한류는 모든 상황들을 바꾸어 놓았는데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드라마였다. 한류의 성공은 드라마 제작에 범아시아적인 투자자들을 끌어 모았다. 드라마 제작은 붐을 이루었다. 게다가 케이블을 비롯해 위성방송, DMB 등 다양한 채널들은 더 많은 컨텐츠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과거 방송사에서 하던 드라마 제작은 대부분 외주 프로덕션으로 넘어갔다. 그것이 경쟁력도 있고 비용측면에서도 유리했기 때문이다. 성공한 제작사들의 위상은 높아졌다. 드라마 제작이 활기를 띄면서, 웰 메이드 드라마에 대한 수요도 높아졌다. 쪽대본으로 상징되는 기존 드라마제작 관행은 사전제작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쪽대본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영화 제작인력들은 사전제작에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영화를 찍는 날보다 찍지 않는 날들이 많았다. 게다가 HDTV라는 환경변화에서 드라마 제작에 영화용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 역시 영화 제작인력들에게 유인이 되었다.

감독은 물론, 촬영감독, 의상, 조명 등등 영화계 현장인력들은 물론이고, 이제 드라마 제작 현장은 각계 각층의 문화계 인물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조악한 현실 여건 속에서 고군분투하던 만화가,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 등은 이런 분위기를 타고 드라마 제작이라는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다. 드라마 홍보 역시 영화 홍보 대행사들이 나설 만큼 전문화되었고, 선 마케팅은 드라마가 제작되기 이전에 제작비를 모두 끌어 모았다. 유통 채널은 이제 전 세계를 향해 뻗어있다. 이것이 지금의 우리네 드라마가 갖는 힘이다. 그런데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 ‘좀더 잘 만들어진’,  ‘우리네 것이 분명하면서도 보편적인 정서를 담는’, 그래서 ‘누가 봐도 재미있으면서 의미도 있는’, 그런 드라마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숨어서 복사된 일본 드라마를 보던 우리가, 일본 본토에서 한류 열풍을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한데는 윤석호 PD라는 국제적 안목을 갖춘 연출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최근 인터뷰를 통해서 “한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최근 한국 드라마나 영화들이 자극적으로 흘러가는데 반해 정작 해외에서 인기를 얻는 작품들은 <대장금>과 <겨울연가>처럼 건강하고 부드러운 작품”이라고 했다. <봄의 왈츠>에 대해 범아시아적인 시청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다.

작가주의 드라마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평가들
<봄의 왈츠>와 <굿바이 솔로>의 시청률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 소위 ‘작가주의’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평가가 그 첫 번째이다. 윤석호 PD나 노희경 작가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열어놓았다. 윤석호 PD의 작품들이 절제된 대사와 감성을 자극하는 뛰어난 영상으로 그 세계를 만들었다면, 노희경 작가는 직설적이면서도 역설적인 대사들, 인물에 대한 끝없는 탐구 혹은 애정, 러브스토리 같지만 한 꺼풀 들여다보면 그 속에 숨어있는 강한 사회적 메시지들로 굳건한 세계를 구축했다. 비평가들은 그들을 작가라고 호칭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작가주의라고 한다면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막상 새로운 드라마를 개봉하면 단 첫 회를 보고도 비평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역시 작가적 면모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전작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이것은 다시 말해, 한껏 작가로서 추앙해서 풍선을 부풀려놓은 다음, 한번에 바람을 빼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가 한번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어쨌든 다 보아야 뭐라 얘기할 수 있는 반면, 드라마는 몇 달에 걸쳐 방영되기 때문에 이러한 초기의 평가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봄의 왈츠>의 경우 초기의 설정과 흐름이 과거 윤PD의 드라마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아직 방영되지 않은 나머지 회의 드라마들까지 그럴 것이라는 짐작들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봄의 왈츠>는 사실 전반부 설정보다는 중반 이후에 드러나는 극중 인물들의 깊은 상처, 그리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이 윤PD가 이 드라마를 통해 새롭게 선보이려 했던 ‘휴머니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아직 본 게임에 들어가지도 않은 것이다.

<굿바이 솔로>는 마치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노희경 매니아’라는 한 단어로 집약된다. ‘좋은 드라마지만 매니아들이나 보는’, 이라는 평가는 우리네 드라마계가 가진 보수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기계적인 설정과 판에 박은 대사, 선남선녀의 주인공들에 화려한 외관을 씌우는 과거의 방식만으로도 예상할 수 있는 20% 이상의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는 마당에, 주인공들이 무려 7명이나 되는 이런 형식 파괴적인 드라마는 도발이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과거를 답습하며 연장방영에 들어간 드라마들은 30%대의 시청률을 끌어 모으며 잘 나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에 시청률 놀음이 가진 함정이 있다. 윤PD가 말했듯 ‘자극적인 설정’은 눈앞의 시청률을 높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보편적인 정서를 말해주지는 않으며, 또한 ‘끊임없이 좀더 자극적인 설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앞으로 나가야할 드라마가 땅을 파고 들어가는 형국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한류라는 거대한 흐름으로 우리네 드라마계가 확고한 문화의 견인차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작가들의 ‘새로운 시도’로서 가능했던 것이지, ‘전통적인 드라마들의 답습’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청률에 연연하지는 않는다고 했으나
윤석호 PD나 노희경 작가의 작품들이 그다지 시청률이 대단했던 것은 아니다. 대체로 윤석호 PD의 작품은 초기에 10%대의 시청률에서 시작해서 끝에 가서 30%에 도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다지 높은 시청률이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마의 시청률이라는 3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달성했다지만 그것이 국내에서도 그랬던 것은 아니다. 또한 노희경 작가는 알다시피 시청률 안나오기로 유명한 작가이다. 가장 시청률이 높았던 것이 <꽃보다 아름다워>로 약 27%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윤PD나 노희경 작가나 모두 “시청률에는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드라마를 방영하는 방송국과 드라마를 만드는 프로덕션이 이원화된 상황에서 시청률은 미묘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직ㆍ간접적인 압력을 받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잣대로 방송국은 시청률이란 카드를 내밀 것이다. 안 본다는 데야 어찌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시청률이란 것이 정말 그렇게 공정한 것이고, 의미가 있는 것인지 반문해보고 싶다.

드라마 시청률은 현재 10대와 4, 50대가 주축이라고 한다. 얼핏 생각해도 가벼운 만화 같은 드라마와 전통적인 문법의 드라마들이 현재 시청률 1, 2위를 다투고 있는 걸 보면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그 중간에 있는 20대 30대 시청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TV 이외의 다른 매체들이 많이 생겨서 그렇다고 하는 건 핑계일 뿐이다. 혹시 그들을 위한 드라마들은 ‘시도조차 되지’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청률이라는 이름의 파시즘
과거에 TV가 국민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 바보상자의 역할을 했을지 모르지만, 이제 TV는 더 이상 바보상자가 아니다. 인터넷이라는 창을 통해 시청자들은 끊임없이 TV에 의견을 전한다. 이러한 다양한 의견들은 건강한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 의견들이 파시즘이 돼서는 안 된다. 자칫 이러한 파시즘은 제작자들의 마음 속에 ‘이건 되고 저건 안 되는 식의’ 자기검열의 족쇄를 채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의견들을 이용해 파시즘으로 활용하려는 어떠한 시도들이다. 시청률이 지고선이 됐다는 것은 마치 그것이 인터랙티브한 사회를 보여주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 지고선이 된 시청률에 동참하라는 심리적인 압박일 수도 있다.

시청률이라는 순위경쟁의 껍데기를 벗어내야 다채로운 드라마들의 스펙트럼이 TV를 장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방송국의 입장에서는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묶어두고 싶겠지만 어느 한 드라마의 독식보다는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TV가 됐으면 좋겠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말해주는 고단한 삶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러 가기 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동성애 영화란다. 그것도 서부의 사나이들이 사랑하는 이야기란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면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오는 그런 영화란다. 한 번 본 사람은 두 번 세 번 보게되는 영화란다. 한편으로는 미국판 <왕의 남자>라면서 동성애 코드가 요즘 유행이냐고 묻는 이들도 있단다.
머릿속에 있는 서부의 사나이들이라면 존 웨인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광활한 황야를 누비던 총잡이들뿐이었던 내게 카우보이들의 러브스토리가 그다지 끌리지 않았던 건 당연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상념에 젖어있을 즈음 불이 꺼지고 영화는 시작되었다.

영화는 담담했다. 1963년 Cowboy State라고 불리는 와이오밍에서 만난 에니스와 잭이 20여 년 간 겪는 안타까운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브로크백 마운틴의 풍경과 파란 하늘이 가슴에 박혀왔지만 그저 그런 영화인 줄 알았다. 역시나 영화 흥행도 그다지 주목할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그 그저 그런 영화가 내내 가슴속에서 울림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혹시 영화를 잘못 본 건 아닐까. 다시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알게 됐다. 왜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이 있었는지, 왜 그 울림은 내 속에서 계속되었던 것인지, 카우보이들의(그것도 남자들 간의) 사랑 따위 얘기가 왜 한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내게 깊은 감명을 준 것인지 알게 되었다.

마초 사회와 동성애 영화
우리가 머릿속에 갖고 있는 미국인 = 카우보이 = 서부의 사나이 = 마초맨의 이미지는 대부분 헐리우드가 각색한 것임에 틀림없다. 본래 서부 상황은 그렇게 낭만적인 것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날 것의 풍광이 의미하는 것은 그 속에 사람들이 극히 적으며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외롭게 고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자주 비춰주는 파란 하늘과 브로크백 마운틴의 절경, 초록의 녹원은, 그 속에 있는 인간을 너무나 왜소하게 만들어버린다. 카우보이니 로데오니 하는 것들은 서부극에서 각색한 것처럼 멋지다기보다는, 외로움과 권태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기껏해야 몇 초간’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위한 목숨을 건 절규로 보인다. 가부장적인 사회구조가 가진 마초적인 강박은 사실 저 고립무원의 자연과 그로 인해 갖게된 두려움과,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자초한 자기고립으로부터 생긴 자기방어본능일 뿐이다. 상처받은 짐승들은 사회가 제공하는 보수적인 안전에 집착한다. 그걸 위협하는 자들을 공격하는 것 또한 용인되는 그 극단적 마초 사회의 두려움은 끊임없이 그 구성원들의 자기검열을 요구한다. 에니스는 그 속에서 자신의 한 평생을 “견디며” 살아간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마초적 본성도 다르지 않다. 서부의 사나이들이 했던 강박적인 자기방어본능은 우리네 군인문화와 보수문화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가끔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군대에서의 동성애자 인권문제를 보면서 우리는 ‘민주화되지 않은 군대문화’를 비판하기보다는, 나와 다른 그들의 상황을 묵인하는 마초적 태도를 갖곤 한다. 남자들의 마지노선은 여전히 굳건하다. 조작된 이미지이지만 서부의 사나이들과 조상의 얼과 군인들은 사회가 제공하는 보수적인 안전망이라는 점에서 믿어진다. 진실과 믿음은 다른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믿음이지 진실이 아니다.

이 잘 만들어진 영화가 그다지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은(물론 많은 매니아층이 형성되기는 했지만) 바로 이런 사회적인 두려움에 대한 암묵적인 거부가 한 몫 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이제야 왜 동성애 코드라는 꼬리표를 달면 영화가 성공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 것도 같다.

이건 동성애 영화가 아니다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버리자 이 영화의 다른 면모들이 보였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볼수록 이 영화는 동성애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카우보이들의 러브스토리’라는 카피 제목은 너무나 표피만을 본 결과로 나온 것이었다. 동성애자도 아니고 동성애에 대한 관대한 입장을 가져왔던 사람도 아닌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기는 것은 왜일까.

이 영화는 에니스와 잭의 사랑이야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그들의 사랑이 절실해 보이는 것은 그들의 현실이 너무나 외롭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들이 사랑하는 장면보다, 그들이 현실의 무게 속에서 얼마나 고립되어 살아가고 있는가를 더 많이 보여준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참을 수 없는 추위와 알 수 없는 성욕으로 첫 관계를 맺는 장면은 이 영화의 슬픈 정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들의 사랑은 사실 매서운 현실들과 극단의 외로움에서 겨우 한 자락 잡을 수 있었던 기쁨이었던 것이다. 20년이 넘도록 간간이 만나 얻는 그 기쁨은 마치 낡고 헤진 젊은 날의 한 자락 추억을 안고 책임과 의무로 가득한 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과 고스란히 닮아있다. 그런 이유로 에니스가 “바꿀 수 없는 것은 견뎌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가 공감하게 되는 것이며,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잃어버렸던 셔츠가 잭의 셔츠 속에 안겨있는 걸 에니스가 발견했을 때, 그 슬픔에 공감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동성애 영화가 아니다. 대신 현실 속에서 보수화 되어가고 있는 우리네 감성에 둔중한 충격을 주는 영화다. 앞도 뒤도 알 수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어느 한 중년이 젊은 시절의 한 때를 떠올리며 ‘잠깐’ 미소짓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얼마나 처연한 일인가.
그러니 많은 사람들은 ‘동성애 영화’라는 꼬리표를 단 이 영화를 보고 난감해 했을 것이다. 나는 왜 이 ‘동성애 영화’에 감동하는가 하고 말이다. 그 조장된 동성애 코드는 그 관객에게 다시금 ‘두려움의 코드’를 끄집어내게 만든다.

없는 자들을 위한 따뜻한 시선들
러브스토리를 걷어내면 이 영화는 그 위대한 휴머니즘을 얻게 된다. 영화는 사랑에 빠진 인물들을 묘사하는 것보다는 ‘일하는’ 인물들을 묘사한다. 에니스와 잭이 만나는 것도, 금지된 것 투성이인 그 ‘빌어먹을’ 일 때문이며, 그들이 각자의 가정을 꾸미는 것도 생계를 위한 것이다. 어찌 보면 미칠 것처럼 살아가는 그들이 짧은 낚시여행을 떠나는 것도 다 이 지긋지긋한 삶을 버티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비단 에니스와 잭의 현실만은 아니다. 에니스의 아내 엘마는 등장에서부터 거의 끝날 때까지 일을 하고 있다. 부엌에서 직장에서 그녀는 죽어라 일을 하지만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다. 잭의 아내 로린은 적어도 가난을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이제 돈의 노예가 된 상황으로 그 삶 역시 행복하지 않다.

그런데 이 현실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 일 중독에 살아가면서 가끔 쉬는 휴식조차 일을 위한 충전 정도로 치부되는 사회. 게다가 없는 자들이라면 그 노동은 희망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재를 ‘버티는’ 절망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우리들은 어떤 식으로든 울기 바로 일보 직전 상태로 살아간다. 물론 얼굴은 웃고 있지만.
이 영화의 슬픔은 내러티브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 안 감독을 위대한 거장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얼굴 표정 하나, 손짓 하나로도 그 심리상태를 섬세하게 보여줬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무언가 거대한 불행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바로 우리네 얼굴들이다.

이 영화는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산에서 내려온 후 잭이 떠나고 에니스가 길을 걷다가 갑자기 골목을 달려가 구역질을 해대며 우는 장면은 잭이 준 상처 때문이 아니다. 사실은 또다시 현실 속에 홀로 남은 자신에 대한 연민인 것이다. 에니스와 잭의 관계를 알게 된 상황에서 아기를 안고 울음을 터트리는 엘마는 버티고 있던 일상 속에 이제 자신 혼자만 남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에니스의 딸이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머뭇거린 것은 그가 딸의 결혼을 반대하는 것 때문이 아니고, 또 딸을 떠나보내야 하는 그 자신에 대한 외로움 때문이다. 상처를 준 것은 사회와 현실이지 상대방이 아니다. 상처 입은 짐승들은 그것이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 살아간다. 이것이 이 영화가 던져주는 우리네 존재의 비극이다.

피묻은 셔츠로 남은 희망
낡은 컨테이너 하우스에 들어온 딸이 “가구를 더 사야겠다”고 말하자 에니스는 마치 달관한 사람처럼 말한다. “가진 게 없으면 필요한 것도 없는 법이야”라고. 가난과 외로움은 고립무원에 홀로 서 있는 컨테이너처럼 쓸쓸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어떤 희망과 감동을 주는 것은 피묻은 셔츠를 바라보는 에니스의 시선 때문이다. 에니스가 결국 인생을 통해 버티면서 얻은 것이라고는 셔츠 두 개가 고작이다. 방금 딸이 놓고 가버린 셔츠와, 옷장 속에서 자신의 옷에 감싸진 잭의 셔츠. 셔츠 옆에는 브로크백 마운틴의 풍경이 담긴 엽서가 꽂혀있다. 그리고 에니스는 말한다. “맹세할게...” 무엇에 대한 맹세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아마도 자신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다. 삶은 고단한 일상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맹세한다.

에니스의 비천한 삶을 숭고하게까지 만드는 이 영화의 맹세는 그 어떤 저항보다 더 강력하다. 심지어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 속에 떨며 강박적인 자기보호본능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조차 끌어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도 생애 한번쯤은 브로크백에 오른 적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 가져온 셔츠 한 벌은 여전히 당신 가슴속에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우리네 가슴속 옷장에 걸어둔 셔츠 두 벌은, 현실에 치여 살아가는 우리에게 먹먹한 희망으로 남을 것이다.

<봄의 왈츠> VS <넌 어느 별에서 왔니>

‘봄의 왈츠’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기나긴 겨울을 전제로 한다. 그 겨울 동안 그들을 버티게 해준 힘은 어린시절 한 자락 가슴 속에 들어앉았던 추억들이다. 윤재하라는 새로운 이름의 겉옷을 입고 겨울을 살아온 이수호의 가슴 속의 절망은 “은영이 수술 후유증으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은영이 죽은 한국은 겨울같은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자를 통해 그녀가 은영일지도 모른다는, 그녀가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의 한국행을 결심하게 만든다. 윤재하로 돌아온 그는 이제 이수호로 지내며 은영과 추었던 추억의 봄의 왈츠를 찾아나선다. 숨은 그림 찾기의 시작이다.

추억의 장소. 과거에 그녀가 있었던 장소. 하지만 지금은 없는 그 장소에서 그가 서성댄다. 이 설정은 <봄의 왈츠>가 앞으로 전개될 드라마의 방향을 예고한다. 윤석호 PD의 뛰어난 영상과 연출은 ‘빈 자리’를 보여줌으로 해서 그 자리에서 함께 했던 따뜻한 봄의 기억들과 현재 진행형이 차가운 겨울을 병치한다. 그 거리감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안타깝게 만든다. 은영을 마지막으로 두고 나왔던 병원, 은영을 잃어버린 줄 알고 찾아헤맸던 남대문 시장, 그 시장통 한쪽에서 은영이 수호에게 주려고 허기를 참아가며 들고 있던 붕어빵을 팔던 노점상... 재하(과거의 수호)는 그 과거의 언저리를 서성대면서 은영의 그림자를 찾아해맨다. 시청자들은 재하의 상황에 감정이입되며 은영이 바로 재하가 찾는 그 인물이라는 확신을 갖게된다.

하지만 여기서 윤석호 PD는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번 무너뜨린다. 막상 찾은 은영은 자신이 생각한 그 추억의 은영과 같은 인물이 아닐 거라는 믿음을 재하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그 드라마에 안타까워하면서 더욱 더 재하와 은영의 만남을 갈구한다. 여기에 끼어드는 송이나라는 과거 진짜 재하(수호가 현재 대신 살아가고 있는)의 단짝친구는 재하에게 정체성의 혼란을 부추긴다. 은영은 죽었을 거라는 재하의 실망은 수호라는 진짜 자신과 그 수호가 가졌던 봄의 기억을 잊고, 가짜지만 현실인 재하라는 새로운 실존에 타협하려 한다. 그는 송이나에게 새롭게 시작하자고 한다.

<봄의 왈츠>는 그 경쾌한 외연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무거운 과거의 설정으로 인해 추억의 언저리에서만 빙빙 돌고 있다. 윤석호 PD의 영상과 내러티브의 힘이 바로 그 추억과 노스텔지어에 있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청자들에게 <봄의 왈츠>는 첫번째 작품이 아니다. 시청자들은 이미 겨울과 가을과 여름을 거쳐 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추억찾기와 숨은 그림 찾기, 그리고 그 엇갈림은 많은 드라마에서 답습해오던 문법이며 그 나름대로의 의미와 힘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마도 지금의 시청자들은 과거를 걷는 이야기보다는 현실적인 카타르시스를 더욱 요구하는 것 같다. 요는 무거움보다는 가볍고 발랄하며 상큼한 이야기에 매료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 오히려 부각되는 인물은 다니엘 헤니가 연기하는 필립이라는 인물이다. 애초의 대본에는 없던 필립이 그 가벼움으로써 이 무거운 드라마의 무게중심을 맞춰주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에서 나오는 드라마틱한 대사들은 고전적이면서도 힘이 있지만, 그것이 새로운 것이 아닐 때 상투가 되기도 한다. 심각한 대사가 닭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반면 <넌 어느 별에서 왔니>는 철저히 가벼움과 경쾌함을 목표로 드라마를 엮어가고 있다. 가벼움과 경쾌함은 과거의 기억보다는 그 현재의 아이러니나 대결구도에서 나온다. 인물들의 시소타기 게임의 귀재인 표민수 PD는 시골소녀 vs 도시남자의 기본 대결구도(물론 이건 관계의 호전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보는 이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를 바탕으로 시골과 도시에서의 엎치락뒤치락하는 드라마를 엮어간다. 시골마을에 오게된 영화감독 최승희로 하여금 시골소녀 김복실의 집에서 기거하게 만들고, 서울로 상경한 시골소녀 복실이 최승희의 밑에서 일하게 만든다. 자본주의 논리에 의하면 도시에서 잘나가는 영화감독인 최승희가 시골의 별볼일 없는 소녀 김복실에게 확실한 우위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특유의 김복실이 가진 명랑함과 순박함은 최승희를 번번히 손들게 한다. 그 밑바닥에 있는 것은 자신이 한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으로 상처받는 복실에 대한 미안함과 가책이다.

하지만 이건 이 드라마의 겉모습이다. 만일 <넌 어느 별에서 왔니>가 이러한 가벼움으로만 일관한다면 그건 금방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그 속모습을 들여다보면 이 드라마의 말하지 않는, 어찌보면 철저히 숨기려 하는 드라마들이 보인다. 최승희가 김복실에게 끌리는 것은 사실 세상을 떠난 과거의 그의 연인과 닮았기 때문이 아니고, 김복실 그녀가 갖는 순박함 때문이다. 최승희가 가끔씩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가 미쳤지. 저런 애를’하는 투의 대사를 하는 것은 그의 착각 때문이다. 그는 김복실에게 끌리는 것이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정신이 약간 이상한 엄마, 수술을 해야 하지만 수술비가 없는 상황, 시골에서 좌판을 하며 먹고 사는 자신 등등 김복실은 사실 현실적으로는 불행해야 하는 인물이지만, 그 대책없는 발랄한 캐릭터로 인해 이러한 신파적 상황들은 전혀 드라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 속모습은 신파가 내재되어 있지만, 드라마는 의도적으로 발랄한 겉모습만을 보여준다. 복실이 엄마의 이야기라며 최승희에게 드라마 소재를 얘기해주자, 최승희가 바로 “그런 신파를 누가 보냐”고 하는 것은 이 드라마의 의도적인 숨기기를 말해준다. 표민수 PD는 말하는 것 같다. “본래 사는 건 신파지만, 그걸 뭘 드라마에서 다 시시콜콜 얘기하느냐”고 말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의 반전은 속모습이 드러나면서 일어난다. 임예진이 친엄마가 아니고 이보희가 친엄마라는 게 밝혀지는 것. 그리고 임예진이 울면서 미안하다고 말하자, 그 입을 막으며 그런 말 하지 말라는 복실에서 우리는 가슴뭉클함을 느끼게 된다. 다소 신파적이긴 하지만 드라마는 그 와중에도 월드컵 경기장에서 복실을 기다리는 최승희의 뚱한 모습을 보여주며 무게중심을 잃지 않는다.

이 드라마는 늘 현재진행형이다. 과거의 일들이 밝혀졌다는 것은 등장인물과 시청자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지만, 이 드라마는 그 과거에 멈춰서거나 서성대지 않는다. 대신 기대하게 되는 것은 시골소녀에서 도시 부유층의 딸이 된 달라진 환경 속에서의 복실과 최승희가 엮어갈 새로운 시소타기 게임이다. 표민수 드라마의 장점은 이 아픔을 숨긴 발랄한 시소타기 게임을 하면서도 가끔씩 반짝반짝하는 대사들을 던진다는 것이다. 밤하늘의 별이 아름다운 것은 그 밤이 많은 것들을 숨기고 가려주기 때문이다. 그걸 표민수는 알고 있다.

많은 드라마에 익숙한 요즘의 시청자들은 친절하게 상황을 알려주는 드라마보다는 저 스스로 상황을 읽는 드라마를 좋아한다. 모든 드라마의 시작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 숨은 그림을 하나씩 펼쳐보이는 드라마가 <봄의 왈츠>라면, <넌 어느 별에서 왔니>는 철저하게 가려진 채 진행되는 드라마 속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그림들을 보여준다. 숨은그림찾기나 숨기기나 모두 목적은 드러내는 데 있다. 그것은 단지 말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드라마에 있어서 그 말하는 방식은 드라마 자체가 되기도 한다. 과거에 잃어버린 봄의 숨은 조각들을 맞춰나가는 재미인가, 아니면 어두운 밤하늘에 숨겨져 있다가 어느 순간 반짝이는 별을 찾는 재미인가. 두 드라마가 나갈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하기만 하다.

<무인 곽원갑> 그 몸이 말해주는 것들

앙상한 체구의 달라이 라마는 성지순례를 온 비구니들과 수녀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종교라는 것은 신뢰와 존중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는 무한한 신뢰를 가져야 하지만 다른 종교에는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한 수녀님께서 물으셨다. “선생님께서는 많은 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달라이 라마가 말했다. “세상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집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눈, 같은 코, 같은 입을 갖고 있어도 좋아하는 음식은 다르지요. 종교는 그런 것입니다.” 우연히 TV에서 보게된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다. 이연걸은 2005년 10월 그의 아내 리지와 함께 달라이라마를 만나기 위해 다럄살라를 방문했다. 10여년 전 불교에 귀의한 그에게 달라이라마가 한 얘기도 비슷한 것이었을까.

테러가 화두가 된 세상 속의 아름다운 몸
액션과 폭력적인 영상에 길들여진 우리 눈에 몸은 하나의 무기로도 보인다. 실제로 어떤 몸은 폭탄을 장착하고 민간인들을 향해 뛰어들기도 하고, 어떤 몸은 무고한 기자를 납치해 살해하기도 한다. 어떤 몸은 뉴욕의 무역센터 건물로 비행기를 몰기도 하고, 어떤 몸은 정치적 이념과는 전혀 무관한 올림픽 선수들을 무참히 살해하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가 네모난 세상 속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우리들의 추악한 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뮌헨>, 이제 곧 개봉할 워쇼스키 형제의 <브이 포 벤데타>, 거장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크래쉬>... 모두 이 추악한 몸이 벌이는 테러와 폭력의 문제를 화두로 삼고 있는 영화들이다. 9.11 테러가 이제 그 의미를 찾는 시점이 다가오자 영화들은 일제히 테러리즘에 대한 자아성찰을 시도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동양에 이연걸이 있다. 그는 내한 인터뷰 기사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현대사회에 폭력은 폭력을,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것... 폭력과 테러가 난무하는 서방세계에 복수의 반복은 악순환일 뿐”이라고 말했다. <무인 곽원갑>이 단순한 이소룡류의 격투기나, 성룡류의 오리엔탈 롤러코스터, 혹은 서극류의 환타지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는 곽원갑이라는 인물을 통해 진정한 무도(武道)의 길을 펼쳐보인다. 몸은 잘못이 없다. 문제는 마음 속의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을 넘어서 타인의 몸까지 껴안을 수 있을 때, 몸은 더이상 추악한 무기가 아니라 아름다운 그 무엇이 된다.

진정한 무도가 완성된 그 후
최고의 무술인이 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몸은 무기로 변해 라이벌인 진대인을 죽이고 만다. 폭력의 시작은 끝이 처참하다. 진대인의 제자는 곽원갑의 노모와 어린 딸을 살해한다. 눈이 뒤집힌 곽원갑은 칼을 들고 진대인의 집을 찾아간다. 진대인의 시신이 놓여진 곳 옆에서 진대인의 아내와 딸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을 본 곽원갑은 칼을 버리고 만다. 그 상황에서 곽원갑은 자신의 딸과 노모의 모습을 진대인 아내와 딸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자시의 신뢰(사랑하는 딸과 노모를 위해 복수를 해야한다)와 동시에 존중(진대인의 아내와 딸도 마찬가지의 고통을 겪고 있다)이 생겨난 것이다.
1인자가 되는 순간에 곽원갑은 나락의 길을 걷는다. 자살을 시도하지만 맹인소녀 문을 만나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진정한 무인의 길을 깨닫게 된다. 무기가 아름다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 앞못보는 맹인소녀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곽원갑은 고향으로 돌아와 진대인의 아내와 딸을 찾아 사죄한다. 이로써 그는 진정으로 강한 자, 자신의 두려움을 이겨낸 자가 되는 것이다.
만일 영화가 여기서 끝났다면 이 영화는 세상에 대한 폭력과 그 폭력에 대처하는 동양적인 대안을 제시한 영화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완성된 무인은 시대적 소명을 갖게 되고, 서구열강과 일본에 대항하는 중국의 영웅이 된다.

국가라는 이름으로는 폭력이 정당한 것인가
WBC(World Baseball Classic)에서 보았던 것처럼, 일본이라는 나라는 우리나 중국이나 반드시 이겨야할 대상이다. 과거의 문제가 현재도 반복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건 이 영화가 얘기하려는 것은 본래 아니었다. 폭력을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은 곽원갑 스스로도 몸소 겪었던 것이 아닌가. 물론 영화적 장치들은 되어있다. 상대편 일본선수가 곽원갑의 손을 들어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풍경은 우리에게 낯선 장면이 아니다. 우리가 저 <바람의 파이터>에서 기대했던 진정한 무도의 길의 모습이 점차 민족주의적인 색채로 변해갔던 그 장면 말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뮌헨>에서 말하는 ‘국가라는 이름 하의 무조건적인 충성’이 가져온 연쇄폭력은 개인의 불행을 담보로 한다. 개인적으로는 누구나 다 아름다운 몸을 갖고 있다. 하지만 국가라는 틀이 그 몸을 갖게 되면 추악한 모습으로 돌변한다. <무인 곽원갑>이 넘지 못한 선은 바로 이 액션영화로의 귀의에 있다. 그가 이 영화를 ‘한 무인의 삶을 통한 사회적인 드라마’로 일컫지 않고 ‘마지막 액션영화’로 소개한 것은 이런 이유다. 이연걸은 알고 있었다. 이 영화가 ‘폭력에 대한 철학적 대안’이 아닌 ‘액션영화’라는 사실을.

이소룡, 성룡, 이연걸로 오는 몸의 계보학
냉전시대에 탄생한 중국무술영화의 영웅, 이소룡의 몸은 파괴적이다. 적과의 대결 속에서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효과적으로 살상하느냐가 그의 몸이 보여주는 매력이다. 그러다 우리는 성룡이라는 괴짜 무술인, 변칙 무술인을 만나게 된다. 그는 냉전을 비웃듯이 몸을 희화화시킨다. 똑같이 살상을 목표로 하지만 동작들은 말하는 것 같다. ‘정말 웃기지 않니? 이 몸이 말야.’ 성룡의 액션은 점차 체조화되고 무용화되어간다.
그리고 이연걸이 있었다. 그의 동작은 아름다웠다. 하나의 무술이면서도 몸의 예술, 무용이었다. 무술영화가 그 미적인 힘을 발휘하는 부분은 그 동작의 무용적인 특성에 있다. 아름다운 몸의 동작들을 보면서 우리는 감탄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액션영화들은 이 무용을 하는 듯한 몸을 폭력과 연결시켜 미학화한다. 느와르의 탄생이다. 타란티노의 <킬빌>이나 워쇼스키의 <매트릭스> 같은 영화는 모두 이 몸의 느와르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많은 액션영화들은 아름다운 몸을 차용해 폭력적인 장면, 상황을 정당화하고 있다. 멋진 동작 하나를 보면서 우리는 빠져든다. 그러면서 저들이 왜 저렇게 싸우고 있는지조차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몸이 무기가 된 이유이다.

아름다운 몸을 탓하지 말라
성찰은 몸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달라이라마의 종교에 대한 성찰은 우리 몸을 아름답게 한다. 이연걸은 이제 그 몸의 차원을 보다 내적인 곳으로 끌어들인 것 같다. 그는 이제 나이들었고, 찍을만큼 많이 액션영화도 찍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젊을 때 고통은, 육체적 측면이 컸지만, 나이 들수록 마음의 고통이 커졌다. 마흔이 가까워오자 비로소 내가 처한 고통을 ‘객관화’하기 시작했다. 어려움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그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름다운 몸을 탓하지 말자. 그 몸을 폭력으로 내모는 수많은 사회적 모순들과, 그 몸을 전장으로 내모는 국가적인 폭력을 탓하자.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자. 몸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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