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일본에서 1천만 관객을 넘겼다는 사실이 주는 기대감만큼
3시간이 넘는 영화라는 문턱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상일 감독의 '국보'는 그 문턱을 간단히 넘겨 버리고
오롯이 기대감을 꽉 채워주는 것으로 3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은 예술의 세계를 보여줬다.
가부키라는 일본의 전통문화가 낯설지 않다면 거짓말일 게다.
아마도 한국의 관객들, 어쩌면 일본 관객들조차 이 영화를 통해 가부키를 좀더 가까이서 봤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낯설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지루할 틈 없이 관객들을 빨아들인다.
그 이유는 가부키 자체보다 하나의 예술을 최고의 경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경쟁하면서 서로를 돕기도 하는 두 예인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다루고 있어서다.

흥미로운 건 두 예인을 통해 이 작품이 보여주는 '내부인'과 '외부인' 사이의 경계다.
가부키는 가문의 후계자가 선대의 이름을 물려 받는 보수적인 전통을 갖고 있다.
즉 핏줄을 이어받는 '내부인'들에 의해 그 예술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인 기쿠오는 그 핏줄을 이어받은 후계자가 아니다.
아버지는 야쿠자였고 어린 나이에 자신의 눈앞에서 살해됐다.
가부키의 재능을 갖고 있던 기쿠오는 그 후, 가부키 명문가인 하나이 한지로 가문에 들어와
후계자인 슌스케와 함께 최고의 온나가타(여성의 역할을 하는 배우)가 되기 위해 경쟁한다.
재능이 남달라 스승조차 자식인 슌스케가 아닌 기쿠오에게 이름을 물려주려 할 정도지만
끝내 그 내부인의 장벽은 외부인인 기쿠오에게 넘을 수 없는 한계를 느끼게 한다.
"내겐 나를 지켜줄 피가 없어. 할 수만 있자면 네 피를 컵에 담아 벌컥벌컥 마시고 싶어."
가문의 혈통인 슌스케 대신 스승의 선택을 받아 무대에 서게 되지만,
긴장감에 손을 덜덜 떨며 분장을 하지 못하는 그는 슌스케에게 그렇게 토로한다.
'국보'가 가부키라는 일본 전통문화를 소재로 가져오면서도
굳이 내부인과 외부인 사이의 장벽을 이 예술의 세계 안에 그려넣은 건
재일교포로 살아온 이상일 감독의 정체성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한국인의 피를 갖고 있지만 일본인으로서 살아온 그가
내부인과 외부인 사이 경계인으로서 느꼈을 정서가 이 설정에서 진정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 작품은 일본에서 1천만 관객을 넘기며
역대급의 흥행에 성공했다.
이 흥행에는 가부키라는 전통 요소가 끌고온 기성세대들의 관심만큼
그 예인들을 통해 보여주는 달라진 시대에 대한 젊은세대들의 호응이 더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내부인과 외부인의 경계에 선 이상일 감독이 오히려 그 위치에 서 있었기 때문에
과거를 가져왔지만 현재적 가치를 잇는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는 내부인과 외부인의 대결 그리고 승패로 끝을 내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평생에 걸쳐 경쟁하지만
끝끝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예술의 최고 경지를 향해 나아간다.
핏줄은 예술의 완성이라는 하나의 경지 아래에 별 의미도 없는 어떤 것이 되어간다.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하고 그 위에 빨간 선을 긋는 가부키 특유의 분장은
그래서 이 핏줄을 넘어서는 예술의 관점을 통해 바라보면
의미심장한 표현으로 느껴진다.
"내겐 나를 지켜줄 피가 없다"며 절규하는 기쿠오에게 다가가
슌스케가 대신 그 얼굴에 빨간 선으로 분장을 해주는 장면은
마치 그 피를 예술로서 채워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기쿠오는 어린 시절 눈앞에서 총에 맞아 죽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본 충격을 평생을 갖고 살아간다.
눈내리는 창 밖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아버지의 모습은
색감으로 보면 흰 바탕에 붉은 색으로 남겨진 '피의 이미지'다.
하지만 그 충격적인 트라우마를 기쿠오는 예술적 승화를 넘어선다.
무대에서 절정의 순간에 보는 꽃잎 같은 하얀 빛들 속에서
아버지가 남긴 피의 이미지는 예술의 완성으로 치환된다.
"예술은 검이나 총보다 강하거든..."
하나이 한지로가 기쿠오에게 던지는 그 말은
내부인과 외부인을 나누고 때론 전쟁까지 비화하던
민족주의, 국가주의 같은 구시대의 대결을 뛰어넘는
예술의 힘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사진: 영화 '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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