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라면 응당.. '택시운전사'가 광주를 담는 방식
망자의 맨발은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왜 그토록 더럽혀지도록 그 맨발이 수고를 다했을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맨발인가. 살아생전에 쉬지 않고 어딘가로 데려다주곤 했으나 이제 겨우 그 끝에 이르러 영원한 휴식에 들어간 고마움과 미안함 같은 감정들이 그 맨발에 묻어난다. 그래서 그 망자의 맨발에 신발을 굳이 신겨주고픈 마음은 사람이라면 응당 그러고픈 인지상정일 것이다.

사진출처:영화<택시운전사>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만섭(송강호)은 독일의 외신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를 손님으로 태우고 광주로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많은 맨발들을 맞이하게 될 줄 전혀 몰랐다. 만섭은 자신의 영업을 위해서라도 대학생들이 데모 좀 그만 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진 소시민이었으니까. 그에게 ‘독재타도’ 같은 대학생들의 구호가 남다른 의미로 있었을 리 없다. 그저 자신의 유일한 가족 딸을 위해 쉬는 날도 거르고 택시를 운전하는 게 그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었을 테니.

신발 좀 구겨 신지 말라고 하는 만섭에게 딸이 신발이 작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느껴지는, 두 사람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무게는 ‘80년 광주’라는 어마어마한 비극 앞에서도 결코 소소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저마다 신고 달려야 하는 신발의 무게는 있는 법이고,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폄하될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 딸에게 새 신발을 사주기 위해 벌어야 할 돈 몇 푼에 광주로 들어가게 된 만섭은 도저히 방외인으로서의 입장을 고수할 수 없는 참담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자기 일처럼 다친 이들을 실어 나르는 택시기사들과 그 택시에 돈도 받지 않고 기름을 채워주는 주유소 사장, 그리고 사람이 모여드는 곳에서 주먹밥을 나눠주며 우리는 결코 타인이 아니라는 걸 몸소 실천하는 이름 모를 젊은이들 속에서, 그들이 총칼에 쓰러지는 걸 결코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게 된 것.

영화 <택시운전사>는 만섭의 시선에 비친 신발의 이미지를 곳곳에 배치해놓는다. 병원 가득 메운 부상자들과 사상자들의 맨발이 그의 눈에 들어오고, 거리에서 군인들의 군홧발에 질질 끌려가다 벗겨지는 신발이 들어온다. 하지만 그는 또한 딸의 그 꺾어진 신발을 떠올린다. 딸에게는 유일하게 자신이 신발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 곳의 더 이상 타자가 아닌 이들의 고통 앞에서 만섭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고, 그를 선선히 보내주는 광주 택시 기사와 피터의 마음이다.

하지만 애써 외면하며 빠져나오는 그 길 위에서 만섭은 누군가 신고 뛰어다녔을 무수한 신발들이 마구 벗겨져 널려 있는 것을 본다. 그 아픈 장면들은 그가 겨우 광주를 빠져나와 어느 시장통의 신발가게를 찾아갈 때, 마치 허공을 날아가는 듯 공중에 전시된 가벼운 신발의 이미지와 대비된다. 그는 결국 새 신발을 사서 딸에게 돌아가려 하지만, 못내 그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 아마도 광주의 거리 위에서 봤던 그 버려진 신발들이 그의 눈에 밟혔을 것이다.

<택시운전사>가 광주를 보는 방식은 이처럼 대단한 영웅적 행보와는 거리가 멀다. 대신 그 극한의 비극적 상황 속에서 광주 사람들이 오히려 얼마나 인간적인 따뜻함을 보여줬는가를 대비시킨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응당 해야만 하는 일로서 만섭의 변화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이것이 그저 실존인물인 피터의 이야기를 담기보다 지금껏 그 행적을 찾을 수 없는 한 택시운전사를 주인공으로 세운 이유다.

이 영화가 의도적으로 그려내는 신발의 이미지는 그래서 어찌 보면 택시운전사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결국 어딘가로 누군가를 이동시켜주는 매체가 아닌가. 길은 어디든 열려있고 그 길 위로 누구나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는 건 좋은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세상의 문제다. 하지만 1980년 광주는 그 당연한 길이 막혀 있었고 누구도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없었다. 많은 신발들은 그렇게 막히고 꺾여 거리에서 스러져 갔다. 그 길을 뚫고 들어가는 만섭의 이야기가 결코 소소할 수 없는 건 그 상식이 무너진 세상 때문이다.

혹자는 <택시운전사>를 좌파 영화 운운하지만, 이 영화는 결코 그런 이념적인 걸 내세우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사람이라면 응당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는 ‘상식의 문제’로서 광주를 이야기하는 영화다. 택시도 신발도 어디든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나아가 그것은 진실이 소통하는 방식이라는 것.


유재석도 과감하게 변화할 때 됐다, 이경규·강호동처럼

혹자들은 변함없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사실이다. 유재석은 과거나 지금이나 늘 성실하고 배려심 강하고 일에 있어서 열정적이다. 그 모습이 앞으로도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건 필자도 똑같은 마음이다. 하지만 최근 예능의 트렌드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양상을 들여다보면, 유재석 역시 변해야할 것은 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변하지 않고 지켜야 할 것도 분명하지만, 그가 변해야 할 것 역시 점점 명확해 보인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그가 최고의 예능인으로서 서게 됐을 때 그 기반이 되어주었던 건 이른바 리얼 버라이어티쇼라고 불리는 캐릭터 예능이었다. 그 선두로 선 프로그램이 MBC <무한도전>이다. 하지만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고 10년여의 세월이 흐르면서 트렌드는 캐릭터쇼에서 관찰카메라라고 불리는 리얼리티쇼로 바뀌었다. 이제 일단의 캐릭터들이 등장해 매회 미션을 수행하면서 웃음을 선사하는 캐릭터쇼는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무한도전>이야 워낙 레전드인지라 이런 트렌드와는 무관하지만.

캐릭터쇼의 시대에는 리얼 버라이어티쇼와 토크쇼가 예능의 대세였다. 그래서 <무한도전>으로 비롯된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명맥은 <1박2일>, <라인업>, <패밀리가 떴다>, <런닝맨> 등등으로 이어졌고, 토크쇼의 명맥은 <놀러와>, <해피투게더>, <라디오스타> 등으로 이어졌다. 유재석은 캐릭터쇼 시대의 맹아로서 이 두 형식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예능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무한도전>을 논외로 보면, 그가 출연하는 대부분의 프로그램들은 그다지 좋은 성적과 반응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꽤 오래도록 그가 MC자리를 지켜온 <해피투게더>는 5% 시청률에 머물러 있고, <런닝맨> 역시 한때 중국을 뒤흔들 정도의 인기를 구가했지만 국내에서는 역시 5% 시청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너무 옛날 형식에 머물러 있고 그 프로그램도 그다지 화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물론 유재석이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나는 남자다> 같은 새로운 형식의 토크쇼를 시도한 바 있고, 유희열과 함께 <투유 프로젝트 슈가맨>을, 김구라와 함께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를 진행한 바 있다. 하지만 이들 프로그램들이 지금껏 살아있지 못하고 모두 종영하거나 새롭게 바뀌었다는 사실은 유재석이 그간 새로운 시도에서 그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걸 보여준다. 

사실 관찰카메라 같은 리얼리티쇼 트렌드 상황 속에서 과거 캐릭터쇼에 최적화되어 있던 예능인들이 다시 적응해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최근 이경규나 강호동 같은 과거 유재석과 함께 예능을 이끌었던 예능인들의 남다른 행보가 눈에 띈다. 이들에게서 보이는 건 과거 최고의 위치에 있던 자신들을 한껏 내려놓은 듯한 모습이다. 지상파만 고집하던 강호동은 연거푸 고전을 못하다가 아예 지상파를 모두 접고 비지상파 예능으로 옮기면서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아는 형님>과 <신서유기>로 새로운 트렌드에 도전한 강호동은 최근 <한끼줍쇼> 같은 프로그램으로 자신의 색깔을 다시금 만들었다. 

예능계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이경규의 행보는 더 파격적이다. 고정 MC만 해오던 그는 아예 여러 프로그램에 게스트를 자처하고 나섰고, 예전 같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정글의 법칙>이나 <한끼줍쇼> 같은 생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자신을 내려놓자 그 자리에서 새로운 영역이 생겨났고, 그 영역에서는 역시 예능계의 베테랑다운 자기만의 독보적 색채를 그려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물론 유재석은 지금 현재도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자타공인 최고의 예능인이다. 하지만 그의 팬들은 그가 과거의 모습에 머물러있기 보다는 새로운 트렌드에서도 최고의 모습을 보이기를 원할 것이다. 여전히 그의 성실하고 배려심 깊은 모습은 변치 않기를 바라지만, 관찰카메라 같은 새로운 형식 속으로 들어온 또 다른 그의 면모를 발견하기를 원한다. 

처음부터 고정이 부담스럽다면 이경규처럼 게스트로 영역을 넓혀보는 것도 좋은 시도일 것이다. 예를 들어 <정글의 법칙>에 가는 유재석이나, 최근 위기 상황에 놓인 <개그콘서트> 같은 프로그램에 한 코너를 해보는 것이나, <세모방> 같은 프로그램에서 영세한 방송에 직접 뛰어들거나, <한끼줍쇼>에 게스트로 나와 낯선 집의 초인종을 누르는 그런 유재석의 모습은 어떨까 실로 궁금하다. 그가 앞으로도 지켜야 할 것들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변해야 할 것들은 과감히 시도해보는 것. 그것이 더 오래도록 최고의 위치에 서 있는 유재석을 보기를 바라는 시청자들의 마음에 부응하는 일이 아닐까.

‘효리네’·‘한끼줍쇼’, JTBC예능이 일반인을 대하는 자세

JTBC <효리네 민박>에 출연한 삼남매 이야기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이상하게도 잡아 흔든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때문에 사실상 엄마 같은 역할을 해온 큰언니 경화와 노래를 만드는 게 꿈이라는 작은 언니 예원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티 없이 자라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모습이 그토록 예쁠 수 없는 막내 하민이. 

'효리네 민박(사진출처:JTBC)'

사실 그들이 이 프로그램에서 무언가 대단히 특별한 말이나 행동을 보인 건 없다. 특별한 일이라고 해봐야 엄마 생전에 같이 갔던 제주의 해변을 찾아가 그 때를 회고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밝고 바른 말과 행동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이들의 진정성 있는 마음이 묻어난다. 

눈치 빠른 민박집 회장님 이효리는 엄마 없이 자란 하민이가 그토록 밝다는 사실에서 큰언니 경화가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공감한다. 그래서 자꾸만 쓰이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노래를 만드는 게 꿈이라는 둘째와 함께 노래를 만들고, 돌아가는 길에 줄 선물로 자신이 누군가에게 받았던 기타를 준비한다. 그러면서 말한다. “누군가에게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호의를 베풀 때가 있잖아. 그러면 그 사람한테 그걸 갚는 게 아니라 나도 다른 사람한테, 필요한 사람한테 주면...” 

이것은 <효리네 민박>이라는 프로그램이 일반인 손님들을 대하는 방식이다. 거기에 출연자라는 의식은 별로 없다. 다만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있을 뿐이고, 그 만남 사이에 벌어지는 꽤 담담해도 은근히 전해지는 마음이 있다. 물론 일반인들은 이효리와 아이유, 이상순을 눈앞에서 보는 것에 신기해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다. 그 후에는 오히려 이 손님들을 위해 헌신하는 연예인들이 보이고, 그로 인해 일반인들의 매력적인 면면들이 자연스럽게 프로그램 전면에 묻어난다. 

<인디애나 존스>의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두 명의 아재 모험가, 마치 친정 부모처럼 갖가지 음식들을 마련해줘 풍족한 효리네 민박을 만들어주었던 멋진 노부부, 동년배로서 아이유와 진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지내는 모습을 보여줬던 유쾌 발랄 소녀들 등등. 삼남매를 비롯한 손님들이 그다지 드러내지 않아도 저마다의 매력이 넘쳐났던 건 바로 그 담담함과 그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이효리와 이상순 부부가 손님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러나온 것이겠지만.

관찰카메라가 예능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하면서 또 하나의 달라진 면모는 연예인과 일반인의 접점을 다룬다는 점이다. 시청자들은 연예인의 일상이 궁금하면서도 동시에 자신과 똑같은 비연예인이 그 세계 속에 들어가 있는 어떤 동질감을 경험하고 싶어한다. <효리네 민박>처럼 아예 이효리와 이상순 그리고 아이유를 민박집 운영자로 세워두고 일반인 손님들이 들어오는 구조는 그래서 이러한 트렌드의 정답 같은 느낌이다. 

중요한 건 여기서 프로그램이 일반인을 대하는 자세다. 연예인과 비연예인의 경계를 나누기보다는 그저 똑같은 사람으로서 서로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 수평적 관점이 중요해졌다는 것. 최근 JTBC에서 주목받는 또 하나의 예능 프로그램 <한끼줍쇼>도 그런 점에서 보면 <효리네 민박>과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효리네 민박>이 연예인의 집으로 일반인을 초대한다면, <한끼줍쇼>는 일반인의 집으로 연예인이 들어가는 것이 다를 뿐.

여기서도 역시 중요한 건 이경규와 강호동이 그들에게 문을 열어준 일반인 분들을 대하는 태도다. 거기서 이들 MC들은 자신들이 주인공이 아니고 단지 그 곳에 사는 분들의 삶을 소개해주는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그래서 프로그램을 보고 나면 이경규와 강호동이 얼마나 재밌었는가보다는 그 날 소개됐던 집에 사는 분들의 따뜻함 같은 것이 더 기억에 남는다. 

<효리네 민박>과 <한끼줍쇼>. 이 JTBC의 대표 예능 프로그램들은 그래서 지금 트렌드가 되고 있는 일반인과 연예인의 콜라보에 있어서 정석을 보여준다. 일반인들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줌으로써 오히려 더 빛나는 연예인의 모습들. 한국형으로 진화한 리얼리티쇼의 독특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김원해에 이어 정상훈, ‘SNL’의 숨겨진 배우들

우리에게 그저 tvN 예능 프로그램 [SNL코리아]의 ‘양꼬치 앤 칭타오’로 알려진 코미디 배우 정도로 여겨져 왔던 정상훈. JTBC 금토드라마 <품위 있는 그녀>는 그의 배우로서의 새로운 면면이 있다는 걸 확실히 각인시켜줬다. 코미디 연기에도 어떤 수준 이상의 레벨이 있다는 걸.

'품위있는 그녀(사진출처:JTBC)'

그가 이 드라마에서 맡은 우아진(김희선)의 남편, 안재석이라는 역할은 사실상 국민비호감이 될 만한 캐릭터다. 딸의 미술선생과 바람이 나고 결국은 그 사실을 들켜버렸지만 오히려 뻔뻔하게 자신은 그 내연녀와 헤어질 생각이 없고 그렇다고 아내인 우아진과 이혼할 생각도 없다고 말하는 인물. 그래서 우아진을 복장 터지게 하는 그런 인물이다. 

사실상 안재석 같은 캐릭터는 이 드라마가 신랄하게 비판해내려는 ‘도덕적 해이’의 수준이 불감증 단계에 이런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안재석은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렇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 안태동 회장(김용건)이 해왔던 ‘도덕적 해이’의 삶을 보면서, 그렇게 살아도 아무 문제가 벌어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면서다. 안재석이라는 캐릭터가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건 그래서다. 

하지만 <품위 있는 그녀>는 이런 인물에 대한 비판을 심각한 사회극으로 담기보다는 냉소가 곁들여진 풍자극으로 담아내려 했다. 안재석은 그래서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뒷골을 잡게 만드는 인물이지만, 어딘지 그 황당함과 코믹함이 웃음을 터지게 해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시청자들은 안재석의 행태를 보며 그 황당함에 실소하게 되고 그러면서 조금씩 이 드라마가 담아내려는 부조리한 저들의 삶에 다가가게 된다. 

흥미로운 건 정상훈이라는 배우가 이 안재석이라는 역할을 제대로 연기해냈다는 점이다. 미움을 넘어 분노하게 만드는 밉상이지만 한편으로는 귀여운 면면까지 있는 철부지로서의 캐릭터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흔히들 쉽게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을 코미디 연기로서 세운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역할의 쉽고 어려움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악역과 코미디 연기 중 더 어려운 건 무엇일까. 언뜻 보기엔 악역이 어려울 것 같지만 실상 배우들은 코미디 연기가 가장 어렵다고 지목하곤 한다. 그런 점에서 정상훈이 <품위 있는 그녀>에서 해낸 안재석 연기는 박수 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tvN [SNL코리아]의 고정 크루들 중에는 정상훈처럼 의외로 단단한 연기 내공을 가진 배우들이 있다. 이를테면 김원해 같은 배우가 그렇다. 영화 <명량>에서 배설 장군 역할을 연기하며 존재감을 드러내더니 <아수라>에서 작대기 역할로 놀라운 에너지를 보여준 배우. 코미디 연기로 먼저 대중들에게 다가왔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 배우가 이제 김원해에 이어 장상훈으로 늘어난 상황이다. 

우리 사회는 코미디 배우를 조금 낮게 바라보는 비뚤어진 시선을 가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저 편견이라는 걸 깨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김원해나 정상훈 같은 연기자들이 제대로 그 연기의 맛을 보여주고 있다. <품위 있는 그녀>는 물론 김희선과 김선아의 연기를 보는 맛이 그 중심을 잡아주고 있지만, 그 바탕을 깔아준 정상훈의 코미디 연기를 빼놓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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