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척하며 여성 이용하는 세상에 대한 '악녀'의 일침

영화 <악녀>는 액션으로 시작해서 액션으로 끝나는 영화다. 그런 사실은 영화가 시작하면서부터 단박에 알 수 있다. 조폭 소굴로 보이는 좁은 복도 저편에서 “너 누구야?”라고 묻는 조직원에게 다짜고짜 총을 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주인공 숙희(김옥빈)의 시점으로 보여진다. 마치 슈팅게임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이 놀라운 액션은 복도에서 좀비처럼 쏟아져 나오는 조폭들을 총과 칼로 마구 도륙해내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숙희의 시점으로 돌아보면 널브러져 있는 조폭들의 시체들. 어쩐지 그 풍경들은 잔인하다기보다는 통쾌하다. 거기에는 그간 여성들이 하다못해 길거리를 걸어 다니면서도 느꼈을 막연한 불안감, 두려움 같은 걸 단번에 일소시켜버리는 그 무언가가 있다. 

사진출처:영화<악녀>

하지만 그게 첫 시퀀스의 끝이 아니다. 문을 열면 마치 헬스장처럼 생긴 공간에 또 일단의 조폭들이 칼과 도끼를 들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한바탕 아수라장이 벌어지고 피가 튀고 날아가는 조폭들의 살점들이 보이다가 숙희는 거울로 날아가 얼굴을 부딪친다. 그 순간 비로소 그 동안 숨겨진 채 조폭들을 제압했던 무시무시한 액션 히어로의 얼굴이 거울에 비춰진다. 시점은 주인공 시점에서 빠져나와 이제 제 3자의 시점으로 숙희를 따라간다. 마지막에 창밖으로 뛰어내리며 두목을 제압하는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거꾸로 뒤집어졌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며 바닥에 착지하는 숙희의 모습이 잡힌다. 

사실 <악녀>는 이 첫 도입부의 10분 정도에 걸쳐 펼쳐지는 액션 장면들만으로도 충분히 감탄사가 터져 나올 영화다. 하지만 이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상상초월 액션 연출의 시작일 뿐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며 벌어지는 스피드 액션과 결혼식 장면에 나오는 저격 액션, 요정에서 벌어지는 칼부림, 그리고 마치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최후의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마지막 시퀀스까지 영화는 긴장을 놓을 틈을 주지 않는다. 

물론 액션에 이렇게 공을 들인 만큼 스토리도 좀 더 쫀쫀하게 짰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마치 <니키타>의 설정을 우리 식으로 따온 듯한 스토리에 갑자기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면서 변화하는 숙희의 모습은 이 도발적인 캐릭터를 신파적 스토리에 얹어 놓은 듯한 이물감을 준다. 만일 스토리가 훨씬 더 이 숙희라는 통쾌한 캐릭터를 통해 우리네 현실에 존재하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폭력들에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댔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이랬다면 <악녀>는 더 높은 성취를 가져갔을 것이다. 

하지만 스토리가 조금 빈약하다고 해도, 액션을 구성하면서 정병길 감독 역시 우리 사회의 폭력성을 의식했다는 점은 도처에서 느껴진다. 즉 숙희의 핏빛 액션을 통해 결혼식은 누군가의 저격장이 되어버리고, 여성을 성 상품화하는 요정이라는 공간은 피 튀기는 전장이 되어 버린다. 무엇보다 숙희라는 인물을 이용하는 건 조폭이나 국정원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은 <악녀>의 제목에 담겨진 비판의식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들은 모두 달콤한 말로 숙희를 움직이게 한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동기를 갖게 만드는 방식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복수나 이제 막 결혼한 남편의 복수 그리고 사랑하는 딸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전장으로 뛰어들지만 그것이 모두 달콤한 거짓말이었다는 걸 숙희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결국 스스로 서서 착한 척하며 그녀를 이용하는 이들을 향해 날리는 일침. 그래서 그녀는 착한 척 하는 세상에 맞서는 ‘악녀’로 재탄생한다. 

영화 <악녀>는 숙희의 시점으로 담겨진 얼굴 없는 액션장면으로 시작하지만 그 마지막 장면은 피칠갑을 한 그녀가 악마처럼 웃는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끝난다. 결국 <악녀>는 자신의 얼굴(존재)을 갖지 못하고 이용당하며 살아가던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찾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여야 하고 피칠갑을 한 악녀가 되어야 하는 현실이라니.

‘알쓸신잡’에 화자 아닌 청자 유희열이 필요했던 까닭

사실 누군가가 가르치는 이야기를 듣는 건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때로는 그런 가르침의 분위기는 ‘꼰대’의 이미지로 연결될 수 있고, 때로는 권위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최근 인문학이 예능의 새로운 소재로 트렌드화되면서도 가장 고민하는 부분은 바로 이런 이미지와 느낌을 어떻게 상쇄시킬까 하는 점이다. 

'알쓸신잡(사진출처:tvN)'

나영석 사단의 새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역시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느껴진다. 즉 작가 유시민, 맛칼럼니스트 황교익, 소설가 김영하 그리고 물리학자 정재승 같은 쟁쟁한 전문가들을 섭외하고 그 안에 유희열이라는 ‘재담꾼’을 투입한 건 그래서다. 

<알쓸신잡>은 첫 회가 방영되고 대체로 반응이 괜찮았다. 나영석 PD표 예능에 대한 여전한 지지가 있었고, 유시민 작가처럼 최근 대중들의 호감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 주는 유쾌함이 있었다. 여기에 유시민과 각을 세우는 황교익 그리고 간간이 한 마디씩 던지지만 깊이가 느껴지는 김영하와 말 그대로 ‘쓸데없어 보이는’ 과학적 상상력을 통해 의외의 예능감을 보여주는 정재승의 합이 썩 괜찮았다. 

물론 통영이라는 지역이 가능케 하는 역사적 담론들(이순신 관련)이나, 문학 이야기(난중일기, 박경리 선생의 토지)와 해산물이 풍부한 곳이어서 식사시간마다 자연스럽게 깔리는 먹방의 분위기 그리고 동피랑, 서피랑 마을을 갖고 있는 곳의 볼거리 등이 어우러진 것도 인문학적인 이야기가 갖는 지나친 무게감을 떨쳐낼 수 있는 요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쓸신잡> 역시 인문학 소재가 갖는 ‘먹물’의 느낌이나 ‘지식의 나열’에서 비롯되는 부담감 같은 건 피하기 어려웠다. 끊임없이 지식을 쏟아내는 유시민 작가의 달변은 먹거리에서부터 역사, 문학, 경제 등 다양한 분야들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것이었지만 그런 달변이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와 부딪치는 지점에서는 고집 같은 것도 느껴졌다. 물론 이런 고집은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도 마찬가지였다. 음식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나이대가 유시민과 황교익 그리고 김영하와 정재승 이렇게 두 세대로 나눠지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이야기를 유시민과 황교익이 끌고 가는 분위기도 감지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전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이들보다 더 주목되는 건 간간히 한 마디씩 터트리는 김영하와 정재승이었다. 김영하가 슬쩍 던진 “햇살이 바삭바삭하다”는 말 한마디가 이들의 여행의 공기를 전해주고, 정재승의 그 황당한 ‘이순신의 숨결’ 이야기가 <알쓸신잡>의 독특한 지적 유머코드를 담아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건 유시민과 황교익이 쏟아내는 전문지식들 속에서 예능으로서의 어떤 균형점을 잡아준 건 다름 아닌 유희열이었다. 유희열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간간히 한 마디씩 덧붙임으로써 가르치는 분위기를 누그러뜨린다. 즉 유희열이 던진 “이 분들 옆에 있으니까 바보가 된 기분”이라는 말은 시청자들이 느낄 그 기분이 당연하다는 걸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런 지식을 털어놓는 그들이 보통은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준다. 

물론 <알쓸신잡>은 그 주인공이 ‘말하는 이들’이다. 이들을 특정 여행지에 합류시킨 건 보통 사람들의 시각과는 완전히 다른 각자 전문분야를 가진 이들의 생각들을 그 공간을 통해 풀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러한 ‘말하는 예능’에서 더 중요해지는 건 유희열 같은 ‘들어주는 인물’이다. 시청자들의 눈높이를 맞춰주고 이야기가 과할 때는 그 사실을 얘기해 공감대를 형성해주고, 놀라운 상상력에는 같이 놀라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때론 그들도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과 똑같다는 사실을 드러내주기도 하는 인물. <알쓸신잡>에서 유희열이 없었다면 자칫 지루해졌을 수도 있는 일이다.

‘수상한’·‘쌈마이’ 같은 멜로라면...장르물과 결합하고 현실 담아내고

사실 우리네 시청자들에게 멜로에 대한 반응은 양면적이다. 우리네 드라마에서 멜로드라마적 전통은 드라마의 전통과 맞닿아 있을 정도로 뿌리 깊다. 지금껏 드라마 하면 그것이 어떤 장르를 갖고 있든 멜로가 빠지면 어딘지 빈자리가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드라마의 ‘멜로 코드’가 식상하다는 반응도 어김없이 나온다. 특히 장르물이나 사극에서 갑자기 멜로 코드가 등장하면, “멜로 없이는 안 되냐”는 불만 섞인 목소리가 나오곤 한다. 어딘지 빠지면 아쉽고, 들어가면 식상해지는 멜로. 그래서 멜로는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수상한 파트너(사진출처:SBS)'

SBS 수목드라마 <수상한 파트너>는 멜로에 법정드라마라는 장르물을 엮어냈다. 물론 법정드라마 속에 간간이 멜로 코드가 섞인 드라마는 이전부터 꽤 많이 등장한 바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저 멜로 코드를 살짝 넣은 것이 아니라, 멜로와 법정드라마 장르를 보다 긴밀하게 엮어내고 있다. 즉 제목에서 드러나듯 법정드라마의 공적 관계 속에서는 ‘파트너’이지만, 그것이 멜로의 사적 관계로 얽히며 멜로와 법정드라마 양면에 모두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일인지 7명을 죽이려는 연쇄살인범이 등장해 여주인공인 은봉희(남지현)에 접근하는 그 장면들은 장르물의 긴장감을 높이지만, 여기에 그녀에 대한 마음이 점점 커져가는 노지욱(지창욱)의 절절함이 더해지며 멜로의 강도도 높이고 있는 것. 그저 멜로가 양념으로 더해진 것이 아니라 장르물의 긴장감 또한 높여주는 효과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은 <수상한 파트너>의 멜로를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다. 

한편 KBS 월화드라마 <쌈마이웨이>의 경우 답답한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있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멜로와 엮어냈다. 즉 갑질 하는 현실에서 질식해가는 청춘들이 그들만의 연대와 사랑, 우정 등을 통해 서로를 위로하고 자신들만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이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이야기의 골자다. 아나운서가 꿈이지만 백화점 안내원인 최애라(김지원)와 태권도 선수의 꿈을 접고 근근이 살아가던 고동만(박서준)이 그 현실의 벽 앞에서 서로를 지지해주며 차츰 친구 그 이상의 감정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은 그래서 청춘 멜로에 현실적 질감을 더해준다. 

태생적으로 가진 자들이 스펙을 통해 저들만의 세상을 꾸려나가고, 거기서 빗겨난 ‘쌈마이’ 청춘들이 그래도 ‘마이웨이’를 가겠다고 선언하는 이야기는 다분히 사회에 대한 도발적 메시지를 담아낸다. 그러면서 그 청춘의 도발을 연대하는 친구들의 훈훈한 우정 속에서 멜로가 은근히 피어난다. <쌈마이웨이>가 다루는 청춘멜로가 뻔해 보이지 않고 어떤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이러한 현실적 질감이 그 밑바닥 정서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멜로의 이종결합이 그 자체만으로 성공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멜로가 그저 보조적으로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장르물이든 현실적인 이야기이든 그 안에 제대로 녹아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수상한 파트너>와 <쌈마이웨이>의 멜로는 이러한 이종결합의 정답지 같은 느낌을 준다. 장르물 속에서 또 현실적인 공감대 위에서 그 멜로의 화학작용이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으니.

‘군주’, 가면과 권력에 대한 중독의 상관관계

가면의 주인은 과연 누가 될까. MBC 수목드라마 <군주>에서 편수회에 의해 죽을 위기까지 처했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아 보부상 두령이 된 세자 이선(유승호)은 궁 밖에서 힘을 모아 편수회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왕좌를 되찾으려 한다. 본래 ‘왕세자’라는 가면의 주인은 그였지만 지금 그는 ‘보부상 두령’이라는 가면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군주(사진출처:MBC)'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세자 이선의 빈자리에 편수회가 허수아비로 세워놓은 천민 이선(엘)에게 일어나는 변화다. 처음 그는 세자를 위해 기꺼이 자신이 가짜 세자 역할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이것이 편수회에 의해 발각되고 세자의 죽음(물론 그건 진짜 죽음이 아니었지만)을 목격하며 대신 세자의 자리에 올라 허수아비 왕이 되자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내가 진짜 왕이 돼 편수회와 싸워 이기고, 만백성을 구하고, 가은 아가씨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그런 꿈을 꾸게 된다” 천민 이선은 왕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면서 차츰 그 가면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자신의 사적인 일들과 무관하지 않다. 편수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자신의 삶이 자신에게 끝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가족의 운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가 편수회를 이겨내고 싶은 욕망을 갖게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사적인 욕망은 고스란히 공적인 욕망으로도 이어진다. 그것이 백성을 구하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사적인 욕망은 가은(김소현)에 대한 연정과도 연결되어 있다. 천민 시절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던 그녀가 아닌가. 마침 가은이 궁녀가 되어 궁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건 향후 천민 이선이 가은과 맺게 될 애증을 예상하게 한다. 천민 이선은 가은을 마음에 두고 있지만, 가은은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한 세자라고 생각한다. 이제 ‘가면의 주인’이 되려는 세자 이선과 천민 이선이 겪게 되는 욕망의 충돌은 그래서 가은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사적 멜로로도 연결된다. 

하지만 <군주>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건 단지 이런 ‘가면의 주인’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대결과 삼각 멜로 때문이 아니다. 사극으로서는 다소 파격적인 가면 설정에 담겨진 또 다른 의미가 새롭기 때문이다. <군주>의 이야기는 애초에 왕(김명수)이 편수회에 짐꽃에 중독되는 입단식을 치르는 것에서 시작한다. 편수회는 그를 왕으로 세우지만 그 왕은 그 대가로 짐꽃에 중독되어 편수회가 주는 해독약을 정기적으로 먹지 않으면 죽음을 맞게 되어버린다. 이 초반 설정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 중독과 같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가면은 처음 얼굴을 가리고 정체를 숨기는 용도로 등장하지만, 차츰 그것이 왕과 권력의 상징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그 가면을 쓰는 순간부터 그것을 벗기가 어려워지는 ‘중독’ 상태가 되어버린다. 천민 이선이 갖게 되는 욕망은 그래서 권력에 대한 중독의 의미가 담겨진다. 정반대로 궁 밖으로 내쳐진 세자 이선은 그 왕세자의 가면을 벗은 후 민초들의 삶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진짜 왕의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단지 가면을 통한 치기어린 욕망이 아니라 진심으로 민초들을 생각하는데서 나오는 희망이다. 

<군주>는 편수회라는 비선실세와 대결하는 왕세자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또한 그 안에 천민 이선과 왕세자 이선의 ‘가면의 주인’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대결 역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천민 이선과 왕세자 이선 그리고 백성들까지 모두 중독(권력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의 주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다소 낮선 가면 설정이지만 <군주>가 이를 선택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인다. 평이한 사극의 틀을 넘어서 다양한 의미들을 그 설정을 통해 담아내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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