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백종원 울컥하게 한 모금 75만원 고맙다는 칼국숫집 할머니

 

“2남1녀인데 한 놈이 저 싫다고 갔어요.” 백종원은 갔다는 말을 어딘가로 떠났다는 이야기로 들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다음 이야기에 화들짝 놀랐다. “사고로...” 큰 아들이 5년 전 사고로 세상을 등졌다는 이야기였다. SBS <백종원의 골목식당>의 분위기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지금껏 백종원이 식당을 찾아가면 늘 생겨나던 긴장감 따위는 사라지고 괜스레 먹먹한 분위기가 화면 가득 채워졌다.

 

화재가 나 터전을 잃고는 비닐로 대충 만들어 창조차 나 있지 않은 곳에서 장사를 이어가고 있던 원주미로예술시장의 칼국숫집. 지난 방송에서 김성주는 할머니에게 자제 분들은 무얼 하시냐고 여쭤본 바 있다. 백종원에게 담담히 애써 웃으며 먼저 간 첫째 아들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모니터로 들여다보던 김성주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정인선에게 그는 사실 지난 번 할머니를 뵈었을 때 오해한 게 있다고 솔직히 속내를 털어놨다. 화재까지 당했는데 굳이 그 연세에 가게를 하시는 게 혹여나 자식들이 신경을 쓰지 않아서인가 생각했다는 거였다. 그 때 할머니는 속사정을 얘기하지 않고 “일 하는 게 좋다”고만 말씀하셨다.

 

하지만 할머니의 안타까운 사연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둘째 아들도 그 곳에 전 재산을 투자해 떡집을 냈지만 3개월 만에 화재를 당해 모두 잿더미가 되어버렸다는 것. 오래도록 떡집에서 일하다 겨우 가게를 마련한 것이라고 했다. 화재는 결국 할머니의 터전도 또 둘째 아들의 꿈도 모두 태워버린 거였다. 그제야 할머니가 그 연세에 이런 허름한 가건물이나 다름없는 가게를 열고 일을 하시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딱한 사정을 들은 백종원은 그래도 이 가게에서 당분간이라도 일하기 위해서는 공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침 할머니도 생각을 하고는 계셨다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생각하는 공사 예산 350만원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화재 보상 문제는 받을 길이 거의 없다고 하셨다.

 

놀라웠던 건 그 와중에도 할머니가 가게복구를 위해 모금된 돈 75만원을 받은 걸 너무나 감사하게 여기고 계셨다는 거였다. “모금해온 돈 걷은 걸로 75만원을 받았어요. 너무나 고마워요. 누가 그렇게 도와주겠어요.” 사실 75만원이라는 모금액이 그리 큰 돈은 아니었다. 당한 피해를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작은 액수에도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는 사실을 고마워하고 계셨다.

 

인테리어 전문가를 직접 만나 할머니 몰래 공사 견적을 내달라는 백종원은 제작진 도움이든 자신의 사비든 들여서라도 공사를 제대로 해주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면서 할머니에게는 비밀로 해달라며 350만원 예산에 맞춘 것처럼 해달라고 당부했다.

 

사실 진짜 도움이 필요한 집을 도와야 한다는 건 이미 예전부터 <백종원의 골목식당>에 대해 나왔던 이야기들이었다. 그런 점을 두고 보면 이번 원주 미로 예술시장 칼국숫집은 역대급 미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모든 걸 잃고도 틈만 나면 카메라를 든 제작진에게 다가와 “밥 먹었냐”고 묻고 요구르트라도 전해주는 할머니의 그 마음 씀씀이에 이미 백종원도, 제작진도 또 시청자들도 모두 어떻게 하면 도움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으니.(사진:SBS)

‘유퀴즈’가 길에서 찾은 우리들의 이야기들

 

tvN <유퀴즈 온 더 블럭>에 흔쾌히 인터뷰를 응해주신 6.25 전쟁 전사자 유가족인 공창순 어르신은 갑자기 선물로 뽑게 된 최신휴대폰을 영 부담스러워 하셨다. 자신이 한 게 뭐가 있냐며 손사래를 쳤다. 어떻게든 선물을 주려고 유재석과 조세호가 초콜릿이라도 달라며 ‘물물교환’ 하듯 선물을 내밀었지만 끝내 거부하셨고 결국 남편분인 김주호씨가 선물을 대신 받았다.

 

6.25 전쟁 당시 오빠 둘을 잃었다는 공창순 어르신은 그 후 지금까지 연락이 끊겨버린 오빠들을 지금도 그리워하고 있었다. “오빠”하고 나지막이 외쳐보는 목소리는 떨림이 가득했다. 꿈 속에서 딱 한 번 봤다는 오빠. 하지만 얼굴이 지금도 기억난다는 공창순씨는 아들이 오빠를 똑 닮았다고 했다. 그리움이 깊어 아들까지 닮은 것인지, 아니면 아들에게서 오빠를 떠올릴 정도로 그리움이 깊은 것인지, 어쩌면 둘 다 일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르신은 현충원 국군묘지를 보면 “내가 당신들 덕분에 이렇게 살아서 댕기지 않나...” 그런 마음이 생긴다고 하셨다. 그리고 군인들을 보면 괜히 자꾸 한 번 더 보게 된다며 ‘군인’이란 단어 하나에도 울컥해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군대 가서 살아가지고 제대했다면 참 너무 반가워요. 남의 집 자식이래도.” 어르신은 “아는 사람이 군대 가서 잘 하고 복무하고 왔다면 아이고- 고맙네요 고맙네요” 하셨단다.

 

<유퀴즈 온 더 블럭>이 동작구를 찾은 건 이 프로그램의 방영일이 6월 25일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동작구에 있는 현충원을 찾아 그 날의 의미를 되새기려 했던 것. 그 곳에서 유재석과 조세호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지금도 유해를 발굴해 유가족의 품에 돌려보내려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고, 전쟁 당시 산화했던 이름모를 전사자들의 가슴 뭉클하고 아픈 이야기들을 들었다.

 

이 날 <유퀴즈 온 더 블럭>은 그러나 현충원과 6.25 전쟁 전사자의 이야기들만을 담은 건 아니었다. 이 날의 주제는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 포괄적인 주제 아래 프로그램은 길거리에서 만난 많은 분들의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회계사 시험을 준비 중이라는 한 학생은 ”뭔가 하나에 미칠 수 있는 열정 같은 것“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어려서는 그렇게 하고 싶은 일에 미쳐서 빠져들 수 있었지만 이제는 해야 하는 일들이 더 많아지면서 점점 열정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이 학생은 아버지에게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와서 좋아하셨는데 아직까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전했다.

 

금은방을 하고 계시지만 직접 시골에서 지은 마늘을 팔아 마늘 냄새가 가득한 금은방 주인아저씨는 경기가 안 좋아 주변 가게들에 손님이 없는 걸 안타깝게 바라보고 계셨고, 20년 동안 식당일을 하며 조그마한 만두집을 차린 중국 동포 모녀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애써 웃으며 들려주셨다.

 

사경을 헤매는 딸을 두고도 찾아가보지도 못하고 한 달에 하루를 쉬며 내내 일해 번 돈을 모두 고향으로 보냈던 사연이며, 그 긴 시간을 지나 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된 딸과 지내게 된 행복에 대해 말씀하셨다. 딸은 엄마가 “건강하게 못 낳아줘서 미안하다”고 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만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딸은 “엄마랑 다신 떨어지기 싫다”고 말했다. 좁고 작은 만두집이지만 모녀는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둘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중국 동포 모녀의 이야기는 그래서 다시 저 현충원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게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 그래서 그 곳에 누워계신 순국선열분들이 있어 우리는 지금도 그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유퀴즈 온 더 블럭>이 길에서 만난 분들의 이야기는 저마다 다른 삶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또한 그리 다르지 않다는 걸 이 프로그램은 일관된 스토리텔링으로 묶어주었다. 동작구에서 담은 스토리텔링은 상실이 주는 아픔과 고귀한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믿음이다.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며 아직까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해 가족에게 미안해하는 대학생은 1+1 상금으로 100만원을 받으며 나머지 기부금 100만원을 저소득청소년 생리대 지원에 써달라고 부탁했다.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이런 작은 일들이 우리 사회가 그래도 괜찮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현충원에서 만난 공창순 어르신이 휴대폰을 선물 받고도 애써 부담스럽다며 자신은 한 게 없다는 말씀에 프로그램 제작진은 ‘우리에게 오늘을 선물해주신 6.25 참전용사분들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자막을 전해주고,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오빠들을 그림으로나마 함께 할 수 있게 그려 영상에 담아주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가는 일 자체가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는 걸 <유퀴즈 온 더 블럭>은 보여주고 있다.(사진:tvN)

‘보좌관’, 시점을 바꾸니 달라 보이는 정치의 세계

 

사실 ‘국회 파행’이라는 뉴스 제목은 이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무덤덤해질 지경이다. 그래서 시큰둥하게 “또야?” 하고 넘어가게 되는 정치권 이야기들... 대중들은 정치 이야기에 흥미를 갖긴 하지만, 그 반복되는 스토리에 신물이 난다. 어째 정치권 이야기는 매번 똑같이 반복되고 달라지는 게 없어 보일까. 이런 식상함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고, 그런 무관심은 또 다시 정치권의 눈치 보지 않는 ‘파행’으로 이어진다. 어느 정도는 조장된 무관심이다.

 

그러니 이 정치를 소재로 드라마를 만든다는 건 모 아니면 도가 되는 위험한 선택일 수 있다. 신물 나는 정치에 아예 무관심해진 이들은 보지도 않고 “또야?” 할 테고, 본다고 하더라도 이미 익숙한 국정감사니 선거자금후원이니 당내 경선 같은 소재들은 이미 뉴스로 봤던 그 식상함을 다시금 떠올리게 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JTBC 금토드라마 <보좌관>은 정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이런 ‘위험한 선택’들을 절묘하게 비켜나간다. 그것은 정치권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시점을 보좌관이라는 그간 수면 밑에 존재했던 이들로 바꾸면서다. <보좌관>의 정치 이야기를 흔히 미디어에 들어나는 정치인들의 이야기로만 들여다보면 얼마나 식상한 이야기가 될 수 있었는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송희섭(김갑수) 의원과 조갑영(김홍파) 의원이 당내에서 원내대표를 두고 벌이는 경쟁이 그들만의 이야기로 처리된다면 어땠을까. 한참 밀리고 있던 송희섭 의원의 패색이 짙어질 즈음 갑자기 조갑영 의원의 불출마 선언을 하는 걸 보며 시청자들은 또 뭔가 약점을 잡혔나 보네 했을 게다.

 

하지만 <보좌관>은 이런 사안의 겉면이 아니라, 송희섭 의원의 보좌관 장태준(이정재)과 조갑영 의원이 러닝메이트로 쓰고는 이제 팽하려던 강선영(신민아) 당 대변인의 기묘한 역학 구도 속에서 조갑영 의원의 정치자금 후원 비리를 찾아내는 이면의 모습을 그려낸다. 즉 <보좌관>은 우리가 정치판 뉴스에서 자주 봐왔던 노동자 문제나 공적제보자 문제 같은 것들이 처리되는 과정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움직임이 동원되었는가를 담아낸다. 정치란 그저 맨 앞에서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이 독단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무수한 역학관계 안에서 많은 이들의 말과 행동들이 겹쳐져 나타나는 거라는 걸 이 드라마는 보여준다.

 

사실 정치인에 대해 대중들은 그리 호의적인 마음을 갖지 않는다. 그것도 송희섭이나 조갑영 같은 노회한 정치인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드라마는 이들의 면면을 미화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 대한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시선이 <보좌관>에는 그대로 담겨있다. 그래서 그 노회한 정치인들이 군림하고 있는 그 밑의 보좌관이나 비서, 인턴 같은 인물들의 고군분투는 그들을 위한 행동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것은 장태준처럼 의원이 되고픈 야망 때문에 하는 행동이거나, 아픈 과거사를 숨긴 채 나름의 소신을 이어가려는 윤혜원(이엘리야) 비서의 선택이고, 하다못해 막연히 장태준을 자신의 롤모델로 삼고는 인턴으로 들어와 자신이 하는 일이 뭔지도 모른 채 뭐라도 도움이 되어 자기 존재를 알리고픈 한도경(김동준) 같은 인물의 열정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이 드라마가 갖는 다층위의 인물들과 그 다양한 시선의 결합이다. 맨 위에 송희섭이나 조갑영 같은 인물이 서 있다면, 그 밑으로 장태준과 강선영의 시선이 교차되고 그 밑으로는 또 윤혜원이나 한도경 같은 인물의 시선이 겹쳐진다. 장태준은 노회한 정치인인 송희섭과 이제 풋내기로 들어와 여전히 정치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가진 한도경 사이에 서 있는 인물로 드라마의 중심을 잡아낸다. 여기에 강선영과 윤혜원이 보여주는 유리천장을 겪는 여성들의 시선이 더해지면서 드라마의 이야기는 더 풍부해진다.

 

같은 소재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식상해질 수도 있고 흥미진진해질 수도 있다. <보좌관>은 우리가 흔히 뉴스에서 많이 봐왔던 그 식상한 정치이야기들을 가져와 다양한 인물군들의 시선과 입장으로 녹여낸다. 이를 통해 그 식상하고 나아가 신물 나는 정치이야기들을 그냥 지나쳐버리지 말고 한 걸음 다가가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있다. 그 안에 그 식상함을 깨주는 다양한 시점들이 있으니.(사진:JTBC)

'녹두꽃'과 '아스달연대기', 문명이라 칭하지만 야만인 저들

 

SBS 금토드라마 <녹두꽃>에서 백이현(윤시윤)은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은 채 ‘개화조선’이라고 혈서를 쓴다. 그리고 자신의 일본식 이름을 오니(도깨비)라 명명한다. 그는 일본 유학을 통해 본 문명의 힘을 실감하고 조선이 개화된 세상을 꿈꾸었지만, 높디높은 신분차별의 벽을 실감하고 절망한다. “조선에 설 곳이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일제의 앞잡이가 되면서도 스스로는 조선을 ‘개화’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신 잘못된 행동을 합리화한다.

 

그러면서 그는 구한말의 조선을 ‘야만’이라 칭한다. 즉 일본이 들어와 개화하려는 것이 ‘문명화’된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 그의 이런 변명과 합리화에 송자인(한예리)은 범궐을 해 무차별로 인명을 살상하고 힘으로 조정을 장악해버린 일제의 만행들을 어찌 ‘문명’이라 말할 수 있겠냐고 꾸짖는다. 무엇이 야만이고 무엇이 문명인가를 명확히 꼬집은 일침이다.

 

백이현이 흔히 말하는 개화니 문명이니 하는 말들은 <녹두꽃>에서 중요한 화두로 등장한다. 그는 일찍이 전봉준(최무성)과 독대하며 “죽창은 야만이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대신 “개화된 세상의 선진 문물, 문명이 사람을 교화시키고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전봉준은 자신이 생각하는 야만 중에 “가장 참담한 것이 문명국이라 자처하는 열강”이라며 “약소국을 쳐들어가 등골을 빼먹고 또 다른 약소국을 놓고 싸우는 짐승”이라 일갈한다.

 

흥미로운 건 이런 문명과 야만에 대한 담론이 구한말을 다룬 <녹두꽃>만이 아니라 심지어 상고시대를 다루고 있는 tvN 토일드라마 <아스달 연대기>에도 똑같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일찍이 불을 다루고 그것으로 더 강한 칼을 만들고, 정복전쟁으로 약한 종족들을 노예로 만들어 그 노동력을 착취해 세운 아스달 문명. 그 문명의 침범을 막았던 대흑벽조차 그들이 하늘 높이의 사다리로 연결 지으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와한족은 살 터전을 잃고 아스달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풍요를 외양으로 치장하고 있는 아스달이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실상 야만에 가깝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연맹장에 오르려 하고, 아버지는 딸을 첩자로 이용해 자신의 지위를 지켜내려 한다. 아버지를 죽인 아들, 타곤(장동건)은 나아가 스스로를 신격화하고 아스달을 지배하려는 권력욕을 드러내고, 타곤과 함께 야망을 불태우는 태알하(김옥빈)는 자신을 첩자로 이용하려던 아버지를 배신한다. 그들은 와한족을 ‘두줌생(두 발로 걷는 짐승)’이라 부르며 짐승 취급하지만, 실상 짐승은 무력으로 무고한 생명을 죽이고 노예화하는 그들이다.

 

<아스달 연대기>가 다루고 있는 건 상고시대부터 시작되었던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야만의 연대기다. 세상을 제 손안에 쥐려는 욕망과 권력에 의해 무수히 많은 이름 모를 생명들의 피로 점철된 끔찍한 인간의 연대기. 그 연대기는 그래서 그 후 계속 지속되어 왔고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수천 년이 지난 구한말을 다루고 있는 <녹두꽃>에서도 똑같은 ‘문명의 야만’을 목도하게 되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그래도 이 잔인한 연대기 속에서 어떤 작은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하게 되는 건, 그 문명의 야만이 침탈해 들어올 때 이를 막기 위해 나선 많은 이들이 있었다는 것일 게다. <아스달 연대기>의 와한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는 은섬(송중기)과 탄야(김지원) 같은 인물들이 그렇고, <녹두꽃>의 일제와 맞서다 전장에서 스러져간 무수한 백이강(조정석) 같은 동학군 의병들이 그렇다.

 

그리고 이런 문명의 야만은 지금도 여전하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신 열강들의 힘 대결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지 않은가. <아스달 연대기>나 <녹두꽃> 같은 과거를 담은 이야기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의미를 갖는 건 그래서다. 그 야만의 역사들을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어떤 선택들을 해야하는가가 명확해질 것이니 말이다.(사진:SBS)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