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리에게’, 사랑을 넘어 삶을 이야기하는 로맨스라니

나의 해리에게

“선생님. 사랑을 하니 모든 게 반짝반짝거린다고요. 행복을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볼 수만 있다면 만질 수만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요?”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에서 주혜리(신혜선)는 정신과 의사에게 그렇게 말한다. 주혜리, 아니 주은호(신혜선)는 해리성 정체성 장애를 겪는 중이다. 본래는 PPS 아나운서지만 또 다른 인격으로 생겨난 주혜리는 미디어N 주차관리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런데 그 곳에서 만난 미디어N 아나운서 강주연(강훈)과 사랑에 빠진다. 

 

주혜리는 그렇게 강주연을 사랑하게 되지만, 잠을 자고 일어나면 되돌아오는 주은호는 8년 동안 만나왔던 같은 회사 에이스 아나운서 정현오(이진욱)와 헤어졌다. 하지만 헤어진 후에도 정현오가 주은호에게 일을 챙겨주는 식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끊어진 듯 끊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정현오는 주은호에게 네가 “창피하다”며 헤어진 후에도 왜 너 같은 사람을 사귀었냐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핑계 삼아 자꾸 주은호를 도와주려 한다. 

 

“네가 좀 괜찮은 사람이면 좋겠거든?” 이렇게 말하는 정현오는 사실 헤어진 후에도 주은호가 신경쓰인다는 걸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만, 주은호는 그 말에 상처받는다. “근데 내가 좀 별로면 안되나? 아니 그렇잖아. 내가 좀 별로고 괜찮지 않은 게 뭐.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주은호가 발끈하는 건 사실 그 스스로도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애써 안하던 현장 리포트를 나가서라도 VCR 분량을 독점하고 싶어하고 그렇게라도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주은호의 그런 선택은 다른 아나운서들의 반발을 불러온다. 아나운서의 명예를 실추했다며. 

 

‘나의 해리에게’는 그래서 로맨스 드라마의 틀로만 보면 해리성 경계성 장애를 가진 주은호가 주은호로서 정현오와 주혜리가 됐을 때 강주연과 엮이게 되는 기막힌 멜로의 구도를 그려낸다. 정체성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힘겨운 일이지만, 각각의 정체성이 사랑을 하게 되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행복감을 느끼고 그래서 그 정체성을 잃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혜리가 강주연이 점점 좋아지는 상황에, 주은호 역시 정현오의 진심을 알게 되는 사건을 겪는다. 생방송 중 실종된 언니를 찾는 동생의 사연을 보다가 사라진 동생을 떠올리며 충격에 빠져 방송사고가 날 뻔한 주은호를 정현오가 챙겨주게 되면서다. 

 

이처럼 ‘나의 해리에게’는 주혜리로 정체성이 분리된 주은호가 정현오와 강주연과 각각 사랑에 빠지면서 겪게 되는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진짜 하려는 이야기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해리성 정체성 장애라는 병명에서 드러나듯이 어째서 이런 장애를 이 인물이 갖게 됐는가가 더 중요하다. 주은호가 그 장애를 갖게 된 건 늘 자신처럼 되고 싶어하고 따랐던 동생이 실종되어서다. 실종된 지 오래되어 사망한 것처럼 처리되어 있지만 실종자 가족들이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 주은호는 그 상처가 깊어지며 동생 주혜리의 삶과 꿈을 이어주고 싶어지고 그것이 해리성 정체성 장애로 나타난다. 그렇게라도 동생을 붙들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처를 겪은 건 주은호만이 아니다. 그가 주혜리가 되어 만나게 된 강주연 역시 아버지 같던 형이 교통사고를 겪고 식물인간이 됐다. 강주연의 어머니는 그가 육군사관학교 임관식에 형을 부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 원망한다. 결국 강주연은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형의 꿈이었던 아나운서의 길을 선택한다. 그래서 그의 삶은 마치 그의 것이 아닌 것처럼 무감해진다. 그 무감한 삶에 어느 날 갑자기 주혜리가 뛰어든 것이다. 

 

그래서 ‘나의 해리에게’는 사라진(어쩌면 죽은) 이들 때문에 상처 입고 그들을 끝내 보내지 못하는 남은 자들의 상처를 그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주은호는 동생 주혜리를 보내지 못해 해리성 장애를 겪고 있는 것이고, 강주연은 형을 보내지 못해 자신의 삶이 아닌 형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두 인물의 삶에 뛰어들어 그걸 변화시켜 나가는 존재는 바로 주혜리다. “행복을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볼 수만 있다면 만질 수만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요?” 주혜리는 단순하게 삶을 직시한다. 그러면서 과거에 집착해 사라진 것들을 놓지 못한 채 힘겨워하는 주은호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병상에 있는 강주연의 어머니가 강주연을 형과 혼돈하자 주혜리는 그 손을 덥석 잡아주며 대뜸 “밥을 잘 드셔야 한다”는 엉뚱한 말을 한다. 그러면 아가씨처럼 예뻐지냐고 강주연의 어머니가 묻자 주혜리는 놀랍게도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아니요. 살아있을 수 있죠. 살아있다는 건 좋은 거거든요 아줌마.... 그럼요. 너무너무 좋은 거예요. 그러니 감사해주세요. 아줌마가 살아있다는 것과 주현씨가 살아있다는 것에.” 그러면서 주현이가 잘해주냐고 묻자 그가 아줌마 손처럼 따뜻하다며 “따뜻하다는 건 좋은 것”이라고 한다. 그건 살아있다는 거니까. 과거와 죽음의 그림자를 놓지 못하고 사는 이들에게 현재와 삶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려주는 이 장면은, 마침 쓰러질 뻔했던 주은호의 손을 잡아 준 정현오의 에피소드와 교차 편집된다. 손을 잡는다는 것. 그건 현재의 온기를 느낀다는 것이고 바로 살아있다는 것이라는 걸 이 손을 잡는 시퀀스들의 교차가 보여준다. 

 

대본이 기막힌 작품이지만, 주은호와 주혜리를 넘나들어야 하는 1인2역 연기가 밑바탕되지 않으면 감흥을 주기 어려운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흔히 표현하는 ‘연기차력쇼’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신혜선의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기에 이진욱, 강훈의 단단한 연기가 받쳐주고 조혜주, 강상준, 김나미, 오경화 같은 배우들의 호연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복잡할 수 있는 서사 구조를 감정선이 느껴지는 미장센으로 풀어낸 연출의 공도 칭찬할만하다. 사랑을 넘어 삶을 이야기하는, 오랜만에 보는 기막힌 힐링 로맨스다. (사진:ENA)

‘흑백요리사’, 계급 대결부터 팀워크, 먹방까지 다 잡은 음식 오디션

흑백요리사

이건 마치 음식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오마카세라고나 할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예능 ‘흑백요리사 : 요리계급전쟁(이하 흑백요리사)’의 탑8 결정전은 이른바 ‘레스토랑 미션’으로 펼쳐졌다. 팀을 나눠 레스토랑을 찾은 손님들(?)에게 어느 팀이 더 매출을 높게 올리는가에 따라 1등은 전원 생존, 꼴찌는 전원 탈락 그리고 그 중간팀들은 미션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본 심사위원들의 판단에 의해 일부가 생존하는 팀 미션이었다. 

 

이 미션은 지금껏 요리 대결을 펼치는 여타의 음식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는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음식만 잘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고, 레스토랑 운영 또한 잘 해야 살아남는 미션이다. 메뉴 선정에서부터 가격 정책 같은 경영적인 마인드 또한 필요한 미션이라는 것. 백종원이 심사위원으로 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으로 보이는 이 미션에서 그 승자는 최현석 셰프가 이끄는 팀이 가져갔다. 그런데 그 승리의 이유를 들어가보면 애초 이 곳을 찾을 손님들을 예상하고 그 성향을 분석한 후 레스토랑의 콘셉트를 잡은 것에서부터 이미 승패가 갈렸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제작진이 음식을 주문해 먹을 수 있는 돈을 줄 거라는 사실에 착안해 최현석 셰프는 이 레스토랑이 일반적인 음식점 개념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이 미션에 걸맞는 ‘플렉스’할 수 있는 메뉴를 구상했고 가격정책도 고가를 선택했다. 물론 이를 받쳐주는 음식의 퀄리티가 담보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만, 이러한 정책적 결정이 그만큼 중요했다는 건 결과가 알려주었다. 

 

‘흑백요리사’가 보여준 이러한 레스토랑 운영에 관련된 미션을 보면 이 프로그램이 얼마나 다채로운 재미를 추구하고 준비했는가가 느껴진다. 애초 흑백을 갈라 계급 구조를 만들어냄으로써 백수저 요리사들의 동기부여를 강력하게 만든 것도 신박한 선택이었지만, 미션이 진행되면서 지나친 계급 갈등으로 가기보다는 마치 바둑대결처럼 특정 미션에 따라 백수저도 떨어질 수 있는 상황들을 보여준 것도 언더독을 응원하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건드린 지점이었다. 

 

이를 테면 철가방 요리사와 여경래 셰프가 1:1 대결을 벌여 결국 흑수저인 철가방 요리사가 승리하는 장면은 이 흑백 대결의 계급 갈등이라는 것이 동기부여의 차원 그 이상으로 첨예해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줬다. 철가방 요리사는 넙죽 여경래 셰프에게 예우의 마음을 담아 절을 했고, 여경래 셰프는 선선하게 “후배들이 잘 해야 한다”며 이번 상황에서는 후배가 더 잘해서 이긴 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이 흑백이 바둑 게임 같은 의미의 흑백이라는 걸 드러내줬다. 이보다 더 훈훈한 대결이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제작진이 훈훈한 상황만을 염두에 두는 건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건 탑8 결정전에서 팀을 3팀으로 나눠놓고는 각 팀에서 한 명씩 투표를 통해 방출해 또 하나의 팀을 꾸리라는 새로운 룰을 더해 놓는 장면이다. 물론 자발적으로 자신이 나가겠다고 말하고 나간 팀원들이 있었지만 투표에 의해 방출되어 새로 꾸려진 팀은 언더독으로서의 투지를 불태우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제작진이 얼마나 출연자들을 룰을 통해 쥐락펴락 하고 있는가가 실감나는 대목이었다. 

 

또 레스토랑 미션에서 주목되는 건, 그 곳을 찾은 손님들을 유명 먹방 크리에이터들로 채우고 그들을 길다란 한 테이블에 앉혀 놓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니 자연스러운 먹방이 연출된다. 어떤 이가 먹으면 그 먹는 모습을 보고 다른 이들이 주문을 하거나 하지 않는 상황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먹방에 먹방을 이어붙여 만들어낸 시너지라고 볼 수 있다. 한 편에서는 주문에 따라 희비가 갈리는 쿡방이 이어지고, 때론 잘못된 음식을 바로잡아 손님의 마음을 다시 끌어내는 백전노장들의 노하우가 시전되기도 한다. 

 

그렇게 톱8이 결정됐고, 이제 톱2를 결정하기 위한 두 가지 미션 중 하나인 ‘인생의 요리’가 펼쳐졌다. 여기서 ‘흑백요리사’는 이제 톱8의 인생 스토리가 곁들여진 음식을 접하게 되고, 스토리텔링이 갖는 재미와 더불어 이들의 캐릭터가 가진 매력을 보다 명확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모카세의 칼국수집 이야기나, 나폴리 맛피아의 할머니 게국지 이야기는 이들의 요리는 물론이고 이들 인물들을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먹방이니 쿡방이니 요리 서바이벌이니 하는 프로그램들이 이제는 지나간 트렌드처럼 여겨져왔던 건 사실이다. 워낙 많이 나왔기 때문에 새로운 게 있을까 싶었던 것. 하지만 ‘흑백요리사’는 실로 다채로운 맛의 미션들을 다양하게 내놨다. 1대1 흑백대결은 물론이고, 팀워크와 팀불화가 명확히 보이는 팀미션, 편의점 재료로 만들어내는 창의적인 요리 대결에, 레스토랑 운영 미션을 통해 쿡방과 먹방의 시너지를 극대화해 보여주는 미션 등등. 그 하나하나의 미션들이 정성스럽다. 마치 코스로 하나씩 내놓는 오마카세 같은 음식 서바이벌의 재미가 아닐 수 없다. 

 

이러니 잘 될 수밖에 없다. 넷플릭스 비영어 부문 2주 연속 1위는 물론이고 이미 SNS에는 여기 나온 요리사들의 영상들이 화제가 되고 있다. 아무리 많이 나와 흔해졌다고 해도 어떻게 요리해내느냐에 따라 그 맛은 또 다를 수 있다는 것을 ‘흑백요리사’는 보여주고 있다. (사진:넷플릭스)

역시 서숙향 작가라 다르다... KBS주말극에 쏠린 관심

다리미 패밀리

“누가 지갑 잃어버렸다고 신고가 들어오면 그 지갑 찾았다고 금방 파출소로 가져고 들어오는 동네가 이 동네야.” KBS 특별기획 주말드라마 ‘다리미 패밀리’는 순찰을 돌며 이 동네의 청렴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찰들의 목소리로 문을 연다. 동네 이름이 청렴이고, 이제 이 주말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다림(금새록)이네 가족이 운영하는 세탁소 이름도 ‘청렴세탁소’다. 좀도둑 한 번 안들었다는 동네. 그 세탁소를 해온 다림의 할머니, 할아버지인 안길례(김영옥), 이만득(박인환)은 실제로 건조기에서 돈이 나오자 챙기기보다는 챙겨주려 하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청렴은 계속 될 수 있을까. 다림이네 가족은 다림의 아버지가 1차 사시 패스를 수석으로 한 후 연거푸 떨어지면서 가세가 기울어진다. 무려 10차 재수를 하며 희망고문을 하던 다림의 아버지는 결국 병이 들어 사망하고, 다림의 엄마 고봉희(박지영)는 셋이나 되는 아이들에 노시부모들까지 부양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리고 불행은 그게 끝이 아니다. 다림은 퇴행성 희귀 망막염에 걸려 어릴 때 2.0이던 시력이 0.02가 됐고 점점 주변 시야가 좁아지다 실명할 위기에 처했다. 

 

그렇지만 다림이 살아오면서 느낀 가장 큰 고통은 ‘희망고문’이었다. 아버지의 희망고문이 만들었던 가족들의 아픔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다. 그래서 심지어 실명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그는 “포기하겠습니다”라며 “엄마한테는 말씀하지 말아달라”고 의사선생님에게 말하는 인물이다. 그는 심지어 대학시절 좋아해 하룻밤을 보낸 서강주(김정현)에게조차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하면 그에게 기대하게 되고 기다리게 될 거라며. 

 

하지만 그렇게 포기가 더 쉽다고 해도, 실명을 벗어날 수 있는 효과 있는 주사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희망을 갖지 않을 수가 있을까. 주사를 맞은 이들이 모두 시력을 되찾았다는 의사의 말에 반색하지만 그 주사비용이 한쪽에 4억씩 무려 8억이라는 말에 다림은 또다시 희망고문에 빠진다. 안 하던 로또를 사서 긁고 또 긁으며 실낱 같은 희망을 걸어보지만 그게 될 턱이 없다. 포기했다 생각했던 희망이 만든 고문 속에 또 다시 빠져든 것이다. 

 

‘다리미 패밀리’에서 다림이네 가족의 짧은 서사는 의미심장하다. 그건 우리가 살아온 삶의 변화를 대변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좀도둑 한 번 안들 정도로 청렴하고 지킬 건 지키던 동네는 세월이 흘러 변해간다. 다림이네 가족이 그러한 것처럼, 아들의 성공에 희망을 걸기도 하며 착하고 성실하게만 살아왔던 우리네 서민들의 삶은 어찌 된 일인지 갈수록 어려워진다. 이런데도 청렴하게만 살 수 있어? 드라마는 그런 질문을 던지는 듯 하다.

 

물론 ‘다리미 패밀리’는 이러한 불행의 연속을 무겁게 그리지는 않는다. 발랄하고 경쾌하면서도 어딘가 페이소스가 묻어나는 코미디로 담아낸다. 그간 ‘파스타’부터 ‘질투의 화신’ 같은 로맨스와 코미디를 그려온 서숙향 작가의 공력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무겁지 않으면서도 문제의식을 잊지 않는 작품의 전개가 물흐르듯 자연스럽다. 이게 KBS 주말드라마일까 싶은 첫 회의 색다른 풍경이다. 

 

사실 그간 방영됐던 KBS 주말드라마들의 첫 시작을 생각해보라. 거의 문법에 가깝게 극적 사건들이 빵빵 터지고 출생의 비밀의 밑거름을 깔아 놓는 식의 클리셰들도 꽉꽉 채워져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시청자들은 ‘이번엔 좀 다르겠지’ 하다가도 ‘또 시작됐군’ 하면서 기대감을 서서히 접게 되는 ‘희망고문’을 반복해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포기하게 되면서 KBS 주말드라마는 시청률조차 뚝 떨어지는 추락을 겪었다. 

 

‘다리미 패밀리’는 바로 그런 상황에 절치부심한 KBS가 내놓은 새로운 결과물이다. 먼저 서숙향 작가가 주말극에 처음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관심을 쏠리게 만든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페이소스가 묻어나는 코미디적 상황 그리고 달달하고 시크한 멜로까지 줄줄이 풀어내는 작가가 아니던가. 그가 시도하는 주말극이니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첫 회가 슬슬 풀어낸 작품의 문제의식은 역시 서숙향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가장 좋은 건 과도하게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려는 강박이 별로 없고, 하려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빌드업하려는 작가의 뚝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완성도를 위해서 주로 50부작으로 기획되던 주말극이 이번에 36부작을 내세웠다는 것도 주목할만한 일이다. 괜스레 고무줄처럼 질질 끌려 늘리기보다는 그만큼 밀도있게 작품을 풀어나갈 수 있는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완성도가 아니면 이제 시선도 주지 않는 현 시청자들의 달라진 눈높이에 조응하는 선택이다. 

 

희망고문은 과연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다리미 패밀리’의 다림이는 물론이고 그 가족들이 던지는 질문이고, 열심히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우리네 서민들이 다시금 던져보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질문은 또한 그간 난맥상이었던 KBS 주말드라마를 그래도 관심있게 봐온 시청자들의 질문이 될 것이다. 과연 ‘다리미 패밀리’는 그동안 구겨져온 KBS 주말드라마의 주름과 무너진 자존심을 깨끗하게 다려줄 수 있을까. 모쪼록 그 질문의 답이 희망으로 돌아오길 기대한다. (사진:KBS)

“아이고 힘들어.” 류승완 ‘베테랑2’

베테랑2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이 명대사로 기억되는 ‘베테랑’이 시즌2로 돌아왔다. 그 대사에 담긴 뉘앙스처럼 서도철(황정민) 형사는 서민들을 대변한다. 가난해도 지킬 건 지키며 살려는 서민들의 마음이 그것이다. 그래서 천인공노할 죄를 짓고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풀려나는 자들 앞에서 서도철은 분노한다. ‘베테랑’ 시즌1은 막강한 돈과 권력으로 법망을 빠져나가는 재벌3세 조태오(유아인)를 끈질기게 추적해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이야기로 서민들의 답답한 속을 풀어줬다. 그런데 시즌2는 이야기의 결이 조금 다르다. 사회적 공분을 불러 일으키고도 법망을 빠져나가며 제대로된 처벌을 받지 않은 범죄자들에게 사적 제재를 가하는 해치(정해인)라는 연쇄살인범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형사가 아닌 보통 서민들의 입장에서 서도철의 마음은 그 해치와 그리 달라보이지 않는다. 특히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형사가 아닌가. 

 

‘사적 제재’는 어쩌다 보니 우리 사회의 새로운 정서로 떠올랐다. 법 정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민심이 불러일으킨 공분은 ‘모범택시’부터 ‘비질란테’, ‘국민사형투표’, ‘노웨이 아웃’ 등등 다양한 사적 제재를 소재로하는 콘텐츠들을 양산했다. 그리고 이 사적 제재는 실제로 범죄자의 사적 정보를 마음대로 공개하는 방식으로 현실에서도 벌어지는 일이 됐다. 하지만 정의가 어찌 간단할까. “살인은 살인이야”라며 “사람 죽이는데 좋은 살인 있고 나쁜 살인 있냐”고 묻는 서도철은 해치의 엇나간 정의를 바로잡는다. 만신창이가 되어 사건을 마무리한 후 서도철이 넋두리처럼 하는 “아이고 힘들어”라는 대사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분노와 처단 같은 단순한 선택만으로 얘기될 수 없어 그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은 것. 그것이 진짜 정의가 아닐까.(글:동아일보, 사진:영화 '베테랑2')

'옛글들 > 이주의 영화 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견과 나다움  (0) 2024.10.21
극한창업  (0) 2024.10.13
가을의 문턱  (0) 2024.09.30
든든한 내 편  (0) 2024.09.16
장애와 사회의 책임  (0) 2024.09.1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