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뱀> 저주받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

깊은 상처를 겪어본 사람들은 말한다. 상처 없이 사랑할 수는 없을까. 하지만 그들 스스로 알고 있다. 상처 그 자체가 사랑이라는 것을.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안전했던 경계를 포기하고 침범을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계를 포기했기에 사랑할 수 있지만, 또한 그 사랑은 상처를 전제로 한다. 결국은 헤어질 수밖에 없는(사람은 누구나 홀로 죽는다) 운명을 타고난 우리들은 그래서 꿈꾼다. 저 멀리 있는 저 별에, 사라진 내 님이 살고 있다고.

저주받은 인간
불치병이나 시한부 인생에 대한 영화 드라마가 관심을 받는 것은 그것이 바로 유한한 우리 인간들의 운명을 다룬 것이기 때문이다. 길거나 짧은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우리는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저 세상으로 떠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랑에는 반드시 이별이 따른다는 말은 어디에나 해당된다.

<도마뱀>은 바로 그 헤어질 수밖에 없는 저주받은 인간의 사랑과 운명에 대한 이야기다. 노란 우비를 보호막처럼 입고 다니는 저 맹랑한 아이, 아리가 저 스스로를 ‘저주받은 아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저 ‘저주받은 인간’의 운명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보호막 치기, 혹은 경계 긋기
날카로운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아리는 자기 주변에 보호막을 친다. 노란 우비가 그렇고 입만 열면 쏟아내는 거짓말이 그렇다. 땅바닥에 금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지 말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의 보호막 치기이다.

그런데 그런 아리의 보호막을 넘어오는 소년이 있다. 조강. 이름에서부터 풍겨나듯 그는 아리의 ‘조강지부’같은 인물이다. 노란 우비를 넘어서 살갗을 마주 대고, 아리의 거짓말을 진짜로 받아들이며, 바닥에 그어놓은 금을 어느새 넘어버린다.

그러자 자신을 보호하려던 아리의 보호막은 이제는 그녀를 사랑하는 조강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경계가 된다. 금 하나를 넘어오는 그 순간, 위협을 느끼면 꼬리를 자르고 사라져버리는 도마뱀처럼 그녀는 종적을 감춘다. 그녀가 느끼는 위협은 다름 아닌 누군가를 영원히 사랑할 수 없는 저주받은 자신이 조강을 사랑하게 될까 하는 점이며, 자신이 이미 사랑하는 조강이 사랑 받을 수 없는 저주받은 몸의 자신을 사랑하게 될까 하는 점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꼬리를 잘랐던 도마뱀은 이제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보호하기 위해 꼬리를 자른다.

죽음을 앞둔 연인, 별을 꿈꾸다
경계를 확실히 긋기 위한 몸부림으로 아리는 외계인이 된다. 외계에서 왔으니 저 별로 돌아가야 한다. 그 거짓말은 그러나 이제 다 큰 조강이 믿기엔 너무나 허황된 것이다. 하지만 절박한 연인의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에게 믿지 못할 것이 어디 있을까.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고 저 별에 잠시 먼저 간 것이다.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아픈 아리를 위해 미스테리 서클을 그리며 UFO를 부르는 조강의 마음 속에는 꼿꼿이 세워진 아리의 가시까지 껴안으려는 안간힘이 있다. 영원한 이별을 앞둔 연인에게 UFO가 나타난들 대수일까. 죽음 앞에서 우리는 유령을 만나기도 하고, 들꽃으로 별로 다시 살아난 연인을 만나기도 하지 않는가. UFO와 우주인은 이 시대의 들꽃이며 별이고 유령이다.

멜로인가, 미스테리인가
영화는 강혜정, 조승우라는 연기파 배우들의 힘으로 움직인다. 아이디어는 여기저기 번뜩이지만 유기적인 구성은 조금 산만한 편이다. 황인호씨의 원작, <아리조강 납치사건>과 <도마뱀>을 비교해보면 감독은 약간은 만화적인 이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면서, 그 만화적 색채를 최대한 줄이고 영화적인 공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아리조강 납치사건>은 저 코엔 형제의 <아리조나 납치사건>처럼 훨씬 더 비현실적이다. 멜로를 추구하고 있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공감을 일으킬 만큼 충분히 그럴 듯하지 못하다. 하지만 <도마뱀>에 와서 그런 색채들은 많이 줄어들었다. 굳이 붙이자면 ‘미스테리 멜로’를 어느 정도 완성한 셈이다.

하지만 공감은 단순히 남녀간 사랑의 이야기나 최루성 신파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보다 깊은 공감을 만들려면 저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그렇듯이 그 안에 인간의 운명이나 존재 같은 깊은 통찰력이 깔려 있어야 했다.

<도마뱀>은 좋은 소재에 좋은 아이디어에 훌륭한 연출까지 모두 괜찮은 영화의 틀을 갖추었다. 아쉬운 것은 ‘도마뱀’이라는 철학적인 제목을 가진 이 영화가, 그런 깊은 울림까지는 획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스테리와 멜로가 만나 휴먼 드라마로 연결됐더라면 오래두고 감동할 수 있는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돋보이는 것은 기존 멜로 영화들의 천편일률적인 스토리와 모범답안 같은 연출을 조금은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인 우리들은 누구나 마음 속에 도마뱀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혹은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 도마뱀은 번번이 꼬리를 잘라왔다. 영화 <도마뱀>은 우리 생애에서 자르고 도망쳤던, 그래서 기억 속에 서서히 버려진 그 꼬리를 기억하게 만든다. 혹은 그렇게 영원히 잘라내려 했지만 계속 돋아나기만 하는 꼬리를 가진 인간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말해주는 고단한 삶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러 가기 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동성애 영화란다. 그것도 서부의 사나이들이 사랑하는 이야기란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면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오는 그런 영화란다. 한 번 본 사람은 두 번 세 번 보게되는 영화란다. 한편으로는 미국판 <왕의 남자>라면서 동성애 코드가 요즘 유행이냐고 묻는 이들도 있단다.
머릿속에 있는 서부의 사나이들이라면 존 웨인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광활한 황야를 누비던 총잡이들뿐이었던 내게 카우보이들의 러브스토리가 그다지 끌리지 않았던 건 당연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상념에 젖어있을 즈음 불이 꺼지고 영화는 시작되었다.

영화는 담담했다. 1963년 Cowboy State라고 불리는 와이오밍에서 만난 에니스와 잭이 20여 년 간 겪는 안타까운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브로크백 마운틴의 풍경과 파란 하늘이 가슴에 박혀왔지만 그저 그런 영화인 줄 알았다. 역시나 영화 흥행도 그다지 주목할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그 그저 그런 영화가 내내 가슴속에서 울림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혹시 영화를 잘못 본 건 아닐까. 다시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알게 됐다. 왜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이 있었는지, 왜 그 울림은 내 속에서 계속되었던 것인지, 카우보이들의(그것도 남자들 간의) 사랑 따위 얘기가 왜 한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내게 깊은 감명을 준 것인지 알게 되었다.

마초 사회와 동성애 영화
우리가 머릿속에 갖고 있는 미국인 = 카우보이 = 서부의 사나이 = 마초맨의 이미지는 대부분 헐리우드가 각색한 것임에 틀림없다. 본래 서부 상황은 그렇게 낭만적인 것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날 것의 풍광이 의미하는 것은 그 속에 사람들이 극히 적으며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외롭게 고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자주 비춰주는 파란 하늘과 브로크백 마운틴의 절경, 초록의 녹원은, 그 속에 있는 인간을 너무나 왜소하게 만들어버린다. 카우보이니 로데오니 하는 것들은 서부극에서 각색한 것처럼 멋지다기보다는, 외로움과 권태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기껏해야 몇 초간’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위한 목숨을 건 절규로 보인다. 가부장적인 사회구조가 가진 마초적인 강박은 사실 저 고립무원의 자연과 그로 인해 갖게된 두려움과,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자초한 자기고립으로부터 생긴 자기방어본능일 뿐이다. 상처받은 짐승들은 사회가 제공하는 보수적인 안전에 집착한다. 그걸 위협하는 자들을 공격하는 것 또한 용인되는 그 극단적 마초 사회의 두려움은 끊임없이 그 구성원들의 자기검열을 요구한다. 에니스는 그 속에서 자신의 한 평생을 “견디며” 살아간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마초적 본성도 다르지 않다. 서부의 사나이들이 했던 강박적인 자기방어본능은 우리네 군인문화와 보수문화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가끔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군대에서의 동성애자 인권문제를 보면서 우리는 ‘민주화되지 않은 군대문화’를 비판하기보다는, 나와 다른 그들의 상황을 묵인하는 마초적 태도를 갖곤 한다. 남자들의 마지노선은 여전히 굳건하다. 조작된 이미지이지만 서부의 사나이들과 조상의 얼과 군인들은 사회가 제공하는 보수적인 안전망이라는 점에서 믿어진다. 진실과 믿음은 다른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믿음이지 진실이 아니다.

이 잘 만들어진 영화가 그다지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은(물론 많은 매니아층이 형성되기는 했지만) 바로 이런 사회적인 두려움에 대한 암묵적인 거부가 한 몫 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이제야 왜 동성애 코드라는 꼬리표를 달면 영화가 성공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 것도 같다.

이건 동성애 영화가 아니다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버리자 이 영화의 다른 면모들이 보였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볼수록 이 영화는 동성애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카우보이들의 러브스토리’라는 카피 제목은 너무나 표피만을 본 결과로 나온 것이었다. 동성애자도 아니고 동성애에 대한 관대한 입장을 가져왔던 사람도 아닌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기는 것은 왜일까.

이 영화는 에니스와 잭의 사랑이야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그들의 사랑이 절실해 보이는 것은 그들의 현실이 너무나 외롭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들이 사랑하는 장면보다, 그들이 현실의 무게 속에서 얼마나 고립되어 살아가고 있는가를 더 많이 보여준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참을 수 없는 추위와 알 수 없는 성욕으로 첫 관계를 맺는 장면은 이 영화의 슬픈 정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들의 사랑은 사실 매서운 현실들과 극단의 외로움에서 겨우 한 자락 잡을 수 있었던 기쁨이었던 것이다. 20년이 넘도록 간간이 만나 얻는 그 기쁨은 마치 낡고 헤진 젊은 날의 한 자락 추억을 안고 책임과 의무로 가득한 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과 고스란히 닮아있다. 그런 이유로 에니스가 “바꿀 수 없는 것은 견뎌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가 공감하게 되는 것이며,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잃어버렸던 셔츠가 잭의 셔츠 속에 안겨있는 걸 에니스가 발견했을 때, 그 슬픔에 공감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동성애 영화가 아니다. 대신 현실 속에서 보수화 되어가고 있는 우리네 감성에 둔중한 충격을 주는 영화다. 앞도 뒤도 알 수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어느 한 중년이 젊은 시절의 한 때를 떠올리며 ‘잠깐’ 미소짓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얼마나 처연한 일인가.
그러니 많은 사람들은 ‘동성애 영화’라는 꼬리표를 단 이 영화를 보고 난감해 했을 것이다. 나는 왜 이 ‘동성애 영화’에 감동하는가 하고 말이다. 그 조장된 동성애 코드는 그 관객에게 다시금 ‘두려움의 코드’를 끄집어내게 만든다.

없는 자들을 위한 따뜻한 시선들
러브스토리를 걷어내면 이 영화는 그 위대한 휴머니즘을 얻게 된다. 영화는 사랑에 빠진 인물들을 묘사하는 것보다는 ‘일하는’ 인물들을 묘사한다. 에니스와 잭이 만나는 것도, 금지된 것 투성이인 그 ‘빌어먹을’ 일 때문이며, 그들이 각자의 가정을 꾸미는 것도 생계를 위한 것이다. 어찌 보면 미칠 것처럼 살아가는 그들이 짧은 낚시여행을 떠나는 것도 다 이 지긋지긋한 삶을 버티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비단 에니스와 잭의 현실만은 아니다. 에니스의 아내 엘마는 등장에서부터 거의 끝날 때까지 일을 하고 있다. 부엌에서 직장에서 그녀는 죽어라 일을 하지만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다. 잭의 아내 로린은 적어도 가난을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이제 돈의 노예가 된 상황으로 그 삶 역시 행복하지 않다.

그런데 이 현실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 일 중독에 살아가면서 가끔 쉬는 휴식조차 일을 위한 충전 정도로 치부되는 사회. 게다가 없는 자들이라면 그 노동은 희망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재를 ‘버티는’ 절망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우리들은 어떤 식으로든 울기 바로 일보 직전 상태로 살아간다. 물론 얼굴은 웃고 있지만.
이 영화의 슬픔은 내러티브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 안 감독을 위대한 거장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얼굴 표정 하나, 손짓 하나로도 그 심리상태를 섬세하게 보여줬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무언가 거대한 불행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바로 우리네 얼굴들이다.

이 영화는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산에서 내려온 후 잭이 떠나고 에니스가 길을 걷다가 갑자기 골목을 달려가 구역질을 해대며 우는 장면은 잭이 준 상처 때문이 아니다. 사실은 또다시 현실 속에 홀로 남은 자신에 대한 연민인 것이다. 에니스와 잭의 관계를 알게 된 상황에서 아기를 안고 울음을 터트리는 엘마는 버티고 있던 일상 속에 이제 자신 혼자만 남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에니스의 딸이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머뭇거린 것은 그가 딸의 결혼을 반대하는 것 때문이 아니고, 또 딸을 떠나보내야 하는 그 자신에 대한 외로움 때문이다. 상처를 준 것은 사회와 현실이지 상대방이 아니다. 상처 입은 짐승들은 그것이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 살아간다. 이것이 이 영화가 던져주는 우리네 존재의 비극이다.

피묻은 셔츠로 남은 희망
낡은 컨테이너 하우스에 들어온 딸이 “가구를 더 사야겠다”고 말하자 에니스는 마치 달관한 사람처럼 말한다. “가진 게 없으면 필요한 것도 없는 법이야”라고. 가난과 외로움은 고립무원에 홀로 서 있는 컨테이너처럼 쓸쓸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어떤 희망과 감동을 주는 것은 피묻은 셔츠를 바라보는 에니스의 시선 때문이다. 에니스가 결국 인생을 통해 버티면서 얻은 것이라고는 셔츠 두 개가 고작이다. 방금 딸이 놓고 가버린 셔츠와, 옷장 속에서 자신의 옷에 감싸진 잭의 셔츠. 셔츠 옆에는 브로크백 마운틴의 풍경이 담긴 엽서가 꽂혀있다. 그리고 에니스는 말한다. “맹세할게...” 무엇에 대한 맹세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아마도 자신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다. 삶은 고단한 일상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맹세한다.

에니스의 비천한 삶을 숭고하게까지 만드는 이 영화의 맹세는 그 어떤 저항보다 더 강력하다. 심지어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 속에 떨며 강박적인 자기보호본능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조차 끌어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도 생애 한번쯤은 브로크백에 오른 적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 가져온 셔츠 한 벌은 여전히 당신 가슴속에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우리네 가슴속 옷장에 걸어둔 셔츠 두 벌은, 현실에 치여 살아가는 우리에게 먹먹한 희망으로 남을 것이다.

<무인 곽원갑> 그 몸이 말해주는 것들

앙상한 체구의 달라이 라마는 성지순례를 온 비구니들과 수녀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종교라는 것은 신뢰와 존중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는 무한한 신뢰를 가져야 하지만 다른 종교에는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한 수녀님께서 물으셨다. “선생님께서는 많은 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달라이 라마가 말했다. “세상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집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눈, 같은 코, 같은 입을 갖고 있어도 좋아하는 음식은 다르지요. 종교는 그런 것입니다.” 우연히 TV에서 보게된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다. 이연걸은 2005년 10월 그의 아내 리지와 함께 달라이라마를 만나기 위해 다럄살라를 방문했다. 10여년 전 불교에 귀의한 그에게 달라이라마가 한 얘기도 비슷한 것이었을까.

테러가 화두가 된 세상 속의 아름다운 몸
액션과 폭력적인 영상에 길들여진 우리 눈에 몸은 하나의 무기로도 보인다. 실제로 어떤 몸은 폭탄을 장착하고 민간인들을 향해 뛰어들기도 하고, 어떤 몸은 무고한 기자를 납치해 살해하기도 한다. 어떤 몸은 뉴욕의 무역센터 건물로 비행기를 몰기도 하고, 어떤 몸은 정치적 이념과는 전혀 무관한 올림픽 선수들을 무참히 살해하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가 네모난 세상 속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우리들의 추악한 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뮌헨>, 이제 곧 개봉할 워쇼스키 형제의 <브이 포 벤데타>, 거장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크래쉬>... 모두 이 추악한 몸이 벌이는 테러와 폭력의 문제를 화두로 삼고 있는 영화들이다. 9.11 테러가 이제 그 의미를 찾는 시점이 다가오자 영화들은 일제히 테러리즘에 대한 자아성찰을 시도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동양에 이연걸이 있다. 그는 내한 인터뷰 기사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현대사회에 폭력은 폭력을,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것... 폭력과 테러가 난무하는 서방세계에 복수의 반복은 악순환일 뿐”이라고 말했다. <무인 곽원갑>이 단순한 이소룡류의 격투기나, 성룡류의 오리엔탈 롤러코스터, 혹은 서극류의 환타지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는 곽원갑이라는 인물을 통해 진정한 무도(武道)의 길을 펼쳐보인다. 몸은 잘못이 없다. 문제는 마음 속의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을 넘어서 타인의 몸까지 껴안을 수 있을 때, 몸은 더이상 추악한 무기가 아니라 아름다운 그 무엇이 된다.

진정한 무도가 완성된 그 후
최고의 무술인이 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몸은 무기로 변해 라이벌인 진대인을 죽이고 만다. 폭력의 시작은 끝이 처참하다. 진대인의 제자는 곽원갑의 노모와 어린 딸을 살해한다. 눈이 뒤집힌 곽원갑은 칼을 들고 진대인의 집을 찾아간다. 진대인의 시신이 놓여진 곳 옆에서 진대인의 아내와 딸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을 본 곽원갑은 칼을 버리고 만다. 그 상황에서 곽원갑은 자신의 딸과 노모의 모습을 진대인 아내와 딸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자시의 신뢰(사랑하는 딸과 노모를 위해 복수를 해야한다)와 동시에 존중(진대인의 아내와 딸도 마찬가지의 고통을 겪고 있다)이 생겨난 것이다.
1인자가 되는 순간에 곽원갑은 나락의 길을 걷는다. 자살을 시도하지만 맹인소녀 문을 만나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진정한 무인의 길을 깨닫게 된다. 무기가 아름다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 앞못보는 맹인소녀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곽원갑은 고향으로 돌아와 진대인의 아내와 딸을 찾아 사죄한다. 이로써 그는 진정으로 강한 자, 자신의 두려움을 이겨낸 자가 되는 것이다.
만일 영화가 여기서 끝났다면 이 영화는 세상에 대한 폭력과 그 폭력에 대처하는 동양적인 대안을 제시한 영화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완성된 무인은 시대적 소명을 갖게 되고, 서구열강과 일본에 대항하는 중국의 영웅이 된다.

국가라는 이름으로는 폭력이 정당한 것인가
WBC(World Baseball Classic)에서 보았던 것처럼, 일본이라는 나라는 우리나 중국이나 반드시 이겨야할 대상이다. 과거의 문제가 현재도 반복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건 이 영화가 얘기하려는 것은 본래 아니었다. 폭력을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은 곽원갑 스스로도 몸소 겪었던 것이 아닌가. 물론 영화적 장치들은 되어있다. 상대편 일본선수가 곽원갑의 손을 들어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풍경은 우리에게 낯선 장면이 아니다. 우리가 저 <바람의 파이터>에서 기대했던 진정한 무도의 길의 모습이 점차 민족주의적인 색채로 변해갔던 그 장면 말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뮌헨>에서 말하는 ‘국가라는 이름 하의 무조건적인 충성’이 가져온 연쇄폭력은 개인의 불행을 담보로 한다. 개인적으로는 누구나 다 아름다운 몸을 갖고 있다. 하지만 국가라는 틀이 그 몸을 갖게 되면 추악한 모습으로 돌변한다. <무인 곽원갑>이 넘지 못한 선은 바로 이 액션영화로의 귀의에 있다. 그가 이 영화를 ‘한 무인의 삶을 통한 사회적인 드라마’로 일컫지 않고 ‘마지막 액션영화’로 소개한 것은 이런 이유다. 이연걸은 알고 있었다. 이 영화가 ‘폭력에 대한 철학적 대안’이 아닌 ‘액션영화’라는 사실을.

이소룡, 성룡, 이연걸로 오는 몸의 계보학
냉전시대에 탄생한 중국무술영화의 영웅, 이소룡의 몸은 파괴적이다. 적과의 대결 속에서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효과적으로 살상하느냐가 그의 몸이 보여주는 매력이다. 그러다 우리는 성룡이라는 괴짜 무술인, 변칙 무술인을 만나게 된다. 그는 냉전을 비웃듯이 몸을 희화화시킨다. 똑같이 살상을 목표로 하지만 동작들은 말하는 것 같다. ‘정말 웃기지 않니? 이 몸이 말야.’ 성룡의 액션은 점차 체조화되고 무용화되어간다.
그리고 이연걸이 있었다. 그의 동작은 아름다웠다. 하나의 무술이면서도 몸의 예술, 무용이었다. 무술영화가 그 미적인 힘을 발휘하는 부분은 그 동작의 무용적인 특성에 있다. 아름다운 몸의 동작들을 보면서 우리는 감탄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액션영화들은 이 무용을 하는 듯한 몸을 폭력과 연결시켜 미학화한다. 느와르의 탄생이다. 타란티노의 <킬빌>이나 워쇼스키의 <매트릭스> 같은 영화는 모두 이 몸의 느와르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많은 액션영화들은 아름다운 몸을 차용해 폭력적인 장면, 상황을 정당화하고 있다. 멋진 동작 하나를 보면서 우리는 빠져든다. 그러면서 저들이 왜 저렇게 싸우고 있는지조차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몸이 무기가 된 이유이다.

아름다운 몸을 탓하지 말라
성찰은 몸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달라이라마의 종교에 대한 성찰은 우리 몸을 아름답게 한다. 이연걸은 이제 그 몸의 차원을 보다 내적인 곳으로 끌어들인 것 같다. 그는 이제 나이들었고, 찍을만큼 많이 액션영화도 찍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젊을 때 고통은, 육체적 측면이 컸지만, 나이 들수록 마음의 고통이 커졌다. 마흔이 가까워오자 비로소 내가 처한 고통을 ‘객관화’하기 시작했다. 어려움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그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름다운 몸을 탓하지 말자. 그 몸을 폭력으로 내모는 수많은 사회적 모순들과, 그 몸을 전장으로 내모는 국가적인 폭력을 탓하자.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자. 몸은 아름답다.

조선시대 연예비사, <왕의 남자>

연예계 뒷담화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관객 수 1천만의 흥행성공을 넘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왕의 남자>는 조선시대에 왕과 광대 사이에 벌어진 희대의 연예비사, 그것도 남성간의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 만일 동성이 아닌 이성이라면야 무치(無恥 :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로 불렸던 왕에게 이건 비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 대상이 평민이었다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시중잡배들의 ‘이 놈도 잡고 저 놈도 잡는 문고리’에 ‘이 놈도 빨고 저 놈도 빠는 술잔’인데다, ‘이 놈도 타고 저 놈도 타는 나룻배’였던 광대를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왕이 탐했다는 점에서 연예비화가 될만하다. 게다가 이 영화의 내용은 그저 만들어낸 픽션이 아니다. 물론 많은 각색이 들어갔지만 역사적 사실들에 상당부분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5백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역사는 재해석이라고 하지 않는가.

자유분방한 대통령과 함량 미달의 정치인들
연산군의 비화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87년에 박종화의 <금삼의 피>를 각색해 만들어진 <연산군>은 당대의 섹스심벌이었던 이대근이 연산군으로, 그리고 강수연이 장녹수로 출연한 영화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과거의 우리의 눈과 귀를 먹게 했던 에로영화의 코드를 그대로 가져왔다. 하지만 불과 1년 후인 1988년 임권택 감독이 만들고 유인촌이 연산군으로 출연한 <연산일기>는 보다 연산군 자체의 인간적 측면에 닿아있다. 이 영화에서 연산군은 죽은 폐비 윤씨에 대한 마더콤플렉스를 가진 인물로 폭군이 될 수밖에 없었던(그의 폭행을 정신착란에 의한 것으로 해석) 면을 강조한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소재의 영화가 이렇게 다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역사적으로는 87년 6.10 민주항쟁에서 6.29 항복선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 속에서 과거의 잔재와 변화하려는 자유에 대한 의지가 공존했던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 같다.
현재에 만들어진 <왕의 남자> 역시 그 시대상을 빗겨갈 수는 없다. 영화가 신드롬이 되다보니 그 신드롬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이 영화적 상황을 현실에 빗대 이야기하면서 이런 부분을 조장한 것이 사실이다. 연산군이 공길에게 중신들의 반대에도 종4품의 벼슬을 주었다는 것을 최근의 노무현 대통령이 당 안팎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시민 의원을 보건복지부 장관에 내정한 것에 빗대 말하기도 하고, 연산군이 ‘내가 왕이 맞느냐’고 하는 말을 노무현 대통령의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발언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광대들을 끌어들여 정적을 제거하는 연산군의 모습을 두고, 어떤 정치인은 인터넷을 동원해 여론몰이를 하거나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내는 노 대통령을 닮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위기 때마다 그걸 뒤집는 장생의 언변으로 시골 마을에서 한양으로 한양에서 궁궐로 가는 장생의 입신 역시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들이다.
물론 <왕의 남자>의 감독이 이걸 의도했는지 안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나, 적어도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유분방하면서 탄핵까지 받을 정도로 힘이 약한 대통령과, 그렇다고 대통령을 욕할 버젓한 자격이 있는 정치인도 없는 답답한 현실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조선시대 개그맨, 정치코미디의 재미
답답한 현실, 이제 그 마이크는 당대의 개그맨이었던, 광대가 잡는다. 장생(감우성 분)은 조선시대 김형곤 같은 정치코미디의 일인자였던 것 같다. 민중들의 애환을 속 시원히 풀어주던 당대의 연예인들, 연희패들은 오늘날의 연예인들보다는 더 자유로울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TV라는 매체는 파급력이 좋은 반면, 통제하기도 쉬운 법이다.
강력한 왕권 하에서도 연희패들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질펀한 농담을 풀어놓는데, 그 내용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과 풍자가 당연했다. <왕의 남자>의 도입부에서 줄타기를 하며 나누는 장생과 공길의 대화는 성적인 농담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당대의 연예인들인 광대들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기예를 팔고 몸을 파는 것이 일이었다. 이것은 당대 여사당(女社堂)이 받는 돈을 화대(花代)라고 불렀던 것만 봐도 쉬 알 수 있는 일이다. 자신들의 이런 처지를 웃음으로 돌려 풍자하던 장생은 이제 그 말의 칼날을 정치인들을 향해 든다. 그는 왕이 기생의 치마폭에 둘러싸여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밝히는 건 왕이나 벼슬아치나 평민들이나 다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한다. 그는 왕과 녹수의 애정행각을 빗댄 정치코미디를 시작하고 이건 공공연한 소문을 눈앞의 현실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어느 정치인이 어느 연예인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인터넷 입소문 만큼 빠르게 전파된다. 민중들은 이 놀이판에서 장생과 공길을 통해 왕과 녹수의 비밀스런 침소를 엿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왕을 잡놈이라 했더니 좋아하더라
어떤 연예인은 대머리에 용모가 비슷하다 하여 집권기간 내내 방송출연을 못했던 사람도 있는 마당에, 강력한 왕권통치의 조선시대에 왕을 빗댄 정치코미디가 성했을 리 없다. 의금부로 압송된 장생은 그러나 또 한번의 당찬 발언으로 궁궐로 들어가는 영광을 얻는다. 그것은 ‘왕을 웃기면 왕을 모욕한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묘한 논리에 근거해 있다.
사실 장생 조차도 왕이 웃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연희마당으로 나서면서 ‘어차피 살 판 아니면 죽을 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천상천하의 왕을 잡놈으로 치부하면서 ‘윗 입을 주랴, 아랫입을 주랴’하는 질문에 점잖은 체, 왕을 빗댄 연기를 하던 장생이 ‘윗 입’을 달라고 하자, 그 뜻을 알아차린 녹수 연기를 하던 공길이 ‘물구나무를 서며 윗 입 대령이오’라는 말에 왕은 웃음을 터뜨린다. 왕은 공감했던 것이다. 중신들 모두 법도니 뭐니 하며 윗 입 타령을 하지만 사실은 다들 아랫입을 탐하던 것을 알았던 왕은 공길의 물구나무에서 중신들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읽어낸 것이다. 그런데 그것뿐이 아니다. 사실은 그 윗 입 아랫 입 퍼포먼스에 등장한 비판의 대상에는 중신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왕 또한 포함된다. 왕은 그 위선적인 법도를 벗어나려는 자학적인 잡놈 행세를 했던 것이고, 이들의 퍼포먼스를 보며, 이들이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켰을 것이었다. ‘너도 광대이고 나도 허수아비 광대’라고 말하는 왕은 왕이 싫었고, 궁궐을 벗어나 잡놈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왕은 광대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중독되게 되고 그들의 퍼포먼스를 통해 세상을 보게 된다. 연희 속의 환상은 왕에게 현실이 되어버린다.

왕의 환타지 속에서 살고 죽고
왕을 농락하는 광대들을 비판하는 중신들로 인해 왕은 더더욱 광대들에게 고착된다. 이제 왕은 광대들을 자기동일시 하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광대들이 왕과 조우하면서 그 가려운 부분을 긁어준다. 중신들을 갖고 노는 것이다. 그러자 왕은 이 놀이판을 현실로 바꾸면서 중신들을 향해 칼을 휘두른다. 한편 녹수와는 달리, 진정으로 왕을 이해하게 된 공길은 폐비 윤씨의 사건을 재현해내고 이 과정에서 왕은 선왕의 여자들을 살해한다. 왕은 장생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자신 속의 강한 왕(선왕)과 동일시하며, 공길을 자신의 어머니와 동일시한다. 그러자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왕은 어머니를 사랑하듯 공길을 사랑하지만, 선왕만을 받들고 죽게 됐던 어머니처럼 공길 역시 장생만을 따른다. 왕은 어린 시절로 퇴행한다.
왕의 환상 속에서 장생은 아버지, 선왕이며, 왕은 어린 시절로 퇴행한 자신이고, 공길은 연산의 어머니가 된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모는 아버지와 어쩔 수 없는 어린 자신의 상황을 다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장생이 연산에게 한 “어느 잡놈이 그 놈 마음 훔쳐 가는 걸 못 보고...”라는 말에, 공길이 “야 이 잡놈아! 거기가 어디라도 올라가느냐!”라고 하며 그 잡놈이 장생이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 장생은 미소짓고 있었고, 연산은 살의를 느꼈다. 질투에 불타는 왕은 장생의 눈을 지지는데, 눈을 지지는 이 모티브는 여러모로 보나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왕>에서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죽게 한 오이디푸스왕이 스스로 눈을 멀게 하는 장면과 맞닿아 있다.

눈 먼 개그맨, 세상이 보이다
눈이 먼 장생은 이제 눈뜬 장님으로 살던 시절을 본다. 자신이 사랑해왔던 공길을 본다. 자신이 살아왔던 길이 사실은 살 판이 아닌 외줄에 가까스로 의지한 죽을 판이었다는 것을 본다. 살기 위해 자유의지를 꺾었던 자신을 본다. 그러나 그 외줄 위에 서는 그 짧은 순간만이 자신이 왕보다 무엇하나 부러울 것 없던 자유인이었던 것을 알게된다. 그 줄 위에서 다시 태어나도 광대가 되겠다는 선언을 한 두 사람은 높이 하늘 위로 솟아오른다. 그 하늘에 붙박여 정지된 장면 속에서 장생의 손에 삶의 지긋지긋한 애착처럼 꼭 쥐여있던 부채는 놓여진다.
연산은 자신이 스스로 허수아비 광대였다는 것을 알게된다. 마치 사이코드라마처럼 자신을 상처 주었던 선왕을 눈멀게 한 연산은, 이제 어머니가 따르던 선왕과, 어머니의 외줄타기 사랑(왕이라는 굴레 속에서)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짓는다.

웃음 뒤의 또 다른 얼굴, 개그맨과 정치인
<왕의 남자>는 마치 개그콘서트 류의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는 것만 같다. 조선시대의 광대들은 각종 기예와 웃음들을 갖고 궁궐로 찾아들어 경연을 벌인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재미는 바로 이 조선시대에 벌어진 개그콘서트를 보는 것이다. 대표적인 조선시대 유랑연예인집단인 남사당의 연희 종목인 풍물(농악), 버나(대접 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각시놀음) 같은 놀이들이 질펀한 개그와 곁들여지니 눈이 즐겁고 귀가 즐겁다.
그런데 그 웃음 뒤에는 또 다른 얼굴들이 있다. 자신의 고통이나 신체적 장애까지 이용해 사람들을 웃기는 개그맨들의 애환이다. 그래서 개그맨들의 웃는 모습을 조금 다른 각도로 보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다. 저들은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네와 똑같이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을 텐데 그래도 우리에게 웃음을 주는구나, 하는 감회에 젖게된다. 하지만 그것과는 정반대의 얼굴도 있다. 부도덕한 정치인의 얼굴이다. 그들의 웃는 얼굴, 혹은 감정을 보이지 않는 포커페이스 뒤에는 뭔가 뒤틀리고 꼬인 실타래 같은 욕망이 숨어 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말 몇 마디로 욕망을 채우려는 부정한 정치인의 이미지들이다.
개그맨이나 정치인이나 둘 다 입으로 먹고산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지향하는 바는 이렇게 다르다. 가장 낮은 입이 가장 높은 입과 한판 걸판지게 붙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가십거리의 연예 비사를 뛰어넘어 억눌린 민중의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저 윗분들의 잘못 이면에 대한 이해 또한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 소비계층의 폭을 대폭 넓혀놓았다. 그러나 이 양극점의 해소는 저 외줄을 타고 있는 장생, 공길과, 녹수를 끼고 높은 곳에 앉아 외줄타기를 보고 있는 연산의 거리만큼 멀다. 다만 그것을 가깝게 하는 것은 연산에 반기를 든 세력들에 의해 연산 또한 같은 운명을 갈 것이라는 예감이다. 높은 놈이나 낮은 놈이나 어차피 가는 것이고, 그러니 이 한 판 자유롭게 살다 가는 게 낫지 않는가. 영화는 ‘자유로운 잡놈’과 ‘자유 없는 왕’이라는 두 측면에서 균형을 잡으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나간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