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vs 괴물

우리나라 사람들은 숫자에 약하다. ‘1000만’ 관객을 ‘단 21일만’에 돌파한 괴물의 괴력에 혀를 내두르며 너도나도 ‘괴물 보자’고 달려가는 지금의 현상은 숫자에 경도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것은 괴물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숫자라는 괴물에게 쫓기는 형국이다. 괴물을 보지 않으면 수준 낮은 사람이 될 것 같은 두려움. 어딜 가도 화제가 되는 그 이야기에서 소외될 것 같은 두려움. 결과적으로는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고 비주류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 그 기저에는 존재한다.

그 두려움은 일반관객들만의 것이 아니다. 전문가 집단이라고 하는 기자들이나 평론가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개봉하기 이전부터 날아온 ‘영화제에서의 호평’이라는 외신은 전문가 집단을 잔뜩 긴장하게 만들었다. 거기에는 기대감이 대부분이었겠지만 한 편으로는 강박적인 두려움도 한 몫 했다. 그저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면 그런 두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호평을 받았다면 그건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봉준호 감독의 작품 앞에는 새로운 수식어가 붙는다. ‘대중적이면서도 수준 높은 작품’, 블록버스터이지만 ‘의미 있는 블록버스터’. 여기서 ‘대중적’이라는 수식어가 주는 힘은 기자들에게 지대하다. 모두들 달려가 보는 영화에 적어도 전문가인데 한 마디 곁들여야 전문가로서 소외 받지 않는다는 의식 때문이다. 이렇게 전문가 집단이 여기저기서 강박적으로 쓴 기사들은 온통 매체들을 뒤덮는다.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우리는 ‘괴물’의 존재감을 느낀다. ‘보지 않으면 수준이 떨어진다는’ 이 이상한 의식의 괴물이 우리 마음 속의 한강에서 조금씩 자라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의식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영화 ‘괴물’ 속에 등장하는 괴물의 탄생처럼, 우리 의식의 한강 속에 누군가 포름알데히드를 방류한 것은 아닐까. 박정희 개발독재 시절부터 우리를 들뜨게 했던 수치들, 수출목표, 아시아 몇 위라고 하는 GNP, GDP 수치, 툭하면 등수를 매기는 경제지표들에서부터, 올림픽 메달 수와 월드컵 몇 강이라는 스포츠의 수치들, 그리고 그 저변에 죽 깔려왔던 성적표와 등수와 점수로 일관되는 입시교육, 그로 인해 의식화된 엘리트주의. 그 소수에 들기 위한 안간힘들…. 그렇게 숫자로 대변되는 소수엘리트주의라는 포름알데히드는 우리 의식 속에 괴물을 키워왔던 건 아닐까. 포름알데히드 방류에 난색을 표하는 김의 모습은 우리가 숫자라는 괴물에 포획되기 이전, ‘이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라며 망설였던 그 때를 생각나게 한다. 그럴 때 입시교육의 선봉에 서야 했던 선생님들은 이런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다. “인생은 길다. (지금 몇 년은 짧다.) 보다 마음을 크고 넓게 가지자.” 저 영화 속의 더글라스 부소장이 “한강 큽니다, 마음을 크고 넓게 가집시다”라고 한 것처럼.

그렇게 우리 마음 속에 자라난 숫자라는 괴물은 백주대낮에 영화가를 습격해 아수라장을 만든다. 전국 1400여 개의 상영관 중 620개를 싹쓸이한 것이다. 거의 영화관 2개 중 하나는 괴물을 틀고 있었다는 것. 그런데 괴물의 등장 이면에는 수많은 피해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뉴스는 연일 괴물의 기록행진, 그 선정적인 수치보도에만 열을 올렸다.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백주대낮에 버젓이 괴물이 등장(사실 괴물은 과거에도 있었으나 그 실체는 밤에 가려져 있었다)하면서 그간 그토록 괴물의 실재를 호소하며, 자신들이 겪은 상처를 토로하는 영화인들도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 피해자 가족들 중에는 김기덕 감독도 있었다.

괴물의 실재와 딸 현서의 생존을 토로하는 박강두를 이상하게만 보는 것처럼, 김기덕 감독의 발언은 곡해됐다. 김기덕 감독은 말을 극도로 아꼈고, 그러다 보니 해석이 분분했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과거 10년 동안 12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총 관객이 100만 명이 되지 않았던 그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기는 어려웠을 것이다(그것도 해외에서는 각광받는 영화가!). 그것은 마치 박강두네 가족이 그 한강변의 매점으로까지 떠밀려 내려온 사연과 비슷하다. 박희봉이 아무리 그 구구절절한 사연을 떠들어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쿨쿨 잠만 잘 테니. 오히려 수치를 들어 얘기하면 이해가 될까. 제목 - 괴물 : 활(김기덕 감독의 이전 작품). 개봉관수 - 620 : 1 관객수 - 1000만+∝ : 1398명! 그는 극장이 자신의 영화를 틀어주지 않는 현실을 통탄했다.

그런데 김기덕 감독이 나서서 수치라는 괴물과 싸우는 방식은 영화 속 강두네 가족의 경우처럼 여러모로 실패의 요소를 안고 있다. 가장 첨예했던 발언은 영화 ‘괴물’에 대해 “우리나라 관객 수준과 영화 수준이 최고점에서 만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의 해석을 두고 “우리나라 관객 수준이 낮다는 것이냐”, 혹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 수준이 높다는 것이냐”는 논란이 제기되었다. 뒤늦게 김기덕 감독은 ‘최고점’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으면서 그 말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뉘앙스를 전달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의 발화점은 높고 낮다는 의미의 해석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수준’이라는 단어에 있다. 그 단어는 저 마음 속 은신처에 숨어있던 괴물을 꿈틀대게 만들면서 저마다 분분한 해석을 하게 만든다.

김기덕 감독의 이 발언에는 함정이 있다. 그 발언을 긍정적으로 읽어 이 영화가 최고점에서 관객과 만났다고 해석한다면 스스로의 수준을 높이는 결과가 된다. 하지만 반대로 그 발언을 부정적으로 읽는다면 스스로의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물론 김기덕 감독은 “괴물은 훌륭한 영화”라고(100분 토론에서) 함으로써 스스로의 수준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00분 토론에 나와 편중된 수치게임과 사투를 벌이는 인물들(김기덕 감독, 강한섭 교수)은 저 영화 속 박강두 가족처럼 무기력해만 보인다. 그들은 영화 속 강두네 가족처럼 각자의 얘기만 할 뿐, 어떤 연대의식을 전혀 갖지 않는 

다. 특히 강한섭 교수는 “그 부분은 김기덕 감독님이 해결하시고….”라는 식으로 각자의 선을 그어놓는다. 김기덕 감독은 자신의 입장만을 얘기하는 것처럼 보이며, 강한섭 교수는 이해할 수 없는 권위적 태도를 보인다. 이런 방식으로 저 마음 속에 굳게 뿌리내린 괴물을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시 영화 ‘괴물’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마치 강두네 가족이 괴물과의 사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박강두 가족의 괴물과의 사투에서 주목해보지 않은 한 인물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영화 끝 무렵에 느닷없이 나타난 행려자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괴물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인물은 바로 그이다(괴물은 화살 한방으로 죽진 않는다. 여기에는 휘발유와 불이 필요했다.). 그는 괴물에게 어떤 피해를 입은 적도 없는 방외인이다. 그는 이 사태의 이해 당사자가 아니다. 이 인물은 도대체 누구며 왜 갑자기 등장한 것일까.

이것은 갑작스런 봉준호 감독의 개입이랄 수밖에 없다. 봉준호 감독의 사회인식은 어둡고 비관적이며 냉소적이다. 그는 전혀 힘없는 한 인물을 집어넣어 괴물을 해치운다. 이것은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냉소적 시선이자 스스로 만들어 놓은 괴물을 없애야만 한다는 책임감의 발로다. 그런데 괴물이 죽었으니 강두네 가족의 승리일까. 여기서 봉준호 감독은 사실 괴물의 죽음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강두네 가족이 원한 것은 괴물의 죽음이 아닌 잡혀간 현서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괴물은 죽었지만 현서 역시 구할 수 없었다. 만일 이 영화가 작금의 영화현실에 어떠한 정치적 태도를 알게 모르게 풍기고 있다면 그 전망은 밝지 않다. 봉준호 감독에게 있어 숫자는 허상이고(괴물은 중요한 게 아니고), 진짜 중요한 영화(살아있는 현서)는 구하지 못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그다지 어둡지 않다고 느껴지는 것은 괴물을 경험한 후의 강두의 변화이다. 그는 거기 괴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또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졸고만 지내던 그가 총을 옆에 두고 늘 경계를 하고 있다는 것. 영화 ‘괴물’이 일으킨 싹쓸이 논란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도 바로 그것이다. 그 속에 수치와 엘리트주의가 뒤범벅된 괴물이 꿈틀거린다는 것. 그런데 그것은 봉준호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해주듯 허상이라는 것. 진짜 중요한 것은 바로 영화라는 것.

이런 면에서 보면 다시금 괴물이라는 영화가 얼마나 대단하며 놀라운 작품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스스로 블록버스터라는 괴물이 되어버린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이, 자신 같은 괴물과 싸우고, 그 존재에 대한 경각심은 늦추지 말라는 것이니 말이다. 이 정도가 되면 괴물이란 영화는 영화의 장르를 넘어서 하나의 행위예술이 된다.

내 청춘에게 고함

흔히 ‘마이너리티’라고 하면 숫적으로 적은 집단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마이너리티는 양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건 영화계만 봐도 극명히 드러난다. 실제로 영화계 전체를 거의 지배하다시피 하는 ‘메이저’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개봉 21일만에 1천만 관객을 돌파한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전국을 강타한다고 해도 그건 단 한 편의 영화일 뿐이다. 빛의 이면, 즉 그림자 속에는 원하든 원치 않든 마이너리티가 되어버린 수많은 영화들이 있다.

인생에 메이저와 마이너가 있다면 ‘청춘’은 어디에 속할까. 사회적 규범과 이해관계 속에 잘 적응되어 그 주류사회에 편입한 노회가 메이저라면, 청춘은 단연 모든 것이 미숙하고, 그래서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는 마이너가 될 것이다. 게다가 메이저 사회는 이들 마이너들을 소수자집단으로 치부하면서 억압하고, 이용하며, 들러리 세운다. 1천만 관객 시대에 1만 명 관객 동원을 기뻐하는 ‘내 청춘에게 고함’은 바로 이런 메이저 사회 속에 숨막혀하는 마이너들(청춘들)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작금의 영화 현실을 닮아 있다.

꽉 막힌 답답한 빌딩 숲 속의 청춘
영화는 21살의 혼란스런 청춘, 정희의 뒷모습에서부터 시작한다. 정희는 전화를 받지 않는 남자친구의 옥탑방을 찾아가는 길이다. 문은 닫혀있고 벽돌 위에 쪼그려 앉은 정희는 캔맥주를 따려다 손톱에 상처를 입는다. 카메라는 집요할 정도로 답답하게 화면 속에 정희를 가둔다. 그때 정희는 마치 그것이 답답하다는 듯 갑작스레 벽돌을 들고 닫힌 창을 향해 집어던진다. 그리고 난간 쪽으로 걸어가 “왜 좀더 기다리지 않았느냐”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댄다. 그 때 잠깐 카메라는 정희의 숨통을 틔워준다. 그러나 그 풍경에 들어오는 것은 다닥다닥 붙은 가옥들의 바다에 섬처럼 돋아나 있는 아파트 건물들이다.

다음 장면에 정희는 언니를 만나러 교회로 간다. 카메라는 교묘하게 교회 담장을 가운데 두고 담 밖에 정희를 세우고 담 안쪽에서 나오는 언니를 잡는다. 세상 밖에서 혼란스러운 정희에게 교회담과 성가대복으로 안전해 보이는 언니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가자고 한다. 그들이 이사가기로 한 집은 한쪽 벽이 창으로 나 있다. 그 창 밖으로 역시 비치는 풍경은 가옥들의 바다에 뜬 아파트들이다. 그 집에 대해서 정희는 창이 너무 넓지 않느냐고 하고, 언니는 넓어서 좋다고 한다. 정희는 위성으로 보면 창이 넓어 우리가 다 들여다보일 지도 모른다고 한다. 정희는 지금 숨는 중이다. 거대한 사회 속에서 자신이 숨을 보금자리를 찾는 중이다. 비좁고 어둡고 어지러운 남자친구의 집에서 섹스를 하는 정희가 “섹스가 아니면 날 만나겠냐”고 남자친구에게 말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남자친구의 공간은 그녀를 보듬어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잠시 망각할 수 있는 도피처일 뿐이다.

그녀가 자신만의 공간을 찾는 이유는 어린 시절, 남들이면 다 가졌을 가족이라는 테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이가 들었고 이제 자신을 버렸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스스로 서야 하지만 그녀는 미숙하다. 그녀가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와의 결별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아버지에게 “나는 정희가 아니고 에비타(정희가 맡은 배역)”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과거를 밀쳐내고 혼자 서려 하지만 현실은 그녀에게 한 평의 공간도 내주지 않는다. 사기를 당한 그녀가 하는 것은 돈을 내고 잠시 자신의 공간이 되어주는 여관방에서 불을 지르는 것이다. 그렇게 경찰서에 잡혀간 그녀에게 경찰은 그녀가 그런 짓을 저지른 것에 대한 내밀한 이유를 들어주지 않는다. 단지 그 방안에서 콘돔이 나왔고, 그래서 성행위가 있었는가 하는 그런 따위의 것들만이 현실에서 그녀와 소통하는 것들이다.

그녀는 사실 그 누구와도 소통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처음 저 아파트 숲을 향해 고한 말들은 대상이 없이 허공을 떠돌았고, 남자 친구집 창을 향해 던진 벽돌은 도둑의 짓으로 오인된다. 지하철역에서의 자살시도는 그 이유를 묻지 않는 용감한 시민들에 의해 좌절된다. 자신이 부정했던 아버지는 한강에 투신한 시체로서 그녀에게 마지막 말을 건넨다. 이제 그녀가 해야할 일은 명확하다. 소통을 포기하는 일이다. 한강철교 위에서 자신을 투신하듯 휴대폰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소통의 대상조차 없는 청춘
두 번째 에피소드로 넘어오면 근우는 아예 소통의 수단이었던 공중전화박스를 수거하는 일을 하고 있다. 공중전화라는 공공의 소통창구가 버젓이 있던 시대에서 휴대폰이라는 사유화된 소통수단의 시대에 근우는 서 있는 것이지만, 정작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지 전혀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 두 번째 이야기의 첫 장면에서 암시되는 것처럼 근우는 그 불안하기만 한 (사회라는 이름의) 담벼락 위를 (사회의 의미 따위에) 눈을 감고, 무모하지만 더듬더듬 걸어 나가는 중이다.

그는 같은 직장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것은 소통이라기보다는 소통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동병상련식의 토로에 가깝다. 연기자지망생으로 ‘연기연습을 하는 것’이라며 여관방을 급습해 협박을 하는 선배라는 작자는 어떤 규범의 선을 넘어서 느끼는 기형적인 소통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 근우는 그것이 위험한 일이라고 하면서도 자신 역시 그 방법밖에는 찾지 못한다. 우연히 남의 전화 통화내용을 엿듣게 되면서 한 여인에게 빠져드는 것이다. 창 밖 전신주 위에 올라 자신이 집착하게 된 여인과 그 여인에게 상처를 주는 남자의 대화를 듣는 건 슬픔을 떠나 절박하기까지 한 근우의 상황을 말해준다. 결국 근우는 남자와 여인의 대화를 연결해주는 전화선을 잘라버리고, 선을 넘는다. 술취한 남자를 노래방에 데려가 여인이 좋아하는 노래, 김보연의 <생각>을 부르며 폭행하는 장면은 우스우면서도 슬프다. 한 소절을 부르고 나서 마치 들으라는 듯 남자를 폭행하는 장면 속에 근우의 단절된 삶의 극단을 보게 된다. 현실이라는 이름의 남자에게 근우는 ‘고(告)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이 의미 없이 하고 있는 공중전화박스 수거는 사실은 스스로가 자신의 단절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근우는 의미를 두지 않았던 죄로 결국 자신이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직장에서 해고통지를 받게 된다. 그 내용은 역시 전화로 통지된다. 여인에게 버림받은 근우에게 회사는 해고통지를 하고 노조는 투쟁에 합류를 권유하지만 근우는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다. 그리고 집에서 바라다 보이는 철길 위에 서 있는 기차를 본다. “왜 저 기차는 늘 저기에 있지?”하는 말은 근우의 처지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근우는 어지럽게 난 철길 위를 서성댄다.

청춘을 버려 얻은 것, 혹은 잃은 것
세 번째 에피소드는 마치 20대를 지낸 정희와 근우가 그 고달픈 청춘을 지나 서른에 얻은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독문과 박사과정 학생이었지만 서른 살의 늦깎이 군인인 인호는 결혼을 해 마련한 자신만의 공간도 있고, 또 언제든 전화를 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아내도 얻었지만 대신 그는 청춘을 버렸다. 영화 초반 짧게 나오는 군대 장면에서 인호는 이제 닳고닳은 병장으로 신병을 놀릴 줄도 아는, 현실에 나갈 준비가 되어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가 나온 마지막 휴가에서 그는 여전한 공간의 부재와 소통부재의 현실을 절감한다. 집 앞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하지만 아내는 없고, 대신 그 빈 공간에서 아내의 부정을 확인하게 된다.

자신만의 보금자리였던 그 집은 이제 그를 소외시킨다. 낯선 남자의 전화가 걸려오고, 자신이 군대에서 보낸 편지는 대상을 잃고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집은 인호를 밖으로 떠민다. 그는 같은 군대의 후배집에 들렀다가, 우연히 대학동창의 결혼식장에 갔다가, 거기서 급기야는 한 여인과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를 다시 집으로 복귀시키고 소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내의 고백이다. 아내가 자신의 부정을 고백한다면 모든 일이 원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한다. 하지만 아내는 입을 다문다. 그러니 스스로 아내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 그는 자신이 저지른 여인과의 하룻밤을 이용한다. 아내에게 고백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그들의 엇나간 관계를 확인하는 꼴이 될 뿐이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인호와 아내는 이미 타인이 되어버린 자신들을 알게 된다.

영화 속에는 세 개의 철길이 등장한다. 정희가 그 외로운 떨림을 듣기 위해 귀를 대고 있는 철로와, 수많은 길이 있지만 자신이 갈 길을 정하지 못하는 근우의 철길, 마지막으로 그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 위에 탄 인호의 철길이다. 청춘을 살아가는 정희와 근우는 그 철길 위로 오르지도 못했고, 인호가 오른 철길 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이 연출된다. 청춘일 때는 길을 몰라서 헤매고, 이제 현실에 들어오자 엉뚱한 국면을 맞게 되는 그 지점에서 세 편의 에피소드는 하나로 묶이며 영화가 말하려는 것이 단순히 청춘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해준다.

길은 많지만 갈 길이 없다
‘내 청춘에게 고함’은 소통되지 않는 현실을 청춘에 빗대 말해주는 듯 하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수없이 전화하고 이야기하려 하지만 그 전화는 받지 않거나, 통신장애거나, 받을 수 없게 된다. 영화 자체도 세 편의 에피소드로 단절되어 있으며, 이 매력적인 주인공들 사이에 어떠한 관계도 형성되지 않는다. 그들은 독립적인 생활의 공간 속에서 홀로 외롭게 싸우고 있다. 그나마 이 세 편을 연결해주는 연결고리는 영화 뒤편에서 들려오는 뉴스들이다. 여관방에 불을 질렀다거나, 노래방에서 폭행을 저질렀다는 식의 그렇고 그런 사회 뉴스가 흘러나올 때마다 관객들이 웃음을 지었던 것은 그만큼 영화 속 주인공의 고립이 타인의 삶에 어떤 울림이 되길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1천만 관객 시대, 600여 개의 극장 동시개봉을 말하는 시대에, 1만 관객 동원과 3개의 상영관 개봉은 초라해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는 마치 자신이 처한 처지를 그대로 말하는 것만 같다. 영화의 소통과 보금자리인 극장은 어디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이너로 치부된 영화가 설 자리는 많지 않다는 것. 길은 많지만 갈 길이 없다는 사실이 미숙해 보이는 청춘들처럼 마이너에 선 영화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 건 아닌지. 누가 그들에게 소통의 창구를 열어줄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괴물이 재난영화처럼 보이는 이유

개봉 전부터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그 영화가 베일을 벗었다. 괴물의 모습이 궁금한 것은 당연지사. 고질라 만큼 거대하지도 않고, 에일리언처럼 작지도 않은 그저 아담한 크기의 괴물은 무엇이든 삼켜버릴 수 있는 거대한 입과, 손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꼬리 그리고 뒤뚱뒤뚱 걸어갈 때나 사용될 법한 다리가 위협적일 뿐이다. 심지어 축축하게 젖은 눈과 조그마한 공간에 벽을 보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은 슬퍼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이것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얘기다.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그 모습은 관객들을 공포와 경악으로 몰고 가는 영락없는 괴물의 모습으로 돌변한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긴장 속에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영화가 끝나고 나면 괴물의 정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 불쌍한 괴물을 괴물답게(?) 만든 것은 사실 괴물 그 자신이 아니고, 괴물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봉준호 감독은 장르를 잘 활용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잘 활용한다는 것은 장르가 가진 속성을 이용해서 그 장르를 파괴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으 통해 전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편의적으로 괴물을 구분한다면 어떤 장르가 적합할까. 괴물이 나왔으니 에일리언이니 고질라, 프레데터 등등의 괴수영화의 한 부류로 봐야 할까.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영화는 블랙코미디, 가족극, 정치극 등등 수많은 요소들을 끌어안고 있다.

아마도 이 영화가 칸느에서 상영되었을 때, 그것을 본 전 세계인들은 괴물에 저마다의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괴물이 단순히 서스펜스와 스릴러, 공포를 곁들인 영화라면 불가능했을 이 의미부여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괴물이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 상징은 전쟁이 되기도 하고, 폭력이 되기도 하며, 부패한 권력이 되기도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상영되고 있는 괴물이 재난영화처럼 보이는 것은 당장 수해로 인해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괴물의 영화 속 상황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수마가 할퀴고 간 도로는 마치 엿가락처럼 휘어있고, 자식처럼 키웠던 작물들은 하룻밤 새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전기가 나가더니 벽이 무너지면서 토사가 집안으로 쓸려 내려왔다. 어제까지 함께 웃고 얘기하던 아들, 딸들은 강물처럼 도로를 질주하는 빗물에 쓸려 사라졌다. 몇 년 전 똑같은 수해를 입은 주민들은 당시 제대로 예방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 한번의 재해는 자연재해라고 해도 연달아 벌어지는 재해는 인재가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수해처럼 괴물은 대낮에 버젓이 한가로운 한강변을 습격했다. 사람들은 밟히고 찢겨지고 잡아먹혔다. 그 가운데 우리의 소시민 박강두네 가족이 있었다. 강두는 자신의 눈에 집어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현서를 괴물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합동분향소에서 오열하는 사람들이 직면한 것은 바이러스 감염이 두려워 행해지는 격리조치이다. 저 많은 헐리우드 괴수영화들이 보여주려는 것처럼 괴물이라는 재해(물론 괴물은 탄생부터가 환경오염으로 인한 인재이다)와 그에 대한 대결은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이 재해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재해에 대한 대처는 미온적이거나 정치적이다. 실제 괴물을 찾아 나서거나 해치워야할 군 병력들은 오히려 사람들의 현장접근을 막기 위해 동원된다. 괴물의 실체는 분명 있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것이 가져올 사회적 파장이다. 그래서 그들이 취하는 제스추어는 있지도 않은 바이러스라는 새로운 공포를 주입하는 것이다. 박강두 가족은 괴물보다, 먼저 사건을 축소 왜곡하려는 정부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렇게 재해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하는 동안에도 괴물은 한강변에 출몰하며 또 다른 재해를 일으킨다. 기물은 파괴되고 사람들은 죽어나간다.

이들 괴물과 싸우는 소시민, 박강두네 가족의 이야기는, 최근 피해가 가장 심했던 인제 지역에 나타난 8명의 산악인을 연상시킨다. 당시 고립된 주민들은 헬기를 보내달라고 했지만 비 때문에 헬기는 뜰 수 없었다. 도저히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길을 뚫고 들어온 산악인 8명은 2박3일 동안 무려 50여 명의 주민들을 구하고 영웅 대접하는 주민들에게 오히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일상생활로 돌아갔다고 한다.

영화 속 박강두 가족이 괴물과 싸우는 이유 역시 소시민에 무슨 영웅이 되고 싶어하는 일이 아니다. 단지 자신들의 손주이자, 딸이자, 조카가 괴물에게 잡혀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소시민들은 도대체 무얼 갖고 싸울 것인가. 저 산악인들이 자신들이 평소 쓰던 등산장비를 사용했던 것처럼(어떨 때는 이것이 헬기보다 더 유용하다) 가족들이 사용하는 무기도 그런 것들이다.

그것은 돈을 주고 구입한 총은 예비군 훈련장에도 사용하지 않을 것 같은 낡은 총이며, 양궁선수로 등장하는 박남주(배두나 분)가 쓰는 활, 그리고 운동권 출신이었던 박남일(박해일 분)이 사용하는 화염병이다. 이걸로 어떻게 괴물을 이기겠나 싶다. 그런데도 이 무기들은 괴물과의 사투에 아주 유용하다. 사실은 괴물 자체가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로써 결국 박강두 가족이 싸워야 했던 것의 실체가 드러난다. 탱크 한 대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정부와 해결책을 주는 듯 접근해 괜한 내정간섭과 실험만 일삼는 미국이 그들이 싸웠던 진짜 괴물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수많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비춰낸다. 현장에 들어가기 위해 공무원에게 돈을 집어줘야 하는 상황이라든지, 격리되어 있는 병원에서 이유도 말하지 않고 검사를 해야하니 아무 것도 먹지 말라는 모습이라든지, 조사랍시고 행해지는 고문이라든지, 휴대폰 강국에 맞게 괴물의 은신처에서 제대로 된 휴대폰을 기다리는 현서나 통신회사에 있는 친구 빽으로 통화기록을 빼내는 장면 등등... ‘괴물’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기에 이런 장면들이 정작 괴물보다 더 많이 등장하는 면면을 보면서 관객들은 진짜 괴물을 보는 듯한 묘한 카타르시스를 얻기도 했을 것이다.

최근 반환된 미군기지의 심각한 오염 사태 또한 영화 속 괴물의 탄생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미8군에서 버린 맹독성 포르말린이 한강으로 스며들면서 탄생하는 괴물처럼, 사건은 이미 터졌거나 진행중이지만 이에 대한 대처는 항상 뒷전이다.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무너지고, 가스가 폭발하는 재난의 발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잉태되어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재난이 터졌을 때, 이 땅의 정치인들은 어떻게 대처했던가. 혹여 사태를 축소하거나 오히려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는 않았던가. 봉준호 감독의 작은 ‘괴물’이 더 무섭고, 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우리 사회라는 한강에서 잉태되고 있는 괴물의 존재 때문이다. 이것은 저 영화 속 괴물처럼 가상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몸서리쳐지기 때문이다.

리메이크 블록버스터들

미국엔 디즈니랜드가 있고 우리나라엔 에버랜드가 있으며 우리 동네엔 H랜드가 있다. 디즈니랜드는 못 가봐서 모르겠지만 롤러코스터의 천국이라고 한다. 찾는 이들도 전 세계적이다. 가끔 가보는 에버랜드는 그럭저럭 롤러코스터들이 구비되어 있지만 한국식으로 즐겨야 한다. 1시간 기다려서 5분 타는 재미.

하지만 우리 동네 하니랜드는 다르다. 놀이기구라고 있는 것이 고작 오래된 회전목마, 시속 5킬로 이하인 궤도열차, 지상 2미터 높이로 뛰면 손이 닿을 정도로 낮은 모노레일, 소박한(?) 바이킹, 범퍼카 등이 전부다.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 기다릴 필요 없고 아저씨한테 잘만 얘기하면 한 번 더 태워주기도 한다. 재미는 없지만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공원으로는 참으로 원칙적인 느낌이다. 이런 상태로 운영되는 게 신기할 정도다.

요즘 극장가를 보면 미국의 디즈니랜드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몇 번의 히트작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던 에버랜드는 그 메가톤급 롤러코스터에 주춤한 상태니 전혀 히트작 하고는 상관없이 소박한 하니랜드가 오죽하랴. 그런데 헐리우드라는 이름의 디즈니랜드에서 선보였거나 앞으로 준비할 영화들의 면면을 보니 이건 사실 전부 대충 감이 잡히는 놀이기구들이다.

리메이크 유행, 왜?
<미션 임파서블3>는 TV를 통해 익숙한 구조인데다, 영화로도 전작이 두 편이나 된다. 물론 새로운 이야기를 담았지만(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다) 우리는 다 안다. 단지 톰 크루즈가 이번엔 어떤 상황에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며 모험을 펼칠 것인가가 궁금할 뿐이다.
이어 개봉한 <다빈치 코드>는 이미 책으로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전력이 있으니 그 내용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심지어 원작 만한 영화 없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개봉 5일만에 150만 명을 넘어섰다.
앞으로 개봉될 영화들도 마찬가지다. <캐러비안의 해적 2; 망자의 함>, <수퍼맨 리턴즈>, <포세이돈>, <엑스맨 3> 무엇 하나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제목이 없다. 이 계보는 아마도 지난해 외화 가운데 최고 흥행을 기록했던 <킹콩>, 어쩌면 그 훨씬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 같다. 최근 슬슬 다가오고 있는 블록버스터의 계절을 맞아 헐리우드라는 디즈니랜드는 왜 이다지도 리메이크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만큼 영화가 다양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영화의 저변은 유럽 영화와 아시아권(홍콩이나 일본, 인도 영화, 우리나라 영화까지) 영화까지 넓어졌다. 과거 헐리우드의 독주시절에는 스크린 쿼터라는 것이 일방적인 문화적 침탈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헐리우드의 독주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류는 전 세계적인 것이고 곧 미국시장까지 파고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른바 한국영화의 ‘어른론’이라는 논리로 스크린 쿼터라는 방패를 반 토막냈다.

마치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헐리우드는 블록버스터를 쏟아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이미 헐리우드 독주시절, 우리 뇌리에서 이건 도저히 이겨낼 수 없다(만들어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고전들의 리메이크였다. 양적으로 팽창한 영화 시장에서, 따로 홍보하지 않아도, 관성적으로 끌리게 마련인(혹은 끌리게 중독되었던) 이 고전들은 헐리우드의 위치를 확고하게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무기인 셈이다. 게다가 롤러코스터, 블록버스터는 헐리우드의 자기정체성이 아닌가. 대문이 반쯤 열린 지금, 디즈니랜드의 국내 상륙에 에버랜드는 떨고, 하니랜드는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상태다. 악몽은 되풀이된다.

리메이크 우리 체질에도 잘 맞을까
하지만 이런 시점에 최근 우리에게도 이 리메이크라는 유혹은 가깝게 들려오고 있다. 리메이크의 대상은 미국보다는 아무래도 정서적으로 가까운 일본이다. 이른바 ‘한류에 역류가 시작되고 있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다. 그 역류는, 영화는 물론이고 드라마까지 스토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일어나고 있다.

먼저 드라마를 보면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해 호평을 받은 <연애시대>, 그 후에 이어질 <101번째 프로포즈>를 기점으로 <오렌지 데이즈>, <하늘에서 내래는 1억 개의 별>등 총 7편의 일본으로 말하면 ‘국민 드라마’들이 리메이크를 준비중이다. 영화는 일본 소설을 리메이크한 <플라이 대디>, <어깨 너머의 연인>, <반짝반짝 빛나는>, <프리즌 호텔>, <검은 집> 등과,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사랑따윈 필요 없어>, 그리고 영화를 리메이크한 <바르게 살자>, <당신의 가방모찌> 등 그 리메이크 대상도 광범위하다.
최근 발표된 <영웅본색>의 리메이크는 그 대상이 좀더 광범위해질 수 있다는 신호탄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걸까. 그것은 새로운 이야기는 필요하지만 기초체력이 부실한 우리 여건에서 이야기를 발굴하기보다는 이미 여건이 충분한 일본 시장에서 손쉽게 가져다 쓰는 게 당장의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일본은 정서적으로도 비슷하고(실제로 그런 지는 모르겠다), 또 한류로 역수출 할 수 있으니 이건 오히려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도대체 한류로 자신만만해 하던 우리네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은 여전히 있는 것일까.
<은행나무침대>,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살인의 추억>, <올드 보이>,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그리고 <왕의 남자>. 이 영화들이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다. 이들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150억이라는 돈을 들여 만든 <태풍>이 참패하고, 순 제작비 41억으로 1200만 관객 돌파라는 대기록을 세운 <왕의 남자>만 봐도 우리네 블록버스터가 헐리우드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헐리우드가 내세우는 단순한 스펙터클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신 우리의 블록버스터는 바로 ‘우리네 정서를 담은 이야기’가 있어야 했다. 엄청난 물량공세로 정평이 난 디즈니랜드가 있는 마당에 똑같이 스펙터클로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네 블록버스터가 미국시장은 물론 전 세계 시장을 공략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미국식의 그것과는 달라야한다. 그들의 아이덴티티가 스펙터클이기에 리메이크라는 방식은 그들 체질에는 잘 맞는 것이 틀림없지만 우리에게도 그것이 잘 맞는다고는 볼 수 없다.

디즈니랜드라는 괴물을 이기는 방법
물론 리메이크는 또 하나의 새로운 창조임에 틀림없다. 우리네 <시월애>나 <엽기적인 그녀> 같은 영화들이 헐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된다는 걸 보면 그 먼 문화적 거리만큼 창조의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리메이크는 이미 충분히 튼튼한 체질을 갖고 있다면 전략상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리메이크라는 전략상품을 만드는 한편으로, 자체적인 체질강화프로그램을 갖지 않으면 결국 우리 문화는 영양실조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영화 시나리오와 문학, 연극, 뮤지컬 등 영화의 자양분이 되는 이른바 기초분야에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그것이 리메이크에 익숙한 디즈니랜드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스펙터클은 아니지만 우리네 정서를 담은 이야기, 그것이 거대 괴물 디즈니랜드와 대항할 수 있는 대안이다.

어쩌면 롤러코스터는 영화가 가진 실체의 한 측면인지도 모른다. 단 몇 분, 몇 시간만이라도 사람들은 현실을 잊고 온전한 자극과 환상에 빠지길 원한다. 하지만 영화를 문화이게 하는 또 다른 측면을 도외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새로움이 없는, 생각하지 않는 문화는 상품일 뿐이다. 따라서 문화로 포장되어 들어오는 자극덩어리의 상품은 중독적인 병폐만을 가져올 지도 모른다.
디즈니랜드의 입성으로 극장이 놀이공원이 되고, 영화가 롤러코스터가 되가는 이 시점, 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는 봉준호 감독의 ‘생각 있는 블록버스터’, <괴물>이 기다려지는 건 그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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