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과 눈물과 감동의 ‘아이 캔 스피크’

그는 도대체 왜 20여 년간 무려 8천 건에 달하는 민원을 넣었을까. 도깨비 할매로 불리는 옥분(나문희)은 시장통에서 수선집을 하며 시장 곳곳에 문제들을 그냥 넘기지 않고 하나하나 구청에 민원으로 제기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 속 깊숙이 담겨져 있는 그 말은 꺼내지 못하며 살아간다.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까지 상처를 입게 했던 그 말. 그래서 그가 8천 건에 달하는 민원을 넣었을 때 그 마음이 느껴진다. 얼마나 그는 말하고 싶었을까.

사진출처:영화<아이 캔 스피크>

그는 시장통에서 사사건건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하다못해 민재(이제훈)의 동생이 생라면을 먹고 있는 것조차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는 그 나이에 이제 그다지 필요 없을 것 같은 영어를 그토록 열심히 배우려 한다. 그래서 집안 벽 곳곳에는 영어 문장들이 적혀진 종이들이 붙어 있다. 학원도 다니며 젊은 친구들 사이에 앉아 조금 천천히 해달라고 선생님께 조른다. 결국 학원도 받아주지 않자 그는 구청에 새로 온 9급공무원 민재(이제훈)에게 영어 개인교습을 청한다. 동생이 인연이 되어 옥분을 가르치게 된 민재는 궁금하다. 왜 그가 이렇게 영어를 배우려 하는지.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옥분이라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하지 못하고 있는 할매를 등장시킨다. 사람들은 그가 하고 있는 많은 말들이 진짜 하고픈 말을 못해서라는 걸 잘 모른다. 그가 영어를 배우려 하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잘 모른다. 그래서 오해한다. 하지만 그 오해가 우리가 가진 많은 편견들에게 비롯됐다는 걸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옥분은 일제강점기에 깊은 상처를 가진 위안부 할머니다. 그 모진 고통을 겪고 돌아왔을 때 그러나 부모조차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그가 평생을 입을 다물고 살았던 이유다. 

<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겁게 시작하지는 않는다. 가벼운 코미디처럼 접근한다. 그래서 영화의 전반부를 보면 이 영화의 제목처럼 할머니가 영어를 배운다는 그 설정이 가진 휴먼 코미디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다. 하지만 그 할머니가 하려는 이야기가 점점 진중해지고 무게가 얹어지는 후반부로 가면 관객들로서는 그 둔중하게 다가오는 메시지에 코끝이 시큰해진다. 지금껏 많은 영화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뤘지만 이 영화만큼 균형 있으면서도 따뜻하게 담은 영화가 있을까 싶다. 

그래서 <아이 캔 스피크>라는 제목은 뒤로 갈수록 그 의미가 확장된다. 처음에는 옥분의 끝없는 민원과 영어가 그 목적어처럼 여겨지다가 그가 평생을 숨기고 있던 그 역사의 한 대목이 될 수밖에 없는 상처가 목적어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더 나아가 그것은 그의 삶만이 아니라 꽤 많은 세상의 할 말은 있지만 말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아픈 서민들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누구나 하고픈 말을 ‘말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이야기.

웃다가 뭉클해져 눈물을 흘리다가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되는 이 감정의 파고는 <아이 캔 스피크>가 위안부 할머니를 소재로 하면서도 그 이야기를 그 소재에만 매몰시키지 않고 보다 확장시킨 데서 나오게 되었다. 역사적 실제 사건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면서도 그 이야기가 그분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걸 영화는 그래서 훌륭하게 설득시킨다. 이만큼 감정을 추스르기 쉽지 않은 이야기를 이토록 균형 잡히게 말해주다니. 그러고 보면 이 영화의 제목은 이 영화가 이런 무거운 소재들도 충분히 따뜻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것 또한 담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다.

솔로보다 하모니, 이게 진짜 ‘팬텀싱어’지

무엇이 이토록 큰 감동을 줬을까. JTBC <팬텀싱어2> 트리오 대결에서 이정수, 임정모, 정필립은 스스로 자신들을 최약체팀이라고 불렀다. 다른 트리오팀들이 연습하는 걸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감은 뚝뚝 떨어졌다. 게다가 선곡해간 곡을 사전에 들어본 프로듀서들은 “분발하셔야 될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 윤종신과 김문정은 무대가 시작되기 전, 사실 이 팀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었다. 

'팬텀싱어2(사진출처:JTBC)'

하지만 막상 이들이 고심 끝에 선택한 Mark Vincent의 ‘Look Inside’를 부르자 프로듀서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들이 그간 봐왔던 모습과는 너무 다른 무대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고음과 중음과 저음이 절로 잘 배합되어 내는 하모니는 모두를 깊은 감동에 빠뜨렸다. 무엇보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자신의 내면’에 있다는 노래의 메시지는 그들의 심정을 그대로 들려주는 것만 같았다. 

프로듀서들은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박수를 쳤고 극찬이 이어졌다. 윤종신은 특히 세 사람의 “합심된 노력”이 빛난 무대였다고 했고, 윤상은 그 어떤 무대들보다 “각자의 컨디션이 최고였다”고 평했다. 김문정은 “트리오의 표본을 보여주셨다”고 했으며 마이클 리는 “이 무대밖에 없다”는 그런 모습이 큰 감동을 줬다고 했다. 

도대체 이들은 저마다 갖고 있는 약점들을 극복하고 어떻게 이런 놀라운 하모니를 들려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약점들이 저마다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종신 프로듀서의 말대로 <팬텀싱어>는 솔로를 뽐내는 무대가 아니라 하모니를 들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약점은 들려주지 않아도 되고 강점을 잘 하면 된다는 것. 그는 제아무리 뛰어난 싱어도 모두를 다 잘해낼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그대로 사실이었다. 우리가 <팬텀싱어>를 보면서 느꼈던 감동의 실체가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잘 하는 사람이 잘 부르는 노래에서 무슨 더 큰 감동이 있을까. 그것은 그저 “잘 부른다”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혼자 부를 때 약점이 분명했던 인물이 하모니로 팀을 이뤄 서로 부족한 면들을 채워주고 잘 하는 면들을 부각시켜 최고의 노래를 들려줄 때 그걸 보는 우리들도 어떤 위안 같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혼자서는 잘 안 되는 것들도 함께 하니 할 수 있다는 걸 새삼 발견하게 된 것.

그것은 우리가 굳이 혼자 부르지 않고 합창을 하는 이유일 것이다. 혼자 충분히 다 잘해낼 수 있는데 왜 굳이 함께 부르겠는가. 그리고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건 겸손이다. 자신을 낮춤으로써 더 큰 것에 도달할 수 있다는 깨달음. <팬텀싱어2>의 최약체팀으로 불리던 이정수, 임정모, 정필립이 보여준 건 그저 좋은 무대만이 아니었다. 그 작은 무대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팬텀싱어>라는 오디션이 여타의 그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프로그램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삼시세끼’의 일상, 낯설음보단 익숙한 게스트가 최적

이종석의 무엇이 tvN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의 풍경을 다르게 만든 걸까. 사실 지난 번 설현이 게스트로 등장했을 때 <삼시세끼>는 어딘가 지금껏 봐왔던 것과는 다른 공기를 느끼게 했다. 어딘지 잘 어우러지지 않는 느낌이랄까. 물론 그건 설현의 문제라기보다는 조합의 문제일 수 있고 나아가 <삼시세끼>라는 특정 프로그램의 색깔이 가진 부조화의 문제일 수 있다. 

'삼시세끼(사진출처:tvN)'

그래서 그것은 <삼시세끼>의 게스트 출연이 만들어낸 문제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건 그리 틀린 이야기도 아니다. 게스트가 들어온다는 건 기존의 분위기에 변화를 만들 수밖에 없다. 이서진과 에릭, 윤균상은 마치 삼형제처럼 이제 가까워졌고 그래서 뭐라 말 하지 않아도 척척 합이 잘 맞는다. 그런 분위기에 낯선 인물이 들어오면 조금 어색해질밖에. 그리고 그런 새로운 조합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게스트가 들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종석이 게스트로 출연하고, 그를 위해 삼형제가 어설픈 몰카를 하기 위해 오히려 자기들이 더 힘든 노력들을 보이며 결국 몰카임이 밝혀지고 평소 친했던 윤균상과 이종석이 만나는 그 일련의 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또 재미도 있었다. 도대체 같은 게스트인데도 이런 차이가 만들어진 건 왜일까.

그것은 <삼시세끼>라는 프로그램이 가진 특징이 그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과 동시에 살짝 낯선 것이 들어와 새로운 이야기를 전해주는 그 균형에서 재미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게스트가 너무 낯설면 본연의 색깔이 잘 보이지 않게 된다. 물론 너무 익숙해도 게스트의 효과가 나오지 않겠지만. 

그런 점에서 보면 윤균상 하나만 믿고 이 득량도에까지 들어온 이종석은 <삼시세끼>에 잘 어울리는 게스트 조합이다. 이미 평소에 잘 알고 지냈기 때문에 윤균상과 함께 있을 때는 <삼시세끼> 특유의 편안한 그림이 나오고(이건 편안함을 넘어서 거의 브로맨스에 가까운 그림이다), 그러다 이서진이나 에릭이 들어오면 살짝 긴장하는 새로운 재미가 만들어진다. 결국 윤균상과 가까워 득량도에 들어왔지만 어딘지 낯가림이 심해 가깝게 느껴지지 않던 이서진과 에릭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친숙해지는 그 과정은 시청자들이 원하는 풍경이 된다.

생각해보면 <삼시세끼>가 지금껏 써왔던 게스트의 법칙이 남달랐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아마도 나영석 PD가 가진 성향이 묻어난 것이겠지만, 무작정 낯설음보다는 어떤 친숙함을 더 게스트 선정에서 고려했다는 것이다. 초창기 정선에서 찍었던 <삼시세끼>에 이서진과 택연이 함께 하고 그 후에 게스트로 윤여정, 김지호, 류승수, 김광규 등이 찾아왔던 건 그들이 과거 <참 좋은 시절>에서 이미 한 가족처럼 가까운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먹함 없이 바로 그 친숙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 

이번 ‘바다목장’편에서도 한지민이 게스트로 들어왔을 때 특히 시청자들이 반색했던 것도 이미 <이산>으로 이서진과 가까운 관계였고, 에릭과도 과거 드라마를 통해 연기호흡을 맞췄던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과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마치 아침에 나갔다 돌아온 가족처럼 편안함이 있었고, 거기에 윤균상과는 조금 서먹했지만 차츰 알아가는 누나 동생 사이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줬다. 

<삼시세끼>의 게스트는 그래서 완전히 낯설기보다는 어느 정도 친숙한 인물이 들어왔을 때 최적의 효과를 보인다. 그것은 이 프로그램이 무엇보다 ‘편안함’을 가장 큰 무기로 장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삼시세끼>를 보며 대단히 놀라운 어떤 이야기를 기대하기보다는 늘 우리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그 가족적인 분위기를 더 느끼고 싶어한다. 이종석이 게스트로 들어와 윤균상과 알콩달콩 보여준 케미에 시청자들이 반색할 수 있었던 건 그래서다.

“부정을 그냥 넘길 순...”, ‘저수지게임’ 그 질깃함의 이유

다큐 영화 <저수지 게임>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무려 5년째 추적해온 주진우 기자는 스스로 실패했다고 말했다. 모든 정황들이 있고, 합리적인 의심을 하기에 충분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 

사진출처:영화<저수지게임>

그리고 이런 결과는 이미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영화관에 들어온 관객들은 알고 있다. 만일 주진우 기자의 추적이 성공했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영화관이 아닌 뉴스를 통해 봤을 것이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민들 대다수가 의구심을 갖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한 속 시원한 뉴스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주진우 기자 말대로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저수지 게임>이 담고 있는 것은 속 시원한 성공담이 아니다. 실패담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마음은 좀체 시원해지지 않는다.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다. 그런데도 영화는 관객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저 정도라면 포기했을 거라는 게 보통 사람들의 경우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진우 기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5년을 추적했고 지금도 그 추적은 끝나지 않았다. 영화는 결과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 담긴 집념을 담는다.

<저수지 게임>의 주진우 기자는 MB의 비자금을 추적하며 하나의 패턴을 발견한다. 해외 투자라는 명목으로 망할 투자를 공기업들이 나서서 하고 그래서 적게는 수백억에 이르는 투자금을 공중분해시켜 버린다. 사라진 돈의 출처가 불분명한 가운데, 이상하게도 손실을 본 투자자인 공기업들은 이를 회수하려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고소도 하지 않는다. 주진우 기자가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주진우 기자가 스스로 “열이 받는다”고 말하고 그 말에 관객들도 공감하는 까닭은 그 많은 돈들이 사실은 국민의 세금이라는 점이다. 결국 우리 돈을 가져가 망할 투자를 하고 돈을 날려버린 뒤 찾으려는 노력도 또 책임자에게 법적인 책임을 추궁하지도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런 식의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가 가능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국민은 바보로 전락한다. 정부는 혹 대책이 없는 게 아니라 공범자는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주진우 기자가 끊임없이 관련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을 통해 어려운 진술을 받아내고, 또 해외로 직접 날아가 관련자들과의 인터뷰를 시도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에 우리는 집중할 수밖에 없다. 제발 증거가 나오기를 바라고 또 바라게 된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일까. 주진우 기자와 함께 사건을 추적했던 김어준은 말했다. 자금 추적을 하면 사라져버리는 일이 일상이었다고.

그러니 5년여의 추적이 실패로 돌아올 이 일을 그들 또한 몰랐을 리 없다. 심지어 고소도 당했다. 그런데도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이 일에 집착하냐고 감독이 묻는다. 기자정신 같은 건 자기도 모른다고 했다. 다만 눈앞의 “부정을 그냥 넘길 수는 없다”고 말한다. 외면할 수는 없다는 거다. 적어도 이렇게까지 “뒤쫓아다니는 사람이 한 명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는 것. 

그래서 관객들이 실패담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저수지 게임>을 들여다보려는 건 적어도 주진우 기자의 그 질깃질깃한 집념에 동감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저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에 지지를 표하고 싶어서다. 어떤 안도감이라도 갖고 싶어서다. 보는 내내 화가 나고 허탈한 한숨이 터지지만 그래도 영화관을 나오며 어떤 뭉클함 같은 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하는 그 의아함에 담겨지는 놀라운 집념에서 어떤 작은 희망 같은 것이 보인다는 것. 그래서 그의 실패담에는 단서가 붙었다. ‘아직까지는’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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