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도 힘들다, 지상파 예능 시즌제 안하면

 

“2008년부터 TV 플랫폼을 벗어나 영화, 인터넷 등의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서 건의를 많이 했다. 하지만 문제는 <무한도전>의 시즌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아이템을 해결할 수 없더라.” 지난 달 25일 김태호 PD는 서울대학교에서 한 강연에서 시즌제를 언급했다.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이건 김태호 PD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이미 지상파 예능 PD들은 오래 전부터 줄곧 시즌제를 외쳐왔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시즌제를 거론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지금의 지상파 예능의 편성 시스템으로는 지속적인 프로그램의 존속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매주 방영되는 프로그램에 맞추기 위해 반복적인 노동에 노출되다 보면 애초 프로그램이 갖고 있던 힘이 사라지는 경우도 많고 무엇보다 제작진도 또 시청자도 어떤 휴지기를 통한 재충전의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시즌제의 문제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PD가 바로 나영석 PD. 그는 KBS를 떠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으로 PD가 쉴 틈 없이 달려옴으로써 너무 고갈되어버린다는 점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CJ로 이적한 후 <꽃보다> 시리즈와 <삼시세끼> 시리즈를 시즌제로 구성해 톡톡한 효과를 거뒀다. 만일 이 프로그램들이 시즌제가 아니라 매주 방송으로 편성되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프로그램의 소비속도는 빨라졌을 것이고, 그 신선한 느낌도 사뭇 상쇄됐을 것이다.

 

이처럼 예능 PD들이 늘 입에 달고 다니는 시즌제에 대한 김태호 PD의 언급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다가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지금껏 시즌제가 아닌 매주 편성으로 버텨냈던 지상파 예능이 어느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인식 때문이다. 알다시피 최근 한 2년 동안 지상파 예능들은 JTBCtvN 같은 비지상파 예능에 그 주도권을 놓친 지 오래다. JTBC<비정상회담>이나 <썰전>, <냉장고를 부탁해>, <히든싱어>가 각각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었고, tvN<삼시세끼>, <꽃보다> 시리즈, <집밥 백선생> 등등의 예능 프로그램들 역시 하나의 트렌드를 세웠다. 지상파들은 뒤늦게 보조를 맞추기 위해 쿡방을 따라하거나 외국인 트렌드를 끼워 넣는 모습을 보였다.

 

트렌드에 민감한 예능에서 주도권이 빼앗긴다는 건 치명적이다. 예능의 헤게모니를 떠나 그것은 방송사의 위상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일이다. 실제로 JTBCtvN이 이른바 ‘5대 방송사(지상파 3사와 함께)’를 새로운 방송사의 틀로 제시할 수 있었던 데는 상당부분 이들 시즌제 예능 프로그램들의 지분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인식들은 지상파 관계자들도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시즌제를 단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눈앞의 이익 때문이다. 이들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들은 어마어마한 광고 완판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주말 예능의 경우는 방송사의 경영지표가 좌지우지될 정도로 광고 매출이 중요하다. 그러니 잠시 쉬고 간다는 건 언감생심 마음먹기 어려운 일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 콘텐츠란 그 자체의 경쟁력이 확보되어야 장기적인 인기를 이어갈 수 있고 그래야만이 광고 매출도 보다 장기적으로 안정화될 수 있다. 지금의 주말 예능을 보라. 그나마 KBS<12>이나 <슈퍼맨이 돌아왔다>, MBC<복면가왕>, <진짜사나이>, SBS<런닝맨>같은 프로그램이 버티고는 있지만 그 프로그램들이 굉장히 뜨겁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최근 들어 급증하고 있는 방송 사고들은 이러한 매주 편성의 노동강도가 결국은 콘텐츠에 무리를 주고 있다는 징후처럼 보인다.

 

물론 모든 예능 프로그램들이 시즌제가 될 필요는 없다. 이를테면 스튜디오형 예능으로 JTBC<냉장고를 부탁해><비정상회담>, <썰전> 같은 프로그램이나 tvN<집밥 백선생> 같은 프로그램들은 매주 편성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히든싱어><삼시세끼>, <꽃보다> 시리즈 같은 파괴력이 있는 대작(?)들은 시즌제가 프로그램의 파괴력을 훨씬 높여준다.

 

이것은 <무한도전>이나 <12>도 마찬가지다. 무려 10년이다. 10년을 쉬지 않고 달려왔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해왔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시청자들도 달라지고 있고 방송 트렌드도 시즌제에 더 맞춰지고 있는 추세다. 이런 변화 속에서 당장의 이익 때문에 미래를 보지 못한다면 자칫 방송의 주도권을 놓칠 수 있고 또한 그런 환경 속에서 많은 인재들 또한 유출될 수 있을 것이다. 지상파들은 나영석 PD의 승승장구를 눈 여겨 보고 김태호 PD의 고민에 귀기울여야할 때다



상도가 땅에 떨어진 현실, <객주>의 시사점

 

장사에도 상도가 있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장사꾼의 첫 번째 도리다.’ KBS 드라마 <객주>의 천봉삼(장혁)이 말하는 장사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건네는 천봉삼에게 길소개(유오성)는 장사에 상도가 어디 있냐고 말한다. 그는 장사는 그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두 관점의 부딪침. 이것은 아마도 <객주>가 현재에 전하려는 메시지의 대부분일 것이다.

 


'장사의 신 객주(사진출처:KBS)'

상도를 지키려는 천봉삼의 길은 험난하다. 그는 화적들에 의해 막혀있던 북관대로를 뚫고 그 길을 막아놓은 것이 육의전 대행수인 신석주(이덕화)라는 사실에 분노한다. 수로를 이용한 유통망을 독점하고 있는 신석주가 육로를 일부러 막아 엄청난 이문을 남기고 있었던 것. 하지만 한달음에 찾아와 상도를 얘기하는 천봉삼에게 신선주는 오히려 달콤한 제안을 한다. 북관대로를 놔두면 자신이 육의전 어물전을 내주겠다는 것. 하지만 천봉삼은 이를 거부하고 전국의 보부상들에게 이제 북관대로가 열렸다는 사발통문을 돌린다.

 

그렇다면 상도는커녕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가까운 이들조차 죽음으로 몰아넣는 길소개나 신석주의 길은 어떨까. 거대한 자본을 이용해 매점매석하는 것이 이들이 돈을 쉽게 버는 방식이다. 북관대로가 열려 보부상들에 의해 장삿길이 열리자 이들은 대신 물화를 꽉 움켜쥐고 내놓지 않음으로써 보부상들의 뒤통수를 친다.

 

육의전과 보부상. 육의전을 표상하는 인물이 신석주와 길소개라면 보부상을 대표하는 인물은 천봉삼이다. <객주>는 결국 천봉삼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국가에 의해 독점적인 권리가 부여된 육의전의 폐해를 알리고 대신 보부상들이 열어갔던 그 험난해도 가치 있는 장삿길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육의전은 거대한 자본을 이용해 장삿길을 막음으로써 매점매석으로 폭리를 취하고, 보부상은 그렇게 막혀있는 장삿길을 맨몸으로 뚫고 나간다.

 

<객주>가 지금의 시청자들에게도 어떤 통쾌함을 주고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이 달라졌고 시대도 많이 흘렀으며 먹고 사는 문제도 조선시대에 비해서는 훨씬 나아진 현재이지만 그럼에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고 어떤 면에서도 더 나빠진 것도 있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한 정경유착의 육의전들이 대자본을 이용해 폭리를 취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 과정에서 작은 장삿길들이 막혀 고사하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상도 따위는 없어진 지 오래다.

 

그러니 <객주>의 천봉삼 같은 인물이 육의전 대행수와 맞서 막혀있던 북관대로를 뚫고 달콤한 유혹을 거부한 채 전국의 보부상들이 살아갈 길을 열어주는 대목이 우리에게 특별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객주>가 다루는 길은 그래서 여러 가지 의미들을 내포한다. 그것은 장사꾼들에게는 자신은 물론이고 식구들의 목숨이 달려있는 목숨길이다. 하지만 그것은 장사꾼들만이 살기 위한 길은 아니다. 그 삶과 죽음의 문제는 그들만이 아니라 이 나라 백성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이기도 하다.

 

<객주>의 천봉삼이 육의전의 독점적 상권과 맞서 자유로운 상업의 길을 주창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신자유주의적인 자유방임을 얘기하는 건 아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상도는 그 안에서도 지켜져야 할 것들이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 상도가 지켜져야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천봉삼은 말한다. 장삿길은 그래서 마치 우리네 몸에 돌고 있는 혈관처럼 비유된다. 그 길이 막히면 누구 하나만 죽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쓰러질 수밖에 없다.

 

<객주>는 그래서 단순히 천봉삼이라는 민초들이 그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식의 영웅담이 아니라 함께 사는 길의 모색이다. 원작자인 김주영 작가는 <객주>라는 작품에 대해 환난상구십시일반의 정신을 얘기한 적이 있다. 환난상구란 곤란에 빠진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정신이고 십시일반은 완전히 망한 동료에게 한 푼씩 모아 최소한의 밑천을 만들어주던 정신이다. 지금 우리네 경제에는 환난상구십시일반의 정신이 남아있는가. 오히려 저 누군가 막아놓고 독점적 이득을 취하는 북관대로와 작은 장삿길들을 막아버리는 자본만 남은 것은 아닌가.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것을 <객주>의 그 장삿길이 보여주고 있다.



싸이의 고심, ‘나팔바지’와 ‘대디’ 사이에서 찾은 초심이란

 

싸이 만큼 고민이 많을 가수가 있을까. ‘강남스타일의 국제적 성공은 그에게 기적 같은 일로 다가왔지만 또한 그만큼의 고민들로 되돌아왔다. 후속곡이었던 젠틀맨은 그 고민이 이른바 싸이스러움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보여줬다. 물론 싸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곡이어서 해외의 관심은 지대했지만 강남스타일의 뒤를 이어주지는 못했다. 싸이는 더 큰 고민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사진출처:싸이의 '나팔바지' 뮤직비디오

그런 그가 정규7칠집싸이다로 돌아왔다. 타이틀곡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나팔바지대디’. 싸이가 이 두 곡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시점을 정확히 밝힌 데는 두 곡이 가진 다른 느낌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나팔바지는 고민에 고민을 하던 싸이가 올 초 대학축제 무대에 서서 제정신을 차리고쓴 곡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 곡은 강남스타일이전부터 줄곧 지속되어왔던 싸이스러움이 더욱 잘 묻어난다.

 

나팔과 나팔바지를 이미지로 엮어내고 여기에 붙은 나팔바지(에헤라디야) 나팔나팔나팔이라는 중독성 강한 후렴구는 그것이 시각적으로도(나풀거리는 듯한) 청각적으로도(나팔나팔나팔) 선명하게 기억에 각인시키는 효과를 낸다. 빼놓을 수 없는 건 역시 뮤직비디오다. 나팔바지가 갖고 있는 복고적 느낌을 제대로 살려낸 뮤직비디오에서 싸이는 저 강남스타일이 그랬듯 허슬 춤을 촌스러운 몸에 멋지게 소화해내는 것으로 흥겹고 즐겁고 웃긴 장면들을 연출해낸다. 싸이가 아니라면 도무지 흉내 내기 어려운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제정신을 차리고쓴 곡이라 그런지 나팔바지는 훨씬 더 우리들의 귀에 쏙쏙 박힌다. 뮤직비디오도 그 춤동작이 쉽게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대디는 느낌이 다르다. 스스로 밝힌 것처럼 국제용으로 만들어진곡이란 느낌이 강하다. 어쨌든 국제용이라는 말에 걸맞게 유튜브 조회 수는 대디에 대한 반응이 훨씬 폭발적이지만 우리에게 훨씬 귀에 익고 싸이 답게 여겨지는 곡은 아무래도 나팔바지가 아닐까 싶다.

 

지난 젠틀맨이 나오고 나서 많은 이들이 초심을 얘기했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당한 얘기였다. 왜냐하면 싸이의 곡이 점점 국제용으로 기획되는 듯한 인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춤과 중독성 강한 후렴구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뮤직비디오에 음악을 오히려 맞춘 듯한 느낌. 하지만 그런 해외시장을 겨냥한 듯한 기획 작품으로는 강남스타일처럼 자연스럽게 싸이의 느낌이 묻어나고 그러면서 음악적으로 그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것이 요원하다는 반성이 초심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초심이란 무엇인가가 싸이는 또한 고민이었다고 한다. 사실 싸이 답다는 표현 속에는 대중들이 요구하는 초심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들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싸이 스스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한 가지의 모습만을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이 초심은 아닐 테니 말이다. 사람은 어쨌든 상황을 겪으며 변화하고 성장하기 마련이다. 이미 상황이 달라져있는데 억지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과연 초심일까. 그것이 초심일 순 있지만 거기에는 진심이 묻어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진정한 초심이란 새롭게 생겨난 것들 속에서 그것이 자신의 모습으로 소화될 때 비로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나팔바지대디사이에는 그래서 싸이의 이 초심에 대한 고심이 묻어난다. ‘나팔바지가 우리에게 친숙한 그 싸이다움을 담고 있다면, ‘대디는 국제가수가 된 그가 해외에서의 활동을 통해 얻게 된 새로운 싸이다움이 담겨있다. 그는 자신이 어렵게 찾은 초심을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어서 딴따라가 된 ’”라고 표현했다. 그에게는 나팔바지대디하고 싶은 것즉 초심일 것이다.

 

이런 면들은 칠집싸이다의 다른 곡들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즉 타이틀곡은 나팔바지대디로서 마치 싸이를 표상하는 것처럼 내세워져 있지만 이 앨범에 담긴 다른 곡들도 저마다의 매력이 넘친다는 사실이다. 전인권이 피처링한 좋은 날이 올거야JYJ 시아준수가 피처링한 ‘Dream’ 같은 곡은 해외는 모르겠지만 국내 팬들에게는 분명 매력적인 곡일 것이다. 국제 활동에 대한 욕망도 느껴지지만 국내 활동에 대한 애착도 느껴지는 칠집싸이다’. 싸이는 그렇게 자신의 초심을 찾았다.



<열정 같은>, 심지어 원작과 정반대의 영화라니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는 현직 연예부 기자인 이혜린 기자의 동명의 자전적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이 소설은 열정같은 소리를 해대며 사실은 갖가지 기레기짓으로 제 밥그릇을 챙기는 스포츠지 연예부 기자의 현실을 폭로하고 비판하며 작가 스스로는 반성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 영화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런 원작의 메시지는 영화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정반대의 주제의식이 드러난다. 그 주제의식이란 다름 아닌 대중들이 흔히 기레기라고 부르는 이들도 나름대로의 애환과 직업의식은 있고, 그것 역시 밥줄이 달린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거론하고 있듯이 이 작품은 여러 모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이야기구조와 유사하다. 인턴기자로 입사한 도라희(박보영)<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드리아(앤 헤서웨이)처럼 보이고 그녀를 압박하는 하재관 부장(정재영)은 미란다(메릴 스트립) 편집장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품은 뒤로 갈수록 <미생>의 인물들로 바뀌어간다. 즉 도라희는 장그래(임시완)처럼 보이고 하재관은 오과장(이성민)처럼 보이는 것.

 

하재관이란 인물에 대한 동정적 시선을 만들어 언론 현실의 문제를 밥줄의 문제로 슬쩍 덮어버리자 영화는 진지한 문제제기보다는 발랄한 코미디를 따라간다. 그리고 사실 악이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라고는 해도 누군가의 사생활을 캐고 그것을 자극적으로 만들어내며 나아가 찌라시를 활용하기까지 하는 그 언론 자체와 그걸 만들어내는 자본의 경쟁논리에 있지만, 영화는 엉뚱하게도 한 기획사의 대표를 악의 축으로 세워놓는다.

 

이렇게 되자 내부의 문제는 가려지고 대신 외부의 강력한 적과 싸워나가는 기자정신(?) 이야기로 포장된다.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라는 제목이 가진 시니컬함은 사라지고 오히려 주인공이 마치 CSI처럼 밤새워 정황들을 모아 기사를 작성하는 열정이 부각된다. 그리고 그 열정은 원작과는 너무나 다른 정식 기자증이라는 훈훈한 결과로 이어진다. 내부 고발의 이야기가 힘겨워도 살만하고, 더러워도 그것이 먹고 살기 위함이라는 포장으로 채워지면서 원작의 메시지는 완벽하게 뒤집어진다.

 

이러한 훈훈한 성장담에 박보영 캐스팅은 아마도 최적이었을 것이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 순수한 이미지의 연기자가 바로 박보영이 아닌가. 그러니 여기 등장하는 기자들의 말 그대로 먹고 살자고 하는 일들이 그녀가 인턴 역할을 연기함으로써 상당부분 용인되게 만드는 힘이 생기는 게 사실이다. 기자라고 하면 막연히 떠오르는 그런 이미지도 박보영이 하고 있으니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것은 정재영 캐스팅도 마찬가지다. 꽉 막힌 것처럼 버럭대는 캐릭터지만 어딘가 마음 한 구석에 정이 느껴지고 때로는 그 버럭 댐이 오히려 우스꽝스럽게까지 보이게 만드는 역할에 정재영 만한 연기자가 있을까. 부하직원을 끔찍이 챙기고, 기러기 아빠로서 살아가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하재관이 그래서 심지어 구악처럼 보이기보다는 한 명의 가장이자 피해자처럼 보이게 된 건 정재영이라는 연기자의 이미지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도대체 어째서 이처럼 지옥 같은 경험을 담았던 원작이 훈훈한 직장생활 성공기로 변신하게 됐던 걸까. 물론 그것은 장르적으로 경쾌한 코미디가 훨씬 경쟁력이 있다 여겨졌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원작을 뒤집어 그저 웃고 넘기기엔 어딘지 아쉬움과 씁쓸함이 남는 리메이크가 아닐 수 없다. 그것 역시 자본의 논리에 의해 각색되고 포장된 것일 테니 말이다. 만일 연예부 기자들의 현실을 리얼하게 들여다보고 싶다면 영화보다는 차라리 원작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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