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에서 중간관리자 지현우의 역할

 

JTBC <송곳>은 노동운동을 소재로 한 드라마다. 외국계 유통체인점인 푸르미 마트에서 벌어지는 비정규직 정리해고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주인공으로 당사자라기보다는 관리자인 이수인 과장(지현우)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왜 비정규직 노동자가 아닌 정규직 그것도 사원도 아닌 관리자가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됐을까.

 


'송곳(사진출처:JTBC)'

사실 이 부분은 <송곳>에서 이수인 과장이 부신노동상담소를 찾아갔을 때 구고신(안내상) 소장이 그의 의도를 의심하는 장면에서 이미 거론됐던 이야기다. “이수인씨 관리자잖아요. 당신이 해고당한 것도 아닌데 왜 나서는 거요?” 그것이 구고신이 이수인 과장에게 던진 의구심이었다. 즉 자기 일에 나서는 것과 그저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나서는 건 다르다는 걸 구고신이 지적했던 것.

 

그렇다면 정작 <송곳>이라는 드라마는 왜 이수인을 주인공으로 세운 걸까. 그것은 드라마를 좀 더 객관화하려는 작가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래도 해고노동자 당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면 드라마는 감정적으로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들의 감정에 동일시하게 되고 그것은 드라마를 생각하게 하기 보다는 감정적으로 불을 지르는 방향으로 흐르게 만들 수 있다.

 

<송곳>은 해고노동자들의 힘겨운 삶을 다루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드라마다. 너무 깊게 빠져 들어가면 드라마가 지나치게 무거워질 수 있다. 물론 현실은 더 무거운 이야기다. 하지만 <송곳>이 추구하는 건 노동자들만 공감하는 노동자들만의 드라마가 아니다. 이것은 지금 이러한 현실을 당면하지 않은 보통사람들 또한 공감하기를 원하는 드라마다. 결국 달라지지 않는 시스템 안에서는 그런 현실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수인 같은 앞뒤 꽉 막힌 듯한 캐릭터는 그래서 <송곳>이라는 드라마의 중요한 가이드 역할을 해준다. 즉 한 발 물러서 있지만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노동자들의 입장에 다가가는 인물. 그래서 그들의 입장을 객관적이면서도 타인의 관점에서 공감하게 해주는 인물이 바로 이수인이다. 노동지부장 선거에서 지부장이 이수인이 아닌 푸르미의 직원인 주강민(현우)이 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실제로 길거리에 천막을 치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구고신이 항상 얘기하듯 남일이다. 심지어 푸르미의 노동자들도 자신에게 해고 통지 같은 부당한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노동조합에 가입하려 들지 않는다. 결국 내 앞에 떨어진 일 앞에서야 그것이 내 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수인은 그런 점에서 보면 독특한 캐릭터다. 오지랖이 넓다기보다는 무언가 부당한 일을 하는 자신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그런 인물. <송곳>이라는 제목에 딱 어울리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송곳>이 지목하고 있는 건 결국 현실에서 싸워야 하는 노동자들의 각성을 위한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직접 관련은 없지만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 말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잠재적 송곳들을 일깨우는 이야기다. 이수인이라는 중간관리자의 시선을 통해.



거리 두기라는 ‘마왕’의 낯선 드라마 공식

데이빗 핀처 감독의 명작, ‘세븐’을 보면 연쇄살인범을 좇는 형사 밀스가 자신의 아내가 살해당한 걸 알게되고 ‘분노’를 참지 못해 연쇄살인범을 죽이는 마지막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이 의미심장한 것은 이 순간 형사는 살인자가 되고 연쇄살인범은 피해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범법자와 법을 집행하는 자 사이는 이렇듯 백지 한 장 차이로 구분된다.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바로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퍼즐을 푸는 듯한 드라마의 새로운 맛을 보여주는 ‘마왕’이 던지는 질문도 다르지 않다. 자신은 나쁜 놈 잡는 형사이지 나쁜 놈이 아니라고 생각해온 강오수(엄태웅) 형사가 맞닥뜨린 현실은 끔직하다. 그것은 첫 번째 경고문 그대로다. ‘진실은 친구들을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 사건을 좇던 그가 사건의 실마리를 통해 알게되는 것은 범인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이 과거 저질렀던 끔찍한 사건의 기억. 강오수 형사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저지른 일의 진실이 주는 고통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보통의 형사물이나 스릴러를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이 ‘자신이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는’ 이야기가 낯설게만 느껴질 것이다. 범인을 좇던 형사가 결국 그 범인은 자신이었다는 이야기는 단순한 구조로 드라마화시키기에 어려운 소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데 있어 이만큼 강력한 소재는 없을 것이다. 강오수와 오승하(주지훈)는 상황의 양 끝단에 서서 정반대의 길을 향해 달려간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형사는 피의자가 되고, 범인은 피해자였다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마왕’이란 드라마는 시청자들에게 끊임없이 거리 두기를 강요한다. 그것은 시청자가 특정 캐릭터에 동화되어 흘러가는 것을 막고, 전체 피스를 손에 쥔 채 하나하나 퍼즐을 맞춰가듯이 사건 전체를 생각하며 보게 만들기 위함이다. 기존 감정이입의 법칙에 익숙한 시청자들이라면 너무 어렵고 힘겹게 느껴질 법하다. 하지만 이것이 ‘마왕’이란 드라마를 보는 진짜 재미이다. 지금까지 가볍고 쉬운 게임에 질력이 났던 시청자라면 이 드라마가 선사하는 복잡한 게임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화면 상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늘 불분명하게 처리된다. 그것은 때론 마치 훔쳐보듯 멀리 떨어져서 보여주는 카메라 때문이기도 하며, 때론 빛과 어둠이 명백한 조명 탓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때론 사건 전개에 있어서 바로 이어져야 이해가 쉬울 신과 신 사이를 일부러 띄어놓는 장치 때문이기도 하며, 때론 거친 듯 흔들리는 카메라 워킹 탓이기도 하다.

이런 장치들을 통해 화면에 구성된 캐릭터들은 전체로 보여지지 않고 주변 사물들에 걸쳐져 가려지거나 갇혀진다. 마치 캐릭터들은 그 갇혀진 화면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역시 익숙하지 않은 화면이다.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는 조각 위에 그려진 작은 흔적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마치 카메라는 화면을 통해 보여주는 것 같다. 분할되거나 가려진 공간 속에 놓여진 캐릭터의 일거수 일투족을 우리는 퍼즐 조각을 바라보듯 집중해서 바라본다. 그 안에 무언가 있기 때문이다.

‘마왕’이란 드라마는 지금껏 등장했던 여타의 드라마들과 달리, TV 속의 드라마와 TV를 보는 시청자 사이의 간극을 넓혀놓았다. 이것은 분명 새로운 재미와 새로운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이다. 빠져들고 동화되어 보는 드라마에서 탈피해, 철저히 이화되고 객관화시켜 봐야 보이는 드라마를 만들었다. 다분히 매니아 드라마가 될 수밖에 없는 시도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늘 같은 공식에 같은 인물들이 나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드라마들만 봐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늘 같은 밥상에 같은 반찬을 맛봐야 했던 시청자들이라면 이 낯선 반찬에서 왠지 모를 대접받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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