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콘텐츠에 투영된 K시민의 비판의식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그리고 탄핵 정국까지, 거꾸로 갈 것 같던 시간을 다시 현재로 되돌린 건 다름 아닌 시민들이었다.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그 과정들을 보다보면, 새삼 K콘텐츠의 진면목이 바로 그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비판의식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서울의 봄

비상계엄 사태를 ‘현실판 디스토피아’라 보도한 외신

지난 3일 갑작스런 비상계엄 선포와 그 해제 과정에 대해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K팝과 독재자들:민주주의에 가해진 충격이 한국의 양면을 드러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그 기사는 한국이 최근 한류 열풍을 통해 ‘문화적 거물’이 됐지만 갑자기 터진 계엄사태로 ‘현실판 디스토피아’가 생겨났다고 했다. 계엄 선포와 해제 과정에서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어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가고, 이를 막으려는 계엄군들이 군용 헬기를 타고 내려와 창을 깨고 국회로 난입하는 장면을 꼬집은 것이다. 실제로 그 장면은 현실이라기보다는 디스토피아를 그린 콘텐츠의 한 부분처럼 보였던 게 사실이다. 새벽까지 잠 못 이루며 실시간으로 보도되던 그 과정을 바라본 시민들은 80년 서울 한 복판에 등장했던 탱크를 떠올렸지만, 그것이 2024년 현재에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에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이 정도였으니, 이를 접한 외신들의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국가적 위상과 이미지가 훼손됐다는 비판이 나왔고, 평화로운 이미지가 한 순간에 무너졌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게다가 그 시점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타는 순간이었고 이제 ‘오징어게임2’의 공개를 앞두고 전 세계의 관심이 다시 한국에 쏠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비상계엄 선포는 문화적 자긍심이 한껏 고조되는 순간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사태는 단 몇 시간 만에 종료되었다. 국회가 비상계엄 선포 해제를 선언했고, 윤석열 대통령도 이를 공식화했다. 그리고 이어진 후폭풍은 시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다. 저마다 응원봉을 하나씩 들고 국회 앞에 모여 대통령 탄핵안 통과를 독려하는 집회를 열었다. 국민의 힘 의원들이 투표에 참여조차 하지 않아 통과되지 못했던 탄핵안은 또다시 국회에 상정됐고 두 번째 투표를 통해 통과됐다. 그 광경 또한 드라마틱했다. ‘현실판 디스토피아’라고 외신이 보도했지만 그건 그저 절망적인 분위기만 가득한 드라마는 아니었다. 희망의 불씨 같은 게 담긴 드라마였는데, 그 주인공은 이름 없는 시민들이었다.

 

다시 보이는 K콘텐츠의 진면목, 비판의식

외신들은 K콘텐츠에 대한 전 세계적인 열광에 국가적 자긍심이 높은 한국이 이번 사태를 통해 심각한 평판의 타격을 입었다고 전하기도 했지만, 잘 들여다 보면 이번 사태는 K콘텐츠의 힘이 어디서 비롯됐는가를 정확히 알려준 것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해외에서 주목받은 K콘텐츠들은 대부분 한국사회가 가진 다양한 문제들을 꼬집거나 비판하는 작품들이었다. 외신이 ‘디스토피아’라는 표현을 썼던 것처럼 K콘텐츠에 투영된 한국 사회는 어두운 터널 안에 들어 있었다. 

 

곧 시즌2가 나올 ‘오징어게임’이 그려낸 디스토피아는 치열한 경쟁이 내면화된 계급사회였다. 약자들이 서로 경쟁하게 만들어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는 그 치열함과 처절함을 동력으로 굴러가는 사회가 그것이었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상을 받은 ‘기생충’은 어떤가. 지상과 반지하 그리고 지하라는 공간으로 구획된 한국사회의 양극화를 이 작품은 블랙코미디로 그려냈다. 한국을 이른바 K좀비의 종주국으로 만든 무수한 한국형 좀비물들도 대부분 한국사회가 가진 모순되고 부조리한 시스템들을 비판한 것들이었다. ‘킹덤’이 조선사회를 빗대 권력에 굶주려 좀비가 된 지배층과 배고픔에 굶주려 좀비가 된 서민들을 비교했다면, ‘지금 우리 학교는’은 한국의 입시경쟁이 만들어내는 몰개성화되어 엇나가기도 하는 아이들의 비극적인 현실을 담았다. ‘부산행’은 KTX에 창궐한 좀비들과의 사투를 통해서 압축성장한 한국사회가 마주한 위기들을 디스토피아로 그려내지 않았던가.  

 

즉 K콘텐츠가 가진 진짜 힘은 바로 이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마주한 문제들은 우리만이 아닌 자본화된 현대사회가 맞닥뜨린 문제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전 세계적인 공감이 생겨났다. K콘텐츠가 글로벌한 각광을 받게 된 이유였다. 이렇게 된 데는 한국사회가 전쟁 후 짧은 기간 안에 압축성장해오며 겪은 일들이 사실상 자본화 단계에서 발생하는 많은 일들을 포함하고 있어서였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빠른 성장을 했지만, 그만큼 다양한 문제들을 동시에 품고 있었고 이에 대한 비판의식들이 K콘텐츠의 자양분이 됐던 거였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이번 비상계엄 사태가 터졌을 때 시민들이 그 비현실적인 장면을 보며 국회로 달려갈 수 있었던 데는 K콘텐츠가 그려내곤 했던 디스토피아의 양상들을 통해 이 사태가 야기할 문제들을 즉각적으로 실감한 부분도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서울의 봄’이 주목받게 된 건

작년 방영되어 1300만 관객을 동원하는 신드롬을 불러 일으킨 영화 ‘서울의 봄’은 이번 계엄 사태를 통해 또다시 주목받았다. 79년 12월12일에 버러진 군사 반란을 소재로 긴박하게 돌아간 7시간의 기록을 담은 이 영화는 시민들에게 중요한 교육적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당시 상황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젊은 세대들도 이 영화를 통해 당대의 계엄 사태를 눈앞에서 생생히 경험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비상계엄 사태가 터졌을 때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을 ‘2024년판 서울의 봄’이라고 칭하며 재개봉을 추진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기도 했다. 또 ‘서울의 봄’을 패러디한 ‘서울의 밤’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했다. 한편의 작품이 그 시대의 어둠을 치열하게 담아냄으로써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서울의 봄’은 이번 사태를 통해 보여줬다. 

 

넷플릭스에서 지난 10월 공개됐던 김상만 감독의 영화 ‘전,란’도 이번 비상계엄 사태를 통해 재조명됐다. 임진왜란을 시대적 배경으로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박정민)와 그의 몸종 천영(강동원)이 각각 선조(차승원)의 최측근 무관과 의병이 되어 서로 칼을 겨누게 되는 상황을 그린 이 작품에서는 왕의 무능이 어떻게 민란으로까지 이어지는가를 그려냈다. 전쟁으로 피폐된 상황에서도 궁궐을 짓는데만 혈안인 왕의 실정으로 결국 봉기하는 민초들의 모습은 현재의 탄핵 정국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번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그리고 이어진 탄핵정국이라는 일련의 사태들이 보여준 건 몇몇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위기상황 속에서도 빛나는 시민의식이 한국사회가 가진 희망이라는 점이다. 여의도 집회 현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이 저마다 색색의 응원봉을 들고 한 마음이 되어 한 목소리를 내는 광경은 바로 그걸 상징하는 장면들이었다. 그리고 이 드라마틱한 장면들 속에서 떠오르는 무수한 K콘텐츠들의 잔상들은 이 작품들이 본래 시민들이 가진 건정한 비판의식들을 담고 있었다는 걸 새삼 절감하게 만든다. K콘텐츠는 바로 이 높은 시민의식들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과 시대적 갈증들을 담아내면서 대중들의 호응을 얻었던 거였다. 

 

혹자들은 이번 비상계엄 사태가 언젠가는 K콘텐츠의 소재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이다. 비현실적으로 여겨질만큼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니었던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재연과 재구성을 통한 비판과 문제의식의 공유는 K콘텐츠에도 또 한국사회에도 희망을 갖게 하는 토양이 될 것으로 보인다. (글:시사저널, 사진:영화'서울의 봄')

“비가 와서 그런지 미세먼지가 없네요.”- 봉준호 ‘기생충’

기생충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차지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동익(이선균)이 사는 번듯한 2층집에 하나둘 기생하며 살게 된 기택(송강호)의 가족 이야기를 그렸다. 신분을 속이고 기택은 운전기사로, 기우(최우식)는 과외선생으로, 기정(박소담)은 미술치료 교사로, 그의 아내 충숙(장혜진)은 가정부로 들어온다. 동익이 누리고 사는 집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눈에 보이지 않게 그림자 속에 숨어 살아가는 기택 가족의 세상이 된다. 하지만 캠핑을 떠나 빈집에 남은 기택의 가족이 마치 제 집처럼 술판을 벌이고 놀 던 날 그 착각은 깨진다. 마침 폭우가 쏟아지면서 동익의 가족이 돌아오자 바퀴벌레들처럼 숨게 된 것. 그리고 그 폭우는 낮은 지대에 있는 기택의 반지하 집을 덮쳐 버린다. 

 

양극화를 메시지로 담은 작품들은 많지만 ‘기생충’이 압권이었던 건 그걸 공간을 통해 직관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이다. 한국에만 있는 반지하 같은 주거공간을 가져와 지상과 반지하 그리고 지하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갈등을 블랙코미디로 담아낸 것이다. 그 공간의 차이를 통해 양극화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장면은 바로 그 갑작스런 폭우가 내려 기택의 집이 물에 잠겨버린 상황에도 그런 일이 어디 있었냐는 듯 동익의 아내 연교(조여정)가 하는 말이다. “비가 와서 그런지 미세먼지가 없네요.” 

 

이제 곧 여름 장마철이 시작된다. 재작년 관악구 반지하에 폭우로 인한 침수로 발달장애인 일가족이 사망하는 참변이 있었고, 지난해에도 14명의 생명을 앗아간 오송 지하차도 참사가 벌어졌다. 매해 비극이 되풀이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대비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내가 안전하다고 모두가 안전할까. 약자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안타까운 비극은 계속 되지 않을까. (글:동아일보, 사진:영화'기생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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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식이 삼촌’으로 첫 드라마 데뷔한 송강호

삼식이 삼촌

“사랑과 존경의 의미로 다들 그렇게 불러요. 삼식이, 삼식이 형님, 삼식이 삼촌. 전 너무 좋아요. 제 별명이요.” 디즈니+ 오리지널 드라마 ‘삼식이 삼촌’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삼식이 삼촌 박두칠(송강호)이 하는 그 대사로 시작한다. 이 첫 대사는 16부작 ‘삼식이 삼촌’이라는 작품이 사실상 이 인물의 서사라는 걸 예감케 한다. 삼식이 삼촌을 연기하는 송강호는 특유의 힘을 쪽 빼서 과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편안한 목소리로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다. 시청자들은 궁금해진다. 도대체 왜 ‘삼식이 삼촌’이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1950년대말부터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 작품의 첫 회가 끝나갈 즈음, 이 대사의 의미는 삼식이 삼촌과 김산(변요한)이라는 인물이 던지는 ‘피자 이야기’로 분명해진다. “미국 사람들은 매일 그런 빵을 먹어. 심지어 먹다가 남겨. 우리도 공단만 완성이 되면 그런 빵을 먹다가 남기고 버릴 거야.” 삼식이 삼촌은 먹고 사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다. 전후 피폐된 경제로 먹고 사는 일조차 힘들어진 현실에 제 권력을 잡겠다는 정치인들과 격동기에 외자를 유치해 공단을 건립함으로써 돈 벌 기회를 잡으려는 기업인들 속에서도 삼식이 삼촌이 주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이유는 바로 이 먹고 사는 문제로 사람들을 설득하기 때문이다. 마침 국가 재건을 위해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믿는 김산이 등장하는데, 그 역시 피자 이야기를 한다. “피자 아세요? 드셔 보신 분? 의원님, 드셔 보셨습니까? 제가 유학시절에 피자집 다락방에서 살았습니다. 하루 한 끼 제대로 못 먹던 유학시절에 매일 피자 굽는 냄새에 밤잠을 설쳤습니다. 여러분 총칼이 아니라 경제입니다. 누구도 끼니 걱정하지 않는 나라. 하루 세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나라! 제가 유학시절에 가장 부러웠던 건 전투기도 항공모함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피자였습니다. 전 국민이 굶으면서 전쟁에 이기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쯤되면 알게 된다. 왜 ‘삼식이 삼촌’인지. 하루 세끼를 배불리 먹는 일이 가장 중요했던 50년대 말부터 60년대까지의 격동기를 이만큼 잘 설명하는 캐릭터가 없으니. 

 

삼식이 삼촌이라는 캐릭터는 그래서 그 시대의 한국인을 표상한다. 어찌 보면 먹고 살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기도 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하는 살벌한 인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생계의 문제라 고개가 끄덕여지기고 또 ‘삼촌’ 같은 든든한 느낌마저 주는 인물. 그 먹고사니즘을 해결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삶이 개발시대를 거쳐 지금의 풍요를 만들어냈지만, 그 과정에서의 부정이 만들어낸 후유증도 적지 않게 남긴 인물로 그 시대의 공기를 이 인물은 고스란히 그려낸다. 배우로서 어떤 시대의 한국인을 그려낸다는 건, 어렵고도 부담되는 일이지만 송강호는 이를 마치 피자 하나 꺼내 먹듯이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소화해낸다. 

 

박찬욱 감독은 일찍이 송강호의 이 자연스럽고 편안한 연기를 그의 라이벌로 꼽히는 최민식과 비교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최민식이 고전주의자라면 송강호는 자연주의자”라고. 그건 그가 주로 맡았던 배역들이 대부분 주역보다는 주역의 뒤편으로 한 발 물러서 있는 인물들이었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물론 중심에 서서 작품 전체를 앞으로 끌고 나가는 역할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가 돋보이는 건 다른 인물들과 함께 앙상블을 이루는 연기이고, 특히 상대 역할보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을 때다.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로 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후 이를 눈여겨 본 송능한 감독의 ‘넘버3’에서 지금도 대중들에게 회자되는 인물은 바로 송강호다.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며 그가 하는 일장연설 장면은 무수한 패러디가 될 정도로 화제가 됐다. 주인공보다 더 주목받는 장면을 인상적인 연기로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는 이병헌만큼 송강호가 빛났고,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서는 김상경만큼 송강호의 존재감이 두드러졌다. 이것은 박해일, 배두나, 변희봉, 고아성이 함께 한 ‘괴물’에서도, 이병헌, 정우성과 함께 했던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딘가 한 발 물러서 있다. 그래서 작품이 그리고 있는 세계를 좀더 관망하면서 거기에 맞는 가장 자연스러운 연기들을 꺼내놓는다. 한 발 물러서 있어 오히려 도드라지는 역설이 가능해지는 이유다. 

 

송강호의 이런 면모가 가장 매력적으로 드러난 작품은 전도연에게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겼던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서였다. 남편과 사별후 어린 아이와 함께 밀양에 오게 되지만 아이마저 유괴로 잃은 후 모든 게 무너져 버린 신애(전도연) 옆에서 그를 지켜보며 주변을 맴도는 종찬 역할을 연기했다. 사실상 ‘밀양(密陽)’ 즉 ‘Secret sunshine’ 같은 존재로, 어둠 속에 갇힌 신애에게 작은 빛을 주는 그런 역할을 역시 ‘한 발 물러서 있는’ 모습으로 송강호는 연기함으로써 전세계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특히 이런 자연스러운 면들은 그가 표현한 인물들이 너무나 한국적인 초상들을 그려내게 한 이유가 됐다. ‘변호인’의 국선변호인, ‘밀정’의 독립운동가, ‘택시운전사’의 5.18 민주화운동의 증언자, ‘기생충’의 반지하 서민 등등 그는 다양한 시대적 인물들을 연기했지만 그 인물들에는 모두 송강호 특유의 한국적인 정감 같은 것들이 묻어난다. 이것은 우리가 그 시대를 떠올릴 때 연상될만한 당대 인물들의 초상 같은 느낌이 있다. 

 

‘삼식이 삼촌’ 역시 마찬가지다.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압축성장을 해온 그 시기를 막연히 어둠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게, ‘삼식이 삼촌’은 당대의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사람들의 욕망을 건드렸던가를 한국적인 느와르로 보여준다. 물론 그 욕망이 비뚤어진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만만찮은 후유증으로 남아 그가 연기했던 ‘택시운전사’의 비극과 ‘기생충’의 양극화로 훗날 돌아오게 되지만, 적어도 그의 설득력 있는 연기는 이 인물을 미워할 수만은 없게 만든다. 한 발 물러서 보면 다르게 보인다던가. 그것이 지나간 시대이건, 한 사람의 아픈 삶이건, 혹은 치열한 연기의 세계이건, 한 발 물러서 보면 보이는 게 다르고 그래서 그걸 더 잘 소화할 수 있다는 걸 송강호만큼 잘 보여주는 배우도 없을 듯 싶다. (글:국방일보, 사진:디즈니+)

‘미나리’에 담긴 시대정신, 윤여정이 해석해낸 ‘미나리’

 

리 아이작 정 감독의 <미나리>에 출연한 윤여정이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국내 최초이자, 자국어로 연기한 아시아권 배우 사상 최초의 기록이다. 윤여정은 어떻게 <미나리>를 통해 이런 성과들을 만들 수 있었을까.

영화 '미나리'

아카데미에서도 빛났던 윤여정

결국 윤여정이라는 이름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서 불렸다. 공교롭게도 시상자는 <미나리>의 제작자이기도 한 브래드 피트였다. 전 연도에 그 상을 수상한 다른 성의 배우가 시상하는 아카데미의 전통에 따라, 작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로 남우조연상을 받았던 브래드 피트가 시상자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윤여정은 시상 소감을 하기에 앞서 “드디어 우리가 만났다”며 “그런데 우리 영화 찍을 땐 어디 있었냐?”는 브래드 피트에게 던지는 유쾌한 농담으로 좌중을 빵 터트렸다. 그리고 윤여정은 자신의 이름을 갖고 또 한 번 재치 있는 농담을 던졌다. “저는 윤여정인데 유럽 분들이 제 이름을 ‘여여’라고 하거나 ‘정’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모두 용서하겠다.” 지난 번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특히 고상한 척하는(Snobbish) 영국인들이 나를 알아봐주고 인정해줘서 감사하다”는 솔직함과 위트가 섞인 농담으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윤여정다운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이 상을 받은 것이 운이 좋아서였다며 다른 후보자들에 대한 예우도 빼놓지 않았다. “나는 사실 경쟁을 믿지 않는다. 글렌 클로즈 같은 대배우와 어떻게 경쟁을 하겠나.” 대신 다섯 후보들이 다 각자의 영화에서 최고였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또 자신의 두 아들이 “일하러 나가라”고 해서 그 덕에 열심히 일했더니 이 상을 받게 됐다는 사적이면서도 공감 가는 이야기와, 자신의 첫 감독이었던 고 김기영 감독에 대한 존경의 마음도 전했다. 

 

윤여정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은 외신을 타고 전 세계로 타전됐다. 로이터 통신은 윤여정이 한국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데 이어 수상까지 이뤄냈다며 그가 수십 년 간 한국 영화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주로 재치 있으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큰 캐릭터를 연기했다고 밝혔다. AP통신은 작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배우 수상에는 불발됐지만 올해에는 윤여정이 상을 받았다고 전했고, AFP통신은 윤여정이 수상소감에서 글렌 클로즈에 경의를 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윤여정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화제가 된 건, 특유의 유머감각과 더불어 할 말은 하는 ‘직설적인 화법’에 상대방에 대한 예우까지 갖추는 모습 때문이었다. 윤여정은 아시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혐오범죄가 늘고 있어 미국에 오는 걸 아들이 걱정한다는 이야기로 이 심각성을 전하기도 했고, 시상식 후 치러진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도 ‘무지개’를 언급하며 소신을 밝혔다. “심지어 무지개도 7가지 색깔이 있다. (무지개처럼) 여러 색깔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고 백인과 흑인, 황인종으로 나누거나 게이와 아닌 사람을 구분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따뜻하고 같은 마음을 가진 평등한 사람이다.”

 

윤여정을 통해 다시 보이는 <미나리>의 가치

<미나리>는 리 아이작 정 감독의 작품이다. 정이삭이라고도 불리지만 한인 2세인 그는 미국인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제작자가 브래드 피트다. 미국영화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미국영화가 힘을 발휘한 부분은 ‘미국적인 문화’가 담겨서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적인 문화’가 전해져서다. 그건 다름 아닌 순자(윤여정)라는 한국에서 딸 가족을 위해 고춧가루며 멸치 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이역만리를 찾아온 할머니를 통해서다. 

 

<미나리>는 제이콥(스티븐 연)이 아칸소로 이주해 농장을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특별히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있지는 않다. 다만 황무지나 다름없는 그 곳을 일궈 농장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이 가족이 맞닥뜨리는 위기의 순간을 잔잔한 카메라로 포착한 영화다. 농장에 들어가는 돈을 벌기 위해 제이콥과 모니카(한예리)는 병아리감별사로 공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고, 아이들을 돌봐주기 위해 한국에서 온 순자는 몸이 좋지 않은 데이빗(앨런 킴)과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그런데 어린 데이빗이 보기에 이 할머니는 여느 할머니 같지 않다. 쿠키를 굽기보다는 화투를 치고, 욕도 잘 하고, 남자팬티를 입고 잔다. 그런데 진짜 다른 점은 힘겨운 상황들 속에서도 낙천적인 모습이다. 가난해 트레일러에서 살고 있는 꼴을 보여주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딸에게 “바퀴달린 집에서 사니 재밌다”고 말해주는 그런 사람. 

 

어떻게든 땅을 일구고 물을 대 농장을 만들어내 큰돈을 벌려는 제이콥과도 순자는 사뭇 다르다. 그는 데이빗을 데리고 산책을 하다 어느 물가에 한국에서 가져온 미나리씨를 뿌린다. 그러면서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다 같이 먹을 수 있으며 건강하게 해준다고 말한다. 물을 대서라도 농장을 일궈 큰돈을 벌려는 제이콥의 다분히 미국식 자본주의적 사고방식과, 그저 물가에 씨를 뿌려두고 누구나 뜯어 먹을 수 있게 미나리가 자라게 해주는 순자의 자연주의적이고 생태주의적인 사고방식은 그렇게 극명하게 대비된다. 

 

즉 <미나리>는 순자가 조연이지만, 사실상 순자의 메시지가 가장 중요한 영화다. 제이콥으로 대변되는 한국식의 가부장적인 모습과 미국식의 자본주의적인 모습이 결합된 삶의 방식에, 순자라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한 인물이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순자를 자기만의 색깔로 해석하고 표현해낸 윤여정이야말로 지금의 <미나리>의 성과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전형성을 거부한 배우, 윤여정의 미나리 같은 삶

윤여정은 어떻게 순자를 그토록 생명력 강하고, 유머러스하며, 한국적인 정이 가득하면서도, 트렌디하고 쿨한 할머니(K할머니라고도 불리는)로 그려낼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그가 작품들을 통해 그려온 배우로서의 여정에 담겨 있다. 그는 이번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소감에도 거론했듯, 김기영 감독의 <화녀>를 통해 데뷔했다. 흔히들 여배우라고 하면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스타로서 시작하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그는 ‘악녀’로 데뷔한 셈이다. 결혼 후 미국 생활을 하다 돌아와 처음으로 한 작품도 박철수 감독의 <어미>로, 이 작품에서 윤여정은 딸을 자살하게 만든 인신매매범들을 처단하는 엄마 역할을 연기했다.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에서는 욕망에 충실한 어르신 역할을 연기했고,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에서는 성매매를 하는 이른바 ‘박카스 할머니’라는 파격적인 연기에 도전한 바 있다. 물론 윤여정은 더 넓은 스펙트럼의 다양한 연기를 해왔던 게 사실이지만, 늘 틀에 박힌 전형성을 거부하는 역할을 연기했던 배우였다. ‘K할머니’라 불리는 <미나리>의 순자가 전형성을 벗어난 우리 시대의 어르신상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 역시 윤여정의 이런 특별한 연기여정의 자연스러운 귀결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제작 현장에서 윤여정은 ‘배우 같지 않은 배우’로 통한다. 최고 선배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성실하게 임하며, 특유의 유머로 그 힘겨운 작업을 즐겁게 만들고, 틀에 박힌 전형성에는 질문을 던지기도 하는 배우. 그의 배우로서의 삶은 그래서 미나리를 닮았다. 자신도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지만 주변도 함께 살리는 그런 존재. 그 삶에 대한 자세들이 <미나리>라는 작품 속 순자를 통해 그려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건 우리 시대가 처한 많은 위기들을 넘어서기 위한 슬기로운 지혜로 다가오는 면이 있다. (글:매일신문, 사진:영화'미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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