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루어질지니’, 사탄 김우빈과 사이코패스 수지가 그려낸 천년의 사랑

다 이루어질지니

이건 마치 김은숙 작가가 모래로 쌓아 만들어낸 거대한 세계 같다. 태초와 현재, 고려와 아라비아, 한국과 두바이, 현실과 상상... 같은 무수한 씨실과 날실을 엮어 짠 이야기의 직물 같다. 그것이 모래 같은 상상의 이야기를 재료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기처럼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야기는 구체적인 물질이 아니어도 보는 이의 가슴을 파고든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샤흐라자드가 그 힘을 보여줬듯이.

 

아무 것도 없이 바람에 서걱거리는 모래만 가득한 사막에 모래바람을 타고 나타나는 지니의 이야기가 탄생한 것도 그래서일 게다. 김은숙 작가의 넷플릭스 드라마 <다 이루어질지>는 바로 그 지니의 이야기를 가져와 시공을 뛰어넘는 대서사시로 재해석했다. 마술램프에서 나타나 무엇이든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가 주인공이니 일단 일상과 맞닿아 있는 평범한 이야기일 수는 없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시공을 초월하며 마법을 부려 누군가를 부자로 만들어주기도 하고 때론 젊어지게 해주기도 하는 존재가 주인공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중요한 건 이 상상의 세계로 빚어진 이야기가 우리의 삶에 어떤 비의를 전할 것인가다. 그건 알라딘의 마술램프 이야기로 익숙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에 의해 역설적으로 파멸하는 인간들을 통해 전하는 욕망의 허망함에 대한 것이다. 마술램프의 정령 이블리스(김우빈)는 그래서 소원을 이뤄지게 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그 세 가지 소원을 통해 인간을 시험대에 올리는 존재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 욕망에 의해 파멸에 이른다. 이블리스가 신이 창조해낸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하찮게 여기는 이유다. 

 

하지만 고려시대 아라비아까지 노예로 끌려왔다가 이블리스를 만나게 된 소녀는 오히려 그를 시험대에 올린다. 세 가지 소원을 죽어가면서도 모두 타인을 위해 빌었던 것. 이블리스는 이제 환생으로 다시 태어난 소녀를 통해 자신이 하찮게 여겼던 인간과 또다시 내기를 벌여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그 소녀는 바로 기가영(수지)이다. 사이코패스로 개구리의 배를 가르고 또 가르면서도 아무런 감정이 없던 소녀. 그래서 엄마도 그녀를 일찌감치 버렸지만, 괴물이 될 수도 있었던 그녀를 사람으로 만든 건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이다.

 

“니가 누구를 안아 주모 내도 니를 안아줄 끼고 니가 누구를 칼로 끄으모 내도 니를 칼로 끄을 끼다. 니가 누구를 직이모 내도 니를 죽일 끼다. 이게 내랑 니 규칙이다, 알았나?” 할머니가 내건 규칙과 더불어 가영은 닭 잡는 낫으로 글을 가르쳐주고 개를 향하던 끌로 나무를 파 장승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날 선 칼로 요리를 하게 해준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감정 없는 돌멩이 같은 가영을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보석처럼 키워줬던 것. 

 

인간은 하찮은 존재라는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려는 지니 앞에 기가영은 의외의 인간이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이기 때문에 욕망 자체가 별로 없다. 시험에 빠뜨리려는 이블리스와 시험 자체가 무소용인 기가영의 대결은 그래서 팽팽해진다. “우리 할머니가 인간은 선한 존재랬어. 세상에서 나쁜 건 나 하나야.” 그렇게 말하며 네가 틀렸다는 기가영 앞에서 이블리스는 수천년 간 자신이 봐왔던 인간의 파멸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엉뚱하게도 기가영은 첫 번째 소원을 그 증명의 내기에 쓴다. 길에서 만나는 5명의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고 그들이 과연 파멸하는지 아닌지를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사이코패스인 기가영이 순수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증명을 해낼 대표자로 나선다는 설정은 흥미로운 면이 있다. 인간적 관점에서는 감정 없는 사이코패스가 연쇄살인마로 주로 그려지지만, 영겁의 세월 동안 삶과 죽음을 무수히 목격하고 경험한(영생 혹은 환생을 통해) 그 전지적 신의 관점에서 보면 사이코패스는 감정이 없이 욕망도 없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건 마치 이블리스의 시선과도 비슷하다. 죽이고 살리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는 이블리스나 기가영이나 그리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 이블리스와 사이코패스 기가영의 대결은 흥미진진해진다. 

 

그 대결은 일종의 수수께끼다. 과연 그런 순수한 인간이 존재하는가를 두고 벌이는 정령과 인간의 ‘세 가지 소원’이라는 룰을 갖고 벌이는 도박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지적 신의 관점으로 흘러가는 서사는 그래서 보통의 드라마들과는 다른 진입 통로를 갖고 있다. 일상적 서사 안에서 극적 사건이 벌어지며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수천 년의 시간을 두고 벌어지는 일이고, 그것도 고려와 아라비아, 한국과 두바이, 천국과 지옥 등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반 판타지 서사의 진입 통로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이블리스와 기가영이 사막 한 가운데서 만나 티격태격하며 벌이는 초반의 이야기는 일상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때론 황당하고 때론 낯설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 진입 장벽을 넘어서면 이제 이야기의 무한한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정령과 인간의 대결과 사랑 그리고 그 안에 담겨진 운명과 슬픔, 그리움 같은 것들을 통해 작품이 건네는 기막힌 위로와 감동 그리고 깨달음 같은 것을 경험할 수 있다. 

 

13부작으로 넷플릭스 드라마로서는 꽤 긴 호흡처럼 초반에는 여겨졌지만, 뒤로 가면 갈수록 13부작도 부족할 지경의 폭발적인 상상의 세계들이 계속 펼쳐진다. 그러면서 이 모래폭풍처럼 다가와 인간들을 시험에 빠뜨리다 자신도 시험에 빠져버리는 이블리스라는 존재를 통해 인간과 삶의 비의를 슬쩍 들여다보게 된다. 인간은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 13부를 다 들여다보고 나면 이런 질문이 가슴 한 켠에 남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김은숙 작가는 특유의 은유적 표현들을 통해 삶의 아이러니를 작품 속에 담았다. 사탄이라 불리지만 더할 나위 없이 선해 보이는 이블리스나, 사이코패스지만 그 차가움으로 누구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기가영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렇고, 영원한 삶을 욕망하는 인간이지만 정반대로 불멸자가 되어 고통받는 반인반령의 존재도 등장한다. 특히 모든 걸 다 이루어지게 해주는 전지전능해보였던 이블리스가 정작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 앞에 무력해지는 상황이나, 금은보화를 원하는 욕망 속에서 파멸하는 한 도시의 이야기는 바로 그런 삶의 아이러니를 기막히게 표현해낸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손아귀에 쥐어진 것처럼 여겨지다가도 어느 순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로 형상화된 지니의 모습은 그 자체가 이러한 욕망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진흙으로 빚어진 인간은 그래서 그 모래를 끝없이 갈망하며 손아귀에 쥐려 하지만, 결국은 죽어 그 모래 같은 한 줌의 재로 사라지는 운명을 뒤늦게야 깨닫지 않던가. 결국 인간의 증명은 그런 가진 것에 의한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가진 것을 잃었을 때 갖게 되는 슬픔과 눈물 같은 것일 수 있다고 김은숙 작가는 이 드라마를 통해 말하고 있다. 모래알처럼 그저 억겁의 세월 동안 부서지고 스러질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누군가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슬퍼하는 감정들이 더해져 반짝반짝 빛나는 그런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사진:넷플릭스)

‘콩콩팥팥’, 나영석 사단의 저력이 느껴지는 힘 뺀 예능의 맛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tvN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이하 콩콩팥팥)>에서 4개월간 농사를 지으며 보냈던 인제에서의 마지막 밤. 그들은 불멍을 하기로 한다. 장작에 불피우는 것조차 초보인 이들은 불이 잘 붙지 않아 계속 토치로 다시 불을 붙이는 걸 반복한다. 어디서 들었던 ‘불멍’의 감성이 생각과는 다르다는 걸 느끼면서 이광수의 여지없는 투덜댐이 시작된다. “이게 만약 불멍이라면 다신 안 하고 싶어.” 불은 잘 안 붙고 연기에 눈은 맵고 넣어 놓은 고구마는 아직 익지 않았다. 

 

30분만에 깨진 캠프파이어의 환상. 하지만 그렇게 조금 지나고 나니 제법 불이 붙고 불멍의 분위기가 피어난다. 출연자들이 반색하며 이 프로그램에서 아마도 김우빈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일 듯한 “좋다”란 말이 튀어나온다. 익은 고구마를 꺼내 돌려먹고, 불멍 앞에서 빠질 수 없는 컵라면을 둘러 앉아 먹는다. 투덜대던 이광수는 금세 불멍의 즐거움에 빠져든다. 서로 좋아하는 걸 묻고 말하는데 김우빈이 이 프로그램을 하며 좋았던 소회를 털어놓는다.

 

“저는 이거 하면서 제일 좋았던 건 뭐냐 하면 흙 밟고, 손으로 만지고, 비 맞고, 새입 난 거 손으로 만지고, 냄새 맡고... 그런 게 너무 좋았어요.” 그 말에 더해 김기방이 한 마디를 곁들인다. “되게 원초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거.” 김기방, 이광수, 김우빈 그리고 도경수. 벌써 만난 지 10년이 된 죽마고우들의 10년 전 팔팔 했던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그러더니 도경수가 불씨가 남은 숯을 입으로 호호 불며 톡톡 터지는 소리를 들려준다. 그런 걸 하나하나 다 돌아가면서 하는 게 웃기다는 제작진의 이야기에 “좋은 건 다 같이 하는 게 좋다”고 입을 모아 출연자들이 말한다. 어찌 보면 불 하나 피워놓은 것일 수 있지만, 그 소소한 불멍 하나로 이토록 사운드가 가득 채워지고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훈훈하게 만들어진다는 게 신기하다. 갑자기 쥐불놀이를 하고 싶다며 집게로 숯을 들고 돌리고, 그걸로 네 사람이 굳이 ‘LOVE’를 그리며 사진에 남기려 애쓰는 모습은 거의 스펙터클이다. 

 

이 마지막밤 불멍의 풍경은 이제 마무리된 <콩콩팥팥>이 가진 독특한 재미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사실 이 프로그램의 제목에 담긴 ‘콩 심은 데 콩나는’ 이야기는 과거 예능에서는 금기로 불리던 소재였다. 이른바 ‘쌀로 밥 짓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너무 뻔한 걸 해서는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방송에 대한 대중들의 감성이 달라졌다. 너무 과잉된 걸 하는 건 오히려 웃기지도 또 재미있지도 않게 됐다. 그건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것이고 인위적인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너무 애써 웃기려는 것도 너무 애써 재밌게 하려는 것도 그래서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워낙 많은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오고, 우리의 일상 또한 영상과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고 있어서인지, 요즘은 ‘멍’ 계열의 예능들이 오히려 주목받는다. 불멍, 물멍 같은.

 

<콩콩팥팥>은 시작부터 그 끝이 보이는 예능이다. 농사라는 소재 자체가 그렇다. 여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수확하는 과정이 담길 수밖에 없다. 초보농사꾼들이라는 사실이 하나하나 겪어내며 부딪치는 좌충우돌의 재미요소를 만들고, 그 와중에 인제의 이 작은 마을에 사는 인심 좋고 정많은 사람들을 알아가고 친해지는 과정이 주는 재미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 과정을 우리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결국 콩 심은 데 콩이 나는 걸 보여주려는 것 아닌가. 

 

하지만 콩 심은 데 진짜 콩이 나고, 그 콩을 수확해 쪄서 먹어보고 또 갈아서 콩국수를 만들어 먹는 과정은 보기만 해도 뿌듯하다. 농사가 쉽지 않은 초보 농부들에게 쑥쑥 자라줘 용기와 보람을 준 깨는 잎으로 고기를 싸먹고, 깨는 털어서 들기름을 만든 후 그걸 양껏 부어 고소한 기름막국수까지 먹게 해준다. 그 고소한 향기가 TV화면을 뚫고 안방까지 전해지는 느낌이다. 

 

떠나온 밭에 남겨두고 왔던 배추며 무로 김장을 담그는 모습은 그래서 이 프로젝트의 대미가 된다. 그냥 사서 하는 김장이 아니라, 하나하나 직접 키워 수확해 하는 김장이니 얼마나 각별할까. 모두가 둘러 앉아 함께 김장을 하며 나누는 대화는 그간 4개월 간의 추억만으로도 포만감이 느껴진다. 

 

어찌 보면 그냥 틀어놓고 크게 집중하지 않은 채 슬쩍슬쩍 봐도 될 정도로 부담없는 ‘멍’ 계열의 프로그램처럼 보이지만, 이를 또 집중해서 보면 더더욱 재밌게 만들어준 건 다름 아닌 이광수를 중심으로 김기방, 김우빈, 도경수, 찐친들의 티키타카였다. 이미 친한 그들의 케미는 그래서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시청자들에게는 새로웠다. 이광수는 예능 출연이 많았지만, 이처럼 자신이 중심에 서서 끌고가는 역할을 맡아 새로운 면모가 돋보였고, 다른 출연자들은 말 그대로 예능 초보자들이었다. 특히 이광수와 티격태격하는 모습과 발군의 요리실력에 귀여움을 독차지 하는 막내였던 도경수는 ‘재발견’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매력을 보여줬다. 

 

처음에는 데면데면했지만 차츰 아버지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따뜻한 정을 보여주신 이웃 동근 아버님이나, ‘홍반장’처럼 우직하게 도움을 주고 재미도 줬던 망치 형님 같은 마을 주민들의 환대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외지인들이 그 곳에 적응할 수 있게 드러내지 않고 도와줬고 그 마음은 고스란히 시청자들에게도 전해졌다. 

 

<콩콩팥팥>의 저력은 나영석 사단이 갖고 있는 균형감각을 다시금 발견하게 만든다. 힘 빼고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예능의 맛을 밑반찬으로 내놓고, 그러면서도 출연자 구성과 그 케미만으로도 빈 틈 없는 재미를 채워넣은 것이 그렇고, 초보가 조금씩 농사를 알아가는 재미를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발견하게 해주는 ‘힘 뺀 연출’이 그렇다. 늘 그래왔듯이 <콩콩팥팥> 역시 한때는 금기로까지 이야기됐던 익숙함을 넘어 ‘뻔할 수 있는’ 소재 속에서도 새로운 재미를 찾아낸 예능으로 각별하게 기억될 것 같다. (사진:tvN)

<마스터>, 영화는 어째서 현실에 미치지 못했을까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마스터>는 여러 가지 흥행의 기본조건들이 이미 기획에 들어있는 작품이다. 실제 사건으로서 희대의 금융사기꾼 조희팔을 모델로 한 이야기는 요즘처럼 현실에 민감해진 대중들에게는 충분히 유인이 될 만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마스터>에서 조희팔을 모델로 한 캐릭터 진현필 회장(이병헌)이 중요한 순간마다 꺼내드는 이른바 정관계 로비가 적힌 노트는, 최근 벌어진 엘시티 비리 사건에서 거론되는 이영복 회장이 갖고 있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로비 리스트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사진출처:영화<마스터>

영화가 아예 대놓고 썩은 머리 이번에 싹 다 잘라낸다라고 포스터에 캐치프레이즈를 담아 놓은 건 그래서 의도적이다. 관객들은 그 문구가 지목하는 비리에 연루된 정관계 인물들이 영화 속에서 통쾌하게 말 그대로 싹 다 잘려내지는모습을 기대하게 된다. 워낙 고구마 시국인데다 갈수록 답답해져가는 정국 속에서 영화를 통해서나며 어떤 카타르시스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스터>는 그런 욕구를 충분히 채워주지는 못한다. ‘썩은 머리를 싹 다 잘라낸다고 했지만 영화 속에서 머리는 목소리만 들려올 뿐 좀체 보이지 않는다. 결말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금융사기의 꼬리에 가까운 진현필 회장만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물론 정관계 로비 리스트가 적힌 노트를 입수했다는 사실은 무언가 그 썩은 머리를 향한 사정의 칼날이 날아갈 것을 예고하지만 어디 우리네 현실이 그런가. 결국 다된 수사처럼 보여도 썩은 머리들은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가던 게 우리네 현실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마스터>는 심지어 이병헌, 강동원에 김우빈까지 캐스팅해 막강한 라인업이 잡아끄는 힘이 어마어마하다. <내부자들>의 이병헌과 <검사외전>의 강동원 그리고 <기술자들>의 김우빈이 아닌가. 물론 캐릭터는 조금씩 변주되거나 완전히 다른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이들이 갖고 있는 배우로서의 아우라는 관객들의 발길을 잡아끌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한 30분 정도가 흐르고 나면 어쩐지 이들 배우들의 매력이 좀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사건들을 쉴 새 없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 사건에 인물들의 감정이 제대로 얹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강렬한 느낌이 없다.

 

이병헌은 확실히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보인다. 하지만 그건 어딘가에서 봤던 캐릭터를 영화 속으로 그저 끌어온 듯한 느낌을 준다. <마스터>의 진현필이라는 인물만의 독특한 개성 같은 것들이 잘 설정되어 있지 않아 악역이라도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 이런 문제를 가장 크게 드러내는 배우는 바로 강동원이다. 사실 강동원 하나만 써도 티켓 파워가 어마어마할 정도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마스터>에서 강동원이 연기하는 김재명이라는 형사는 그다지 인간적인 느낌도 없고 그렇다고 멋진 카리스마를 폭발시키지도 못한다. 그나마 영화적 재미를 주는 배우는 김우빈이다. 그가 연기하는 김장군이라는 캐릭터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오가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마스터>는 대중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현실적 소재를 따오고, 제 아무리 티켓 파워를 자랑하는 캐스팅과 100억 대의 물량을 투입한다고 해도 이야기와 장르가 제대로 재미를 만들어내지 못했을 때 얼마나 지루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최근 이병헌과 강동원 그리고 김우빈이 나왔던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이들이 함께 모인 작품이 이렇게 지루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달라지고 있는 드라마 트렌드, 로맨틱하거나 발칙하거나

 

KBS <함부로 애틋하게>가 종영했다. 이 드라마는 100% 사전 제작에 김우빈, 수지 주연, 스타작가인 이경희 작가가 참여하는 것으로 KBS 측도 최고의 기대작이라는 말을 아끼지 않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100% 사전 제작은 오히려 작품을 중도에서라도 수정할 수 없는 한계로 드러났고, 김우빈과 수지라는 최고의 캐스팅은 그럼에도 안 좋은 결과라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너무 옛날 드라마 같은 설정들과 코드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함부로 애틋하게(사진출처:KBS)'

물론 <함부로 애틋하게>가 완성도가 떨어지거나 주제의식이 약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염치없는 세상에 대한 젊은 청춘들의 한판 대결구도가 이경희 작가 특유의 절절한 멜로로 연결됐다는 건 작품의 완결성으로는 나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의 시청자들이 원하는 코드들이나 정서와 이 드라마가 너무나 달랐다는 점이다. 성패는 결국 거기서 비롯됐다.

 

<함부로 애틋하게>가 방영될 때 등장한 경쟁작들을 보면 이 사전제작 드라마가 지금의 대중정서에 어떤 한계를 갖고 있었는가가 명확히 드러난다. 먼저 <W>를 보라. 어찌 보면 이 드라마는 지상파에는 어울리지 않는 드라마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만화적이고 나아가 한치 앞을 예측하기 어려운 기상천외한 전개로 이어지고 있다. <함부로 애틋하게>가 그 시한부 설정만으로도 마지막 새드 엔딩을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시도다.

 

<함부로 애틋하게>KBS라는 그래도 보수적 시청자들이 존재하는 채널에서 방영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호응이 없었다는 건 지금의 시청자들이 달라지고 있다는 걸 잘 보여준다. <함부로 애틋하게><W>가 가진 그 발칙한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작품의 완성도야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의 결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시청자들이 열광할만한 도발적이고 발랄한 상상력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뒤늦게 합류한 SBS <질투의 화신>은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장르. <함부로 애틋하게>가 눈물 가득한 비극적 정조를 끊임없이 보여줬던 것과는 사뭇 다른 유쾌하고 웃음이 빵빵 터지는 전개를 보여준다. 가슴에 집착하는 여자 주인공과, 유방암에 걸린 남자 주인공, 그리고 그들이 한 병실에서 만들어가는 상황들은 웬만한 코미디보다 훨씬 더 우습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작품이 가볍기 만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질투의 화신>은 지독한 현실을 담아내기도 하고, 또 가족의 해체와 한 가장의 죽음을 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 비극성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그 비극과 함께 존재하는 희극적인 면들 또한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인물의 심정 속으로 들어가면 눈물 날 정도로 가슴이 아프지만,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그 상황은 눈물 날 정도로 웃기는 희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함부로 애틋하게><질투의 화신>이 현실을 다루는 방식과 비교해보면 너무나 무겁고 어떤 면에서는 비장함까지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런 접근방식은 지금의 시청자들에게는 그다지 호응을 얻기가 어려워졌다. 드라마 한 편조차 잠시 간의 휴식이나 위안으로 기능하길 바랄 정도로 지금의 시청자들은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힘든 현실을 힘들게 드라마 속에서조차 보는 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 된다.

 

<함부로 애틋하게>라는 작품이 보여준 결과들은 지금의 시청자들이 적어도 두 가지를 요구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발칙하거나 아니면 로맨틱하거나. 발칙한 상상력을 끝없이 질주해나간 <W>, 비극성조차 웃음의 코드로서 전하는 <질투의 화신>으로 변한 트렌드 속에서 <함부로 애틋하게>는 사전제작이라는 족쇄에 묶여 힘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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