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는 과정, 비판 없으면 성장도 없어

 

연기력에 있어서 김태희와 수지는 비교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맞는 얘기다. 연기자 출신으로 연기 경력이 10년이 넘은 김태희와, 가수 출신으로 이제 갓 연기를 시작한 수지의 연기력을 비교한다는 건 어딘지 공정치 않아 보인다. 즉 이들의 연기력을 상대 비교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중요한 건, 그저 지금 하고 있는 작품의 캐릭터를 얼마나 잘 소화해내고 있는가 하는 점일 게다.

 

'구가의 서(사진출처:MBC)'

대중과 언론의 대체적인 평가를 보면 김태희는 늘 그렇듯이 연기력으로 욕을 먹고, 수지는 칭찬받는다. 김태희가 욕을 먹는 근거 중 가장 큰 것은 그렇게 오래 연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지가 칭찬받는 이유는 본격적인 연기자도 아니고 연기를 오래하지도 않았지만 연기가 못 봐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연기력에 대한 평가는 이처럼 잣대 자체가 다르다.

 

그렇다면 김태희는 정말 연기가 늘지 않았고 지금 하고 있는 <장옥정 사랑에 살다(이하 장옥정)>라는 작품의 몰입을 방해하는 존재일까. 또 수지는 과연 몰입에 방해를 일으키지 않을 정도의 연기를 해주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연기자에 대한 일정부분의 편견과 정서가 작용한다. 김태희 하면 어느 순간부터 당연히 연기력 논란이라는 연관검색어를 떠올리는 관성이 있다. 반면 <건축학개론>의 후광효과로서 수지는 만인의 연인,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이미지화되는 경향이 있다.

 

시청률도 무시하지 못한다. 가혹한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시청률이 부진하면 그 희생양으로 여배우의 연기를 드는 경향이 있다. 괜찮은 시청률을 보였던 <아이리스>에서도 김태희의 연기력 논란은 여전히 있었지만 그래도 멜로와 액션을 넘나든 괜찮은 연기라는 평도 있었다. 당시 KBS 연기대상에서 김태희는 우수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장옥정>은 어떨까.

 

<장옥정> 방영 초반에 김태희에 대한 연기력 논란이 쏟아진 건 연기의 문제도 있었지만 캐릭터와 시청률의 영향도 컸다. 김태희 연기의 문제는 본인이 연기하는 자신을 자꾸 의식한다는 데 있다. 연기력 논란이 생기면 이런 문제가 더 악화되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보일까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장옥정의 진짜 캐릭터(독하게 변해가는 모습)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래 대중들이 갖고 있던 장희빈의 이미지와 김태희가 초반 연기하는 장옥정은 부딪침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시청률의 추락은 더더욱 이 모든 것이 김태희 연기의 문제로 몰리는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장옥정이 본래의 캐릭터를 회복하는 순간부터 김태희의 연기는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김태희는 자신에게 쏟아진 연기력 논란의 문제를 장옥정이라는 캐릭터 속으로 끌어들였다고 한다. 연기자로서는 영리했던 선택이다. 드라마 속에서 악에 받친 듯한 한스러운 눈빛은 어쩌면 김태희 자신의 답답한 마음의 토로였는지도 모른다. 이런 선택은 그녀가 연기를 삶의 한 부분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과거 장희빈을 다룬 작품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 연기와 비교되는 지점도 있다. 하지만 연기로만 따지만 이번 작품은 과거의 작품들과 비교해 결코 쉽지 않다고 여겨진다. 이 작품에서 특히 장옥정이라는 캐릭터의 연기가 어려운 것은 처음부터 악독한 인물이 아니라, 그 악독해져가는 변화과정을 입체적으로 그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사랑에 빠진 여인의 모습이었다가, 궁으로 들어와서는 사랑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점점 독해지고 나중에는 결국 자신을 잃고 파멸에 이르는 그런 변화과정은 결코 쉽지 않은 연기다.

 

그렇다면 <구사의 서>에서 수지가 연기하는 담여울은 어떨까. 사극 연기가 처음이라 쉽지 않다고 하지만 <구가의 서>는 본격적인 사극이라고 하기가 어렵다. 판타지에 가까운 <구가의 서>는 그래서 현대 어투를 사용해도 그다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게다가 담여울이라는 캐릭터는 수지가 늘 해왔던 연기의 연장선이다. 운명적인 사랑의 아이콘. 때론 남자처럼 털털하고 그러면서도 두근두근 설렘을 주는 캐릭터. 이것은 연기라기보다는 수지가 가진 이미지의 매력 그 자체다. 수지는 여전히 <건축학개론>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게다가 우리는 수지에게 엄청난 연기력이나 연기 변신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만일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자리한 수지가 장옥정 같은 악역을 연기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누구나 미스 캐스팅으로 여길 것이다. 수지에 대한 기대치는 바로 수지 자신이 갖고 있는 순수한 이미지를 캐릭터로 끌어오는 것에서 만족된다. 이것은 연기의 영역이 아니다. 캐스팅의 영역일 뿐.

 

김태희와 수지의 연기를 비교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경력이 어떻든 출신이 어떻든 둘 다 드라마를 통해 대중들에게 연기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또 앞으로 할 것을 기대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각자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자는 얘기다. 여러모로 김태희의 연기에 쏟아지는 비난은 그녀에게는 훗날 약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과거의 CF스타의 모습과는 달리 이제 진정으로 김태희가 연기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다 여겨지기 때문이다. 장옥정이라는 입체적인 캐릭터는 그래서 그녀에게 연기자로서의 전환점이 될 가능성도 높다.

 

반면 어떤 연기를 해도 칭찬받는 수지는 만일 연기를 앞으로도 계속 할 요량이라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 나오는 칭찬이란 기대치가 낮거나 캐릭터에 대한 연기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수지 본인이 갖고 있는 이미지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미지는 시간이 흐르면 소멸되고 만다. 연기자는 자신의 이미지를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미지로의 변신이 가능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상대적으로 남자 배우들보다 여배우들은 귀하다. 이렇게 된 것은 대중들이 여배우에게 갖는 이미지가 남자 배우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배우들은 논란도 많이 겪게된다. 나이 들거나 사랑을 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하는 것들은 여배우에게는 하나의 넘어야 할 산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김태희도 수지도 바로 그 귀한 여배우들이다. 그들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우리 대중문화를 풍성하게 해줄 좋은 자산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비난도 칭찬도 모두 약이 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장옥정>, 왜 독해질수록 살아날까

 

장희빈 하면 먼저 떠오르는 장면. 그것은 바로 먹지 않으려는 사약을 억지로 입에다 우겨넣는 장면이다. 하지만 <장옥정, 사랑에 살다(이하 장옥정)>에서의 장옥정(김태희)은 그런 최후는 절대 보여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조선시대의 패션 디자이너인데다 이순(유아인)과의 달달한 로맨스가 전면에 펼쳐지지 않았던가.

 

'장옥정 사랑에 살다'(사진출처:SBS)

하지만 역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나 보다. 순둥이에 늘 당하기만 할 것 같던 그녀는 단 몇 회만에 독이 잔뜩 오른 모습으로의 대변신을 보여주었다. 장옥정이 영원히 용종을 잉태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극약을 대비 김씨(김선경)가 궁녀들을 시켜 억지로 입에 넣는 장면은 그래서 본래 장희빈 하면 떠오르던 바로 그 명장면(?)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했다. 본래 장희빈의 귀환이다.

 

예쁘고 착하기만한 장희빈? 의도는 알겠지만 애초부터 가능하지도 않고 또 대중들이 원하는 바도 아니다. 굳이 장희빈을 장옥정으로 부르고, 숙종을 이순이라 부르는 건 그만큼 이 사극이 역사와의 간극을 두겠다는 의지인 것만은 분명하다. 즉 이 사극은 역사의 기록에 남겨진 장희빈과 숙종을 그리는 게 아니라, 기록 바깥에 존재하는 사적인 인물로서의 장옥정과 이순의 애틋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미 역사에 기록된 장희빈이 벌인 일련의 사건들마저 왜곡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장희빈을 장옥정으로 바꾸면서 해줄 수 있는 일이란 그녀가 벌인 일들에 어떤 사적인 근거를 마련해주는 정도다. 그래서 장희빈의 독한 행동들이 왜 나왔는가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여준다면(그것이 이순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그것으로 장옥정이란 인물의 재해석은 충분할 것이다.

 

그래서 <장옥정>은 그녀가 독하게 변하게 되는 극적인 계기를 마련한다. 궁 밖으로 내친 것도 모자라 그녀를 집에 가둔 채 불을 질러버린 인현왕후(홍수현)의 부친 민유중(이효정)은 그녀가 독해지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계기는 그녀의 당숙인 장현 역관(성동일)이 제공한다.

 

“이제 깨달았느냐. 가지고 싶은 것을 갖지 못했을 때의 들끓는 욕망을, 원하는 것을 빼앗겼을 때의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넌 주상의 총애를 받고도 길거리에 내던져졌고 민유중의 여식은 주상의 총애 없이도 명문가에서 태어났다는 것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감히 네가 바라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저 자리에 있지 않느냐?”

 

장 역관이 장옥정의 마음에 불을 지른 것은 태생적으로 이미 정해져 버린 삶에 대한 도발이이다. 누구는 명문가에 태어나 사랑 없이도 왕의 여인이 되는데, 정작 왕의 사랑을 받는 자신은 궁에서 밖으로 내쳐져 정인 옆에도 갈 수 없는 현실. 조선이라는 신분사회가 가진 간극을 장 역관은 그녀에게 펼쳐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태생적이고 운명적인 삶에 대한 도발은 다분히 작금의 성장의 사다리가 끊겨버린 청춘들의 현실을 반영한 스토리텔링일 것이다.

 

결국 장옥정은 독해지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장옥정이 이순의 사랑을 갈구하며 뭐든 다 저지르기로 마음먹는 그 순간, 장희빈이라는 캐릭터가 본래 갖고 있던 대중적인 힘이 생겨난다. 장희빈이라는 캐릭터가 과거 정통사극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반복되면서도 대중들의 마음을 끄는 것(여성 캐릭터로서는 거의 유일무이하다)은 그녀가 단지 악역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어찌 보면 조선을 다루는 사극에서 신분과 계급의 금기를 뛰어넘고 도발하는 거의 유일한 능동적인 여성이다.

 

과거 정통사극에서는 그래서 장희빈이라는 캐릭터를 보는 이중적인 시선이 존재했다. 한편으로는 악녀로서 비난하는 시각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운명적으로 정해진 꽉 막힌 신분제 사회 속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통쾌함이 있었다는 것. 마치 가부장적인 시월드에서 시어머니에 대들고 맞서는 며느리처럼 장희빈은 당대의 양가적인 감정을 끌어안는 캐릭터였던 셈이다. 어쩌면 사극 속 장희빈의 악행을 보며 시어머니는 분노하고 며느리는 통쾌해했을 지도 모르겠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장옥정>은 이 이중적 시선에서 ‘악녀’로서의 시각을 떼어낸 셈이다. 그녀는 여전히 독하지만 악녀는 아니다. 오히려 운명을 뛰어넘으려, 또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온 몸을 던지는 신세대 여성이다. 그러니 그토록 연기력 논란에 휘말리던 김태희가 ‘언제 연기 이렇게 잘했나’ 칭찬받고, 바닥을 치던 시청률이 반등하는 것은 이 본래 장희빈이 갖고 있는 캐릭터의 색깔이 살아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사극 속의 신세대 장옥정은 악녀라는 죄의식조차 느끼지 않고 몰입할 수 있는 캐릭터이니 이제 시청자들에게 남은 일은 그녀의 도발을 즐기는 것뿐이다. 물론 그 결과는 역사가 기록한대로 비극일 수밖에 없겠지만, 조선 같은 신분사회에서 한바탕 제 목소리를 내고 사라진 한 여성의 삶이 어찌 새롭고 귀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이제 사랑 앞에 한없이 말랑해지고 그 사랑을 위협하는 이들에게 한없이 독해지는 장옥정을 즐기는 일만 남았다.

<장옥정>의 끝없는 추락, 그 이유는 뭘까

 

역시 김태희의 사극 캐스팅은 무리수였나. <장옥정, 사랑에 살다(이하 장옥정)>의 시청률이 7%대까지 추락하면서 그 원인으로 김태희의 연기력이 도마 위에 올랐다. 어색한 표정 연기와 어려운 사극 톤에 어울리지 않는 발성이 몰입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일까. <장옥정>의 부진은 과연 온전히 김태희의 연기력 부족 때문일까.

 

'장옥정 사랑에 살다'(사진출처:SBS)

물론 김태희의 연기력은 <아이리스>에서 보여준 가능성을 되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특히 사극 특유의 맛을 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사극의 대사 톤은 현대극과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일상적인 발성으로는 어색해지기 십상이다. 사극 특유의 연기 톤을 자기 특유의 색깔과 맞춰 자기화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김태희의 목소리는 복색만 한복을 입었을 뿐, 현대극의 그것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김태희의 연기력보다 더 큰 문제는 연기자들 사이에 조합이 잘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장옥정>의 유아인과 김태희 캐스팅은 극중 캐릭터와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다. 멜로 드라마의 경우 드라마를 보는 관점은 캐스팅된 배우들의 조합 그 자체가 될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 나이 많은 김태희와 한참 어려보이는 유아인의 조합은 자연스러운 멜로의 결을 만들어내는데 장애요소가 되는 게 사실이다.

 

이런 남녀 연기자들 사이의 조합 문제는 동시간대 타 방송사의 드라마들과 비교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직장의 신>의 김혜수와 오지호 조합이나, <구가의 서>의 이승기와 수지의 조합을 생각해보라. 그 캐스팅 자체가 기대감을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기대한 대로 김혜수는 카리스마와 코믹과 슬픔을 모두 껴안을 수 있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고 오지호는 <환상의 커플>과 <내조의 여왕>에서 보여줬던 코믹하고 과장된 캐릭터를 잘도 소화해내고 있다. 또 <구사의 서>의 이승기와 수지는 그 확실한 비주얼만큼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것도 작품 속 캐릭터의 힘이 만들어내는 착시현상일 수 있다. 본래 연기력 논란은 캐스팅 논란이나 캐릭터 논란과 겹쳐져 나타나곤 한다. <장옥정>은 사극의 옷을 입고는 있지만 현대극을 더 많이 떠올리게 하는 드라마다. 제목을 장옥정으로 달고 있기는 하지만, 만일 다른 이름으로 한다고 해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이 드라마에서 장옥정은 심지어 그 시대에 패션쇼를 여는 패션 디자이너다.

 

만일 장옥정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들이대지 않았다면 조선시대의 패션 디자이너라는 설정은 그 자체로 흥미로웠을 수 있다. 실제로 군복 디자인을 하기 위해 이순(유아인)의 친위대 비밀야영지로 들어온 장옥정이 군복을 직접 입어보고 군영을 체험하는 장면은 사극으로서는 이색적이다. ‘옷을 만드는 여인’이 그저 미적인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군사력을 위한 기능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충분히 흥미로운 일이 아닌가.

 

하지만 장옥정이라는 역사적 인물로 그 패션 디자이너를 세우자 충돌이 생겨난다. 장희빈으로 기억되는 그 강렬한 이미지는 아마도 대부분의 시청자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비록 악녀로 낙인찍히기는 했어도 그 절절함과 절실함은 시청자들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것이 사실이니까. 하지만 <장옥정>에 등장하는 패션 디자이너는 기존 장희빈이 갖고 있던 그 절실함이 빠져 있다. 오로지 사랑에 목매는 여인이라도 역사적 인물로서 장희빈을 내세웠다면 적어도 그 절절함만큼은 가져갔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장옥정>은 기존 장희빈을 기억하는 사극의 시청자들에게는 너무 가벼운 사랑타령이 되어버렸고, 또 새로운 사극을 희망하는 젊은 시청자들에게는 너무 무거운 옷(무려 장희빈이라는!)을 입은 드라마가 되어버렸다. 마치 조선판 패션 디자이너를 그리는 퓨전사극에 어색하게도 장희빈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억지로 꿰어 덧댄 느낌이다. 작품이 이렇게 어정쩡한 선에 서 있으니 그걸 연기하는 연기자들이 입은 캐릭터라는 옷이 잘 맞을 리 없다. <장옥정>의 추락은 물론 김태희 연기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바로 현대극인지 사극인지 알 수 없는 위치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작품의 문제가 더 클 수 있다.

너무 많은 사건들, 김대희표 체념의 공감

 

작년 대선에서 5060세대들이 한 목소리를 내며 그 투표의 힘을 보여줬을 때, 2030세대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멘붕”이었다. 그토록 많은 SNS 상에서의 결집된 젊은 목소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온 정반대의 결과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때 SNS 상에서 떠도는 농담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개그콘서트>의 ‘어르신’ 코너에 등장하는 일명 ‘소고기 할아버지’ 김대희의 목소리를 딴 것이었다. “○○○가 당선되면 뭐하겠노... 기분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제...”

 

'개그콘서트'(사진출처:KBS)

사실 이 ‘소고기 할아버지’가 그토록 임팩트 있는 개그라고 처음부터 생각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비슷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며 “소고기 사먹겠제-”를 연발하는 것으로 얼마나 그 개그가 지속될 수 있을까 생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웬걸? 김대희의 목소리는 점점 더 대중들을 빨아들였다. 이미 한 생을 거의 다 살아서 이제 큰 기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한 소고기 할아버지의 체념의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도대체 이 기이한 힘은 어디서 온 걸까.

 

대선 이후 자신이 투표한 후보가 당선되지 않은 나머지 48%의 멘붕에 이어, 마치 상징적인 사건처럼 ‘웃음 전도사’였던 황수관 박사가 별세했다. 그리고 2013년이 되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연초가 되자마자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과 논란이 쏟아져 나왔다. 김태희와 비의 열애설은 비의 군복무가 불성실했던 것이 아니냐는 논란으로 이어졌고 그건 또 연예사병이란 존재가 반드시 필요한가에 대한 찬반논란으로도 번졌다.

 

오연서와 이장우의 열애설이 터지면서 엉뚱하게도 프로그램에 불똥이 튀면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던 중, 또 놀라운 비보가 전해졌다. 고 최진실씨의 전 남편이었던 조성민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최진실, 최진영 그리고 조성민까지 이어진 이 불행의 가족사는 남아있는 아이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이제 겨우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2013년이지만 너무 많은 사건들이 쏟아진 느낌이다.

 

‘소고기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점점 마음 한 구석을 파고들게 된 것은 아마도 이런 시끄럽고 슬프고 아픈 현실의 소식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현재와 관련이 있을 게다. 인생을 달관한 자의 체념의 목소리. 마치 당장 죽을 것처럼 힘겨워하고 분노하고 슬퍼하지만 인생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겠냐는 듯한 그 ‘소고기 타령’은 의외로 우리를 허허롭게 웃게 만든다. 늘 긴장상태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혹은 생존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우리에게 던져지는 ‘소고기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우리의 그 긴장상태를 관조적으로 비웃음으로써 우리를 이완시켜준다.

 

사실 ‘어르신’이라는 <개그콘서트>의 코너는 작년 국민드라마로 추앙받았던 <추적자>의 박근형 캐릭터에서 따온 것이다. 그 특유의 사투리가 섞인 목소리로 “욕봐래이-”하고 말하던 박근형의 그 노회함을 김원효가 뒤틀어서 웃음으로 만들어냈던 것. 그 노회함을 비트는 이 개그에서 김대희가 만들어낸 ‘소고기 할아버지’의 달관은 의외의 수확이 되었다.

 

참 많은 일들이 우리 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아니 거의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정신없는 현실들 속에서 때론 화가 나고 때론 슬퍼하고 또 때론 지나치게 행복해 했다면 가끔 저 ‘소고기 할아버지’의 ‘소고기 타령’을 떠올려 보시라. 자칫 염세적으로 되거나 체념을 넘어 비관에 이르면 곤란하겠지만, 잠시 동안의 ‘소고기 타령’ 생각은 마치 가끔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한숨처럼 우리를 위안해줄 것이다. 너무나 복잡한 세상, 바로 그것이 소고기 할아버지에 점점 공감하게 되는 이유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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