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정>, <구가의 서>, 사극의 선을 넘다
‘이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으나 등장인물과 사건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픽션화 된 부분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런 문구와 함께 <장옥정, 사랑에 살다(이하 장옥정)>는 조선시대에는 있었을 법 하지 않은 공간에서 시작한다. 지금으로 치면 청담동 의상실 정도 될까. 나무를 깎아 만든 마네킹에 입혀진 색색의 한복과 장신구를 꼼꼼히 살피는 장옥정(김태희)은 누가 봐도 조선판 패션 디자이너다. 그 곳으로 훗날 장옥정과 라이벌이 될, 미래의 인현왕후 민씨(홍수현)와 최무수리(한승연)가 들어온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사진출처:SBS)
이 곳이 이 사극의 첫 번째 시퀀스로 등장하는 이유는 그 공간을 빌어 장차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옷들이 너무 화려하다는 민씨의 말에 장옥정은 “나비를 부르는 꽃들의 유혹”을 표현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자 민씨는 “나비가 꽃을 찾는 것이지 어찌 꽃을 유혹”하냐고 되묻는다. 장옥정은 “그건 비유일 뿐이고 사내에게 사랑받는 옷을 만들고자 함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시퀀스는 훗날의 인현왕후와 장옥정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이다.
민씨의 이어지는 이야기는 앞으로 전개될 사극의 성격까지 보여준다. “경박해. 난 그런 거 필요 없네. 내가 필요한 옷은 어떤 상황에서도 무양의 무취 같은 색감이야. 그래서 늘 한결같고 근엄해 보이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그것이 왕후의 덕목이니까. 자네 옷은 아름답지만 내가 원하는 전통이 느껴지지 않아.” 민씨가 가진 고상한 취향을 말해주는 대사 같지만 여기에는 앞으로 장옥정을 따라갈 이 사극이 품위나 전통을 따르기보다는 심지어 유혹적이고 경박해 보일 지라도 속내를 과감히 드러내는 그런 이야기를 담을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극에 대한 도발이면서 역사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이미 수없이 역사에서 악녀로 다뤄졌던 장옥정을 거꾸로 뒤집는 이야기.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장옥정은 기생들을 모델로 세우고 마님들을 부용정에 초대해 조선시대판 패션쇼를 벌인다. 한복은 색색으로 반짝거리고 그 옷을 입은 기생들은 사뿐사뿐 런웨이를 걷는다. 뒤에서는 패션디자이너 선생이 된 장옥정이 모델들의 옷을 일일이 점검하고 감독한다. 사극으로서는 파격적인 연출이다. 화려하고 유혹적인 장면들이지만 역사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이거 사극이 맞아 하고 물을 정도로 너무 과감한 건 아닌가 하는 아슬아슬함도 있는 게 사실이다. 의상실에 패션디자이너에 패션쇼까지. 현대를 사극으로 옮긴 듯한 장면들이다.
<장옥정>과 동시에 시작하는 MBC의 <구가의 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사실 <구가의 서>를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사극이라는 범주에 넣는다는 것은 애매하다. 이것은 차라리 과거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역사적 배경 자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 드라마의 공간 또한 지극히 판타지적이다. ‘그곳은 기괴하고 감히 사람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험한 산세. 태곳적 산을 지키는 영물들만이 때때로 출몰한다는 그 곳. 이름 하여 달빛 정원.’ 이 드라마는 지리산의 어딘가에 있다는 이 달빛 정원의 수호신인 구월령(최진혁)이 억울하게 역모로 폐가하고 관비로 내쳐진 윤서화(이연희)를 사모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역사적인 사건과 연루된 이야기라기보다는 구미호라는 전설에 기댄 사랑과 복수의 이야기가 <구가의 서>가 다루는 것이다. 물론 옛 말투를 흉내 내고는 있지만 사실상 현대어를 쓴다고 해도 그다지 이물감이 없을 법한 설정이다. 사극이 <조선왕조 오백년>같은 정사에서 <허준> 같은 퓨전사극으로 이어지는 한 줄기의 흐름과, <전설의 고향>류의 야사와 전설에서 <쾌도 홍길동>이나 <일지매>를 거쳐 <아랑사또전>에 이르는 일련의 옛이야기의 흐름으로 나눠져 왔다면 <구가의 서>는 후자에 해당하는 것이다.
<장옥정>이 역사에 기록된 시각을 뒤틀어 장옥정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면, <구가의 서>는 아예 역사 바깥으로 나가 마음껏 이야기의 한계를 넘어선다. 이것은 사극의 외연이 확장된 것일까 아니면 현대극이 사극을 침식해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최근 사극들은 확실히 화려해졌고 더 풍부한 이야기들을 담게 되었다. 하지만 역사와는 점점 더 결별을 고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 시점에서 역사왜곡이라는 말은 이제 구태의연한 낱말처럼 들린다. 이것은 최근 들어 왜곡의 문제가 아니라 사극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의 문제가 되었다.
사극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를 투영하는 그릇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역사의 변형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일 수밖에 없을 게다. 이제 중요해진 것은 역사와 맞냐 맞지 않냐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나 연출이 얼마나 완성도가 있고 극적인 개연성이 있느냐가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로 남는 허전함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은 아마도 과거에 사극이라고 하면 우리가 느끼던 그 독특한 분위기와 아우라를 이제는 점점 느끼기 어려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민씨가 말하듯 이제 “무양의 무취 같은” 그런 사극은 존립 자체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늘 한결같고 근엄해 보이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그런 사극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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