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마프>, 여성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일그러진 우리 사회

 

꼰대들의 드라마? 애초에 이런 기치를 내걸었다지만 tvN <디어 마이 프렌즈>는 거기서 머무는 드라마는 아니다. 단지 어르신들의 이야기만이 아니게 된 것은, 그들의 삶에 묻어난 많은 것들이 우리 사회 현실의 적나라한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눈물 없이는 보기 어려운 드라마는 일그러진 우리 사회의 종합판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디어 마이 프렌즈(사진출처tvN)'

물론 이야기는 어르신들의 삶에서부터 시작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삶. 그래서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혼자 살 수 있다고 되뇌는 희자(김혜자), 한 평생 구두쇠에 꼰대 남편 밑에서 살아오며 차라리 <델마와 루이스> 같은 자유롭게 살다가 길 위에서 죽는 삶을 꿈꾸는 정아(나문희) 같은 어르신들의 삶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 세월을 살아온 어르신들에게서 묻어나는 건 우리 사회 현실의 많은 문제들이다. 폭압적인 남편을 그저 참으며 살아온 정아는 알고 보면 상습적인 아버지의 폭력을 겪으며 살아오신 어머니의 삶에서 영향 받은 것이고, 그것은 또 폭력을 당하는 딸의 삶으로 대물림된다. 이것은 우리네 근대사에 점철된 가부장제로부터 지금껏 흘러온 폭력의 역사를 고스란히 그려낸다.

 

그 폭력 속에는 바람 피는 남편 같은 불륜의 문제가 만들어내는 치명적인 결과들까지 들어 있다. 남편과 자기 집 침대에서 뒤엉켜 있는 다른 여자를 본 난희(고두심)는 그 충격에 자살을 결심한다. 딸을 혼자 놔두고 갈 수 없어 딸에게도 약을 먹인 일을 저지른 난희는 훗날 딸 완이(고현정)에게 그 때 일로 인해 자신이 갖게 된 선택들에 대한 처절한 원망을 듣게 된다. 난희는 그 일로 유부남과 장애인(동생이 장애를 가져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어머니 때문)은 안된다고 완이에게 버릇처럼 말하고, 완이는 그 때 그 일 이후 자신은 엄마 거라는 걸 확인했다며 엄마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아이가 되었다고 말한다.

 

즉 하나의 폭력은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아픈 트라우마로 남아 그들의 삶 역시 굴절시킨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는 난희에게 완이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연하(조인성)가 교통사고로 장애를 갖게 되자 버렸다며 그것이 엄마 탓이라고 절규한다. 그런 딸의 아픔을 뒤늦게 알게 된 난희는 완이를 끌어안고 자신의 잘못을 후회한다.

 

<디어 마이 프렌즈>가 어르신들의 삶을 조명하면서 결국 비뚤어진 남성성의 폭력의 역사가 드러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여성들의 우정같은 연대로서 화해되고 해결되는 모습을 그리게 됐다는 건 주목해볼 일이다. 난희는 불륜 상대녀의 친구였던 영원(박원숙)과 결국 화해하고, 또 어린 시절 그런 고통을 겪게 만든 딸과도 화해한다. 정아는 남편에 대한 복수의 칼로서 이혼을 결심하고 친구들은 그녀를 돕는다. 성재(주현)를 두고 희자와 충남(윤여정)이 모두 관심을 갖지만 충남은 희자에게 남자를 양보한다. 그리고 확인하는 건 다시 그들의 우정이다.

 

남성성의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수직적 관계들을 <디어 마이 프렌즈>는 여성성의 우정으로 대변되는 수평적 관계로 그 해결점을 보여준다. 이 어르신들의 삶 속에서 일그러진 우리 사회의 주름을 발견하는 건 그래서 어려운 일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연대에 심정적인 지지를 하게 만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실로 어르신들을 이토록 깊게 들여다보고 그 안에 담겨진 삶을 통해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는 건 이 드라마가 가진 놀라운 성취가 아닐 수 없다. 역시 노희경이다

'아가씨' 김민희와 김태리, 그녀들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영화 <아가씨>의 배경은 일제강점기 어느 곳에 지어진 대저택이다. 하필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일제강점기로 삼은 이유는 명백하다. 그건 이 시대를 다룬 무수한 영화들이 많이 보여주던 민족주의적인 관점과는 무관하다. 다만 그 시기가 가진 혼종적 성격, 즉 문을 지나고 나서도 한참을 차를 타고 들어가 세워져 있는 대저택이 일본식과 영국식 그리고 우리식으로 한 공간에 지어져 있는 모양새와 무관하지 않다. 공간이 그러하듯이 그 공간에 살아가는 이들도 혼종적 성격을 띤다. 일본어를 쓰는 조선인이 있고 조선어를 쓰는 일본인이 있다.

 

사진출처: 영화 <아가씨>

영화가 담는 시공간이 이처럼 혼종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건 <아가씨>에서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수한 경계와 구분들이 이 혼종적 시공간에서는 어딘지 느슨해지기 때문이다. 그 느슨함은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대저택에 거의 감금되듯이 살아온 아가씨 히데코(김민희)는 부모를 잃고 막대한 유산을 받았지만 그 후견인인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의 손아귀에서 자라난다. 그런데 이 코우즈키와 히데코의 관계가 애매하다. 친인척 관계지만 코우즈키는 히데코에 대한 변태적인 애정을 갖고 있다. 외부에는 그것이 코우즈키가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기 위함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건 영화의 말미에 가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아가씨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하려는 가짜 백작(하정우)이 그녀에게 좀 더 쉽게 접근하기 위해 숙희(김태리)를 하녀로 넣는 일종의 작전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연기를 한다. 혼종적 공간에서의 연기는 이들이 도대체 그 진심이 무엇이고 실체는 무엇인지를 더욱 오리무중으로 만들어버린다. 3부로 나뉘어 구성된 영화는 그래서 그 시점이 매 부마다 달라지면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의 반전을 보여준다. 연기를 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연기가 아니었고, 진짜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연기였다는 것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한 장면에 대한 서로 다른 이야기의 변주만으로도 <아가씨>는 꽤 흥미롭다.

 

하지만 영화가 지향하는 점은 그간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이 보여줬던 모호함이 아니라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폭력적인 남성성의 세계로부터 두 여성이 유쾌한 탈주극을 벌이는 것이다. <아가씨>에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하고 그들이 모두 두 명의 남성에 포획된 존재들이라는 설정은 그래서 이 영화가 가진 상징성을 보다 명쾌하게 보여준다. 가짜 백작에 의해 작전에 투입된 숙희가 그렇고, 코우즈키에 의해 대저택에 감금된 채, 신사차림으로 가장한 남자들 앞에서 더럽고 도착적인 소설 강독을 하며 살아가는 히데코가 그렇다.

 

아가씨와 하녀라는 관계 설정은 아마도 남성성을 드러내는 무수한 성애 영화가 보여주곤 했던 기묘한 상상을 자극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직접 보기 전에는 <아가씨>라는 영화가 일종의 동성애 영화가 아니냐는 편견을 갖게 되는 건 이 영화가 주는 반전에는 오히려 더 효과적인 면이 있다. 남자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묻는 아가씨의 질문에 하녀가 그 속살을 만지고 성 행위를 하는 장면은 그래서 1부에서는 말 그대로 남성성의 시각을 그대로 재연하는 듯 보이지만, 2, 3부에서 다시 보는 그 장면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코르셋처럼 남성성에 의해 짓밟히고 옥죄던 육체들이 아가씨와 하녀라는 서열 구조까지 한껏 벗어던진 채 서로를 온몸으로 위무하는 듯한 장면으로 치환된다. 두 여성이 첫 설렘을 갖게 되는, 골무로 날카로운 이빨을 갈아주는 장면 역시 다시 보게 되면 여성들의 연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이 대저택 지하실로 상정되는 남성성의 세계는 점점 더 도착적인 느낌을 준다.

 

섹스는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저 성행위가 아니다. 여기 등장하는 남성들은 이상하게 삐뚤어진 성의식을 갖고 있다. 마치 여성들을 위압적으로 짓눌러야 여성들이 더 좋아할 거라는 사고방식. 그런 폭력적인 생각들은 지하실 가득한 무수한 성애 소설들의 판타지로 남겨져 여성들을 그 폭력의 대상이 되게 만든다. 뒤늦게 이 지하실에 가득 채워진 성애 소설들을 발견하고 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 숙희는 그래서 히데코와 함께 그 집으로부터 탈주하며 소설들을 발기발기 찢어버린다. 그리고 마치 발기된 성기처럼 세워져 위압적으로 그녀들을 억압하던 상징물 뱀 대가리를 잘라버린다.

 

그렇게 여성들이 탈주해버린 대저택에서 남겨진 남성들은 그 폭력적인 성의식 속에서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 대신 탈주한 여성들은 블라디보스톡행 배를 타고 자유의 항해를 한다. 그간 남성성의 억압을 상징하던 옷들을 남김없이 벗어버리고 폭력적인 성행위가 아닌 행복한 성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 코우즈키가 히데코를 훈육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구슬은 온전한 쾌락의 도구로 바뀐다.

 

사실 이렇게 선명하게 메시지를 담아내면서도 매번 반전에 반전을 이어가고 그리고 박찬욱 감독 특유의 탐미적인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가씨>는 놀라운 성취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장면을 바라보던 카메라가 갑자기 느릿느릿 뒷걸음질을 치면서 그 장면의 진짜 이야기를 보여주는 듯한 영상 연출은 그래서 이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다음에 벌어질 상황들이 못내 궁금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갖고 있던 편견들이 여지없이 박살나는 그 장면에서는 어떤 쾌감마저 느껴진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혼종적 성격을 띠던 영화의 모호함은 보다 선명해진다. 가짜는 가짜임이 판명되고 진짜는 진짜임이 드러난다. 그래서 모두가 연기를 하는 듯 보였던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면 그 연기의 끝장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폭압적인 상상력과 기획으로 강요되던 연기들이 벗겨지고 대신 진실 된 알몸이 드러날 때의 카타르시스는 그 어떤 섹스보다 강렬하다. 남성성이 내포하고 있는 폭력적인 양태들이 무너져 내리고 저 편 들판을 향해 달려 나가는 두 여성의 자유를 지지하게 될 때, 영화는 한없이 유쾌해진다. 성 의식에 대한 논제들이 그 어느 때보다 쏟아져 나오는 시기여서 일까. <아가씨>는 특히 더 흥미로운 동지의식을 갖게 만드는 영화다

<육룡이>, 박혁권이 만들어낸 악역의 품격

 

이토록 모스트스러운 악역이라니. SBS <육룡이 나르샤>에는 육룡만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의 활약을 가능하게 해주는 악역들이 있다. 이른바 도당3인방이라 불리는 이인겸(최종원), 길태미(박혁권), 홍인방(전노민)이 그들이다. 고려 말 혼돈기에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전횡을 일삼는 이들이 전제되기 때문에 육룡이라는 시대의 영웅들이 훨훨 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드라마 구조상 이들 악역은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아닐 수 없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그 세 명의 악역이 모두 강렬한 저마다의 캐릭터를 갖고 있다. 이인겸은 정치력을 갖춘 악역이다. 그는 일찍이 이성계(천호진)의 약점을 잡아 무릎 꿇린 바 있고 그의 정계 진출을 막기 위해 갖가지 정치적 책략과 술수를 동원하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홍인방은 배신의 아이콘이다. 본래 성균관의 스승이었지만 모진 고문 앞에 스스로를 포기하고 오히려 개인적인 욕망을 터트리는 인물. 해동갑족의 수장에게 대놓고 협박을 하는 모습에서 소름돋는 악역의 면모를 보여줬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 세 명의 악역 중 단연 주목을 끄는 캐릭터가 길태미일 것이다. 삼인방 중 무력을 상징하는 그는 삼한제일검이라 불리며 초절정의 무공을 갖고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하는 행동이나 외모, 말투는 여성스럽기 그지없다. 진한 화장에 말할 때 목소리나 손동작은 영락없는 여성의 그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부드러움이 칼을 뽑을 들 때 더 섬뜩한 느낌을 준다.

 

해동갑족 전원의 서명이 들어간 상소를 이방원(유아인)이 가져옴으로써 최영(전국환) 시중이 주상의 윤허를 받아 이뤄진 길태미의 추포 과정에서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 어떤 사극 속 악역들보다 압도적이다.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 그를 잡으러 온 군사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배가 고프다며 국밥을 먹는 장면은 길태미의 캐릭터를 제대로 보여준다. 평상시에는 전혀 무공을 할 것 같지 않는 듯한 허술함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오히려 고수의 면면으로 느껴지는 그런 캐릭터.

 

그가 저잣거리로 걸어 나올 때 그를 본 백성들이 도망치는 장면은 마치 영화 <괴물>의 한 장면 같다. 그만큼 그 캐릭터가 가진 살벌함이 드러나는 대목이지만 왠지 길태미에게서는 인간적인 면모도 느껴진다. “어이 이인겸 따까리!” 라고 부르자 그가 분노하는 건 그 역시 스스로를 세우려 노력했지만 실상은 이인겸의 그늘 아래 있었다는 걸 자인하기 때문일 게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돈인 홍인방과 헤어지면서 그래서 사돈 때문에 재밌었다고 토로한다. 그리고 자신은 할 것 다 해봤기 때문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한다. 권력에 대한 끝없는 욕망으로 끝까지 손에 쥔 걸 놓지 않는 홍인방과는 사뭇 다른 캐릭터다. 그리고 그의 앞에 나타난 땅새(변요한)와 대결을 하게 되자 오히려 기뻐하는 모습에서는 무인으로서의 면모도 드러난다. 마치 최고의 무인에 의해 마지막을 장식하기를 바랐다는 듯이.

 

여성스러움과 난폭함을 동시에 갖춘 이 이중적인 캐릭터가 제대로 구현된 건 다름 아닌 박혁권이라는 연기자의 공력 덕분이다. 지금껏 어딘지 찌질하거나 소심한 중년의 모습을 자주 보여왔던 그지만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그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악역 길태미를 시청자들의 뇌리에 깊게 남겨놓았다. 길태미는 시쳇말로 모스트스러운 악역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역할에서 박혁권은 악역의 품격이 무엇인가를 보여줬다.



<미세스캅>, 일과 가정의 양립은 불가능한 일인가

 

김희애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워킹맘이다. 그것도 극한 워킹맘. SBS의 새 월화드라마 <미세스캅>에서 김희애가 연기하는 최영진이라는 인물은 포장마차에서 주인아주머니와 털털한 이야기를 나누며 잠복근무하는 장면으로 등장한다. 무언가 세련되고 우아한 자태를 늘 보여주던 김희애는 이제 나쁜 놈들을 잡기 위해 좁은 골목길을 달리고, 싸워야 하는 인물로 돌아왔다.

 


'미세스캅(사진출처:SBS)'

여성들을 잔인하게 유린하고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그녀가 일하는 현장에서는 자칫 잘못하면 범인들의 칼에 맞아 사경을 헤매게 되기도 하는 그런 살벌한 일들이 벌어진다. 최영진 팀장의 오른팔인 조재덕(허정도) 경사는 범인의 칼에 맞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간경화였다는 걸 발견할 정도로 자신을 돌볼 틈조차 없는 이 일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최영진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어쩌다 홀로 아이를 키우게 되었지만, 형사라는 직업 때문에 아이의 발표회에도 가지 못하는 나쁜 엄마가 되었다. 대신 그녀의 여동생인 최남진(신소율)이 아이를 돌보지만 아이는 결국 엄마를 그리워하게 된다. 자꾸 물건을 훔치는 아이에게서 그렇게 해서라도 엄마가 보고 싶었다는 얘기를 들은 최영진은 그래서 오열하며 이 일을 때려치울 결심을 한다.

 

그래서 과장에게 사직서를 제출하지만 또한 눈에 밟히는 것이 팀장이라고 자신을 바라보는 팀원들이다. 조재덕에게 칼을 먹인 범인이 등장했다는 이야기에 그녀는 갈등한다. 그와 그의 아내에게 반드시 범인을 잡겠다고 약속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게 조직의 생리이기도 하다. 팀장의 상사인 과장은 비리에 얽혀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성급하게 지목해놓고는 이를 고치려 하지 않는다.

 

<미세스캅>은 일과 가정 사이에서 동분서주하는 우리네 워킹맘들의 이야기를 형사라는 직업을 통해 극화시킨 드라마다. 일 때문에 아이를 돌볼 틈이 없는 워킹맘들의 보이지 않는 속 앓이를 이해하고 공감한다면 최영진이라는 인물에 푹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온통 일에 자신을 내던지는 삶을 살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가족은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그런 삶의 아이러니라니.

 

최영진과 최남진 그리고 최영진의 딸이 그려내는 가족의 풍경은 다른 식으로 들여다보면 여성들의 공동체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과제 앞에서 가녀리게만 보이는 이 여성 공동체의 파편화된 삶은 저 살풍경한 남성성의 세계와 대립구도를 갖고 있다. 최영진의 상사인 염상민 과장(이기영)이나 연쇄살인범이 일 안팎에서 여성성의 삶을 위협하는 존재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래서 <미세스캅>은 마치 전형적인 형사 장르물의 하나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네 워킹맘들의 초상이 담겨져 있다. 최영진은 아마도 앞으로 일의 세계와 가정이 뒤얽히는 상황을 겪게 되지 않을까. 그 안에서 어쩌면 그녀는 선택을 강요받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일인가. 가정인가. 이러한 질문은 <미세스캅>이라는 장르물에 괜찮은 무게감을 얹어준다. 김희애가 그려나갈 최영진이라는 워킹맘의 삶이 자못 궁금해지는 이유다. 그녀는 과연 일과 가정을 모두 지켜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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