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왜 하필 말인가 했더니

 

“하지만 생명이잖아요.” 칼에 찔려 죽어가는 말을 살리기 위해 사암도인(주진모)을 찾아갔으나 자신은 인의(人醫)지 마의(馬醫)가 아니라며 거부하는 그에게 어린 백광현(안도규)은 이렇게 되묻는다. 그러자 사암도인은 백광현에게 말이든 사람이든 생명에 귀천은 없다고 말한다.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함부로 시술을 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이 짧은 장면은 <마의>가 왜 하필 말이라는 소재를 선택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사극에서 말은 바로 민초의 다른 이름이다.

 

'마의'(사진출처:MBC)

마의들의 삶이란 어찌 보면 말보다 천시 받는 삶이다. 말이 날뛰다 이명환(손창민)의 아들 이성하(남다름)를 발로 차는 사고가 벌어지자 그 말을 관리한 마의들(이희도, 안상태)은 호위무사에게 끌려간다. 자신들의 직접적인 잘못은 없지만 반가의 자제를 다치게 했다는 것에 “반쯤 죽여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족속이 양반들이기 때문이다. 끌려가면서 안상태는 자신은 마의가 아니라며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어렸을 때부터 말똥만 치우며 살았을 뿐이라는 것. 우스운 설정이지만 그 얘기는 짠하게 다가온다. 마의들의 삶이 거기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말과 마의로 대변되는 민초들은 그래서 이 사극에서는 거의 동격처럼 그려진다. 화살을 맞고 죽음이 경각에 몰려 목장에 들어온 광현이, 새끼를 잃어 시름시름 죽어가는 말과 한 마구간에서 만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말은 잃은 새끼처럼 광현을 보살피면서 다시 살아나고, 광현은 말의 보살핌을 받으며 환영처럼 아버지(사실은 사암도인이었지만)가 나타나 자신을 고치는 꿈을 꾼다. 이 장면은 말과 마의의 교감을 보여준다. 작금의 수의사라면 그다지 큰 감흥이 느껴지지 않을 수 있지만, 조선 후기의 수의사는 다르다. 말 못하는 짐승들과 그들이 동병상련의 위치에 서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그 말과 인간의 교감이 벌어지는 이 시퀀스들은 <마의>가 가진 여타의 사극들과의 차별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승우가 백광현의 성인역으로 등장하는 것만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말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관심을 끄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말은 그간 사극 속에서 묵묵히 누군가를 태우고 달리고 있었지만 그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못했었다. 이것은 마치 왕조 사극들이 왕과 신하들의 이야기를 전면에 보여줄 때 가려져버린 민초들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말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것은, 그리고 그 말과 인간의 교감을 보여준다는 것은 이토록 전복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말은 또한 그 자체로도 다이내믹한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말을 사고 파는 마택일에 목장에서 벌어지는 마상쇼는 <마의>의 스펙터클을 잘 보여준다. 초원 한 가운데 오밀조밀 세워진 목장과 마택일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장애물을 뛰어넘고 말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기수들이 마치 하나의 쇼를 구성하는 듯한 장면들은 이병훈 PD 특유의 연출력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말이 가진 스펙터클보다 중요한 것은 말이 가진 의미다. 저 어린 백광현이 말한 것처럼 말은 인간과 똑같은 하나의 ‘생명’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와 위계가 생명이라는 동일한 가치로 인해 사라지는 지점에 이르면, 왜 이타촌(외국인들이 사는 마을)이 이 사극에 들어와 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일본인과 중국인은 물론 서양인들까지 들어와 하나의 인종의 용광로처럼 섞여있는 이타촌은 민족과 인종의 경계가 허물어진(혹은 허물어져 가는) 한 세계를 잘 표상한다. 동물이든 인간이든(그것이 어떤 민족이든 상관없이) 하나의 생명으로 바라보는 백광현은 그래서 글로벌한 현 시대가 갖는 다양성의 가치를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의>에서 말이 갖는 의미는 이토록 크다.

다양성을 담은 ‘종결자’, 표현은 획일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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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 송승헌'(사진출처:OSEN, MBC)

이른바 ‘종결자’ 시대다. 인터넷을 열거나 TV를 켜면 어디서든 ‘종결자’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종류도 가지가지다. 아이유처럼 고음 종결자가 있는 반면, 송승헌 같은 복근 종결자도 있고, ‘시크릿 가든’의 김사랑에서부터 패션모델 장윤주까지 무수히 많은 몸매 종결자들도 있다. 물론 투기 종결자라거나 정치개그 종결자처럼 부정적인 의미도 있다.

사실 너무 많은 종결자들이 넘쳐나다 보니 이제 누가 진짜 종결자인지는 잘 모르는 지경이다. 하지만 그래도 ‘종결자’라는 표현 자체가 강하다보니 일단 그런 제목이 붙어 있으면 들춰보게 되는 게 인지상정. 이렇게 보면 이 단어는 이 시대 최고의 ‘낚시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종결자라는 말에 담긴 의미는 ‘최고’라는 뜻이다. 그게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말미에 종결자라고 붙여놓으면 그 분야에서 더 이상은 넘볼 수 없는 존재를 뜻한다. 즉 누가 낫고 누가 덜하다고 말들이 많은데, 그런 말들을 ‘종결’시킬만한 존재라는 얘기다.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왜 ‘종결자’라는 단어가 이처럼 횡행하는지가 보인다.

너무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저마다 자기 말이 맞다고 주장하는 현실이 ‘종결자’ 속에는 배경으로 깔려 있다. 즉 현실은 정반대로 어느 하나가 최고로 군림하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종결자’라는 말은 ‘최고’ 혹은 ‘1위’ 같은 단어가 가진 구체적인 이유가 삭제된 경우가 많다. 그저 감성적으로 느낌으로 ‘종결자’라 붙여지고 추앙되어지는 ‘놀이’의 성격이 강하다.

언론이 이 놀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당연하다. 프로그램이나 연예인 띄워주기에서 이 만큼 강력한 ‘낚시’의 힘을 가진 단어가 없는데다가, 1위니 최고니 하는 말에 따라붙는 구체적인 책임 또한 없다. 종결자라는 단어에는 참으로 애매모호하면서도 시선 잡아끄는 데는 확고한 힘이 느껴진다. 수많은 정보들이 경쟁하듯 서야하는 인터넷이나 방송 같은 공간 속에서 ‘종결자’는 말 그대로 표현의 종결자다.

재미있는 것은 누군가 특별한 분야의 ‘종결자’라고 주장한 후에 말 뜻 그대로라면 더 이상 없어야 할 그 분야의 ‘종결자’가 계속 해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작금의 정보들이 가진 유희적 성격을 잘 말해준다. 엄밀하고 진지한 정보들보다는 휘발성 강한 유희적인 정보들이 난립한다는 얘기다. 물론 이것 자체는 점점 놀이화되고 있는 작금의 매체 환경 속에서 지극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무수한 ‘종결자들’의 홍수 속에 진정한 고수들이 묻히고 있다는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이렇게 서로 ‘종결자’라 소리치는 상황은 때론 공해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한 때의 유행어라 해도 너무 획일적이라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이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종결자’라는 말 자체가 너무나 많은 다양성을 밑그림으로 갖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종결자라는 이 다양성의 주장은 나쁜 게 아니다. 하지만 그 표현에 있어서 ‘종결자’라는 말은 유행처럼 번지며 그 다양성을 해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의 다양한 최고들만큼, 최고를 표현하는 다연한 말들이 나타나기는 어려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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