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크 다큐와 다큐 드라마, 같은 듯 다른 길

올 초 느닷없는 성추행 동영상에 인터넷은 후끈 달아올랐다. 동영상이 유포되면서 언론들이 일제히 이를 보도했고, 경찰들은 ‘성추행범 검거’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이틀 후, 이 퍼포먼스(?)는 고교생들의 자작극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발칙한 고교생들이 덧붙인 말이다. “우리의 동영상을 검증이나 여과 없이 방영한 방송 등 미디어의 행태 등에 비춰 UCC 동영상의 정치·상업적 악용 가능성에 주목해달라”고 했던 것. 물론 동영상이 극장이나 TV에 어떤 영화나 드라마 같은 틀로서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작품(?)은 현실을 오도하는 부적절함을 남긴 것이 분명하지만, 그 목적으로만 보면 진정한 ‘페이크 다큐’의 한 면모를 보인 것은 틀림없다.

페이크 다큐, 사기와 작품 사이
최근 케이블 TV를 통해 하나의 장르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위 페이크 다큐는 고교생들이 만든 동영상처럼 ‘장르 패러디’의 성격을 갖고 있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진실성을 꼬집으면서 동시에 그 장면 속에 잡히는 진실처럼 보이는 사회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고교생들이 만든 동영상은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 미디어들의 선정성을 끄집어냈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동영상이 어떠한 허구적 장치를 담보할 수 있는 틀이 없었다는 데서, 작품이 아닌 사기가 되었던 것이다. 1999년 인터넷을 발칵 뒤집히게 한 ‘블레이 위치’나 2006년 토론토 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상을 받은 페이크 다큐, ‘대통령의 죽음’은 영화라는 틀로 소비될 수 있었기에 사기가 아닌 작품이 되었다.

즉 페이크 다큐가 가진 전략적 의미는 다큐보다는 그 다큐를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의 영화라는 허구에 더 방점이 찍힌다. 이들 영화의 틀을 가진 페이크 다큐가 보여주는 영화적인 의미는 허구를 현실처럼 믿는 대중들에게 그것은 본래 허구였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는 데 있다. 즉 허구를 깨기 위해 다큐라는 무기를 쓰는 것이다.

환타지를 제공하는 가짜들
그렇다면 최근 케이블 TV에서 들고 나온 프로그램들을 ‘페이크 다큐’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가짜 다큐를 보여주는 것은 맞지만 이 프로그램들은 그 그릇으로 영화 같은 허구가 아닌 다큐멘터리를 취하고 있다. 즉 이들 프로그램들이 파괴하고 있는 것은 허구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라는 현실이다. 이것은 마치 뉴스 프로그램 속에 선정적인 거짓장면을 넣은 후에(이것은 고교생들의 성추행 동영상을 통해 실제로 벌어졌다) 사실은 페이크 다큐였다 말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본래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갖는 신뢰성을 무너뜨려 가면서 이들 프로그램이 얻어내려는 목적은 다른 데 있다. 현실에서라면 보기가 쉽지 않은 자극적인 장면들을 현실인 것처럼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것은 페이크 다큐가 가진 환타지 파괴가 아니라 정반대의 방향, 즉 환타지 제공의 목적을 갖고 있다.

시청자들은 이들 프로그램 속에 ‘실제 소재를 바탕으로 제작진이 재구성한 페이크 다큐멘터리입니다’라는 자막 고지가 나온다고 해서 이 프로그램을 통해 얻는 자극이 줄어들지 않는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현실성에 있는 게 아니고 환타지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포지셔닝 이론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드라마의 환타지를 깨는 다큐 드라마
즉 페이크 다큐는 허구라는 그릇 속에 들어가야 그 진가를 발휘한다. 그것이 아닌 페이크 다큐(?)는 TV가 가진 신뢰성을 저 기반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제살 파먹기와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이런 상황에 주목을 끄는 것이 ‘다큐 드라마’라는 형식을 표방하면서 만들어진 ‘막돼먹은 영애씨’다. ‘다큐’라는 진실성을 담보하는 단어에 ‘페이크’라는 정반대의 의미를 붙여 ‘페이크 다큐’가 탄생했듯이, ‘다큐 드라마’는 ‘다큐’라는 현실성에 정반대축에 있는 ‘드라마’라는 환타지가 붙어 탄생했다. 목적은 페이크 다큐와 같다. 드라마가 가진 환타지를 다큐라는 형식을 통해 깨겠다는 의도다.

‘막돼먹은 영애씨’라는 제목 역시 다큐 드라마처럼 상반된 두 의미를 갖고 있다. ‘막돼먹은’이란 단어에 연기자 이영애가 붙은 것이다. 드라마는 영애씨(김현숙)의 음성변조와 모자이크 처리된 얼굴을 보여주며 다큐의 한 틀로 시작하지만 곧 드라마 형식으로 전환된다. 즉 ‘막돼먹은 영애씨’는 다큐가 아닌 드라마라는 걸 공공연히 드러내면서 다큐적인 속성들을 활용해 트렌디한 드라마들의 환타지를 깬다. 도저히 안될 것 같은 사랑은 저 트렌디 드라마의 해피엔딩과는 상반되게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다큐를 활용해 드라마의 허구성을 파괴하고 있다는 점에서 ‘막돼먹은 영애씨’는 그 목적에 있어서 진짜 페이크 다큐의 장르적 미학을 제대로 따르고 있다 말할 수 있다.

케이블 TV들이 ‘페이크 다큐’라 부르는 프로그램들은 다큐멘터리를 표방하지만 거짓이고, ‘막돼먹은 영애씨’ 같은 다큐 드라마는 드라마라는 허구를 표방하지만 진실에 가깝다. 전자는 환타지를 더 적극적으로 끄집어내고 후자는 환타지를 부순다. 똑같이 다큐를 표방하고 있어도 양자가 그 길이 서로 다른 것은 이처럼 목적이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지금 방영되고 있는 케이블 TV의 ‘페이크 다큐’라 불리는 프로그램들에 어느 정도의 안전장치가 필요한 이유는 그 목적이 자극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다큐 드라마 새 지평 연 ‘막돼먹은 영애씨’의 정환석 PD

‘막돼먹은 영애씨’는 겉보기엔 거친 화면을 가진 막돼먹은 드라마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가 영애씨의 외모만을 보고 그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 드라마는 다큐 드라마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케이블에서 저예산으로 시도할 수 있는 모범답안이면서도, 그것을 통해 기존 관습에 머물러 있는 드라마들에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국내에서 모든 드라마를 통틀어 거의 첫 번째로 시즌2가 생기는 것 역시 큰 의미가 있다. 시즌2가 어려운 많은 이유들 역시 이 드라마는 손쉽게 넘어서고 있다. 저비용이고, 에피소드별로 끊어지면서 연결고리를 갖는 시즌 드라마 성격을 갖고 가기 때문이다. 이제 더 까칠해진 모습으로 돌아온 영애씨의 면면을 들어보기 위해 정환석 PD를 만났다.

초심으로 끝까지 갈 것이다
- 굳이 다큐 드라마라는 형식을 취한 이유는?
▲ 케이블에서 드라마를 한다는 것이 공중파와 같을 수 없다. 스타시스템을 가져올 수도 없는 문제고. 드라마를 어떻게 차별화 할 수 있겠느냐는 측면에서 형식적인 면을 고민했다. 여기에 다큐 드라마가 갖는 외형적인 포맷이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목적에 잘 맞아 떨어졌다. 리얼한 존재들의 숨기고 싶고 가리고 싶어하는 것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보고자 6mm라는 좀 다소 거칠지만 리얼함이 돋보이는 시각을 구사했다. 그러다 보니 다큐 드라마라는 게 나오게 되었다.

- 다큐 드라마라는 포맷이 참신하다. 다큐멘터리의 속성과 드라마의 속성이 다르게 느껴지는데 다큐는 굉장히 현실적인 걸 잡아내는 반면 드라마는 환타지를 갖고 가기 때문이다. 이것을 붙인 이유가 혹시 우리나라 드라마 속의 환타지를 만족시켜주는 멜로 같은 형식을 파괴해보자는 목적도 있지 않았나.
▲ 드라마적인 복선이나 환타지 같은 것이 배제되고 그걸 따라가지 않더라도 공감이 가는 이야기를 다큐적인 기법을 통해 보여준다면 어떨까. 드라마로는 완성도가 좀 떨어진다 해도 다큐로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리얼함을 더 높게 사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 시트콤 냄새가 많이 나는데 시트콤이 많이 하는 게 장르 파괴다. 예를 들면 익숙한 장면들에서 다음에는 이런 장면이 나올 것이다 하고 기대하는데 전혀 엉뚱한 것이 나올 때 웃음이 터진다. ‘막돼먹은 영애씨’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많이 들어 있는 것 같다.
▲ 아무래도 시트콤을 계속 해오던 사람이라 시트콤적인 요소가 어쩔 수 없이 들어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트콤하고 다른 방법이 뭘까를 작가팀하고 자주 얘기하고 고민한다. 그래서 어떤 소재가 나올 때도 시트콤이면 이렇게 풀 텐데 하면서,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말자고 하는 경우가 많다. 정반대의 발상으로 늘 생각을 하고 있다.

- 캐스팅이 굉장히 파격적이었는데.
▲ 처음 제의를 받았던 연기자분들은 다큐 드라마라는 것에 대해 재미있겠다고 생각을 해주었다. 면면을 보면 다 A급으로 빛을 발했던 분들은 아니지만 다 연기내공과 느낌이 있는 분들이라 연기 같지 않은 연기를 해보지 않겠냐는 그런 제안에 굉장히 공감을 해주었다. 따라서 오히려 설득하기가 쉬웠다.

- 영애역의 김현숙씨나 영채역의 정다혜씨 둘 다 연기라기보다는 그냥 생활 느낌이 많이 든다. 이 드라마가 주는 캐릭터의 느낌이라는 게 환타지쪽은 전혀 아니고 리얼함이 주는 정감 같은 것이다. 캐릭터로만 봤을 때는 ‘어글리 베티’나 ‘김삼순’같은 캐릭터와 유사한데 그런 드라마들은 환타지로 갔다. ‘막돼먹은 영애씨’의 경우에도 환타지가 깨졌다곤 해도 어느 정도는 가미가 된 걸로 보이는데.
▲ 처음에 생각했던 ‘막돼먹은 영애씨’는 세상에 대해서 꼬인 게 많고 그런 것 때문에 울분이 많은 여자였다. 그런 부분을 여과 없이 보여주자는 게 의도였다. 한편으로 환타지 혹은 미화되지 않는 부분을 어떻게 시청자분들이 받아들여 주실까 걱정도 많이 했다. 하지만 오히려 점점 더 리얼해서 좋다는 느낌, 환타지가 없어도 재미요소가 있구나 하는 공감을 해주셨다. 그래서 자신감을 많이 가졌는데 현실적으로 나이 서른의 솔로 여자가 직장생활 하면서 어떤 남자라도 관계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애씨가 연하남과 연애를 하게 됐다. 애초에는 되지 않는 사랑, 짝사랑의 개념이었는데 하다보니 그래도 어느 정도 여성들을 설레게 하는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해서 살짝 로맨스가 들어갔다. 그런데 영애씨의 눈에 하트가 그려지다 보니까 까칠함이 없어지게 되고 보통 드라마류와 비슷하게 빠지게 되는 것 같았다. 외려 로맨스로 가면 대본 만들기가 쉬웠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생각에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으로 가는 게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30대 노처녀를 넘어 폭넓게 사회문제를 다룰 것이다
- 시즌 2에서 시즌 1과 비교해 달라지는 것은?
▲ 환타지가 없어도 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자신감을 더 얻었다. 오히려 더 리얼하게 나갈 것이다. 좀더 까칠해진 영애가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줄 것이다. 어차피 로맨스도 벗어나지 않았나. 이것이 달라지는 하나이다. 또 하나는 이게 어느 정도 반향이 되고 했으니 이제 변죽만 올리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폭넓게 얘기해보려고 한다. 30대 노처녀의 문제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에는 시트콤이 가진 다양한 세대들이 있기 때문에 그분들의 사회적인 이야기를 같이 할 것이다.

- 이 드라마에는 여성들의 연대의식, 동지애 같은 게 있는데 심지어는 회사동료도 자매로 느껴진다. 물론 남자 시청자가 재밌게 보는 부분도 있는데 그것은 샐러리맨들로서의 동지의식, 애환 같은 것이다. 시즌 2에서는 그런 측면이 많이 나온다는 얘기인가.
▲ 새로운 인물도 보강됐고 직장이나 그런 데서 공감 갈 수 있는 얘기들을 더 많이 포진하려 한다. 사실 사회에서 막돼먹은 행동을 전혀 안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선하고 착하다고 해도 사람은 이기적이기에 누구에겐가는 부지불식간에 막돼먹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 하나로 악인으로 규정될 수 없듯이 인간은 다면성을 갖고 있다. 마초적이고 권위적인 사장도 기러기 아빠라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자기 자식에 대한 정이 있다. 그런 양면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야기들 리얼하게, 정제되지 않은 알 것 그대로 보여줄 것이다.

- 새로운 캐릭터인 정대리(정지순)가 곰과 여우를 합쳐 놓았다던데 그 캐릭터가 갖는 의미는 뭔가.
▲ 대다수 남성들을 대변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출세 지향적이고 적당히 아부 떨 줄 알면서 자기 손해보는 일 하지 않는 그런 인물이다. 또 인물 설정 자체가 위에 윤과장 같은 선배도 있지만 무서운 사람이 없는 사람이다. 회사에서 자신이 헤게모니를 잡으려 한다는 걸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능력도 있고 노하우도 있고. 그런데 영애는 그걸 한눈에 알아보는 거다. 동류가 동류를 알아채듯. 막돼먹은 그림자를 보게 되는 거다. 둘이 티격태격하게 되는데 어떻게 보면 대놓고 성차별 하는 그런 사람보다 더 무서운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된다.

- 더 까칠해진다는 말은 풍자와 직설에서 직설쪽으로 더 간다는 말인가
▲ 내 자체가 직설적으로 무언갈 잘 표현 못하는 사람이다. 직설적으로 까대는 건 쉬운 일이지만 풍자는 기술이 필요하다. 어렵지만 그걸 지향하고 있다.

- 노출 신이 많은 영채는 이 드라마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드라마는 직장내 성희롱도 많이 나오는데 그것조차 시청자들에게는 소비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면서 그걸 비판하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따라서 드라마를 보며 자아비판을 하게 되는 상황을 맞게 되는데이를 테면 영채를 성적환상으로 보다가 영애가 그걸 사정없이 부서버리는 그런 거다. 자기반성을 많이 하게 된다.
▲ 내 딸아이가 프로그램 시즌 2 제작발표회 때 남성들은 반성해야한다는 기사를 보고 이런 문자를 보냈다. ‘아빠, 여자들은 정말 반성할 게 없나?’ 보는 남자들도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은 사실은 반성해라 라고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에 이 드라마의 목적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오히려 여자들도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제 딸이 얘기한 것처럼 여자들은 반성할 게 없나 하는 생각을 해봤으면 한다.

늘 새로운 것을 고민하고 싶다
- 드라마를 찍으며 제일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
▲ 저예산 드라마를 표방하기 때문에 제작에 있어서 굉장히 어렵다. 60분 짜리를 단 이틀만에 아침7시부터 새벽1시까지 강행군한다. 이틀 동안 40신 42신을 찍어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어려운 건 어떻게 하면 좀더 우리가 하고 싶은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거부감 없이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다. 이런 걸 공감시키고 싶은데 그 공감시킬 수 있는 방법이 어떤 걸까 하는 고민. 또 늘 똑같은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전개하는 게 아니고 어떤 소재라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이 뭘까하는 그런 게 늘 고민이다.

- 6mm를 쓰는데 그걸 들고 가면 확실히 연기자들의 거부감이 덜하고 솔직해진다는데.
▲ 그렇다. 거부감이 덜해 여러 면에서 자연스런 장면들이 나오는 것 같다. 일부러 풀 샷 카메라 같은 것도 가구 밑에다 숨겨서 놓는다. 어디서 나를 잡는지도 사실은 잘 모르는 거다. 카메라 한 대면 아 저기 카메라가 있구나 할텐데 그래서 난 어깨만 나오는 구나 이럴 수 있는데 카메라 세 대가 동시에 도니까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모든 테이크를 끊지 않고 한번에 가는 위주로 하니까 최선을 다하게 된다. 끊어서 가는 것 즉 한번 더 간다는 건 연기가 된다. 연기자들 중에는 이런 방식을 어려워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편안하게 가는 편이다.

- 어떻게 보면 이 드라마는 그 기존 형식을 깬다는 자체가 포인트일 수 있겠다. 그런 면에서 형식을 고민할 때 고민 끝에 나오는 순수 창작인가 아니면 다른 것들을 참고하나.
▲ 캐릭터는 아무래도 여러 드라마나 영화에서 참고를 하게 된다. 이런 것들이 있어서 거기서 조금 더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형식에 있어서 물론 ‘블레어 위치’ 같은 사실인지 허구인지 알 수 없는 느낌의 형식이 어느 정도 영향을 안 줬다고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거 비슷한 건 어디에도 없다. 그런 것들이 다 모여서 된 거다.

- 시즌 2 이후에도 형식 고민을 계속 할 것인지. 대부분 자기 형식을 고집하는 분들이 많은데 다큐드라마란 형식을 계속 가져갈 것인지.
▲ 다큐드라마란 장르는 독특한 스타일로 계속 갔으면 좋겠다는 조언을 많이 듣는다. 내가 아니어도 다른 분들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계속 이걸로 갈 거냐면 그건 아닌 거 같다. 늘 새로운 걸 고민하는 게 내 취향인 거 같다.

- 케이블에서 할 수 있는 모범답안 같은 드라마다.
▲ 환경이 그렇게 만든 거다. 제작비만 봐도 시즌 1은 회당 3500이다. 참고로 키드갱 같은 건 회당 2억이 들었다고 한다.

- 환경이 그러게 만든 건 사실인데 케이블에서 하는 이런 시도들이 공중파에서 하지 않는 시도를 해서 결국 드라마 전체 발전에 이바지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
▲ 늘 듣는 말이 자극 받게 만들어라. 뒤통수를 쳐라. 이런 말이다. 그게 존재가치가 될 수 있다 생각한다.

이 드라마는 기존 딱딱하게 굳어있는 여타의 드라마들이 주는 답답함을 깨뜨리는 통쾌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만날 똑같이 흘러가는 드라마들의 공식들에서 벗어나 어떤 반향을 일으켰을 때 주는 통쾌함이다. 그것은 이 드라마 속의 영애씨가 순간순간 주는 통쾌함과 맞닿으면서 동시에 이 드라마의 존재이유가 되기도 하다. 매번 새로운 시도, 새로운 형식, 새로운 내러티브를 고민하는 PD가 있다는 건, 우리네 드라마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막돼먹은 영애씨’의 고군분투 자체를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로 만든다.

자매애로 보여지는 동지의식

참 이상한 일이다. 인터넷사전에 ‘형제애’라고 치면 ‘형이나 아우 또는 동기(同氣)에 대한 사랑’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반면, 왜 ‘자매애’라는 단어는 없는 것일까. 신데렐라와 못된 언니들 혹은 콩쥐와 팥쥐 같은 고전들 속 캐릭터들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틀에 박힌 텍스트 공식들이 만들어낸 결과일까.

하지만 드라마들은 꽤 여러 번 자매애의 가능성을 포착한 바 있다. ‘여우야 뭐하니’의 병희(고현정)와 준희(김은주), ‘연애시대’의 은호(손예진)와 지호(이하나), ‘내 남자의 여자’의 지수(배종옥)와 은수(하유미)가 대표적이다. 이들의 자매애는 모두 늘 만나면 서로를 못 잡아먹어 한이라는 듯 으르렁대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사실은 서로를 깊이 배려하고 있는 속내를 내보인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렇게 자매들이 드라마 속에서 서로 의견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여성들의 서로 다른 입장(애정관, 결혼관 등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자 캐릭터들의 개성은 더 살리고, 공감의 폭은 더 넓어진다. 재미있는 것은 애정관, 결혼관이 달라 싸우던 이들이 결국에는 자매라는 끈으로 묶여지면서 묘한 동지의식을 끌어내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여성들의 연대의식 같은 것이다. 그 대표주자로 꼽을 수 있는 건 역시 ‘내 남자의 여자’의 지수와 은수다.

“이런 언니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들의 자매애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이라는 연대의식 속에서 피어났다. 이 드라마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드라마 자체가 추구하는 것이 멜로가 아닌, 결혼제도나 남녀문제 같은 사회성 짙은 메시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여우야 뭐하니’나 ‘연애시대’ 역시 기존 관습에 던지는 사회성 짙은 질문들이 있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여우야 뭐하니’가 사회 통념으로 생각되는 나이와 결혼의 문제에 있어서 병희와 준희란 캐릭터를 통해 연령차를 극복하려 했다면, ‘연애시대’는 은호와 지호를 통해 결혼이란 사회적 관습에 연애라는 잣대를 들고 질문을 던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멜로가 가진 틀이 강했기에 ‘내 남자의 여자’처럼 그것이 전면에 부각되진 않았지만 그 속에서 이들 자매들이 보여주는 은근한 서로에 대한 애정은 바로 이런 동일한 적(?)을 앞에 두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매애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도 자매들 간의 동지의식이 드라마 자체로 드러나는 캐릭터들이 있다. 그것은 ‘막돼먹은 영애씨’의 영애와 영채다. 둘은 서로 다른 외모로 똑같은 외모지상주의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 비슷한 결론에 다다른다. 막돼먹은 영애씨가 살기 어려운 만큼, 잘 빠진 영채씨의 삶도 어렵다는 것. 결국 이 드라마는 이 둘의 대비와 거기서 얻어지는 한 가지 결론, 즉 ‘이 사회에서 여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영애와 영채가 굳이 자매애를 강조하지 않아도 한 가닥의 끈으로 연결되는 것은 그들이 이 시대를 사는 여성이라는 동지의식이다.

멜로 드라마들이 보여주었던 연애에 시청자들이 식상해했던 것은 어쩌면 그 연애 밑바닥에 공유되어 있는 남성중심의 사고방식이나 사회체계에 더 이상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현대의 여성들에게 참신하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아예 남성중심의 사고방식을 제거해버린 여성들만의 환타지(커피 프린스 1호점)를 그리거나, 그런 사고방식과 싸우는 여성들의 이야기(막돼먹은 영애씨)가 유리하다. 만일 드라마 속 자매들의 끈끈한 정에 마음을 빼앗겼거나, 자매들이 좀더 자매애를 보여줬으면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도 그들과 한때 암묵적인 동지였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시대, 연애보다 애틋한 것은 어쩌면 자매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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