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쎈 여자 도봉순’, 박보영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드라마는 끝났지만 박보영이 남긴 잔상은 꽤나 오래 지속될 것 같다. 마지막회 시청률 8.957%(닐슨 코리아). JTBC로서는 이제 종영한 <힘쎈 여자 도봉순>이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가장 큰 이유다. 그간 완성도 높은 드라마들을 꾸준히 만들어왔지만 시청률에 있어서는 그다지 괄목할만한 성적을 내지 못했던 JTBC 아닌가. 그러니 이 <힘쎈 여자 도봉순>이 난공불락으로만 여겼던 시청률의 성을 깨버린 건 JTBC로서는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힘쎈여자 도봉순(사진출처:JTBC)'

그리고 이 드라마가 이처럼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누가 뭐래도 박보영이라는 독보적인 연기자 덕분이라는 것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게다. 생각해보라. 어찌 보면 만화 같은 슈퍼파워걸 도봉순이 보여주는 엄청난 괴력의 장면들은 자칫 잘못하면 유치하게 느껴지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살짝 치기만 해도 사람이 날아가고, 문짝을 통째로 뜯어내거나 달리는 버스를 맨 손으로 멈춰 세우며, 수십 명은 될 조폭들을 간단히 제압해버리는 그 장면들은 우리네 드라마에서는 좀체 성공하기 어렵다는 B급 정서까지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비현실을 드라마는 그간 범행의 대상으로만 주로 다뤄지던 여성 히어로를 세움으로써 심정적 지지로 바꾸었고, 그 B급 정서가 코미디적으로 연출되면서 믿기 어려운 액션들마저 웃어넘길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런 난관들을 모두 허용시킨 건 다름 아닌 박보영이라는 배우 자체였다. 어른들에게는 복스럽고, 남녀 모두에게 귀엽게 다가오는 이 대체불가의 배우는 액션이면 액션, 멜로면 멜로, 코미디면 코미디 등등 뭐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게 만드는 힘을 발휘했다. 

이 드라마에서 박보영이라는 배우가 한 장르들을 떠올려보라. 스릴러는 물론이고 액션, 멜로, 코미디, 청춘 성장드라마 등등 그 스펙트럼이 너무나 넓다. 마치 아이처럼 눈을 반짝거리며 올려다볼 때는 보는 이들을 가슴 설레게 만들고, 조폭들을 한꺼번에 때려눕힐 때는 그간 억눌렸던 감정들이 시원하게 풀어지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취업난을 겪고 있는 청춘들에게는 개인적 성장을 통한 어떤 위로와 위안을 주고, 웃을 일 찾기 힘든 현실에 잠시 동안 모든 걸 잊고 웃을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이렇게 다채로운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배우가 있을까.

액면대로 보면 드라마가 굉장한 메시지나 형식미 혹은 내용적 완성도를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조금씩 있는 흠결들을 채워 넣어준 건 다름 아닌 박보영이다. 그녀가 하기 때문에 용서되는 장면들도 있었고, 그녀가 있어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게 됐던 허술한 이야기 설정들도 적지 않았다. 

이 배우가 놀라운 건 보통 우리가 ‘국민 여동생’ 같은 표현으로 지칭할 때 생기는 어떤 이미지의 장벽 같은 것들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 귀여운 여동생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뭇 남성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여성으로서의 이미지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 이건 배우로서 박보영이 가진 가장 큰 독보적인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작년 방영해 큰 성공을 거뒀던 tvN <오 나의 귀신님>은 박보영이라는 배우의 꽃길이 이미 시작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이제 <힘쎈 여자 도봉순>으로 확실히 입증된 그 힘은 벌써부터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를 갖게 만든다. 이제 자신의 힘을 자각한 박보영의 또 다른 비상을 기대한다. <힘쎈 여자 도봉순>에서 도봉순이 결국 자각했던 그 힘처럼.

‘도봉순’, 어째서 멜로와 여성주의 사이에서 방황하나

결국 힘쎈 여자 도봉순(박보영)이라는 슈퍼히어로라고 해도 남자의 구원을 받아야 될 존재여야만 할까. JTBC 금토드라마 <힘쎈 여자 도봉순>이 예상과 달리 엉뚱한 전개를 보이는 것이 대해 시청자들이 실망감을 드러내고 있다. 제대로 된 여성주의적 관점을 담은 드라마라는 생각과 달리, 슈퍼히어로인 도봉순이 여전히 남자에게 의존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힘쎈여자 도봉순(사진출처:JTBC)'

여성들을 감금해 사육하는 엽기적인 사이코 김장현(장미관)은 도봉순을 유인해 선량한 사람을 자신으로 위장시켜 다치게 함으로써 그녀의 힘을 무력화시켰다. 그런 설정이야 김장현과 도봉순의 팽팽한 대결구도를 만드는 것으로서 필요했던 장면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위기 상황에 나타난 안민혁(박형식)과 인국두(지수)가 결국은 무력화된 도봉순을 구한다는 설정은 너무 쉬우면서도 안이한 해결책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그 장면은 결국 도봉순처럼 힘쎈 슈퍼히어로라고 해도 안민혁이나 인국두 같은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되는 존재처럼 비춰진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가 지금껏 해오려던 이야기의 긴장감을 일시에 무너뜨렸다. 힘쎈 여자는 과연 예쁘지 않고 사랑받지 못할까라는 드라마가 화두로 던진 문제의식은 끝없이 도움을 갈구하고 남성 캐릭터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도봉순의 각성 없는 모습 앞에 조금씩 휘발되고 있다. 

사실 <힘쎈 여자 도봉순>이 어떤 통쾌함을 주었던 장면들은 동네 조폭들을 단신으로 대적해 모두 병원 신세를 지게 만드는 그런 것들이었다. 결국 애초부터 도봉순이라는 괴력을 이겨낼 수 있는 적수는 찾기 어려웠다는 것. 그것은 여성들만 범행대상으로 삼아 엽기적인 범죄를 저질러온 김장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결국 꼼수를 쓰게 되는 것이지만 이런 꼼수로 슈퍼히어로가 무너질 리는 없다. 

그러니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도봉순이 가진 진짜 문제는 이런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들이었다. 힘쎈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스스로 인정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주체성의 결여가 그것이다. 그러니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에 종속되어 수동적으로 사랑받는 걸 갈구하는 모습에서 나아가 스스로 가진 자존감을 바탕으로 대등한 관점에서 사랑을 주고받는 그런 도봉순으로 깨어나길 시청자들은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3회 분을 남겨 놓은 상황에서 도봉순은 한 걸음도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된 건 애초의 주제의식을 끝까지 밀어붙이기 보다는 멜로와 여성주의 사이에서 드라마가 지나치게 갈등을 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도봉순과 안민혁의 멜로가 주는 힘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 멜로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새롭게 그려낼 수는 없었을까.

물론 남은 3회 분량을 봐야 결론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지금의 멜로 구도는 너무 전형적이다. 위기에 상황에 몰린 여성을 구하러 달려오는 왕자님의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멜로 상황을 거꾸로 뒤집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위기 상황의 남자들을 오히려 구해내는 보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도봉순이었다면.

‘도봉순’, 어째서 멜로에 대한 기대가 커진 걸까

본격 장르물에 대한 시청자들의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다. 그래서 과거에는 본격 장르물에도 멜로나 가족극 요소가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런 멜로의 틈입에 대해 시청자들은 오히려 긴장감을 떨어뜨린다며 비판적인 시선을 갖게 되었다. 최근 방영됐던 <피고인>이나 <보이스> 같은 본격 장르물이 멜로 없이도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 끈 건 그래서다. 

'힘쎈여자 도봉순(사진출처:JTBC)'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JTBC <힘쎈 여자 도봉순>의 경우는 멜로에 대한 기대가 훨씬 더 커지고 있다. 물론 이 드라마를 본격 장르물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힘쎈 여자 도봉순>은 여러 장르들, 이를 테면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스릴러 장르와 코미디, 게다가 가족드라마적 요소들과 멜로까지 복합적인 장르를 보인다. 

그래도 그 메인으로 깔려 있는 건 여자들만을 공격대상으로 삼는 사이코패스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다. 그 사이코패스와 맞서는 강력계 형사 인국두(지수)와, 재벌가의 승계를 두고 벌어지는 테러 앞에서 위협을 느끼는 안민혁(박형식)이 만들어내는 긴장감에 도봉순(박보영)이 양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슈퍼히어로로 서 있는 구도. 

이미 도봉순은 자신이 그간 드러내지 않았던 힘을 제대로 써야 한다는 걸 각성했고, 안민혁과의 트레이닝을 통해 그 힘을 조절하는 방법도 배웠다. 그러니 그녀를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사실상 이 드라마 상의 어떤 악역들에게도 없다. 수십 명의 조폭들을 단신으로 상대하며 모두를 병원 중환자실로 몰아넣는 그녀가 아닌가. 백탁(임원희)은 그래서 그녀 앞에 일찌감치 무릎을 꿇는다. 

그렇다면 이미 자신의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도봉순에게 진짜 목표는 무엇일까. 드라마는 결국 주인공의 결핍을 욕망으로 삼아 그것을 어떻게 쟁취하는가에 따라 동력을 얻기 마련이다. 물론 여자들을 감옥 같은 철창에 가둬두고 마치 전리품처럼 여기는 사이코패스가 버젓이 살아있지만 그를 잡는 건 이 드라마의 한 과정일 뿐, 목표 그 자체라고 보기는 어렵다. 

도봉순은 사실 정의의 실현 같은 것에 목을 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그 자체로 소중하게 느낄 수 있는 것에 더 강력한 욕망을 갖고 있다. 힘이 세다는 것을 그녀는 숨기며 자라왔다. 여자가 힘이 세다는 것을 마치 무언가 대단히 잘못된 일인 양 받아들였던 것이고, 그래서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그녀는 자신을 부정하고 있었던 것. 

우리가 <힘쎈 여자 도봉순>을 보면서 이상하게도 도봉순의 멜로를 더욱 기대하게 되는 건 바로 그것이 그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누군가에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다. 숨기고 왔던 괴력을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그런 그녀를 그 자체로 사랑하는 남자의 등장은 바로 도봉순이 꿈꾸는 것일 테니 말이다. 

<힘쎈 여자 도봉순>의 멜로는 그저 남녀 간의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거기에는 남녀 간의 성별로 나뉘어지는 역할이나 선입견들을 깨는 요소가 들어가 있다. 남녀의 성역할에 따라 누가 누구를 보호해주고 보호받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사랑의 이야기가 이 드라마의 멜로가 그려내려는 것이다. <힘쎈 여자 도봉순>이 스릴러 장르물의 틀을 가져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로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커지는 건 그래서다.

'도봉순' 박보영, 이 슈퍼히어로가 던진 진짜 메시지

“너 왜 이렇게 치마가 짧아? 너무 예쁘게 하고 다니지마.” 인국두(지수)의 이 말에 도봉순(박보영)은 하루 종일 싱글벙글이다. 젊은 여자들만 폭행 납치하는 사이코가 출몰하는 동네, 형사 인국두의 그 말은 물론 도봉순이 걱정 되어 하는 말이겠지만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비뚤어진 여성관을 담고 있다. 세상에 벌어지는 여성관련 성폭력 사건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 여성 때문인가. 너무 예쁘게 하고 다니기 때문인가. 

'힘쎈여자 도봉순(사진출처:JTBC)'

놀라운 건 인국두의 이런 말에도 도봉순은 아무런 자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짝사랑해온 인국두의 이 말 속에 담겨진 “너무 예쁘게”라는 말에만 집중하며 행복해한다. 이런 상황은 시청자들이 JTBC 금토드라마 <힘쎈 여자 도봉순>의 인국두와 도봉순의 관계를 보며 어딘지 잘못됐다고 여겨지는 이유다. 두 사람은 너무나 순수해보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들은 사회적 편견과 선입견에 빠져 있다. 인국두가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처럼, 도봉순도 사회가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여성들에게 부가하는 ‘예뻐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있다.

그래서 도봉순은 그녀가 안민혁(박형식)과 술을 마시다 만취해 클럽에서 봉을 뽑아 흔든 것이 카메라에 찍혀 SNS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것에 창피해하며 책상 아래로 들어가 우울해한다. 사실 이 장면은 여성을 성적으로만 소비하는 세태에 통쾌한 한 방을 날리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하다못해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봉 하나를 세워두고 여성들이 봉춤을 추는 장면을 내보내는 시대가 아닌가. 그 봉을 뽑아 휘두르는 도봉순의 모습은 그냥 넣은 장면이 아닐 게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극중 캐릭터 도봉순은 이런 자신에 대한 자각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힘쎈 여자 도봉순>이 그 로맨틱 코미디의 포장 아래 숨겨둔 진짜 메시지가 아닐까. 이 드라마는 그래서 도봉순이 동네에 출몰하는 사이코를 제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목표가 그녀가 스스로 각성하는 일이다. 사이코가 젊은 여성들을 유괴해 자신의 은신처에 가둬두는 비뚤어진 성의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도봉순도 또 인국두도 마치 공기처럼 되어버린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여성을 성추행하는 치한의 손가락을 비틀어 응징하면서 “내가 힘을 제대로 쓴다면 세상이 좀 더 나아질까?”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도봉순은 그래서 이러한 여성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지만, 자기가 만든 편견에 갇혀 그 힘을 공공연히 세상에 드러내는 걸 창피하게 여기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도봉순 스스로가 이것이 여성으로서 창피한 것이 아니라 자랑스러워할만한 일이라는 걸 깨닫고, 나아가 그러한 편견과 선입견을 깨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걸 알게 되는 과정은 그녀가 놀라운 힘을 가진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된다. 그것은 이 땅의 여성들이 힘이 없어서 때론 핍박받는 대상이 된 것이 아니라, 그 존재하는 힘을 스스로 인정하거나 각성하지 않아서 그렇게 됐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결국 이 도봉순이 ‘힘쎈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될 인국두를 기대하게 된다. 그것은 여성에 대한 편견을 깨는 멋진 남성으로서의 자각이 될 테니 말이다. 

이 드라마가 이러한 캐릭터의 함의를 담고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역시 박보영이라는 연기자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길 수밖에 없다. 힘과 여자를 이토록 멋지면서도 귀엽고 러블리하게 봉합해낼 수 있는 이 연기자의 결이야말로 이미 시청자들에게 ‘힘쎈 여자’ 도봉순이 얼마나 예쁜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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