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 작가는 여전한데, 세상은 바뀌었다

 

종영한 SBS <그래 그런거야>는 실패했다. 김수현 작가는 흥행 보증수표라는 공식도 깨졌다. 물론 이것은 김수현 작가가 예전만 못하다는 뜻도 아니고, <그래 그런거야>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뜻도 아니다. 김수현 작가는 여전히 자신만의 작법으로 시청자들의 눈을 잡아끌 수 있는 능력을 보였고, <그래 그런거야>는 대가족의 여러 캐릭터들을 능수능란하게 이끌어가면서 어떤 인생의 통찰을 포착해내는 완성도도 분명히 있는 드라마였다. 무엇보다 자극적인 막장 설정으로 치닫는 드라마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갔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 그런거야(사진출처:SBS)'

하지만 실패는 실패다. 최고의 고료를 받는 김수현 작가를 SBS가 주말드라마 시간대에 세웠던 건 그간 참패의 늪을 벗어나지 못했던 주말시간대의 부활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의미도 중요하지만 성과도 중요했다. 하지만 시청률은 줄곧 한 자릿수에 머물렀고 시청자들의 반응도 뜨겁지 못했다. 시청자들은 심지어 옛날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는 혹평까지 내놓았다.

 

어째서 김수현 작가는 변함이 없는데 드라마에 대한 정반대의 반응들이 나왔을까. 그건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런거야>는 물론 의도적으로 가족의 가치를 내세우기 위해 3대 대가족을 그렸지만, 그건 이제 네 가구 중 한 가구가 1인 가구가 된 작금의 현실과는 너무나 유리된 것이었다.

 

변화된 것은 이런 소재적 내용만이 아니었다. 김수현 작가의 작품은 주로 대사 중심으로 이어진다. 즉 어떤 면에서는 TV를 보지 않고 귀로만 들어도 그 내용이 이해가 갈 정도다. 라디오 드라마 같은 느낌을 줄 때도 있다. 게다가 김수현 작가의 대사는 속사포다. 인물들마다 끊임없이 수다처럼 이야기를 쏟아낸다. 이런 방식의 드라마 작법은 지금의 시청자들에게는 너무 고루한 느낌을 준다. 이른바 대사가 아닌 영상을 통해 어떤 뉘앙스와 의미를 던져주기도 하고, 때로는 영상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지금의 시청자들이 드라마에서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한 때는 본격 장르물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많아도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었던 시절이 있었다. 단 몇 년 전의 이야기다. 하지만 최근 들어 멜로 없이도 가족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도 성공하는 본격 장르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tvN에서 시도됐던 몇몇 본격 장르물들은 호평은 물론이고 시청률도 가져갔다. 심지어 영화제작인력이 투입되어 영상미까지 더해진 tvN 드라마들은 시청자들의 눈을 높인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시청자들은 이미 변화했는데, <그래 그런거야>는 여전히 몇 년 전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그것은 이 드라마가 추구하려는 것처럼 의도된 회귀일 수 있었지만, 이미 김수현 작가의 늘 비슷한 패턴을 반복하는 가족드라마의 틀에 이제 시청자들은 그만한 호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게다가 출연자들까지 매번 비슷한 김수현 작가 사단으로 채워지니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그게 그거인 드라마처럼 여겨질 수밖에.

 

결과적으로 <그래 그런거야>는 시대착오적 드라마가 되었다. 그건 김수현 작가가 의도한 것도 아니고 또 필력이 떨어져서도 아니다. 다만 세상은 변화하고 있는데, 드라마는 변화하지 않고 멈춰져 있었던 결과다. 하지만 이것 역시 김수현 작가의 책임이라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현재와 호흡하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모든 작가는 과거의 작가가 되기 마련이니까. 제아무리 대작가라 하더라도.

<나 혼자 산다>, 잘 나가는 이유? 남자들에 있다

 

설 특집으로 방영된 <남자가 혼자 살 때>가 정규편성 되면서 굳이 몇 번의 제목을 고치더니 <나 혼자 산다>가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남자가 혼자 살 때>의 뉘앙스가 어딘지 소극적이고 궁상맞은 느낌을 주었던 반면, <나 혼자 산다>는 좀 더 당당하고 즐기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 모인 무지개 회원들은 구호를 굳이 이렇게 외친다. “나 혼자 산다! 자알-”

 

'나 혼자 산다'(사진출처:MBC)

사실 혼자 사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뭐 그리 재미있을까 한번쯤 의구심을 갖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지금껏 그런 이야기를 방송을 통해서(특히 예능에서) 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방송이 조명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란 여행을 가거나(1박2일) 특별한 도전을 하거나(무한도전, 남자의 자격) 게임이나 스포츠를 하는(우리동네 예체능) 식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방송은 이 남자들이 지금껏 보여주지 않았던 면들을 보여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아빠 어디가>는 대표적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아빠들은 지금껏 바쁘다는 핑계로 좀체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던 아이들과 1박2일의 추억 여행을 떠난다. 처음에는 아내 없는 아이와의 여행이 어색하기도 하고 영 적응이 안 될 정도로 낯설기도 했지만, 몇 주가 지난 지금 아빠들은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잠이 들고 스스로 척척 아이들의 아침밥을 차려낸다. 조금 투박하긴 해도 아빠와 함께 놀고 아빠가 차려주는 밥을 맛있게 먹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새롭다. <아빠 어디가>의 성공은 아이들이라는 순수의 지대가 일등공신임에 분명하지만 거기 새로운 남자들의 이야기가 주는 호기심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관전 포인트인 셈이다. <일밤>이 남자들의 군대이야기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같은 의도가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새로운 남자들의 이야기가 핵심적인 재미를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은 <나 혼자 산다>가 아닐까 싶다. 이 프로그램의 남자 이야기가 새로운 것은 지금껏 우리가 잘 보지 못했던 남자들의 수다와 놀이(그것도 남자들끼리 놀거나 혼자 노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실 노홍철과 김태원, 이성재, 서인국, 김광규, 데프콘 같은 너무나 다른 색깔을 가진 남자들이 카페 같은 공간에 둘러앉아서 신나게 수다를 떠는 모습은 그 자체로 우습다.

 

<우리 결혼했어요>에 나간다면 누구랑 나가고 싶냐는 노홍철의 질문에 김태원이 강수연을 얘기하고, 서인국이 김혜수를 떠올리며, 김광규가 김완선을 지목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건 이렇게 남자들끼리 둘러앉아서도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이야기꽃이 주는 새로움이다. 그 누가 수다를 여성들의 전유물이라고 했던가. 누군가와의 정이 그리울 수밖에 없는 이 혼자 사는 남자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였을 때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심지어 이성재처럼 프로그램이 끝나고도 자리를 뜨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재미는 이들의 놀이다. 서인국의 집을 방문한 노홍철이 그 구질구질한 방에서 삼겹살을 구워먹으며 그 방에 동화되는 즐거움을 느끼거나, 노홍철의 제안으로 한강변에서 야경을 즐기는 장면은 그것이 너무나 일상에 닿아있어 지금껏 여타의 예능에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흥을 만들어낸다. 여행이나 도전 같은 특별한 계기가 아닌 다음에야,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에서 남자와 남자가 함께 노는 장면은 그리 흔하지 않다. 기껏해야 남자들의 만남이란 술자리에서 시작해 술자리로 끝나기 일쑤가 아닌가. 그만큼 우리네 남자들은 일할 줄은 알아도 놀 줄은 잘 모른 채 살아왔던 게 사실이다.

 

김광규의 집을 방문한 김태원이 즉석에서 기타를 조율해 주고 레드 제플린의 곡을 연주하며 노는 모습이나, 데프콘의 집을 방문한 이성재가 힙합 리듬에 맞춰 어색하지만 즉석에서 랩을 하는 장면은 그래서 흥미롭다. 수다 떠는 남자들이나 저들끼리 노는 남자들의 모습은 어쩌면 과거와는 갑자기 달라진 시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남자들에게는 하나의 판타지가 되기도 한다. 왜 남자들이라고 그렇게 한가롭게 수다를 떨거나 놀고 싶지 않겠는가. 다만 그렇게 사는 남자가 무능력하고 무책임하다 교육받아온 탓이 클 뿐이다.

 

<나 혼자 산다>는 그래서 독신자들(혹은 독거자들. 제목에서 남자를 뺏으니 여자도 출연이 가능해졌다)의 라이프스타일을 하나의 트렌드로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지만, 그것은 또한 달라지고 있는 가족 관계 속에서 남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남편, 가장, 아빠, 회사원 같은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만 늘 서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혼자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남자들이라면 그래서 이 프로그램을 보며 그 삶이 또한 유쾌하고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노홍철이 말한 것처럼 자신이 스스로를 아끼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때로는 그 어떤 즐거움보다 크다는 것을 판타지처럼 발견할 수도 있을 게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