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요한’, 이렇게 깊은 질문을 던진 의학드라마 있었나

 

그는 과연 환자의 생명을 끝까지 살리기 위해 그토록 간절했던 걸까. 아니면 자신과 똑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통해 자신 역시 살고픈 그 마음을 투영했던 걸까. SBS 금토드라마 <의사 요한>에서 갑자기 의식을 잃은 무통각증 환자 이기석(윤찬영)을 어떻게든 살려내기 위해 차요한(지성)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민태경 과장(김혜은)이 더 이상 지속하는 건 환자에게 고통만 더 가중시키는 거라 막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환자의 어머니가 이제 편하게 보내주고 싶다고 하자 그는 멈췄지만, 절망적인 모습이었다.

 

자신과 똑같은 증상을 갖고 있는 환자 기석이기 때문에 요한은 더더욱 집착하는 모습이었다. 그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어떻게든 그 원인을 찾아 살려내려 안간힘을 썼다. 자신 역시 점점 몸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집착은 더 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은 분명했다. 의사로서 최선을 다해도 신의 뜻은 거스를 수 없는 일이니.

 

의사란 어떤 존재여야 할까. 또 의사가 할 수 있는 일과 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의사 요한>의 던지는 질문은 꽤 깊다. 생명과 죽음에 대해 이토록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의학드라마가 있었던가. 그것은 아마도 통증의학과 함께 존엄사라는 소재가 갖는 무게감 때문일 지도 모른다.

 

생명이 겨우 유지되고는 있지만 지독한 통증 속에서 버텨내는 것이 과연 환자를 위한 일인가에 대한 질문은 마치 차요한이 안락사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즉 고통을 해결해준다는 안락사 약 케루빔이 전직 장관이었던 이원길(윤주상)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는 분노했다. 이들을 ‘살인자’라고 했다. 이원길은 “죽음이 뭐 그렇게 대단하냐. 누구나 죽는 거 아니냐. 하지만 누구나 평온하게 죽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평온하게 죽는 건 행운”이라 말했지만, 차요한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 약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생명에 대한 생각들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즉 의사들도 또 환자들도 끝까지 생명을 지키려 애쓰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단지 고통이 있다는 것만으로 쉽게 생명을 지워내게 된다면 그건 생명에 대한 엄청난 혼돈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보통의 의학드라마들이 의사를 전지전능한 존재로 그려낸다. 즉 아픈 환자에게 의사란 신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그려내곤 했다는 것. 하지만 <의사 요한>은 의사는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 신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한다.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러니 의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하는 것뿐이라고. 신의 일을 의사가 대신 해선 안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희망 없이 고통뿐인 환자를 방치하는 것 또한 의사의 일은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이 지점에서 <의사 요한>이 보여주는 의사관에 대한 독특함이 드러난다. <의사 요한>은 의사가 단지 병을 고치고 환자를 살리는 존재가 아니라, 환자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에게 가장 이로운 선택을 해줄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통증 속에서 삶을 지연하거나 지연하지 않는 건 환자의 선택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삶은 케루빔 같은 약이 있어 맘대로 끝장낼 수 있는 그런 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이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차요한은 신적인 천재적 의사가 아니라, 한없이 생명 앞에 부족한 의사로 그려진다. 심지어 보통 이하의 무통각증을 겪는 의사라니. 자신의 한계를 환자에게 투영해 더 세심하게 환자의 고통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차요한이란 존재는 그래서 우리가 죽음 앞에 무력해도 어째서 타인의 고통과 생명에 더 집착하게 됐는가를 잘 그려낸다. 결핍이 만드는 절실함이 때론 가장 인간적인 노력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신의 일 앞에 무력해도 의사(인간)는 의사로서의 일을 끝까지 해야 한다는 것.(사진:SBS)

‘하백의 신부’, 코미디로 무장하고 있지만 그 속내는

“중증 강박장애였을 거에요. 완전무결을 위한 강박. 피해망상. 박상철 그 사람 계속 나를 만나고 싶어 했어요. 마지막 구조신호였을 거예요. 마봉열씨도 그렇고 이번 일도. 의사인 내가 봐야할 걸 보지 않고 들어야 할 걸 듣지 않아서 생긴 일들일까요?” tvN 월화드라마 <하백의 신부 2017>의 윤소아(신세경)는 하백(남주혁)에게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들의 아픈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자신을 그렇게 자책한다. 

'하백의 신부(tvN)'

하지만 그녀는 또한 그렇게 정신이 아픈 이들의 삶에 연루되는 것을 버겁게 느낀다. 정신과 의사로서 누구보다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지만 그로 인해 겪을 부담은 피하고 싶은 것. 그래서 하백에게 그 정반대의 감정을 토로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런 일로 책임감 갖거나 미안해하거나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냥 내 생각하면서 살고 싶어요.”

하백은 그러나 그녀의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확신한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근데 하난 확실하지. 넌 네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할 거야. 넌 애초에 그렇게 생겨먹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상황을 자전거 바퀴에 비유해 이야기한다. “내가 바퀴에 관심 있어서 좀 찾아봤는데 자전거라는 게 그렇더군. 넘어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쓰러지지 않아. 네 마음이 넘어지려는 쪽이 어딘지 너만 모르는 거 아냐? 자꾸 억지로 반대로 꺾으려 하면 쓰러져 골병든다.”

사실 <하백의 신부>가 가진 이야기의 기조는 판타지와 코미디다. 그래서 조금 썰렁한 코미디들이 반복되고 또 허공으로 붕 날아오르거나 고층 건물 옥상에서 떨어지는 소아를 하백이 끌어안고 구해내고,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량 위로 탈출해 내려오는 판타지적 장면들을 보다보면 흥미롭긴 해도 어딘지 너무 가볍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99%의 판타지 코미디적 설정들을 잘 들여다보면 이 드라마가 궁극적으로 하려는 1%의 진심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왜 윤소아가 하필이면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인물로 설정되어 있고, 여기 등장하는 신들이 물과 하늘같은 자연(주로 기후와 관련이 있는)을 관장하는 신들이며, 하필이면 하백의 경쟁자로 등장할 후예(임주환)라는 인물이 리조트 개발 회사의 대표인가에서 드러난다. 

후예가 하는 리조트 개발이란 다름 아닌 자연을 파헤쳐 인공적인 공간을 만들고 그것으로 부를 창출하는 사업이다. 그리고 지금 후예가 만들려는 리조트는 다름 아닌 하백을 대대로 받들어오던 윤소아의 조상들이 살던 터전이다. 그녀는 이 땅을 무려 7배의 가격으로 사겠다는 후예의 제안에 반색하지만 리조트 개발을 둘러싼 하백과 후예 사이의 대결구도는 어쩌면 윤소아를 흔들리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실로 자본의 세상에서 살아가며 돈이 신인 물신을 숭배하는 현대인들에게 <하백의 신부>는 하백이라는 자연을 상징하는 존재를 통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행복한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윤소아는 어떤 길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까. 

신석을 잃어버린 무라(정수정)와 비렴(공명)은 하백과 대립하며 심지어 그의 신력을 시험하기 위해 윤소아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아마도 이것은 신(자연)이 갖는 무심함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세상으로 오며 신력을 잃어버린 하백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이들과는 다르다. “배도 고프다며?”하고 묻는 비렴의 질문은 하백이 인간적인 고통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특별한 신이라는 걸 오히려 드러낸다. 

윤소아는 신과 인간적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며 헷갈려 한다. 정신과 의사로서 자신의 환자들이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면서도, 자신은 그런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녀는 그래서 궁금하다. “신들이 다 이 모양이라 세상이 이 꼬라지인지. 세상이 이 꼬라지라 신들이 포기하고 저 모양인지.”

그럼에도 그녀에게서 발견되는 어떤 희망 하나는 힘들게 살아가며 투덜대면서도 그런 삶조차 고마워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고맙습니다. 또 살려준 거. 그리고 오늘 종일 바쁘게 해준 거.” 그녀가 하백에게 전하는 이 한 마디는 마치 우리가 힘겨운 현실에 나갔다 돌아와 잠자리에 들 때 작은 기도 속에 담는 희망을 닮았다. 99% 판타지 코미디의 외피를 갖고 있는 <하백의 신부>가 그 안에 촘촘히 숨겨놓은 1%의 진심이다.

‘하백의 신부’가 전하려는 진심, 과연 통할 수 있을까

“잘 들어. 물의 신, 하늘의 신, 땅의 신. 우리들은 자연이다. 곧 나는 자연이다.” 하백(남주혁)의 이 대사는 낯설다. 현실적인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그건 이 주인공이 하백이라는 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낯선 말을 하는 인물 앞에 선 소아(신세경)의 황당과 당황은 마치 시청자들이 느끼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게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그 말을 듣고는 이렇게 반문한다. “나는 자연인이라고요?”

'하백의 신부(사진출처:tvN)'

우리에게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의 제목이 “나는 자연이다”라는 대사보다 훨씬 더 익숙하다. 진지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나는 하백이다”를 반복해서 말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우는 드라마는 바로 그 비현실성 때문에 초반 몰입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tvN <하백의 신부>라는 드라마는 그래서 이를 위해 병맛 코미디를 그 장르로 차용해 이 어려운 몰입을 유머로 넘어서려 한다. 

<하백의 신부>의 첫 방에 나오는 비판적 목소리들은 사실 예견된 것들이다. 이 작품은 원작 만화가 가진 ‘신계의 이야기’라는 난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계로 내려온 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나 그 신을 연기한다는 건 사실 시청자들을 몰입시키기가 몇 배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저 소아의 입장이 된다. “나는 자연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하백에게 자꾸만 “나는 자연인이라고요?”라고 묻게 된다. 

이런 병맛 코미디 설정을 몰입을 위한 전략적 장치로 세우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부분은 왜 이런 하백이라는 신의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가 하는 그 의도일 게다. 사실 비현실적인 설정과 이를 넘어서려는 병맛 코미디라는 설정의 겉면 때문에 가려져 있지만, <하백의 신부>는 첫 회에 상당 부분 그 의도를 대사 속에 드러내고는 있다. 그것은 ‘진정한 행복’에 대한 질문이다. 

“이봐 종. 넌 정말 가장 필요한 게 도오온이야? 인간에게 왜 그렇게 도오온이 필요한거지?” 하백이 묻자 소아는 말한다. “도오온이 있으면 행복해질테니까요.” 그러자 하백은 그녀의 말을 뒤집어 그 의미를 되새긴다. “이봐 종. 넌 가장 필요한 게 도오온인데 도오온을 가지면 행복해지니까. 가장 필요한 건 행복이군.”

물질적인 풍요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 소아에게 하백은 거꾸로 그녀가 진짜 원하는 건 돈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하지만 그 단순한 사실을 그녀는 머리로는 이해할지 몰라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당장 대출을 연장하지 않으면 파산할 위기에 처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은 너무나 쉽게 아주 낮은 금리에 돈을 빌릴 수 있지만, 없는 이들은 어렵게 그것도 아주 높은 금리에 울며 겨자먹기로 돈을 빌려야 겨우 살아갈 수 있는 현실 앞에 그녀는 서 있다. 

“당신 말이 맞아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행복일지 모르죠. 정말 지쳤거든요. 그러니 이제 그만 가주세요.” 그녀는 말한다. 자신이 지쳤다고. 그리고 그렇게 된 원인을 그녀는 돈이 없어서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남은 것이라곤 산 속에 있어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팔리지도 않는 땅이 전부이니. 

그 산 속에서 하백과 그녀가 마주하는 상황은 그래서 그 병맛 코미디 너머를 바라보면 자못 의미심장하다. 아무 것도 없는 그녀가 마주한 건 하백 스스로 얘기했듯, ‘자연’이니 말이다. 그 자연 속에서 네비게이션에 기대 길을 가던 그녀는 길을 잃는다. 그런데 그건 길을 잃은 것일까 아니면 자연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게 된 것일까. 

지친 현실 속에서 돈이 구원이 될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때론 아무 것도 없는 듯 보이지만 우리를 넉넉히 껴안아주는 자연이 주는 행복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하백의 신부>가 병맛 코미디 속에 숨겨 말하려는 진심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 누구나 다 가질 수 있지만 찾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자연처럼 행복도.

떡밥 넘치는 <배트맨 대 슈퍼맨>의 약한 메시지

 

사실 배트맨이니 슈퍼맨이니 하는 슈퍼히어로들에게 대단한 세계관과 메시지를 요구하는 건 과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왕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배트맨으로 그려냈던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세계가 슈퍼히어로물이 더 이상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심지어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어른들의 세계일 수 있다는 게 드러난 마당에, 꼭 이런 세계관과 메시지에 대한 요구는 절대로 과한 것이 아닌 게 되었다.

 


사진출처:영화<배트맨 대 슈퍼맨>

하도 오랫동안 예고편을 통해 떡밥을 던져놔서인지 <배트맨 대 슈퍼맨>에 거는 기대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제목대로만 보면 배트맨과 슈퍼맨이 대결하는 이 구도가 마치 아이들이나 좋아할 법한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같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슈퍼히어로물에 대해 철학적 세계관을 투영시켜 바라보는 시각이 생긴 지금, 이 대결구도는 다양한 의미와 메시지의 도출을 기대하게 만든다.

 

알다시피 배트맨은 인간이고 슈퍼맨은 외계인이다. 아니 슈퍼맨은 그저 외계인이 아니고 배트맨과 비교하면 거의 신적인 존재다. 그러니 이 대결은 인간과 신의 대결로 보일 수 있고, 나아가 인간과 이종족이라는 타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배트맨 대 슈퍼맨>은 실제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신격화되어 있는 슈퍼맨은 과연 인간을 보호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위협하는 존재인가. 슈퍼맨과 그를 쫓아 지구를 침공한 조드 장군과 일당과의 대결로 초토화되어버린 도시 속에서 배트맨은 그런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의 문제로까지 나아간다. 과연 슈퍼맨은 믿을만한 존재인가. 아니 인간이 아닌 신은 과연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인가.

 

<배트맨 대 슈퍼맨>이 그리는 신과 인간의 대결구도가 저 성서의 이야기를 따왔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지구를 산산조각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슈퍼맨은 신적 존재이지만 그는 인간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 위대한 사랑은 지구로 떨어진 아기를 키워준 어머니로부터 나온다. 이런 인물 캐릭터에서 우리는 성서의 많은 인물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철학적인 이야기의 구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그 진지한 질문보다는 간단한 해결과 블록버스터 볼거리에 더 치중한다. 물론 그 볼거리는 잭 스나이더 감독의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충분히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 끌만큼 매력적이다. 게다가 향후 쏟아져 나올 DC 코믹스의 히어로들 이야기에 대한 떡밥들도 넘쳐난다. 아마도 이 작품으로 인해 앞으로 나올 저스티스 리그의 슈퍼히어로 각각의 이야기들 역시 관심을 끌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도입부분의 진중한 메시지가 후반부에서 흐지부지되는 과정은 기대한 만큼 큰 실망감을 남긴다. 그래서 <배트맨 대 슈퍼맨>이 차용한 신과 인간의 이야기 같은 철학적 주제가 앞부분에 강조된 것은 후반부의 말도 안 되게 기막힌 볼거리들을 그저 만화가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하기 위한 장치 정도로 여겨지는 면이 있다. 만일 앞부분의 진중한 질문들이 없었다면 영화 후반부의 많은 장면들은 너무 과도해 실소가 나왔을 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영화는 재밌다. 적당히 진지하고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시각적 즐거움이 넘쳐난다. 하지만 <다크나이트 라이즈> 같은 진중한 메시지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지도 모른다. 이것은 어쩌면 그만큼 큰 기대감 때문일 수 있다. 어차피 철학적 질문을 던졌다면 그만한 메시지를 담아냈어야 한다는 그 기대. 혹평이 쏟아진 건 이제 슈퍼히어로물에서도 철학적 주제를 기대하게 된 그 달라진 시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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