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되지 않은 연기돌에게 유리한 위치란 없다

 

연기하는 아이돌, 이른바 연기돌들은 연기에 있어서 훨씬 더 냉정한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 당연한 것이 배우를 지망하는 신인 연기자들이 오랜 시간을 거쳐 차근차근 밟아도 오르기 어려운 자리에 아이돌로서의 인지도가 높다는 이유로 떡하니 캐스팅 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대중들은 훨씬 더 까다로운 잣대를 갖고 이들의 연기를 들여다보게 된다.

 

'달의 연인(사진출처:SBS)'

그래도 작년부터 연기돌에 대한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tvN <응답하라1988>에서 혜리가 덕선이 역할로 괜찮은 평가를 받았고, SBS <미녀 공심이>에서 민아 역시 그리 큰 이물감을 주지 않는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특히 tvN <굿와이프>의 나나는 지금껏 예능에서 가졌던 비호감적인 요소마저 김단이라는 컬크러시 캐릭터를 통해 한 방에 일소해버리는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연기돌들에 대한 반응은 점점 가라앉고 있다. 종영한 KBS <함부로 애틋하게>의 수지는 온몸을 던지는 눈물 연기를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너무 비슷한 톤의 연기를 반복한다는 뼈아픈 지적을 듣기도 했다. 또 현재 방영되고 있는 SBS <달의 연인>의 아이유는 이 작품이 가진 문제를 거의 혼자 떠안다시피 할 정도로 연기에 대한 혹평이 쏟아졌다. <프로듀사>에서 괜찮은 연기를 보여줬던 그녀는 어쩌다 이번 작품에서는 이런 혹평을 듣게 된 걸까.

 

사실 연기돌들의 호불호는 작품의 성패와 무관하지 않다. 작품이 잘 될 때는 그 연기돌들의 연기 또한 호평을 받지만, 작품이 잘 되지 않을 때는 심지어 그 작품의 패인이 바로 그 연기돌의 연기력 부족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함부로 애틋하게><달의 연인>이 생각만큼 좋은 성적을 보이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작품의 여주인공을 맡고 있는 수지와 아이유에 대한 비판이 더 거세게 쏟아지게 됐다는 것이다.

 

배우들처럼 준비된 경우는 문제가 없지만 연기돌들은 또한 어떤 연출자를 만나고 어떤 캐릭터르 만나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달의 연인>의 아이유가 처한 연기력 논란의 문제는 그녀의 연기만이 아니라 연출, 캐릭터의 문제가 역시너지를 만들면서 생겨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김규태 감독 특유의 클로즈업의 미학은 섬세한 감정연기를 보여주지 못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고 있고, 황자들에 둘러싸인 캐릭터는 그 자체의 매력을 드러내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반감을 갖게 만들고 있다.

 

반면 <굿와이프>의 나나가 연기한 김단 캐릭터는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주인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주인공만큼 중요한 역할을 해내는 캐릭터이고,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막후 접촉을 해내는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점은 이를 연기한 나나에게는 굉장한 호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걸 소화해내는 것이 관건이었지만 나나는 전도연에게 연기지도를 받을 만큼 열성을 들여 의외로 괜찮은 연기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주인공의 자리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연기돌의 경우에는 그 역량이 아직 부족하다고 느껴진다면 함부로 주인공의 자리를 올라서는 그 무게를 견디기가 어렵게 된다. 만일 주인공으로서 어떤 역할을 해내겠다면 연출자와 캐릭터가 그만큼 중요해진다. 연기돌과 얼마나 잘 매칭이 되는지, 또 캐릭터는 얼마나 그 자체로 매력적인지 같은 것들을 꼼꼼히 따져봐야 괜찮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연기돌은 물론 일반 신인 연기자들보다 더 쉽게 캐스팅되는 위치에 서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유리한 위치는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엄정한 잣대가 드리워지기 때문이다. 때로는 작품의 성패의 이유를 온전히 혼자 떠안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연기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작품 선정 또한 조심스러워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오히려 커다란 후폭풍에 휘말릴 수 있으니.

중국발 사전제작, 정서 다르고 고치기도 어려워

 

SBS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이하 달의 연인)>KBS <구르미 그린 달빛>과 동시간대 사극대결을 벌인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이준기를 비롯한 강하늘, 홍종혁, 남주혁, 백현, 지수 같은 꽃미남들이 줄줄이 배치되고 여기에 아이유까지 들어가 화려한 라인업을 만들었고, 무엇보다 중국에서 성공한 드라마의 리메이크로서 그쪽 자본이 들어와 100% 사전 제작된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단연 월화 사극대전에서 우위를 점할 것이라 예측됐다.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사진출처:SBS)'

하지만 이런 높은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달의 연인> 1회는 의외로 너무 심심했고 SBS가 초강수로 연속 방영한 2회는 후반부에 이르러 액션 장면이 들어가며 약간의 긴장감이 만들어졌을 뿐 전체적으로 너무 느슨한 전개를 보였다. 제 아무리 시선을 잡아끄는 캐스팅과 김규태 감독 같은 영상미학을 만들어낼 줄 아는 감독이 있어도 시청자들을 한 순간에 몰입시킬 수 있는 긴장감 있고 속도감 있는 이야기가 전개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좋은 결과를 가져가기가 어렵다.

 

결과는 역시 시청률에서의 참패였다. <구르미 그린 달빛>SBS<닥터스>를 방영할 때까지만 해도 8.5%(닐슨 코리아) 시청률에 머물렀지만 <닥터스>가 끝나고 <달의 연인>과 맞붙으면서 무려 두 배에 해당하는 16% 시청률로 껑충 뛰어올랐다. 반면 <달의 연인>은 첫 회 7.4%, 29.3%를 기록했다. 물론 이 시청률이 모든 걸 말해줄 순 없지만 어쨌든 두 사극의 대결에서 <구르미 그린 달빛>이 압승을 거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도대체 무엇이 <달의 연인>이 이처럼 선전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을까. 모든 걸 속단하긴 이르지만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건 역시 중국발 사전제작의 함정이다. 사전제작은 완성도를 높이는 동시에 좀 더 나은 제작환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방식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네 드라마 제작환경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사전검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들어졌다는 점이 문제로 지목된다.

 

결국 중국 시장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는 사전제작이란 그쪽의 정서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사전검열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피해야 할 요소들도 있고, 무엇보다 그들이 만족하는 방향성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 게다가 이렇게 한 번 통과된 제작방향은 중간에 어떤 문제점이 발견되어 바꾸고 싶어도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한다.

 

<달의 연인>에서 이상하게 여겨진 것은 첫 회가 너무 우리나라 드라마답지 않게 느슨한 전개를 보였다는 점이다. 만일 이 작품이 중국발 사전제작이 아니었다면 분명 바뀌었을 대목이다. 이를테면 2회 후반부에서 정윤을 살해하려는 시도와 이를 막으려는 왕소(이준기)의 대결을 1회 앞부분으로 당겨 먼저 보여주는 방식 같은 편집의 묘를 살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구르미 그린 달빛>이 생각보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도 <달의 연인>도 대처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중국에 발이 묶여버린 사전제작은 결코 이미 만들어진 <달의 연인>을 바꿀 수가 없게 되었다. 작은 차이일 수 있지만 이런 실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건 의외로 큰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KBS <함부로 애틋하게>가 역시 고전하게 된 까닭은 중국발 사전제작의 함정 때문이라 판단된다. 이 작품 역시 사전심의를 통과하면서 굳어져버린 내용들을 후반부에 보완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물론 방영되면서 나타난 문제점들은 더더욱 대처 자체가 어려웠다. 만일 사전제작이 아니었다면 중반부터 반응에 대처해 충분히 괜찮은 결과의 반전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중국발 사전제작은 <함부로 애틋하게>처럼 물론 중국에서는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중국에 맞춰져버린 사전제작은 국내에서는 빠져나오기 힘든 함정이 될 수 있다. 한 때 <겨울연가>로 촉발된 일본 한류로 인해 일본의 자본이 들어오면서 만들어진 한류를 추구했던 드라마들이 톱스타들을 캐스팅하고도 연전연패했던 일들이 있었다. 일본 자본의 입김에 의해 톱스타 누구를 캐스팅하면 투자금이 들어오던 시절, 오히려 그로 인해 일본 한류는 점점 시들해져갔다. 최근 우리네 드라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국발 사전제작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함정. 이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이유의 ‘zeze’ 불편하지만, 출판사의 과잉도 불편하다

 

아이유의 노래 ‘zeze’의 가사에는 불편한 구석이 분명히 있다. ‘교활이라는 표현도 있고 더러워라는 다소 거친 해석도 있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읽었던 독자로서 이 가사가 등장인물인 아이 제제에 대한 아이유의 직접적인 평가이자 해석이라면 불편함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갑작스레 불거진 이 논란에서 많은 대중들이 그토록 날선 비판을 하는 것일 게다.

 


'아이유 앨범(사진출처:로엔트리)'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사 측인 동녘이 직접 나서서 페이스북을 통해 아이유님. 제제는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라며 올린 글이 적절한가는 다른 문제다. 동녘측이 제기한 아이유가 제제를 성적 대상으로 봤다는 논리에는 비약이 들어있다. 그 첫 번째 이유로 든 인터뷰 내용에 대한 과잉 해석이 그렇다.

 

“zeze는 소설 속 라임오렌지나무인 밍기뉴의 관점에서 만들었고 제제는 순수하면서 어떤 부분에선 잔인하다. 캐릭터만 봤을 때 모순점을 많이 가진 캐릭터다. 그렇기 때문에 매력있고 섹시하다고 느꼈다.” 아이유의 이 인터뷰에서 동녘측이 주목하는 건 섹시하다라는 단어 하나인 듯하다. 그런데 섹시하다라는 표현이 반드시 성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섹시하다는 표현은 멋있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아이유는 인터뷰 내용에도 들어있지만 제제라는 아이 자체가 섹시하다는 의미로 말한 건 아니다. 오히려 순수하면서도 잔인한모순점을 많이 가졌다는 점, 그런 특성이 섹시하다고 말한 것. 이 모순점에 대한 매료는 이번 아이유의 음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스물셋이란 곡에서도 아이유는 다분히 상반된 이미지들을 나열하며 자신의 진짜 모습이 뭐냐고 대중들에게 질문하고 있다. 자신이 한 이미지로 해석되기보다는 다양한 이미지를 가진 존재로서 모순점 자체도 그대로 내보이는 것. 아이유는 지금 스물 셋의 나이에 이런 점에 매료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동녘의 아이유의 곡 ‘zeze’에 대한 해석은 그래서 일단 이 인터뷰 내용을 섹시하다라는 하나의 글자 그대로 해석함으로써 아이유가 제제를 성적 대상으로 봤다고 단언해버린 경향이 있다. 그리고 나서 동녘은 가사를 문제 삼는다. ‘제제, 어서 나무에 올라와 잎사귀에 입을 맞춰 장난치면 못써 나무를 아프게 하면 못써. 제제, 어서 나무에 올라와 여기서 제일 어린 잎을 가져가. 넌 아주 순진해 그러나 분명 교활하지 어린아이처럼 투명한 듯 해도 어딘가는 더러워 그 안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

 

앞부분에 섹시하다라는 표현을 통해 아이유가 제제를 성적대상으로 봤다고 단언해버리자 가사들도 그런 뉘앙스로 읽히게 된다. 상징적인 표현들은 다양한 해석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또 그래야만 그것이 상징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녘이 오히려 한 가지 관점으로만 몰아세우고 있기 때문에 아이유의 곡 ‘zeze’는 다른 해석이 용납되지 않는 곡이 되어버렸다.

 

아이유의 곡에 나오는 제제라는 인물은 물론 그 모티브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나온 것이지만 반드시 그 인물이라고 단언하긴 어렵다. 왜냐하면 모티브란 말 그대로 모티브일 뿐 거기에 대한 해석은 확장되기 마련이고 다분히 가사를 쓰는 이의 개입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유의 ‘zeze’에 들어있는 제제는 저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제제 그대로라기보다는 그 캐릭터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유 자신일 가능성이 높다. 순진하지만 교활하고 투명한 듯 해도 어딘가는 더럽다는 건 제제를 지칭하기보다는 그 제제를 바라보고 있는 화자즉 아이유의 상태를 말해주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창작과 해석의 자유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학대로 인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다섯살 제제를 성적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부분입니다.’ 동녘은 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도 창작과 해석의 자유는 있다고 전제한다. 하지만 이 출판사는 아이유의 곡 ‘zeze’다섯 살 제제를 성적대상으로삼은 곡으로 단언하고 있다.

 

그리고 제제가 순수하면서도 심한 행동을 많이 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는 것도 결국은 심각한 학대에 따른 반발심과 애정결핍에 따른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닌 학대라고 하는 후천적 요인에서 나온 것이죠. 이를 두고 제제를 잔인하고 교활하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 생각이 듭니다.’

 

동녘의 이런 지나치게 친절한 작품에 대한 해석과 타인의 작품에 대한 지나친 단정은 과연 올바른 일일까. 다시 말하지만 아이유의 곡 ‘zeze’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노래다. 거기에는 당연히 호불호가 나뉠 수도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입장은 대중들이 느끼는 불편함에 공감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동녘의 이런 단정들과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나간 작품이 반드시 작가의 의도대로만 읽혀야 한다는 식의 관점이 더욱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최근 벌어지고 있는 국정교과서에 대해 그토록 거센 비판들이 쏟아지고 있는 건 그것이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관점들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팩트를 말하지만 팩트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승자들에게 팩트일 수 있는 것이 패자들에게는 팩트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팩트보다 더 중요한 것이 관점이다. 소수라도 그 다양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사회라면 그것은 폭력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물론 취향에는 맞지 않을 수 있어도 아이유의 곡 ‘zeze’는 나름의 자신의 관점을 투영시킨 자신만의 해석을 담고 있다. 그녀 역시 노래를 내놓는 순간 그것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이미 대중들의 것이 된다. 그러니 대중들이 그 노래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도 자유다. 이것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도 마찬가지다. 출판사가 나서서 타인의 작품을 맘대로 해석하고 단정하고 자신들의 작품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이 못내 불편하게 여겨지는 건 그래서다.



아이유의 질문, 가수는 무릇 어떠해야 하나

 

<무한도전>이 또 음원을 낸 줄 알았다. 음원차트에 1위부터 7위까지 아이유의 새 음원 전곡이 올라 있었다. 그저 화제성이겠지 했다. 하지만 웬걸? 노래를 들어보니 하나하나 버릴 게 없다. 물론 마음같은 시적 가사를 써낼 때부터 어딘가 일을 낼 것 같은 아이유였다. 하지만 지난 23일 발매된 네 번째 미니앨범이자 그녀의 첫 프로듀싱 앨범인 챗셔(CHAT-SHIRE)’의 타이틀곡인 스물셋을 들어보니 그 가사가 농익었다.

 


아이유(사진출처:로엔트리)

어느 쪽이게? 뭐든 한 쪽을 골라. 색안경 안에 비춰지는 거 뭐 이제 익숙하거든.’ 그녀는 스물셋 먹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수수께끼처럼 내놓고는 끊임없이 이런 모습일까 저런 모습일까를 추론하게 만든다. 물론 답을 주지 않는다. 사랑을 하고 싶다고 얘기하고는 아니 돈이나 많이 벌 것이라고 말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아이유는 이제 이런 모순되고 어찌 보면 다양한 모습들이 사실은 사람의 진짜 실체라는 걸 알아차린 듯하다. 많은 이들은 색안경 안에 한 가지 모습만을 담으려 하지만.

 

스물셋의 나이에 다양한 얼굴들이 자신에게 있다는 걸 당당하게 드러내는 아이유는 이제 더 이상 나는요 오빠가 좋은 걸-”하고 부르던 그 아이 같던 소녀가 아니다. 물론 여전히 풋풋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삶이 어떤 것이라는 걸 알아차린 여자의 테가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상징적인 시어로 사랑을 얘기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 ‘푸르던의 가사는 대단히 시적이면서도 감각적이다. ‘너는 조용히 내려 나의 가물은 곳에 고이고. 나는 한참을 서서 가만히 머금은 채로 그대로. 나의 여름 가장 푸르던 그 밤, 그 밤.’

 

이미 장기하와의 사랑이 알려졌지만 그게 뭐 어때서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는 아마도 이런 노래의 가사가 전해주는 것처럼 그녀 스스로 이미 성숙한 데서 나오는 것일 게다. 과거 국민 여동생이라는 색안경에 갇혀 있을 때 그녀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스물셋의 아이유는 그래서 그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이제는 그대로의 그녀를 드러내는 노래를 한다. 노래는 그래서 아이유의 마음이자 언어다.

 

아이돌이나, 그게 아니라도 연예인이라는 위치는 늘 이런 저런 소문과 논란으로 점철되기 마련이다. 나이 어린 소녀가 그 살풍경한 연예계 속에서 자라나며 차츰 단단해졌다. 그게 가능했던 건 아이유가 여느 아이돌들이 그렇듯이 콘셉트부터 춤 동작까지 완벽하게 기획된 노래를 그저 인형처럼 부르는데 머물지 않고 자신의 노래를 부르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 많았던 성장통과 이야기들은 그래서 그녀의 노래 속으로 들어가 담담해졌다.

 

그저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아니라 무릇 아티스트라면 해야 할 행보가 바로 이것이다. 삶이 묻어나고 경험이 축적되어, 때로는 깊은 아픔까지도 한 곡조의 노래 가사로 뽑아내는 일. 아이유는 이제 겨우 스물셋이지만 그걸 해내고 있다. 물론 그건 스물셋의 경험치에 해당하는 풋풋하고 귀여운 심정의 토로다. 하지만 이것이 솔직하게 음악에 담기는 작업이 계속될 때 우리는 아이유라는 아티스트의 온전한 성장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화점으로 스물셋의 아이유가 있었다는 걸 떠올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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