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2’로 돌아온 이정재, 돌고 돌아 서민의 편으로

오징어 게임2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이건 그냥 게임이 아닙니다. 게임을 하다 걸리면 죽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2’에서 다시 그 죽음의 게임으로 돌아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게 된 기훈(이정재)은 사람들 앞에 나서서 그렇게 외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미쳤다고 한다. 하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다 죽을 수 있다는 말을 그 누가 믿겠는가. 하지만 기훈은 안다. 이미 한 번 그 잔혹한 게임을 치렀고, 그 곳에 참가했던 456명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1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알고 있다. 저 멀리 술래처럼 서 있는 영희 인형의 눈이 사람들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고, 움직임이 걸린 이들은 사정없이 사살될 거라는 걸. 한 번 겪어 봤기 때문에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안다는 것. 그것은 기훈이 이들을 피니시 라인까지 이끌어 살아남게 하려는 이유다. 

 

이 장면은 영웅의 탄생이 대단한 운명이나 사명감 같은 거창한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기훈이 나서게 된 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죽어나갈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다. 456명이 참여해 1인당 1억씩 배정된 목숨값을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마다 적립해 최후의 1인이 456억을 독식하는 게임이 오징어 게임이 아닌가. 사실 이건 ‘오징어 게임’ 시즌1의 맨 마지막에서 미국으로 떠나려던 기훈이 발길을 돌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떠나려던 기훈은 인천공항 지하철역에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딱지남(공유)’에게 뺨을 얻어 맞아가며 딱지치기를 하는 사내를 보게 된다. 그건 이 잔혹한 게임이 여전히 계속 벌어지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어디선가 저마다 절박한 이유를 가진 이들이 모일 것이고, 그들 중 마지막 단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처참하게 살해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그는 차마 그들을 외면하지 못한다. 

 

‘오징어 게임2’는 바로 그렇게 돌아온 기훈이 어떻게든 게임을 만든 이들을 찾아내 끝장내려는 과정을 담았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에서 이 평범 이하의 삶을 살다 456명 중 1인이라는 우승자가 되는 기훈의 모습에서는 이 캐릭터를 연기한 이정재가 겹쳐지는 면이 있다. 시작부터 ‘모래시계’로 한 순간에 스타덤에 올랐고, 영화 ‘젊은 남자’, ‘태양은 없다’, ‘하녀’, ‘도둑들’, ‘신세계’ 등등 하는 작품마다 승승장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정재는 늘 ‘연기력’에 대한 의문부호를 달고 다니던 배우였다. ‘모래시계’에서 과묵하게 눈빛으로 순애보를 보여주는 보디가드 백재희로 주목받게 된 것도 실상은 연기력이 부족해서 대사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태양은 없다’에서 정우성과 함께 한 연기가 인상적이었지만 대중들은 그것 또한 이 두 배우의 투샷이 주는 비주얼 효과와 김성수 감독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영상 연출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정재는 배우가 아닌 모델로 시작했다. 그러다 인상적인 초콜릿 광고로 인해 ‘모래시계’ 재희 역할에 발탁됐다. 워낙 좋은 비주얼에 조각같은 몸매를 갖고 있어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그가 배우로서 온전히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다양한 작품에 도전해오면서다. ‘하녀’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지만 무책임한 주인집 남자를 연기했고, ‘도둑들’에서는 비열한 뽀빠이 역할을 소화했다. 또 ‘신세계’에서는 경찰과 조직 사이에서 줄을 타는 언더커버 역할로 아슬아슬하면서도 위태로운 인물을 자기 색깔에 맞게 연기해냈다는 평가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배우로서 이정재의 연기에 대한 호평이 쏟아진 건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 역할을 통해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다. 극 중에서 ‘이리’의 상으로 소개되는 수양대군의 모습을 연기하기 위해 동물 다큐까지 참고해가며 연구한 이정재는 이 역할을 통해 그토록 오래 따라다니던 ‘연기력 논란’의 꼬리표를 뗄 수 있었다. 그 후 ‘암살’에서 희대의 친일파 역할을 소화한 이정재는 이제 그토록 청춘스타라는 이미지와 더불어 따라다니던 연기력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배우로서 대중들 앞에 서게 됐다. 

 

그를 글로벌한 배우로 등극시킨 ‘오징어 게임’은 이러한 일련의 연기 경험들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였다. ‘오징어 게임’의 기훈은 그의 빛나는 비주얼을 앞세우는 그런 역할들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밑바닥 인생이고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잔혹한 게임에 저도 모르게 뛰어들었다가 그 치열한 과정을 거쳐 최후의 1인이 되는 인물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이정재가 한 연기 중 가장 도드라진 장면이 달고나 미션에서 혓바닥으로 달고나를 핥는 장면이라는 외신들의 평가는 그의 연기가 이제 비주얼이나 멋진 이미지와는 상관없는 배역에 대한 깊은 몰입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렇게 한 때 연기력에 대한 의구심이 늘 따라다니던 이 배우는 ‘오징어 게임’으로 미국 배우조합상,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 제74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등 미국 메이저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또 그는 디즈니+ ‘스타워즈’ 시리즈의 새 드라마인 ‘애콜라이트’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어찌 보면 국내 무수한 배우들 중 단연 도드라지는 한국배우로서의 꼭대기에 서게 된 것이다. 

 

이정재는 앞서도 말했듯 시작부터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 스타였다. 워낙 도드라지는 비주얼을 갖고 있어 묵묵히 대사없이 눈빛만 보내도 대중들의 시선을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배우로서는 족쇄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그가 꽤 오랜 세월을 거쳐 그 족쇄를 풀 수 있었던 건 어찌 보면 그 높은 위치에 서 있던 청춘 스타의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밑바닥으로 끊임없이 떨어지면서 서민들 가까이로 다가가려는 노력 때문이었다. 그는 비열한 역할은 물론이고 악역, 친일파 등 자신의 비주얼과는 상관없는 역할들 속에 뛰어들었다. 그 과정을 통해 얻게 된 게 ‘오징어 게임’의 기훈이 가진 서민의 얼굴이었다. ‘오징어 게임2’는 그렇게 지독한 생존을 통과한 그가 영웅적인 선택을 하는 모습들을 담았다. 저 높은 별이 아닌 바로 옆에서 우리와 함께 하며 그 아픔을 공감하는 영웅. 지난한 과정을 거쳐 글로벌 배우가 된 이정재에게서는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바로 그 서민 영웅의 페르소나가 어른거린다. (글:국방일보, 사진:넷플릭스)

<그알>, 어째서 현 시국을 악의 연대기라 명명했을까

 

이건 차라리 소설이나 영화여야 하지 않을까.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파헤친 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 일가의 40년 고리는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았다. 다만 그 영화가 평이한 드라마가 아니라 악에서 악으로 이어지는 사회극이자 스릴러 나아가 <곡성> 같은 오컬트 장르까지 연상시킨다는 게 시청자들을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사진출처:SBS)'

일제강점기에 일본 순사를 지낸 최태민이 독립운동을 위한 밀정이라 주장했다는 내용은 영화 <밀정> 이야기의 최태민식 해석처럼 보였다. 전문가는 시험도 안보고 순사 추천을 받았다는 건 그가 일제에 충성도가 높았다는 단적인 증거라며 그의 밀정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걸 확인했다.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 친일파들이 자기 친일 경력을 숨기기 위해 많이 한다며 해방 후 최태민이 개명을 한 걸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암살>의 염석진(이정재)을 떠올리게 했다.

 

최태민이라는 인물의 삶은 마치 <태양은 가득히>의 리플리처럼 거짓말과 사기로 점철된 삶의 연속이었다. 무려 7개의 이름과 6명의 부인. 훗날 만들 사이비 종교를 준비하려 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살다보니 교주가 된 것인지 각종 종교를 전전하다 박근혜와 인연이 되어 구국선교단으로 승승장구하게 된 삶. 그리고 그 인연의 고리에는 육영수 여사의 서거로 인해 생겨난 약해진 감정을 최면으로 파고들었다는 마치 <곡성>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의혹 제기도 들어 있었다.

 

10.26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끝장나고 청와대를 떠나 박근혜가 자리한 육영재단은 사실상 최태민 일가의 사적 축재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사적 조직에 가까웠다. 여기서 최태민에서 최순실로 이어지는 악의 연대기가 본격화됐고 10.26 사건으로 청와대를 나온 박근혜의 대통령 만들기는 마치 종교나 군사조직처럼 진행되었다.

 

황상민 전 연세대 교수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심리 분석은 이 영화 같은 이야기를 보다 쉽게 이해하게 해주었다. 그는 2년 전 60명을 상대로 조사한 이미지 분석 결과, 60명 중 40명이 박 대통령을 혼군, 즉 어리석은 지도자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 다음이 얼굴마담’. 황 전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대중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꼭두각시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황 전 교수는 한나라당 대선 후보 당시 박 대통령이 국회의원직 사퇴를 말실수해 대통령직 사퇴로 얘기한 사실이 중요하다고 지적하며 이는 “15년간 국회의원으로 있으면서도 그냥 대통령이라는 마음으로 지냈다는 것을 그대로 노출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의 심리가 내가 자라던 집에 돌아가서 우리 아버지의 나라를 내가 주인으로서 지키는 것, 거기에서 내 집을 뺏겨가지고 쫓겨났을 때 그 이후에 아버지에 대해서 상당히 욕되게 한 것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의 사회 작동 원리에 맞지 않는 박정희식 통치의 방식들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아주 최선을 다해서 사익을 추구했다, “권력을 가지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식의 시대에 맞지 않는 생각이나 행동방식 때문에 결국 오늘의 이 사태가 터진 것 아니냐고 지적한 김윤철 경희대 교수의 이야기처럼 <그것이 알고 싶다>가 추적한 악의 연대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서 현재의 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그 어두운 시기를 하나의 실타래로 꿰어냈다. 그건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았다. 결코 영화가 돼서는 안되는 현실이기에 보는 내내 참담함을 금치 못하게 했지만. 우리가 살아온 한 시대가 어쩌면 한 사기꾼에서 사기꾼으로 이어지는 농단의 연대기였다니.

<밀정>, 송강호가 왜 최고의 배우인가를 증명하다

 

김지운 감독의 <밀정>에서 송강호라는 배우가 차지하고 있는 지분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연기하는 이정출이라는 인물이 처한 상황, 즉 일제에 붙어 경무부장으로 독립운동가들을 검거하는데 앞장서는 인물이면서 의열단을 와해시키기 위해 밀정으로 투입되면서 겪게 되는 심적 변화가 이 영화의 거의 모든 메시지나 재미를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영화<밀정>

이정출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을 잡기 위해 상하이로 보내진 밀정이면서, 동시에 의열단원의 핵심요원으로 이정출에게 접근해 경성으로 폭탄을 실어 나르는 일에 그의 도움을 얻어내려는 김우진(공유) 사이에 서 있는 경계인이다. 사실 이 일제강점기를 다루는 많은 관점들 중에서 경계인이라는 관점은 중요하다.

 

지금의 시선으로야 분명히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를 명쾌히 구분해낼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그들조차 어느 쪽이라 애매모호한 입장에 서 있는 인물들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독립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가 모호한 상황에 처한 당대의 인물들은 그래서 자신의 정체성조차 모호하게 느끼는 그림자같은 경계인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 영화의 첫 시퀀스인 이정출이 일본군에 쫓기다 궁지에 몰린 의열단원인 김장옥(박희순)과 마주하는 장면은 이 인물이 가진 갈등을 잘 드러낸다. 이정출과 김장옥은 과거 친구였지만 이렇게 일제와 의열단원이라는 새로운 경계로 만나게 된다. 총에 맞아 잘려진 발가락을 보며 이정출은 생각보다 너무 가볍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 한 구석에 존재할 안타까움이나 슬픔 같은 것들이 살짝 묻어난다.

 

이정출이라는 경계인을 주인공으로 세우기 때문에 영화는 우리가 <암살> 같은 작품에서 봤던 그런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나 장르적 쾌감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영화의 애초 목적이 그런 장르적 즐거움이 아니라 이정출이라는 경계인의 복잡한 내면을 들여다보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 내면은 때론 어두웠다가 때론 밝아지고 때론 한없이 아파했다가 분노하며 폭발하기도 한다. 분명한 적와 아군의 편을 나누고 그 대결을 그렸다면 포착하기 힘든 영화적 재미가 바로 이 이정출이라는 인물로부터 나오게 된다.

 

사실 역사책을 통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의열단같은 조직의 활동을 우리는 좀체 실감하지 못한다. 그들이 항일투쟁을 해왔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밀정>은 이정출이라는 조금은 경계에 서 있기 때문에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에 가까운 인물을 통해 그 의열단이라는 존재의 실체에 접근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에게 요구되는 삶은 복종 아니면 죽음이라는 총독부 경무국장의 진술처럼 복종을 거부한 의열단원들은 사실상 죽음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처연하기 그지없다.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하고 그럼에도 배신하지 않기 위해 혀를 물거나 아예 곡기를 끊어버리는 그들의 표정은 의연하면서도 쓸쓸하다. 다만 실패하더라도 그 실패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그 막연한 강령이 그들을 그토록 끝까지 나가게 하는 힘이 되어줄 뿐이다.

 

경계에 선 이정출은 죽음을 딛고도 또 앞으로 나가는 그들을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그 감정은 고스란히 지금의 관객들과 맞닿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일제강점기라는 상황에 카타르시스란 애초부터 기대할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 복잡하게 바뀌어가는 경계인의 모습을 영화는 유려한 영상과 긴장감 넘치는 장면들 속에서 포착해낸다.

 

송강호는 역시 최고의 배우답게 그 미세한 감정의 변화들을 온전히 관객들에게 설득시킨다. 속물적인 욕망들을 지워내지 못한 지독한 현실주의자의 면면을 담아내면서도 동시에 그의 앞에서 스러져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약해지는 휴머니스트의 면모 또한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그의 섬세하게 표현되는 인물의 내면의 변화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움을 주는 영화다. 물론 그를 통해 느끼게 되는 건 결국 의열단원들의 경외로운 삶에 대해 절로 숙연해지는 마음이지만.

동북공정에서 항일로, 일본 버리고 중국 향하는 한류

 

KBS <12>3.1절 특집으로 중국 하얼빈을 간다고 한다. 3.1절이라는 의미도 그렇고 하얼빈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곳이라는 점은 이 특집이 갖고 있는 방향성을 확실히 보여준다. ‘항일의 의미로서 하얼빈이라는 장소는 우리와 중국의 뜻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1박2일(사진출처:KBS)'

하지만 지난 2008년 이른바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우리와 민감했던 시기에 <12>이 떠났던 백두산행과는 사뭇 다른 그림이다. 당시 외교적인 갈등 상황 때문에 촬영 자체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독도, 가거도, 우도, 백령도에서 가져온 물을 백두산 천지에 붓는 장면은 나름 <12>의 방식으로 백두산을 생각하는 우리네 정서를 표현했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8년 전 중국과의 대립에서 마치 하나의 상징물처럼 존재하던 백두산을 갔던 분위기와 현재 항일이라는 동일한 뜻이 모이는 하얼빈 출국을 준비하고 있는 분위기는 이토록 다르다.

 

물론 <12>이 중국과 공존하려는 최근의 분위기를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최근 <런닝맨>이 중국 상하이에서 찍은 이른바 ‘10인의 결사단특집을 떠올려 보라. 옛 난징루 거리를 재현한 곳에서 <런닝맨>이 게임을 하며 가져온 스토리는 다름 아닌 일제에 맞서 싸우는 독립투사들의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면 작년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암살>이 중국시장을 염두에 뒀고 또 실제로 중국 흥행에서 꽤 괜찮은 수익을 거둔 사실은 흥미롭다. 물론 초반 기록적인 흥행이 불법 다운로드로 인해 지속적으로 이뤄지진 못했지만 <암살>이라는 작품이 중국에서도 관심을 끌어 모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미 <별에서 온 그대>로 주목받고 있는 전지현이 항일 독립투사로서 캐스팅되었다는 점이 주효했던 것.

 

올해 개봉을 준비 중인 김지운 감독의 <밀정> 역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과 그를 둘러싼 투사들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한다. 여러모로 <암살>과 궤를 같이 하는 블록버스터가 아닐까 싶다. 이밖에도 개봉을 앞두고 있는 시인 윤동주의 이야기를 다룬 이준익 감독의 <동주>, ‘위안부문제를 정면으로 다뤄 이미 해외에서까지 반향을 얻고 있는 <귀향>도 어찌 보면 이러한 항일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때 한류의 목적지는 일본으로 귀착됐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종착역이 중국으로 바뀌고 있다. 일본 아베총리의 망언에서부터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역사인식의 부재, 어이없는 독도 영유권 주장 등의 정치적 사안들이 한일 간의 교류의 물꼬였던 한류마저 얼어붙게 만들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여전히 일본의 한류는 진행 중이지만 매해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 한류의 흐름과 비교해보면 한풀 꺾인 모양새다.

 

최근 들어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하는 영화나 콘텐츠들이 부쩍 늘고 있다는 것이 그래서 우연의 일치처럼 보이지 않는다. 해외여행에 있어서 명확한 명분이 필요한 <12>8년 전 백두산을 갔던 데 이어 하얼빈을 선택했다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어쨌든 현재 우리네 한류는 일본을 떠나 중국으로 이동 중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