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상의 몰아주기, 청룡의 나눠주기

 

아마도 이번 청룡영화상 대종상의 파행으로 인해 오히려 돋보인 시상식이 아니었나 싶다. 단 며칠 사이에 벌어진 두 영화상이지만 대종상 시상식장에 주조연 배우들이 대거 불참했던 것과는 상반되게 청룡영화상에는 상을 받든 못 받든 별들이 모여 들었다. 대종상에서 대리수상 불가를 공표함으로써 결국 대리수상이 남발하게 된 것과 대조적으로, 청룡영화상은 참석한 배우들이 상을 고루 가져가는 축제의 장으로 기억되게 됐다.

 


'청룔영화상(사진출처:SBS)'

청룡영화상이 참 상을 잘 주죠?” 김혜수가 던진 이 말은 물론 청룡영화상의 균형 잡힌 고른 시상에 대한 상찬이었지만 대중들에게는 대종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번 대종상은 <국제시장>에 무려 10관왕을 몰아줬다. 이런 일이 이번 한 번이 아니다. 이미 2012년 대종상은 <광해>에 총 22개 부문에 15개의 상을 몰아준 바 있다. 어째서 같은 해에 상영됐던 같은 영화들에 대해 상을 주는 것인데도 이렇게 다를까.

 

이것이 이렇게 다른 것은 그 자체로 상의 성격이나 지향점이 다르다는 걸 말해준다. 대종상이 구태의연한 영화 시상식의 전형처럼 다가오게 된 건 이 같은 몰아주기가 과연 지금의 영화 환경과 관객 취향과 사뭇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에서부터 비롯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네 영화는 그만큼 다양해졌고, 관객들의 취향도 다양해졌다.

 

물론 1천만 대작 대박영화가 매해 나오기도 하지만 그보다 작은 중박 영화도 점점 많아지고 있고, 아예 독립영화들도 의외로 다양한 관객들의 취향을 받쳐주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그러니 몇몇 대작 영화에 상을 몰아준다는 건 자칫 잘못하면 관객들의 다양한 취향들을 배려하지 못하는 일로 비춰질 수 있다. 나아가 이것은 승자가 모든 걸 독식하는, 적어도 문화에서는 바라보고 싶지 않은 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청룡영화상이 블록버스터과 독립영화에 똑같은 상의 지분을 나눠주었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올해 작품 중 누구나 <베테랑><암살>, <국제시장>이 상을 가져가는 것에 대해 이견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사도> 같은 의미 있는 작품도 있고, 독립영화로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거인> 같은 작품도 있었다는 걸 청룡영화상은 놓치지 않았다. 결국 최우수작품상은 <암살>이 감독상은 <베테랑>이 가져가고 남녀주연상에 <사도>의 유아인과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이정현이 받은 건 균형잡힌 배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시상식에 몰아주기만큼 비판받는 것이 나눠주기다. 하지만 이것은 방송사들의 연말 시상식에서 과연 그 상이 적절한가 싶을 인물들에게 다음해를 위해 억지로 나눠 상을 시상할 때 나오는 비판이다. 이번 청룡영화상이 보여준 나눠주기는 이것과는 다르다. 그만큼 다양해진 영화들과 관객의 취향을 고루 끌어안는다는 의미에서의 나눠주기라는 점에서 의미가 다르다는 것.

 

시상의 공정성과 균형은 결국 그 영화상이 축제의 장이 되게 만드는 이유다. 이번 청룡영화상이 유독 훈훈한 영화인들의 축제의 장이 될 수 있었던 건 그 균형이 잘 이뤄졌기 때문이다. 상을 받고도 사과하는 상, 한쪽으로 몰아주기를 해서 다른 한쪽은 커다란 그림자와 병풍을 만들어버리는 상, 권위로 오라마라 강요하는 상. 이번 청룡영화상은 이런 시상식과는 너무나 다른 행보를 보여주었다.



<암살><베테랑>, 쌍 천만의 진의를 살리려면

 

영화 <암살><베테랑>의 천만 관객 돌파에 의해 쌍 천만이라는 새로운 수식어가 만들어졌다. 그 힘들다는 천만 관객을 같은 시기에 두 편의 한국영화가 달성한 것. 그래서 그 의미를 되새기는 기사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천만이라는 상업적 수치에만 너무 집중하다보면 거기 담겨져 있는 진짜 의미를 놓칠 수 있다.

 


사진출처: 영화 <암살>,<베테랑>

사실 요즘처럼 멀티플렉스 영화관과 유통, 제작, 홍보마케팅이 하나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상황에 천 만 관객은 이제 그리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닐 수 있다. 상업적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일원화된 유통 배급의 힘으로 천 만 관객에 도달하는 일이 과거보다는 훨씬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이라는 특수성은 이를 가능케 하는 시즌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래서 쌍 천만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이처럼 공고히 구축된 제작 배급 시스템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 수치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한다는 것은 자칫 이 독점적인 상업적 시스템에 대한 암묵적 지지에 그칠 수 있다. 그것은 <암살><베테랑>이 영화를 통해 얘기하려고 한 사회적 메시지들을 그저 상업적 성공으로만 결말짓는 일일 수 있다.

 

물론 <암살><베테랑>이 모두 천만 관객을 넘어서는 대박 흥행을 가능하게 했던 건 그것이 상업적으로 잘 만들어진 장르물이라는 외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사들을 다루면서도 마치 액션물의 영웅담을 보는 듯한 경쾌함을 유지한 <암살>이나, 재벌과 서민 사이의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갑을 시스템을 갖고 왔지만 통쾌한 액션으로 영화를 풀어낸 <베테랑> 모두 상업영화로서 잘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잘 만들어진 상업영화에 뇌관처럼 박혀 있던 현실적인 문제제기가 없었다면 이처럼 대중들이 호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암살>이 결국 얘기하려는 건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일제의 잔재다. 민족을 배반하고 독립투사들을 향해 총구를 겨눴던 인물이 반민특위의 재판에서 오히려 큰 소리를 치고 법정을 빠져나오는 장면은 그래서 이 영화에 깊은 여운을 만들었다. 어찌 보면 <암살>은 상업적인 영화의 끝에 현실적인 무게감의 숙제를 남겨놓았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친일파의 문제는 현재의 거대 자본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베테랑>이 제기하는 재벌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베테랑>은 자본의 힘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구가하는 재벌의 문제를 액션 장르로 잘 그려낸 영화다. 돈이면 뭐든 다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자본이 어떻게 서민들의 살 터전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밀어내버리는가를 잘 보여준다. 법 정의조차 재벌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이 현실 속에서 <베테랑>은 일종의 서민 판타지를 그려냈다. 그것은 물론 영화적 판타지지만 그 판타지 속에는 서민들이 가진 울분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구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그저 허구로만 치부될 수 없는 것들이다.

 

<암살><베테랑>이 모두 천만 관객을 넘기게 된 데는 거기에 현실에 부재한 것을 희구하는 대중 정서가 깔려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천만 관객을 상찬하면서 상업적 성공에 대해서만 얘기하다보면 정작 이 영화들이 깔고 있는 상업적이고 자본적인 세계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놓치는 부조리를 갖게 된다. 영화를 보며 그토록 대중들이 열광했던 건 그 안에 자본 현실에서는 도무지 이뤄지지 않을 해결책들이 영화적 판타지로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 영화들이 던지고 있는 메시지들이 현실적인 울림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자본의 놀라운 힘은 자본을 비판하는 것조차 상업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두 시간여의 판타지를 보고 그저 통쾌함을 느낀다고 해도 영화관 밖을 나오면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아니 오히려 이런 정서들조차 상업적으로 만들어져 또 다른 자본이 되는 아이러니를 겪게 되는 지도 모른다.

 

물론 <암살><베테랑>은 지극히 상업적인 영화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진 메시지에는 분명 진정성이 있다. ‘천만이라는 수치가 얘기해주는 건 그 상업적 성공만이 아니라 지금의 대중들의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분노와 갈증이다. 이제 현실이 그 마음들에 응답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여름 성수기에 어울리지 않는 <협녀>의 부진

 

영화의 성패는 개봉시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겨울방학 시즌과 여름 성수기는 영화를 찾는 관객들의 기대치가 다르다. 겨울방학 시즌이 조금 무거운 영화라도 영화적인 완성도가 있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시기라면, 여름 성수기는 말 그대로 블록버스터가 대결하는 시기다. 이 시기에 과한 메시지를 담아내는 영화는 어울리지 않는다.

 


사진출처:영화 <협녀, 칼의 기억>

<협녀, 칼의 기억(이하 협녀)>이 겨우 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개봉 첫날 박스오피스 4위를 차지한 건 그 영화적인 완성도라기보다는 그 개봉시기가 영 어울리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낫다. 이 영화는 여름 성수기에 보기에는 너무 무겁다. 끝없이 이어지는 독백과 마치 연극처럼 비일상화되어 있는 대사들, 그리고 유려한 영상미는 충분하지만 역시 반복되는 슬로우 액션은 영화를 한없이 무겁게 만들었다.

 

<협녀>는 웃음의 포인트를 거의 찾기 힘들다. 두 시간짜리 영화가 쉬지 않고 비장함으로 흘러가는 건 마치 피서하듯 영화관을 찾는 여름 성수기 관객들이 바라는 일은 아닐 것이다. 물론 예고편으로 보기에는 마치 <와호장룡>이나 <동사서독> 같은 느낌의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실로 <협녀>는 그 영상 연출만 놓고 보면 마치 한 편의 무용을 보는 것처럼 우아하고 스펙터클하다.

 

하지만 그런 영상미도 이야기의 무거움을 이겨내지는 못한다. <협녀>는 사사로움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이라고 설명하며 원죄를 가진 부모를 자식이 처결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즉 대의를 위해 가족 관계의 사사로움을 뛰어넘는 비극적인 주인공들의 이야기다. 욕망에 의해 덕기라는 이름을 버리고 유백(이병헌)이 된 사내와 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형을 죽인 월소(전도연) 두 사람 사이의 애증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마치 그리스의 비극이나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보는 듯한 비장미는 너무 과도하게 무거워 자칫 실소가 나올 정도지만 그나마 그 무게를 버텨내는 건 연기자들이다. 이 영화는 실로 이병헌과 전도연,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확실한 자기 색깔을 드러낸 김고은 같은 배우들에 깊은 몰입에 의해 겨우 그 비장미를 유지하는 작품이다.

 

50억 협박 사건으로 인해 그 불편한 사생활이 공개되면서 이병헌에 대한 대중적인 정서는 결코 좋지 않지만 연기자로서 그가 갖는 아우라가 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야기하면 <협녀>의 부진은 이병헌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연기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사생활 문제로 인해 개봉시기가 겨울에서 여름 성수기로 들어오게 되면서 생긴 일이다.

 

<베테랑><암살>, <미션 임파서블> 같은 여름철 더위를 날려버릴 블록버스터에 딱 어울리는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협녀>는 그 무겁고 과한 메시지와 비장함 때문에 오히려 더 더워지는 영화다. 만일 이병헌 논란이 터지지 않고 그대로 지난 겨울에 개봉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큰 흥행을 거두기는 어려운 작품임에 분명하지만, 그래도 영화를 보고 나오는 그 찜찜함이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았을까



<암살>, 상업성과 역사 사이의 절묘한 줄타기

 

일제강점기를 오락물로 풀어내는 건 가능한가. 사실 영화는 어떤 시기든 소재로 담을 수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즉 이 시기를 다루는 방식은 대부분 민족주의적인 입장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반일감정을 자극하고 애국주의적인 시선을 담아내는 방식. 그러니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하는 콘텐츠는 비장한 분위기를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사진출처:영화<암살>

하지만 <암살>은 일제강점기라는 시기를 가져오지만 그것을 암울하고 비장하게만 다루지는 않는다. 나아가 이 영화는 케이퍼 무비(Caper movie. 범죄 영화의 하위 장르 중 하나로, 무언가를 강탈 또는 절도 행위를 하는 모습과 과정을 상세히 보여주는 영화)의 장르적 성격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도둑들>을 통해 케이퍼 무비의 성공방정식을 보여준 최동훈 감독의 장기이기도 하다.

 

조선주둔군 사령관인 카와구치 마모루와 친일파 강인국(이경영)을 암살하려는 독립군의 이야기.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 마치 만주 웨스턴의 캐릭터들을 보는 듯한 저격수 안옥윤(전지현)이나 속사포(조진웅),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같은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들은 저마다의 욕망과 목표를 갖고 이 암살의 과정 속에 뛰어들어 이야기를 다채롭게 만들어낸다.

 

케이퍼 무비의 특성 중 하나인 배신 역시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배신은 사적 관계의 배신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에 대한 배신이라는 점에서 다시금 일제강점기가 갖는 비장함과 맞물린다. 그래서 이 케이퍼 무비가 갖는 유쾌함은 일제강점기의 비장함과 얽혀 기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암살>이라는 영화가 가진 가장 빛나는 지점이면서 동시에 가장 상업적인 지점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철저히 상업적인 지향을 보여준다. 그것은 일제강점기라는 사뭇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 시기를 끌어오면서도 그 안에 오락적인 재미를 펼쳐놓는 최동훈 감독의 연출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밑바탕에는 당대의 독립군들이 가졌을 그 암담함과, 초개처럼 자신을 던지는 그 비장함이 주는 먹먹함 역시 느껴진다. 그것을 가장 짧게 인상적으로 그려낸 건 암살 미션을 받고 떠나기 전 안윤옥과 속사포 그리고 황덕삼(최덕문)이 함께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그들은 마치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처럼 카메라 앞에서 비장하다. 하지만 카메라 셔터가 눌려지기 직전, 그들은 애써 웃음을 짓는다. 어딘지 어색하면서도 진심이 느껴지는 그 장면은 영화 전체가 케이퍼 무비의 오락 속으로 빠져 들어갈 때도 마음 한 구석에 이물감처럼 남는다.

 

배신과 처단은 물론 케이퍼 무비 특유의 장르적 재미를 담고 있지만, 동시에 일제강점기가 끝나고도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네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물론 케이퍼 무비의 오락적 요소들을 극점까지 보여준 후, 이렇게 역사적인 문제로 마무리하는 것 역시 상업적 선택이다. 그것은 과거 민족주의적인 관점으로 일제강점기를 다루던 콘텐츠들이 대중들을 격동시키던 그 이야기방식을 닮아있다.

 

<암살>은 또한 다분히 중국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전지현이라는 배우를 전면에 내세운 건 우연이 아니다. 이미 <별에서 온 그대>로 중국에서 열풍을 만들어낸 전지현이 아닌가. 게다가 영화는 일제와 싸우다 스러진 독립군의 이야기를 담는다. 상하이를 배경으로 일제와 싸우는 액션이란 중국의 관객들에게도 충분히 어필될 수 있는 이야기다.

 

이처럼 <암살>은 잘 계산된 상업적인 영화의 모범답안 같은 면면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재미에만 치우쳐 일제강점기와 현재를 바라보는 의미를 놓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어찌 보면 <암살>은 그 상업성과 역사 사이의 절묘한 줄타기를 성공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처럼 보인다. 일제강점기를 오락물로 풀어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암살>은 그 가능성을 놀라운 균형감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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