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도시여자들

 

“니가 씨부린 말이 책으로 나오면 내가 그 책으로 평생 똥을 닦을 것이다!” 음흉하기 이를 데 없고 말도 안되는 신화처럼 자신의 삶을 포장해 자서전을 내려는 박회장(박영규)에게 안소희(이선빈)는 마치 랩이라도 하듯 속사포로 욕을 쏘아댄다. 술에 잔뜩 취해 기관총처럼 쏴대는 욕설. 그런데 세상에 이렇게 속 시원할 수가 있을까.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술꾼도시여자들>의 이 장면은 이 독특한 드라마의 색깔을 제대로 드러내준다. 애초 지상파나 케이블에서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소재와 내용 그리고 표현수위를 가진 드라마다. 이 사실은 첫 회만 봐도 단박에 알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술을 마셔대는지 보는 사람이 취할 정도다. 

 

그래서 이거 너무 ‘술 권하는’ 드라마 아닌가 하며 드라마가 이래도 되나 싶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대사들이나 수위도 거침이 없다. 욕은 일상어처럼 튀어나오고 술에 취해 원나잇을 하는 것도 그게 뭐 대수냐는 듯 등장한다. 그런데 술과 욕과 성적 분방함이 어쩐지 그리 거슬리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로운 느낌이다. 도대체 이 색깔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그건 이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 술을 마시는 안소희, 한지연(한선화), 강지구(정은지)라는 인물들이 그렇게 하게 되는 이유들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때는 출판사 직원이었던 안소희와 대기업 영양사였던 한지연 그리고 학교 교사였던 강지구가 모두 일을 그만두게 된 사연은 모두 박회장이라는 한 명의 빌런과 연관되어 시트콤처럼 그려졌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그 상황들이 너무나 실감나게 이해된다. 

 

기업 회장이랍시고 자서전을 빙자해 더러운 욕망을 드러내는 박회장은 안소희와 한지연을 모두 분노하게 만들고, 성소수자인 그의 딸을 괴물 취급해 자살하게 만듬으로써 강지구를 절망하게 만든다. 물론 이 부분은 극화된 것이지만, 아마도 시청자들은 술 마시며 세상에 독설을 쏘아대는 이 세 친구들을 보면서 저마다 겪은 부조리하고 무례한 세상을 떠올렸을 지도 모른다. 이 드라마에서 술은 그래서 그걸 잊기 위한 것이면서 그래도 버텨나가게 하는 친구들을 한 자리에 모아주는 묘약 같은 것이다. 

 

세상에 아무리 거지같아도 이런 친구들 몇 명만 있으면 살만해질 것 같은 그런 광경들을 <술꾼도시여자들>은 보여준다. 물론 그 개개인이 가진 개성들과 매력은 시청자들이 빠져들 수밖에 없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다. 세상 쿨하고 시크한 강지구는 무심한 척 하지만 친구가 위험에 빠지거나 어려워할 때면 가장 먼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달려오는 친구고, 세상 낙천적이며 생각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상처도 많고 생각도 깊은 한지연은 축 처진 친구들을 기분 좋게 업시키는 친구다. 평범하게 조직에 순응하며 살아가면서 남다른 타인에 대한 연민을 가진 안소희는 하지만 술만 들어가면 꾹꾹 눌러뒀던 억압된 말들을 시원스런 욕설로 풀어주는 친구다. 이런 매력적인 인물들이 서로 등 두드리며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드라마. 시청자들에게는 이들의 일상이 자꾸만 보고픈 이유가 된다. 

 

<술꾼도시여자들>은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로서 그 플랫폼에 걸맞는 소재와 표현수위 그리고 형식까지 잘 갖춰진 드라마다. 1시간을 기준으로 분량을 억지로 채우는 것도 없고, 적당한 길이에 군더더기 없이 압축도 높은 스토리를 속도감 있게 풀어낸다. 술이 등장하고 거침없는 대사들과 자유로운 이야기가 OTT라는 플랫폼에 너무나 잘 어울린다. 또 세 명의 인물을 매력적으로 세워놓고 시트콤적인 상황들을 부여해 이야기를 끌고 가고 있어, 향후 시즌제 드라마로서도 충분히 가능성을 보이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기성 드라마들이 전면에 내세우지 못했던 술과 욕을 이토록 속 시원하게 잘 풀어낸 드라마가 있을까 싶다. 특히 개성이 톡톡 튀는 세 여성이 저마다 다른 삶을 살면서도 함께 어우러지는 이야기는 보는 이들에게까지 일종의 유대감을 갖게 만들 정도로 마음을 잡아 끈다. OTT 시대에 접어들어 토종 OTT들이 어떤 이들만의 전략을 담는 콘텐츠를 내놔야 하는 시국에 <술꾼도시여자들>은 어떤 틈새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되지 않을까. 앞으로 좀 더 긴 호흡의 시즌제가 기대될 정도로.(사진:티빙)

<나를 돌아봐>, 논란의 힘으로 굴러가는 이상한 예능

 

<나를 돌아봐>는 설마 막장 예능을 지향하고 있는 걸까. 막장은 드라마에만 있다는 편견을 깨고 싶은 건가. 이번에는 최민수 폭행 논란이 불거졌다. <나를 돌아봐>를 촬영하는 도중, 최민수가 의견충돌을 빚은 외주제작사 PD의 턱을 주먹으로 가격했다는 것.

 


'나를 돌아봐(사진출처:KBS)'

일단 무슨 이유에서든 폭력을 썼다는 건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번 한 번도 아니고 시작부터 반복적으로 계속 논란이 불거지고 있는 상황은 프로그램 제작에 있어서도 그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제작발표회에서 벌어졌던 논란부터 이번 최민수 폭행 논란까지 그 안을 들여다보면 여기 출연하는 인물들의 평소 이미지와 캐릭터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증폭되어 있다는 걸 볼 수 있다. 즉 평소 욕쟁이에 독설 이미지를 갖고 있는 김수미가 제작발표회에서 조영남을 도발했던 건 시청률을 빌미로 하차 운운했던 돌직구였고, 평소 기행을 일삼는 조영남이 거기에 대응했던 것 역시 하차 선언 후 발표회장을 떠나는 것이었다.

 

이번 최민수 폭행 논란 역시 그에게 늘 따라다니던 거친 남자의 이미지가 프로그램을 통해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문제적 출연자들의 어둡고 불편한 부분들이 이 프로그램에서 하나같이 밖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건 마치 이것이 의도된 것 같은 생각마저 갖게 만든다.

 

물론 제 아무리 시청률이 갈급하다고 해도 논란을 의도했을 리는 없다(실제로 논란에도 이 프로그램 시청률은 그리 높지 않다). 다만 프로그램의 정체성 자체가 이런 논란의 소지를 어느 정도 품고 있었다고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나를 돌아봐>는 결국 관계의 불편함을 예능의 기폭제로 끌어오는 콘셉트일 수밖에 없다. 김수미와 장동민 그리고 박명수가 그렇고, 조영남과 이경규가 그러하다. 이홍기와 최민수는 말할 것도 없다.

 

매니저라면 연예인을 편안하게 해줘야 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이홍기는 매니저로 온 최민수 앞에서 늘 긴장하고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그 역전된 상황이 웃음의 포인트가 되는 것. 이것은 평소 버럭 하던 박명수가 욕쟁이 김수미 밑에서 얌전해지는 모습이나, 늘 주도권을 쥐고 방송을 하던 이경규가 조영남에게 휘둘리는 모습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불편한 관계는 어쨌든 그 불편한 인물이 하는 행동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조영남은 기행을 하고 김수미는 욕과 독설을 던질 때 그 불편함이 바깥으로 튀어나온다. 그러니 최민수는 어딘지 거칠고 센 이미지를 계속 바깥으로 드러내는 것이 이 프로그램에서의 역할일 수밖에 없다. 물론 폭행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지만 어쩌면 이 프로그램의 촬영 분위기가 그런 센 이미지를 어느 정도는 부추겼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이 프로그램은 관찰카메라 형식을 취하고 있다. 어느 정도의 설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감나는 진짜모습을 꺼내 보여줘야 하는 상황이다. 어떤 사람이 만드는 불편함이란 밖으로 나오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인물들의 불편함을 마치 과시하듯 적극적으로 밖으로 꺼내놓는 이 프로그램이 논란의 많은 빌미들을 제공하고 있다는 건 그래서다.

 

김수미도 조영남도 최민수도 잘못했다. 하지만 그들만을 욕하는 것으로 이런 논란의 바탕을 제공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들이 비껴가는 건 더 잘못된 일이다



욕먹어도 보면 그만? 임성한 월드의 참상

 

이제 임성한 월드는 더 이상 욕하는 것도 지겹다는 대중들의 반응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항간에는 아예 임성한 월드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 것조차 불편해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비판 기사는 사실상 임성환 월드가 먹고 자라나는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압구정백야(사진출처:MBC)'

임성한 월드는 논란을 먹고 자란다. 도무지 나올 수 없는 칭찬은 당연히 논란으로 이어지고, 당연한 비판 역시 그 논란을 부추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이것이 임성한 월드에 일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이 생기는 건 그래서다. 무관심이 답일 수 있지만 그래도 최근 들어 조금 오른 시청률 때문에 자꾸만 임성한 월드에 대한 재조명 기사들까지 나오는 건 이해하기가 어렵다.

 

시청률은 작정하면 나올 수밖에 없다. 가장 쉬운 것은 룰을 깨는 것이다. 드라마라는 창작의 공간에도 정해진 룰이라는 게 있다. 그러니 이걸 깨버리면 당연히 시끄러워진다. 그리고 그 시끄러움은 임성한 월드가 목적하는 것이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 여기서 함정은 방점이 욕하면서에 찍히는 게 아니라 보는에 찍힌다는 점이다.

 

이렇게 찍힌 방점은 본말을 전도시킨다. 보게 하기 위해 욕먹기를 자초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등장인물(그것도 주인공급)의 어이없는 죽음은 욕먹기가장 좋은 수단이다. 물론 거기에는 작가의 욕망이 들어 있다. 이 세계에는 작가가 신이다. 그는 인물과 인물을 이어붙이는 것에서 장애물이 있다면 거침없이 제거해낸다. 그 세계가 작가만의 것이 아니라 이미 시청자들의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데서 나오는 잡음들은 오히려 을 통한 시청률로 이어진다.

 

죽었던 인물이 다시 유령이나 환시로 재등장하는 건 그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인물에 대한 대중들의 뜨거운 논란의 불씨를 끄기 보다는 오히려 계속 끌고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여 섬뜩해진다. 마치 길거리에서 드잡이 싸움이 벌어지면 그 내용과 상관없이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처럼 임성한 월드는 무관심이나 비판조차도 가만두지 않고 오히려 키워버린다.

 

당연히 작품을 일관적으로 통과하는 메시지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그 지극히 이상한 임성한 월드가 마치 보편적인 세계인 양 매일 같이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끔찍한 악영향만이 거기에는 존재한다. 현실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놀라운 장면들이 주는 황당함과 어이없음은 그 강도가 너무 강해서 비판조차 허탈하게 만든다. 그러니 작품성 자체는 일찌감치 포기한 채 황당한 웃음을 지으며 자극만을 쳐다보는 지경에 이를 수밖에 없다. 자조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시청패턴이다.

 

이 황당한 세계가 매일처럼 대중들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여진다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죽어나가는 등장인물을 의심 없이 바라보다보면 마치 사람을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 당연한 듯한 세계관을 내면화하게 될 수도 있다. 룰 자체는 아랑곳없이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리는 이야기에 익숙해지다 보면 마치 그런 임기웅변식의 삶이 우리가 지향해도 무방한 삶의 본질이라는 것에 승복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임성한 월드보다 더 큰 문제는 이 세계를 매일 매일 보여주는 방송사의 윤리 부재의 현실이다. 시청률만 되면 뭐든 받아들인다는 이런 식의 태도는 모든 가치들을 경제적인 논리 아래 굴복시킨다. 일부 기자들을 비판하는 기레기라는 말을 끌어와 작레기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을 방송사는 왜 좌시하고만 있는 걸까.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를 디즈니랜드에 비유해 설명하며, “디즈니랜드는 미국 자체가 거대한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함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임성한 월드가 갖는 정치적 위험성은 바로 이 점에 있다. 이 극단의 막장의 세계는 어떤 면에서는 지독한 현실의 막장을 은폐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펀치> 같은 작품들이 오히려 막장의 현실들을 환기시키는 것과는 정반대의 흐름이다.

 

임성한 월드는 그래서 세상의 모든 막장에 쏟아지는 욕들을 마치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성장하는 괴물처럼 보인다. 이 룰도 없고 삶과 죽음의 예의도 없는 세상을 들여다보면서 혀를 차고 있는 순간, 저 바깥세상에서 돌아가는 막장의 현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마비된다. 과연 욕먹어도 그만일까. 이런 세계를 방치하는 것은.

 

'빵꾸똥꾸'에 깃든 사회, 그 의미

난데없는 '빵꾸똥꾸(?)'로 사회가 시끌시끌하다.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악동인 해리(진지희)가 입에 달고 다니는 이 '빵꾸똥꾸'는 올해의 유행어가 될 만큼 장안에 화제가 됐다. 그런데 지난 22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이러한 용어가 폭력적이고, 필요이상 반복적으로 사용됐다며 해당 프로그램에 권고 조치를 했다. 도대체 왜 이 같은 용어에 대해 이처럼 상반된 반응이 나온 걸까.

먼저 사전에도 없는 '빵꾸똥꾸'가 무얼 의미하는 지부터 정확히 알아야 할 것 같다. 시트콤의 내용에 따르면 그 유래는 해리가 어렸을 때 말을 좀 늦게 하게 됐는데, 할아버지인 이순재가 방귀를 뀌는 소리를 듣고는 첫 마디를 '빵꾸똥꾸'라고 말했다는 데서 비롯된 것. 그 후로 뭔가 심사가 뒤틀리는 것(행위나 사람 모두 통틀어)을 대하면 해리는 이 말이 습관적으로 터져 나온다. '빵꾸똥꾸'는 적어도 해리에게는 자신만이 가진 욕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빵꾸똥꾸'를 외치는 해리의 모습은 그래서 거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어쨌든 욕의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욕은 그 집에 새로 들어와 식모 생활을 어렵게 하며 살아가는 세경과 신애 자매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진다. '빵꾸똥꾸'는 해리가 처음 신애의 뺨을 올려 부쳤을 때 느껴지던 그 충격처럼 다가왔던 게 사실이다. 어린 아이가 어쩌면 저렇게 독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그런 충격은 조만간 사라져갔다. 그리고 차츰 독하기만 한 아이라고 여겨졌던 해리는 역시 아이다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빵꾸똥꾸'를 외치면서도 하루만 신애가 보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하고, 신애가 쓰는 동화를 읽기 위해 신애가 하는 일을 도와주며 빨리 쓰라고 욕을 해대는 해리는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이다. 그러니 이 아이가 이렇게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모습에서 이제는 불쌍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바로 이 지점부터 해리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비호감에서 호감으로 바뀌었다. 해리를 이해하게 되는 지점에서 해리의 '빵꾸똥꾸'가 의미하는 것이 진짜 무엇인지도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어린 아이가 입에 담는 욕이 보기 좋을 수는 없다. 그런데 이 보기 좋지 않은 것, 그것은 사실 우리가 인정하기 싫은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아이가 무슨 죄가 있을까. 아이마저 욕을 하게 만드는 환경이 문제가 아닐까.

아이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빵꾸똥꾸'는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놓은 사회의 비뚤어진 부분을 거울처럼 비춰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해리가 '빵꾸똥꾸'를 외칠 때마다 이제는 심지어 묘한 카타르시스까지 느끼게 되는 것은 욕이 가진 언어적인 기능과 거의 궤를 같이 한다. 욕과 배설의 즐거움이 같다는 것은 어떤 억압을 대리해 풀어주는 그 기능적 유사함 때문이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을 때, 그것을 지적하는 촌철살인의 욕은 심지어 문학적으로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빵꾸똥꾸'가 문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용어는 풍자를 웃음의 재료로 삼는 시트콤으로서는 꽤 우회적인 괜찮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빵꾸똥꾸'를 듣고 빵 터졌던 분들은 그 이유가 이 말이 가진 표피적인 의미 이상의 뉘앙스를 순간 느꼈고 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아이들이 무비판적으로 해리의 행동을 따라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아이들의 리얼한 모습이라는 것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지붕 뚫고 하이킥'은 정직하게 그런 변화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변화 혹은 아이들의 성장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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